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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2 여호와의 증인의 연감
연92 42-64면

전 세계 보고

아프리카

시편 필자는, 악인들은 “향촌 유벽한 곳에 앉으며 그 은밀한 곳에서 무죄한 자를 죽[인다]”고 기술한다. (시 10:8) 여러 세기에 걸쳐 여호와의 숭배자들은 광포한 악인들의 무죄한 피해자들이었다. 오늘날 일부 아프리카 지역에서도 여전히 그러하다.

라이베리아에서 일어난 내란으로 우리 형제들 중 33명이 죽었으며, 그 밖의 많은 형제들은 옷만 걸친 채 이 나라를 떠나 피난처를 찾아 코트디부아르와 시에라리온으로 도피하지 않을 수 없었다. 라이베리아와 코트디부아르의 국경에 위치한 두 도시에 설치된 구호 위원회는 이들 피난 온 궁핍한 형제들을 돌볼 뿐 아니라 라이베리아에 남아 있어 고통을 겪는 증인들에게 구호품을 보냈다. 코트디부아르와 시에라리온 그리고 가나의 증인들은 의약품, 식량, 구호금과 아울러 수톤의 옷을 트럭에 실어 라이베리아로 보냈다. 아비장의 형제들도 급히 구제 활동을 벌여, 시급히 도움을 필요로 하는 커다란 무리의 피난 온 형제들을 정성껏 돌보고 있다.

이 형제들 중에는 소름끼치는 충격적인 경험을 한 사람들이 많다. 예를 들면, 라이베리아의 수도 몬로비아에서 봉사하는 한 장로는 이렇게 이야기한다. “1990년 7월 27일 새벽 두 시경에 나는 가족과 함께 강제로 집에서 쫓겨났습니다. 반군은 우리를 밖으로 끌고 가더니 수백 명의 이웃 사람들과 합류시키더군요. 우리는 이 지역에 대한 간단한 수색 작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으리라고 믿었지요. 그런데 다시는 우리 집을 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오히려 우리는 50킬로미터 떨어진 큰 규모의 난민 수용소로 끌려가게 되었습니다. 나는 환자인, 처고모를 등에 업고서 그 먼 거리를 내내 걸어 갔습니다. 가는 곳마다 시체가 널려 있는 것을 보고, 여호와께 힘을 주실 것을 끊임없이 간구하였습니다.

“바로 우리 뒤에서 반군이 호위하는 가운데 거의 한 시간 동안 악몽 같은 상태에서 휘청거리며 걷다가, 정부군의 기습 공격을 당하였습니다. 급히 땅바닥에 엎드리자 탄환이 사방에서 날아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었지요. 일부는 도피했더군요. 그때 문득 열네 살 된 아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즉시, 마을 사람인 우리들 45명은 포로로 잡혀, 텅 빈 주유소로 끌려갔습니다. 그곳에서 우리 모두를 처형시킬 작정이었습니다. 한 군인이 총을 들어 나를 향해 쏘았습니다. 하지만 총에 탄창이 끼워져 있지 않았지요. 그 순간, 그 부대의 지휘관이 도착하여 우리를 병영으로 데려가도록 지시하였습니다. 그날 밤 아홉 사람은 처형되었지요. 우리는 여호와께 충실을 유지하게 도와주실 것을 기도하였습니다.

“그 다음날 아침, 지휘관은 우리 모두를 보내 주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는 군용 트럭 한 대에 우리를 실어 보내 주겠다고 제안하기까지 하더군요. 우리는 사양하고 그 대신 처고모를 태우고 갈 손수레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우리끼리만 떠났습니다. 목적지로 가는 도중에, 군용 트럭들이 붕붕하는 소리를 내며 지나가더군요. 군용 트럭들이 우리 앞에 있는 교차로에 다다르자, 귀청이 떨어질 것 같은 폭음이 대기를 진동시켰습니다. 뒤이어 거의 30분 동안 치열한 기관총 사격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급히 몸을 피하여 숨어 있는 동안 유탄이 사방에서 핑핑 날아왔습니다. 우리를 이송해 주겠다고 제의했던 군 호송대는 완전히 전멸당하고 말았지요. 태워주겠다는 지휘관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릅니다!

