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파96 2/1 27-31면
  • 내 평생의 희망—결코 죽지 않는 것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내 평생의 희망—결코 죽지 않는 것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레그는 왜 죽었는가?
  • 성서 진리를 받아들임
  • 전파 활동을 조직함
  • 전시의 경험
  • 믿음의 시험들을 인내함
  •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함
  •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그에게 영광을 돌리라”
    1989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 여호와께서는 겸손한 자들을 진리로 이끄신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2003
  • 1986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1986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 전시의 역경이 훗날에 도움이 되다
    깨어라!—2004
더 보기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파96 2/1 27-31면

내 평생의 희망—결코 죽지 않는 것

헥터 R. 프리스트의 체험담

“이 암은 치료가 되지 않습니다. 당신을 위해서 우리가 더 해줄 수 있는 일이 없군요”라고 의사가 말했습니다. 그러한 진단을 받은 지 십 년이 넘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결코 죽는 일 없이 땅에서 영원히 살 것이라는 성서에 근거한 희망을 아직도 간직하고 있습니다.—요한 11:26.

나의 부모는, 우리 가족의 농장에서 멀지 않은 한 조그만 읍에 있는 교회에 꼬박꼬박 다니던 독실한 감리교인이었습니다. 나는 뉴질랜드, 웰링턴에서 북동쪽으로 약 13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있는 아름다운 농장 지대인, 와이라라파 지구의 계곡에서 태어났습니다. 우리는 그 곳에서 눈덮인 산들과 산을 끼고 흐르는 맑은 강들 그리고 굽이굽이 이어지는 언덕과 비옥한 평야의 경치를 즐겼습니다.

우리는 감리 교회에서 선한 사람들은 모두 하늘에 가지만, 악한 사람들은 불타는 고초의 장소인 지옥으로 간다고 배웠습니다. 나는 하느님께서 사람들이 하늘에서 살기를 바라신다면 애초부터 사람들을 하늘에 두시지 않은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나는 항상 죽음이 두려웠고 종종 우리가 왜 죽어야 하는지 궁금하였습니다. 내가 열여섯 살이던 1927년에 우리 가족은 비통한 일을 겪었습니다. 그 일로 말미암아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질문들에 대한 답을 탐구하게 되었습니다.

레그는 왜 죽었는가?

동생 레그는 열한 살 때 중병에 걸렸습니다. 의사는 어디가 아픈지 알아내지 못하였고 동생을 도와 줄 수 없었습니다. 어머니는 감리교 목사를 불렀습니다. 목사는 레그를 위해 기도하였지만, 그것이 어머니에게 위로가 되지는 않았습니다. 사실, 어머니는 그 목사에게 그의 기도가 아무 효과도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레그가 죽자 어머니는 왜 어린 아들이 죽어야 했는지에 대한 진실한 답을 갈구하는 마음을 채워 보려고 만나는 사람 누구에게나 이야기를 건네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읍에서 한 사업가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죽은 자의 상태에 관해 알고 있는 점이 있는지 물었습니다. 그는 아는 바가 없었지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이 책을 한 부 여기 남겨 두고 갔는데 당신이 가져도 좋습니다.”

어머니는 그 책을 집에 가지고 와서 읽기 시작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책을 손에서 내려놓을 수가 없었습니다. 점차 어머니의 모든 태도가 달라져 갔습니다. 어머니는 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바로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다.” 그 책은 「성경 연구」 제1권인 「시대에 관한 하나님의 경륜」이었습니다. 처음에 나는 회의적이어서 창조주의 목적에 관한 그 책의 설명에 대해 논쟁하려고 하였습니다. 결국에는 나의 논쟁도 그쳤습니다.

성서 진리를 받아들임

나는 ‘결코 죽을 필요가 없이 영원히 산다니 정말 놀랍군!’ 하고 생각하였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이 많으신 하느님께 바라게 되는 희망입니다. 낙원이 된 땅! 그렇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놀라운 진리를 배운 후에 어머니는 웰링턴에서 온 세 그리스도인 자매들인 톰프슨, 바턴, 존스 자매와 함께 한번에 며칠씩 집을 떠나 시골 지역에 왕국의 씨를 두루 퍼뜨리곤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어머니처럼 선교의 영을 가지고 있지는 않았지만, 어머니의 활동을 지원해 주었습니다.