“아내는 임신 5개월이었지만, 용감하게도 단 하루 만에 58킬로미터를 걷는 일을 해냈습니다. 우리에게는 아직도 도피해야 하는 문제가 남아 있었지요. 레바논의 한 형제는 우리가 처한 곤경에 대해 알게 되자 이 나라에서 빠져 나가는 유일한 교통 수단인 낡은 버스를 이용할 비용을 지급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마침내 안전하게 국경을 건너 코트디부아르로 들어갔습니다. 하지만 앞서 언급했듯이 기습을 당하는 사이에 열네 살 된 아들과의 접촉이 끊겨 매우 서글펐습니다. 우리는 그 아이가 죽은 줄로만 생각했지요. 그런데 육 개월 후에 그 아이가 살아 남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이곳 코트디부아르에서 그 아이와 다시 만나는 마련이 있었습니다.”

다른 두려운 일을 경험한 증인들도 있었다. 나이지리아 출신인 클레멘트는 몬로비아에서 17년 동안 살았지만, 도피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반군은 그 나라에 거주하는 나이지리아인과 가나인을 모두 색출하고 있었다. 반군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그는 총살당할 것이었다. 몬로비아에서 코트디부아르의 다나네까지 무려 백여 개나 되는 검문소가 클레멘트와 안전한 곳 사이에 가로놓여 있다. 그는 이 나라를 떠나고 싶어하는 외국인이라고 말함으로써 대부분의 검문소를 통과할 수 있었다. 한 검문소에서는 그의 설명이 통하지 않았다. 그는 처형될 판이었다. 클레멘트는 처형되기 전에 훌륭한 증거를 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검문소장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전파하였으며 「파수대」와 「깰 때이다」지를 보여 주었다. 검문소장은 당혹해 하면서 이렇게 큰소리로 말하였다. “이봐요. 우리는 지금 해야 할 일이 있소. 이 일이 끝나야 당신이 하는 말에 주의를 돌릴 수 있을거요. 그러니 당장 떠나시오!”

그후, 클레멘트는 정신의 평온을 찾고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 보자, 여호와의 이름이 견고한 망대라는 잠언 18:10의 의미를 깨닫게 되었다고 말하였다. 그는 오직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고 하나님의 왕국에 관하여 전파함으로써 아직 남아 있는 여러 곳의 검문소도 통과할 수 있었다. 마침내 그는 국경을 건너 코트디부아르로 들어갔다. 안전한 곳에 당도한 것이었다! 최근에 일부 지부 성원들이 라이베리아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토록 슬픈 이야깃거리가 모든 나라에 다 있는 것은 아니다. 모잠비크는 기뻐할 만한 좋은 이유를 제공한다. 1991년 2월 11일에, 마푸토의 정부는 모잠비크의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명칭의 법인체를 법적으로 인가해 주었다. 우리는 이렇게 진전된 사태에 대해 실로 매우 감사하게 생각한다. 이제 선교인들이 모잠비크에 체류할 기회를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서적과 잡지가 아무 방해 없이 수입될 수 있다. 선교인 집이 세 개 도시에 개설되었으며, 모두 18명의 선교인이 거주하고 있다. 이 선교인 집마다 협회 소유의 보관소가 있다.

그렇지만 청소년들에게는 그 나라에서 게릴라전이 벌어지는 동안에 중립을 유지하고 여호와께 충성을 나타내는 일이 요구된다. 열두 살 된, 귀먹고 말 못하는 소녀가 반군에게 부도덕한 목적으로 납치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소녀의 부모는 그를 성서 원칙으로 잘 훈련시켜 왔었다. 납치범들이 소녀의 몸을 범하려고 하였을 때, 소녀는 확고하게 거부하였다. 어린 자매는 하늘을 가리키면서 부도덕한 짓은 하나님의 법을 범하는 것이라고 몸짓으로 설명하곤 하였다. 소녀가 확고한 결의를 나타내자 납치범들은 어느 날 소녀를 지독하게 구타한 다음 죽도록 버려 두었다. 두 달이 지나서 소녀가 부모에게 돌아왔다. 소녀가 잡혀 있는 동안 함께 있던 여자가 데려다 준 것이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부모님들이 이 어린 소녀에게 무엇을 가르쳤는지 모릅니다만, 소녀의 단정한 행실에 감명을 받았습니다. 소녀는 군인들의 압력에 결코 굴하지 않았어요. 소녀는 참으로 특출했습니다! 무슨 종교를 믿고 계신가요?” 이 귀먹은 자매가 확고한 입장을 취했기 때문에, 그 여자는 이제 증인과 연구하고 있으며 진리를 배우는 데서 잘 발전하고 있다.

아시아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라고 고대의 다윗 왕은 읊었다. (시 3:8) 오늘날에도 여호와의 축복이 그분의 백성에게 내린다. 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은 그 사실을 명백하게 증거할 수 있다.

한국에서 어느 자매는 의료 각서를 소지함으로써 좀 특이한 방법으로 생명을 구하게 되었다. 그 자매가 차를 주차시켜 놓고 차에서 내리는데, 네 명의 남자가 갑자기 공격하여 자매를 차 뒷좌석으로 밀어 넣고 바닥에 엎드리게 했다. 자매는 반지와 지갑을 내주면서 풀려나기를 바랐다. 하지만 그들은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이 성폭행을 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운 생각이 순간 자매의 뇌리를 스쳤다. 자매는 있는 힘을 다하여 큰소리로 비명을 지르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그들 중 한 사람이 볼멘소리로 “죽여야 되겠어”라고 말하였다. 그들은 자매의 다리를 찌르더니 접착 테이프로 두 눈을 가리고 발을 묶는 것이었다. 필사적으로, 자매는 여호와의 이름을 사용하여 큰소리로 기도하며 울기 시작하였다.

갑자기, 그들은 조용해졌다. 이윽고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부인, 당신 여호와의 증인이오?” 그들이 자매의 지갑을 뒤져보니 의료 각서가 나왔다. 그들은 자매를 죽이지 않기로 하고, 자매를 차에 남겨 놓고 잽싸게 사라져 버렸다. 그 자매는 그들 모두가 범법 행위를 회개하고 여호와의 숭배자가 되기를 기도한다.

많은 나라에서 그러하듯이, 일본에서도 노동 인구에 포함되는 주부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그 때문에 가정에서 주부들을 만나 좋은 소식을 전하기가 어려워진다. 그러므로 니가타 시에 사는 한 파이오니아 자매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도심지로 왕국 소식을 가져가기로 결심하였다. 그 자매는 회중에서 사업 구역을 맡은 다음, 만나는 사업 구역 사람들에게 간단하게 가정 성서 연구를 제안하는 식으로 전파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팜플렛을 사용하였으며, 조금이라도 관심을 나타내는 사람은 모두 재방문함으로써 관심자와 계속 접촉하였다. 그는 관심가진 사람들에게 점심 휴게 시간에 30분 동안 다방이나 백화점 휴게실 혹은 공원에서 연구를 할 수 있다고 제안하였다. 그는 각 연구 시간에 한 가지 특정한 점만을 집중적으로 다루며, 이 사업 구역에서 8건까지 연구를 사회한 적도 있다.

6만 명이 넘는 필리핀 사람들이 중국인 가정에서 가정부로 일하려고 필리핀을 떠나 홍콩 섬에 와 있다. 이러한 근로자들은 대부분 로마 가톨릭교인들이다. 한 자매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그러한 사람을 만나게 되어, 성서를 더 배우는 데 관심이 있는지를 간단히 물어 보았다. 그는 “성서를 더 배울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해 왔습니다”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성서 연구가 그 즉시 시작되었다.

키프로스, 니코시아에서 한 청소년 전도인은 이렇게 편지하였다. “제 이름은 마르코스이며, 나이는 열두 살입니다. 종교 수업 시간에, 여선생님은 종교에 관한 세 가지 수업 계획을 세우셨습니다. 저는 「하나님을 찾으려는 인류의 노력」 책을 수업 시간에 가져와야겠다고 생각했지요. 첫 수업이 시작되기 전에 저는 그 책을 선생님에게 보여 드렸지요. 선생님은 그 책을 죽 살펴보시더니 책상 위에 놓으시더군요. 조금 후에 선생님은 급우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수업 시간에 마르코스의 책을 사용하겠어요. 이 책에는 학교에서 마련한 책보다도 더 자세한 지식이 들어 있기 때문이에요.’” 청소년 마르코스는 이러한 말로 편지를 끝맺는다. “저는 모든 청소년 전도인들에게 학교에서 협회 서적을 항상 가지고 있도록 권합니다.”