나는 진리에 대해 확신은 하고 있었지만, 얼마 동안은 믿음과 관련하여 거의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1935년에는 로위나 콜렛과 결혼하였으며, 이윽고 딸 에니드와 아들 배리를 두는 축복을 받았습니다. 나는 인근 농부들에게서 수천 마리의 가축을 사들이는 일을 하였습니다. 이 농부들이 정치에 대해 토론을 할 때 그들에게 이렇게 말해 주고 나면 가슴이 뿌듯해지곤 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이렇게 노력하는 것은 모두 허사가 될 겁니다. 성공을 거둘 유일한 정부는 하느님의 왕국이지요.”

안타깝게도 나는 담배에 중독되어 엽궐련을 줄곧 입에 물고 살았습니다. 급기야 건강이 악화되었고 위의 이상으로 통증이 있어 입원하였습니다. 나는 흡연 때문에 생긴 급성 위장염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그 습관을 끊기는 했어도, 꺼지지 않고 마냥 타는 엽궐련이나 담배를 피우고 있는 꿈을 꿀 때가 자주 있었습니다. 담배는 정말 지독한 중독에 빠지게 합니다!

담배를 끊고 나서 나는 다른 중요한 조정을 하였습니다. 스물여덟 살 때인 1939년에 시골 우리 집 근처의 망아타이 강에서 침례를 받은 것입니다. 로버트 레이전비가 웰링턴에서 먼 길을 여행하여 우리 집에서 연설을 하고 내게 침례를 주었는데, 그는 후에 뉴질랜드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였습니다. 그 때 이후로 나는 담대한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전파 활동을 조직함

침례받은 후에 나는 에케타후나 회중의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아내 로위나는 아직 성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아내에게 알프 브라이언트를 파히아투아에서 오라고 초대하여 호별 방문 증거를 제대로 하는 법을 알려 달라고 할 예정이라고 알려 주었습니다. 나는 전파 활동을 조직해서 구역을 체계적으로 돌고 싶었습니다.

아내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보, 당신이 집집으로 증거하러 간다면, 당신이 돌아왔을 때 나는 여기에 없을 거예요. 당신을 떠날거란 말이에요. 당신의 책임은 이 곳에, 당신의 가족이 있는 이 가정에 있는 거예요.”

나는 어찌할 바를 몰랐습니다. 나는 머뭇거리며 옷을 입었습니다. ‘이 일을 해야만 해. 내 생명이 여기에 달려 있고 내 가족의 생명도 마찬가지지’라고 속으로 계속 생각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아내에게 어떤 식으로든 마음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다는 것을 확신시켜 주었습니다. 내가 아내를 깊이 사랑하기는 하지만, 우리 자신의 생명뿐 아니라 여호와의 이름과 주권이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런 방법으로 꼭 전파해야만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알프와 나는 첫 번째 집으로 갔으며, 알프는 말을 건네는 시범을 보였습니다. 하지만 얼마 후에 내가 대화를 이어받아 노아 시대에 있었던 일이 우리 시대에 일어나고 있는 일과 유사하다는 점과 구원을 보장받기 위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점을 집주인에게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마태 24:37-39) 나는 그 집에 소책자 몇 부를 남겼습니다.

그 집에서 나오자 알프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어디서 그 모든 지식을 얻었습니까? 당신에게는 내가 필요 없군요. 당신이 혼자 힘으로 해나가면 우리는 두 배나 되는 구역을 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렇게 하였습니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무슨 일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지 몰랐습니다. 놀랍고 기쁘게도, 아내 로위나가 우리를 위해 차 한 잔씩을 준비해 놓고 있었습니다. 두 주일 후에 아내는 나와 함께 공개 봉사에 참여하였으며, 그리스도인 열심의 훌륭한 모범이 되었습니다.