스리랑카에서, 로마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루카스가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네 명이 한 조를 이루는 고기잡이 배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선주는 불교 신자였다. 선주는 바다의 신이 고기잡는 일을 축복해 주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힌두교와 불교 신자에게 널리 알려진 숭배 장소를 참배하도록 고용인들에게 요구하였다. 루카스는 자기로선 여호와께서 유일하신 참 하나님이라고 믿기 때문에 참예할 수 없다고 설명하였다. 주인은 “우리와 함께 가든지 직장을 그만두든지 해!”라고 딱 잘라 말하였다. 루카스는 즉시 그만두었다. 그는 자기 마을로 돌아가고 나서 불과 며칠 안 있어 다른 배에서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 그는 이제 정기적으로 연구할 수 있다.

타이에 사는 젊은 새댁, 방남이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자, 그 부모가 아파 눕게 되었다. 부모가 주술사에게 알아보니, 딸이 종교를 바꾸는 것을 죽은 친척들의 영이 승인하지 않는다는 것이며, 부모가 건강을 회복하고 싶으면 딸의 성서 연구를 중단시켜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부모는 딸에게 제발 연구를 그만두라고 말하였다. 방남과 연구를 하고 있던 특별 파이오니아는 성서를 사용하여 고통을 일으키는 장본인은 죽은 사람의 영이 아니라 악한 영이라고 그 부모에게 설명해 주었다. (전도 9:5, 6) 그러자 부모는 딸을 멀리 보내기로 하였다. 하지만 그 자매는 성서가 자녀들에게 부모를 사랑하도록 어떻게 가르치는지 그리고 방남이 부모를 사랑하기 때문에 부모를 돌보기 위하여 얼마나 함께 살고 싶어하는지를 그 부모에게 설명하였다. 방남의 어머니는 그 말을 듣자 마음이 누그러졌고, 그 자매와 함께 읍내로 나가서 의사의 진찰을 받아 보자는 데 동의하였다. 의사가 진찰해 보니 아무 이상이 없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도중에, 폭우가 쏟아질 것 같은데다 날이 저물어 가기에, 특별 파이오니아는 방남의 어머니에게 자기 집에서 그날 밤을 함께 보내자고 제안하였다. 그 이튿날 아침, 방남의 어머니는 상쾌한 기분으로 깨어났고 마음이 매우 즐거웠다. 밤새도록 아무런 호흡 장애 없이 잠을 푹 잤기 때문이었다. 방남의 아버지는 아내의 건강이 나아졌음을 알고는, 영매술과 관련된 모든 장식품을 없애는 데 동의하였다. 그의 건강도 빨리 회복되었다. 방남은 이제 침례를 받았으며, 그의 남편은 헌신을 향하여 잘 발전하고 있다.

탄은 미안마에 살고 있다. 그는 군인이었다. 하지만 쓰라린 좌절감 속에서 군경력을 끝마쳐야 했다. 그의 절망적인 생활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반군과의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는 동안, 바로 그가 숨어 있는 벙커 근처에서 포탄이 폭발하였다. 벙커가 무너져 내려, 그의 하반신이 파묻히게 되었다. 잡석더미를 파헤쳐 그를 구조했을 때, 절망적이게도 그는 두 다리를 움직일 수 없었다. 바로 마비가 된 것이었다. 곧 그는 제대하게 되었다. 절망에 빠진 그는 자신의 불행을 곰곰이 생각하기 시작했고, 하나님께 대한 믿음을 송두리째 잃고서 자살을 기도하였다. 바로 그 무렵, 특별 파이오니아 형제가 탄의 이웃 사람을 방문하여 정기적으로 성서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다. 탄은 정기적인 방문객이 누구인지를 알게 되자 그를 자기 집에도 초대하였다. 파이오니아 형제는 성경을 사용하여 탄을 위로해 주었다. 성서 연구가 시작되었다. 그가 진리의 소리를 깨닫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열정적으로 증거하기 시작하였다. 또한 약 8킬로미터나 떨어진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기를 원하였다. 그는 낡은 자전거 바퀴를 구입하여 2륜 수레를 직접 만들었다. 대단한 결심을 한 그는 스스로 밀고 당기고 하여 비탈을 오르내리면서 왕국회관까지 오며,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그의 쓰라린 좌절감은 더 나은 장래에 대한 빛나는 희망으로 바뀌었다.