농장 지대인 우리 계곡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이 된 사람들 중에는 모드 맨서 그리고 그의 아들 윌리엄과 딸 루비가 있었습니다. 모드의 남편은 우락부락한 외모를 지닌 사나운 사람이었습니다. 어느 날 아내와 나는 모드를 봉사에 데리고 가려고 그들의 농장에 도착하였습니다. 청년인 윌리엄이 자기 차를 사용하도록 마련해 주었지만, 그의 아버지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긴장감이 도는 상황이었습니다. 나는 아내에게 어린 아기인 우리 딸 에니드를 안으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윌리엄의 차에 올라타서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재빨리 차고를 나가는데 맨서 씨가 뛰어오더니 우리가 나가지 못하도록 차고 문을 닫으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이미 늦었습니다. 도로로 조금 나온 후에 우리는 차를 세웠으며, 나는 차에서 내려 화가 머리 끝까지 난 맨서 씨를 만났습니다. 나는 그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야외 봉사에 나갈건데, 부인도 우리와 함께 가려고 합니다.” 나는 그에게 간청하였고, 그는 화를 다소 누그러뜨렸습니다. 돌이켜 보면 필시 내가 그 일을 다르게 처리했다면 좋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더 우호적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영영 증인이 되지는 않았습니다.

그 시절에는 여호와의 백성이 얼마 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농장에 묵었던 전 시간 봉사자들의 방문을 정말 즐겼고 또 유익을 얻었습니다. 이 방문객들 중에는 에이드리언 톰프슨과 그의 누이인 몰리도 있는데, 두 사람 다 선교인을 양성하는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의 초기 학급들에 참석하였으며, 외국 임명지인 일본과 파키스탄에서 봉사하였습니다.

전시의 경험

1939년 9월에 제2차 세계 대전이 일어났으며, 1940년 10월에는 뉴질랜드 정부가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금지하였습니다. 많은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전국에 있는 법정들로 끌려갔습니다. 일부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져서 아내와 자녀들과 떨어져 있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낙농업을 하고 있었지만, 전쟁이 치열해지자 혹시 내가 징집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농부들은 더 이상 군복무를 위해 자기 농장을 떠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발표가 있었습니다.

아내와 나는 그리스도인 봉사를 계속하였고 각자 한 달에 60시간 이상을 전파 활동에 바쳤습니다. 이 기간에 나는 그리스도인 중립을 지키고 있던 젊은 증인들을 돕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나는 그들을 위해서 웰링턴, 팔머스턴노스, 파히아투아 그리고 매스터턴의 법정에 섰습니다. 징병 위원회의 위원 중에는 대개 교직자가 있었으며, 나는 그들이 그리스도교 정신에 위배되게도 전쟁을 지지하고 있음을 폭로하게 되어 기뻤습니다.—요한 첫째 3:10-12.

어느 날 밤 아내와 내가 「파수대」 연구를 하고 있는데, 형사들이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우리 집을 수색하여 성서 서적을 발견하였습니다. 우리는 “이런 책을 소유하면 교도소에 갈 수 있소”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형사들이 떠나려고 차에 탔을 때, 제동 장치가 단단히 잠겨 있어 차가 움직이려 하지 않았습니다. 윌리엄 맨서가 차를 고치는 것을 도와 주었는데, 그 후 우리는 두 번 다시 그 형사들 소식을 들어보지 못하였습니다.

금지령이 내려진 동안에는 우리 농장의 외진 곳에 있는 한 건물에 성서 서적을 감추어 두었습니다. 나는 한밤중에 뉴질랜드 지부 사무실에 가서 내 차에 서적을 실었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것을 집으로 가져다가, 따로 떨어져 있던 그 건물에 비축해 두었습니다. 어느 날 밤에 내가 몰래 서적을 실으러 지부에 도착하자, 갑자기 불이 환하게 켜졌습니다! 경찰이 이렇게 소리 쳤습니다. “당신을 체포한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은 별다른 이의 없이 나를 보내 주었습니다.

1949년에 아내와 나는 농장을 팔았으며 돈이 다 떨어질 때까지 파이오니아를 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우리는 매스터턴으로 이사를 하여 매스터턴 회중과 연합해서 파이오니아를 하였습니다. 이 년이 채 못 되어 24명의 활동적인 전도인으로 이루어진 페더스턴 회중이 설립되었으며 나는 주임 감독자로 일하였습니다. 그 후 1953년에는 미국에 가서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린 8일간의 여호와의 증인의 국제 대회에 참석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아내는 뇌성마비를 앓는 딸 에니드를 돌봐야 했기 때문에 나와 동행할 수 없었습니다.