유럽

“우리 혼[“영혼”, 「신세」]이 새가 사냥군의 올무에서 벗어남 같이 되었나니 올무가 끊어지므로 우리가 벗어났도다 우리의 도움은 ·⁠·⁠· 여호와의 이름에 있도다.” (시 124:7, 8) 시편의 이 시는 동유럽에 있는 우리 형제들에 대해 얼마나 잘 묘사해 주는가!

지난 봉사년도는 소련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 역사상 주목할 만한 해였다. 전도인과 파이오니아 수의 신기록 외에도, 서적 배부 수의 7차 신기록과 잡지 배부 수의 10차 신기록은 우리 형제들이 새로이 얻은 자유 가운데서 기뻐할 만한 부가적인 이유가 된다. 이러한 신기록에 달하게 된 것은, 사상 처음으로 서적 발송품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1991년 3월 18일 월요일에, 독일 지부는 20톤 가량의 서적을 실은 첫 번째 트럭을 소련에 급파하였다. 이 일이 있기 전에는, 형제들이 소포로 서적을 받았다. 서적을 가득 실은 첫 번째 트럭이 도착하는 것을 어떻게 알아보았는가?

리보프 시의 지방 장로가 뜻밖의 전화를 받은 때는 한밤중이었다. 전화를 건 상대편 독일 지부에서, 운전석이 노란 색이고 차체가 파란 색인 대형 트럭에 목적지가 소련으로 찍혀 있는 서적이 실려 있음을 알리는 전화였다. 그들은 만나는 장소를 정하였다. 그곳은 바로 폴란드와 소련의 국경이었다. 소련의 증인들이 수요일에 국경에 도착하였을 때는 날씨가 혹한으로 변해 있었다. 살을 에는 듯한 추위와 쏟아지는 진눈깨비에도 끄떡하지 않고, 소련 형제들은 교대해 가면서 결연한 태도로 국경선으로 접근해 오는 트럭들을 한대 한대 뚫어지게 살폈다. 형제들 중 한 사람이 이런 말을 하였다. “우리는 이 잊을 수 없는 순간을 수십년 동안 기다려 왔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몇 시간 아니 며칠을 기다린다 해도 이 기다림을 특권으로 여깁니다.”

마침내, 3월 22일 금요일, 아침 정각 8시에 운전석이 노란 색이고 길고도 육중한 차체는 파란 색인 트럭이 국경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보였다. 형제들 저마다의 마음속 깊은 곳에서 우러나온 기도가 하늘을 향해 피어 올랐다. 그 트럭이 국경선을 통과하여 소련 땅으로 들어왔다. 당황한 두 명의 세관원은 많은 양의 서적을 쳐다보면서 그 상황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망설이다가, 그 문제를 의논하기 시작하였다. 서류와 화물을 대조해 본 후, 세관원들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얼른 양손을 흔들어서 트럭을 통과시키는 것이었다. 그때 일을 회상하면서 형제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우리는 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우리 형제들이 수십 년 동안 혹독한 박해를 받다가, 마침내 풍부한 영적 양식을 받게 된 것입니다.”

화물을 부리도록 허가가 났다. 70여 명의 형제들이 대기하고 있다가 그 일을 열심히 지원하였다. 형제들은 두 줄의 “컨베이어”를 형성하여 조직적으로, 율동적으로, 손에서 손으로 서적 꾸러미를 이동시켰다. 그 이튿날 토요일에 방대한 땅 전역의 먼 구역들에서 형제들이 서적을 실어 가려고 왔다. 약 3500킬로미터를 여행한 두 형제가 첫 번째로 도착하였다. 그중 한 형제는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이 일의 목격 증인이었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이전에 동독으로 알려졌던 곳에 있는 드레스덴 시로부터 이러한 경험담이 들어왔다. “오랫동안 아내와 저는 저의 부모를 진리 안으로 들어오게 하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얻은 것이라곤 반대뿐이었지요. 그러다가 1988년 11월에 아내가 3주일 동안 입원하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우리는 하는 수 없이 18개월 된 딸 사라를 할아버지와 할머니 품에 맡기게 되었습니다.

“바로 첫날부터 일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아침 식탁에서 사라는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식탁에 앉자마자 식사를 시작하시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라는 할머니를 팔꿈치로 살짝 찌르고 두 손을 모으면서 ‘할머니, 기도해요!’하고 말했습니다. 사라는 고개를 숙이고 눈을 지긋이 감고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어떻게 하라는 것인지 알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사라가 재차 요청하였습니다. 그제서야 저의 어머니는 사라가 무엇을 원하는지 알아차리고는 루터교 식으로 짧게 기도하였습니다. 그날 저녁에 어머니는 우리가 무슨 종교에 속해 있느냐고 묻더군요. 어머니는 우리가 교회를 탈퇴한 사실만을 알고 있었습니다. 우리에게 그 밖의 일을 설명할 기회를 한번도 주지 않았던 것이지요. 저는 어머니에게 사실을 설명하였습니다. 사라의 할머니는 우리가 사라를 돌보는 식으로 사라를 돌봐주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저는 사라가 저녁마다 「나의 성서 이야기 책」에 나오는 이야기를 듣곤 하였기 때문에 어머니에게 그 책을 드렸습니다.

“사라는 할머니에게 저녁마다 서너 개의 이야기를 읽어 달라고 하였습니다. 저의 부모는 사라의 성서 지식을 알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사라가 가끔 이야기를 멈추게 한 다음 나머지 부분을 대신 이야기하였기 때문이지요. 저의 어머니는 저녁마다 사라에게 읽어 주는 이야기의 내용에 호기심을 갖기 시작하였습니다. 1990년 5월에 우리는 부모와 함께 가정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부모는 다니던 교회를 탈퇴하였으며, 우리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1년 후인 1991년 5월에 어머니는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 되었으며, 이제는 침례받을 준비를 하고 있습니다. 아버지도 잘 발전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우리가 그토록 오랫동안 시도했지만 성공을 거두지 못한 일을 이루시기 위하여 어린 딸과 「성서 이야기」 책을 사용하신 것에 대해 감사드립니다.”

오스트리아에서 많은 청소년들이 참 숭배를 위해 확고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한 예로 11세 된 소녀, 멜라니가 있다. 가정 환경 때문에, 멜라니에 대한 양육권이 그의 어머니에게서 이복 자매에게로 넘어갔다. 이복 자매는 남편과 함께 여호와의 증인의 도움을 받아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고, 멜라니도 연구에 참여하였다. 그들 모두가 잘 발전하였다. 멜라니는 가톨릭 교회를 떠나기를 원하였다. 하지만 오스트리아 법에 의하면, 14세가 되어야만 그렇게 할 수 있었다. 멜라니의 문제는 이것으로 일단락되었는가? 그렇지 않다! 멜라니는 청소년 복지국장에게 가서 자신이 원하는 바를 알렸다. 회견을 가진 다음 이 국장은 멜라니에게 보낸 편지 가운데서 이렇게 말하였다. “곰곰이 숙고한 끝에 본인으로서는 소녀가 가톨릭 교회를 떠나는 것을 수락함을 알리고자 합니다. 하지만 현행법상, 지방 법원에서 본인이 내린 결정에 동의하는 것이 또한 필요합니다.” 그러므로 멜라니는 판사 앞에 단독으로 서서 자신이 교회를 떠나고 싶어하는 이유를 밝혀야 했다. 1990년 9월 21일에, 멜라니는 지방 법원으로부터 유리한 판결을 받았다. 11세의 소녀가 참으로 멋진 승리를 한 셈이다! 멜라니는 이제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으로서 전파 활동에 즐거이 참여하고 있다.