뉴질랜드로 돌아온 후에는 세속 일을 다시 시작해야 하였습니다. 우리는 다시 매스터턴 회중으로 옮겼으며, 나는 주임 감독자로 임명되었습니다. 이 무렵에 윌리엄 맨서가 매스터턴에 있는 소극장을 매입하였고, 이 건물이 와이라라파 지구의 첫 번째 왕국회관이 되었습니다. 1950년대에 우리 회중은 영적으로나 수적으로나 훌륭하게 성장하는 즐거움을 맛보았습니다. 따라서 순회 감독자가 방문할 때면, 그는 장성된 사람들에게 다른 시골 지역으로 이사 가서 그 곳의 전파 활동을 도와 주라고 자주 격려하였으며,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하였습니다.

우리 가족은 매스터턴에 남았으며 나는 그 후 수십 년 동안 회중에서 많은 특권을 받았을 뿐 아니라, 국내 대회와 국제 대회에서 받은 임명도 즐겼습니다. 아내는 야외 봉사에 열심히 참여하였고 다른 사람들도 그렇게 하도록 꾸준히 도와 주었습니다

믿음의 시험들을 인내함

서두에서 말했듯이, 1985년에 나는 불치의 암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충실한 아내 로위나와 나는 우리 자녀들과 함께 지금 살아서 결코 죽지 않을 수백만 명 가운데 포함되기를 참으로 바랐습니다! 그러나 의사들은 나를 집으로 보내 거기서 죽게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우선 그들은 그 진단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나에게 물었습니다.

“평온한 마음을 유지하고 낙관적이 될 겁니다”라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사실 성서 잠언이 나에게 안정제가 되었습니다. “마음의 화평은 육신의 생명이[니라].”—잠언 14:30.

암 전문의들은 성서의 충고를 높이 평가하였습니다. “그러한 정신 태도를 갖는 것이 암 환자들에게 있어서 치료의 90퍼센트를 차지합니다”라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7주간 방사선 치료를 받을 것을 권하였습니다. 다행히도 나는 마침내 암과의 투쟁에서 이겼습니다.

몹시 힘들었던 이 기간 중에, 나는 심한 충격을 받는 일을 겪었습니다. 아름답고 충성스러운 아내가 뇌출혈로 고통받다가 사망한 것입니다. 나는 성서에 기록된 충실한 사람들의 모범과 그들이 충절을 유지하였을 때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해 문제를 해결해 주신 방법에서 위안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신세계에 대한 내 희망은 여전히 밝게 빛났습니다.—로마 15:4.

그렇지만 나는 우울해져서 장로로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고 싶었습니다. 지방 형제들이 격려해 주었고 그제서야 나는 일할 힘을 다시 얻었습니다. 그 결과 나는 지난 57년 동안 그리스도인 장로이자 감독자로 계속 섬길 수 있었습니다.

확신을 가지고 미래를 맞이함

이 모든 세월 동안 여호와를 섬긴 것은 더할 나위 없이 귀중한 특권이었습니다. 나는 참으로 많은 축복을 받았습니다! 내가 열여섯 살 때 어머니가 큰 소리로 이렇게 말했던 일이 엊그제 일 같습니다. “바로 이거다. 이것이야말로 진리다!” 어머니는 1979년에 사망할 때까지 계속 충실하고 열심 있는 증인이었는데, 사망할 당시 어머니는 백 살이 넘었습니다. 어머니의 딸과 아들 여섯도 역시 충성스러운 증인이 되었습니다.

불타는 내 욕망은, 살아서 여호와의 이름에 돌아간 모든 비난이 깨끗이 제거되는 것을 보는 것입니다. 결코 죽지 않기를 바라는 내 평생의 희망이 실현되겠습니까? 물론 그것은 두고 볼 일입니다. 그렇지만 나는 많은 사람들이, 아니 수백만 명이 마침내 그 축복을 받게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러므로 내가 계속 살아 있는 한, 나는 결코 죽지 않을 사람들 가운데 포함되리라는 전망을 소중히 간직할 것입니다.—요한 11:26.

[28면 삽화]

나의 어머니

[28면 삽화]

나의 아내와 자녀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