핀란드에서 한 여자는 자동차 사고로 중상을 입고 병실에 누워 있으면서, ‘내 생명이 끝났더라면 이것이 인생의 전부였단 말인가?’하고 생각해 보았다. 퇴원하고 나서 그는 해답을 얻기 위하여 성서를 조사해 보았지만 찾을 수 없었다. 그는 탄식하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 제발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지를 알게 해주세요. 그 점이 성서에 들어 있을 줄로 압니다. 진실로 구하오니, 그 점을 깨닫게 도와주세요.” 10분쯤 지났을 때, 초인종이 울렸다. 문간에 서 있는 사람은 누구였는가? 따뜻한 미소를 띠고 있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 여자는 이렇게 말하였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순간 ‘하필이면 여호와의 증인이란 말인가?’ 하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하지만 자신을 억누르고 그를 안으로 초대하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성서를 이해하기 시작하였으며 계속 발전하고 있습니다.”

라틴 아메리카

“내가 여호와의 의를 따라 감사함이여 지극히 높으신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리로다.” (시 7:17) 지난 봉사년도 동안 다윗의 이 시는 라틴 아메리카에 사는 전도인들의 한결같은 주제였다.

창조를 연구하는 데도 진화의 경우처럼 똑같은 시간을 바쳐야 하지 않겠는가? 이것은 에콰도르에서 흔히 제기되는 한 가지 질문이다. 항구 도시 과야킬에서 한 교사는 「생명—그 기원은 무엇인가? 진화인가, 창조인가?」 책의 내용을 그가 맡고 있는 104명의 학생들과 함께 살펴보기로 하였다. 지난 1월, 학기말에 교사는 학생들에게 일련의 질문을 하였다. 그중 하나는 “이 수업 시간에 제시된 모든 과학적·성서적 증거들을 고려할 때, 생명의 기원에 대해 무슨 결론에 이르렀는가?”라는 질문이었다. 하나님의 창조를 지지하는 대답이 압도적으로 많았다. 한 학생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땅과 그 안에 있는 만물이 틀림없이 완전한 분에 의해 존재하게 되었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지상에 사는 사람들을 위해 목적을 가진, 대단히 사랑이 많은 분이 존재하셨음에 틀림없습니다. 살아 있는 인격체처럼 복잡한 것이 우연에 의해 창조되었다고 생각하는 것은 불합리합니다. 생명처럼 복잡한 것을 창조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성서 진리가 이 교사에게 매우 큰 영향을 미쳤기 때문에 그는 1990년 12월에 침례를 받게 되었다. 그의 학생들 중 42명은 지방 순회 대회에 참석하여 그 침례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 당시에, 그 학생들 중 31명 역시 과야킬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다!

가이아나의 내륙 깊숙한 곳, 모루카 강변에 사는 한 성서 연구생은 편지로 연구하고 있다. 그 부인은 그리스도의 죽음의 기념식 날 밤에 여호와의 증인과 함께 참 숭배에 연합하기를 간절히 원하였다. 그는 비싼 비용으로 통나무 배를 세내어, 열세 살 된 아들과 열두 살 된 딸과 함께 21시간 동안 노를 저어서 차리티에 있는 가장 가까운 회중에까지 갔다. 그 여행을 하는 데는, 모루카 강을 따라 대서양 쪽으로 가다가 다시 내륙으로 방향을 돌려 포메룬 강을 따라 노를 저어야만 했다. 그 부인은 오후 9시 30분에 출발하여 그 다음날 오후 6시 20분에 도착하였다. 그 사이에 휴식을 취하기 위해 단지 한 시간 동안 멈췄을 뿐이다. 기념식이 끝나자 그 부인은 즉시 떠나야 했다. 하루에 얼마씩으로 배를 세내었기 때문이다. 그 부인은 현재 침례받지 않은 전도인이며, 그 기념식 때에는 임신 사 개월이었다!

베네수엘라에서 지난 3월에 한 로마 가톨릭 사제가 서적을 구하러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였다. 그는 그때 교리에 관한 특정한 점들에 관해 누군가와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나이가 65세가 넘었고 사제로서 37년 간 봉사해 왔다고 자신을 소개하였다. 그는 이탈리아 로마에서 사제직에 대해 연구한 사람이었다. 지난 4년 동안, 그는 가톨릭 교회의 공의회에 관한 내용을 읽어 왔으며, 자신이 발견한 사실로 인해 깜짝 놀랐다. “교회에는 결코 진리가 없습니다”라고 그는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요즈음에는 내 전 생애중 어느 때보다도 성서를 더 많이 읽고 있습니다. 나는 혼란에 빠져듭니다. 교회의 가르침은 성서와 일치하지 않습니다. 내게는 가르쳐야 할 책임이 있지만, 내 양심은 거짓을 가르치는 것을 허용하지 않습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나는 방법을 찾고 있습니다. 나는 교회에 전 생애를 바쳐 왔습니다. 이제는 노인이니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디서 일자리를 얻을 수 있겠습니까? 현재는 훌륭한 거처에서 살고 있고, 호화로운 차도 있고, 은행에 돈도 있습니다. 하지만 교회를 떠난다면, 이 모든 것을 잃게 됩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습니다.”

대화를 나눈 형제는 사제에게 여호와께서는 그분을 섬기는 사람들을 버리시지 않는다는 점을 확증하는 몇 가지 성구를 보여 주었다. 그 형제는 사제가 희랍어를 연구하였다는 것을 알고는, 마태 복음 10:28을 언급하면서 사제에게 「희랍어 성경, 왕국 행간 번역」을 보여 주었다. 사제는 상기된 어조로 이렇게 말하였다. “이 말씀은 정말이지 매우 명확하군요. 영혼은 죽습니다! 그러므로 이것은 또 하나의 거짓말이었군요!”

얼마 동안 대화를 나눈 후, 그 형제는 사제에게 어떻게 해서 지부 사무실에 오게 되었는지 물었다. 그의 대답은 매우 흥미 있었다. 14세 된 전도인이 카라카스에 있는 그의 교회에 들어와서, 한 부인이 기도하고 있는 것을 보고는, 그 부인에게 사제가 어디에 있는지 물었다. 부인은 “저기 뒤쪽에”라고 알려 주었다. 그러자 그 청소년 형제는 교회 뒤쪽으로 가서 사제의 집무실을 찾았다. “어떻게 왔지?” 하고 사제가 그에게 물었다. 우리 청소년 전도인은 성서에 관하여 이야기하러 왔다고 말한 다음, 사제에게 큰 바벨론이 멸망될 것이며, 만일 사제가 거짓 종교에서 나오지 않는다면 그 역시 멸망될 것이라고 설명하였다. 사제는 14세 소년이 나이 든 사람에게 그토록 담대하게 그토록 많은 점들을 설명하는 것을 보고 너무 놀라서 말문이 막혔다. 청소년 전도인은 사제에게 지부 사무실 주소를 알려 주었다. 그리하여 이 사제가 지부 사무실을 방문하게 된 것이다.

두 시간 가량 대화를 나눈 후 사제는 떠났다. 우리는 사제가 그의 윗사람들을 대면할 용기를 갖기를 그리고 진리를 받아들이기를 바란다.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섬들

북아메리카와 카리브 해의 섬들에 사는 증인들은 시편 필자 다윗의 다음과 같은 말에 공감하여 동일하게 외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라 내 속에 있는 것들아 다 그 성호를 송축하라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찌어다.”—시 103:1, 2.

간혹, 종교를 바꾸기에는 너무 늙었다는 태도를 취하는 관심자들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캐나다, 브리티시컬럼비아 주에 사는 어느 연로한 부인은 그러한 견해를 갖고 있지 않다. 그 부인은 그 작은 지역 사회 내에서 미술 교사이자 성공회의 주요 후원자 중 한 사람으로 널리 알려져 있었다. 부인은 교회 내의 성찬대의 비용을 개인적으로 부담하였으며, 예배 시간에 예배의 한 부분을 주재하는 평신도였다. 성서에 관심이 있었기 때문에 부인은 여러 해 동안 지방 증인들의 잡지 통로였지만 그 이상으로는 발전하지 않았다. 약 5년 전, 딸과 사위가 표면상으로는 연로한 어머니를 돕기 위하여 친정으로 이사왔다. 하지만 그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였고 어머니에게 양로원에 들어가도록 끈질기게 압력을 가하였다. 부인은 그렇게 할 마음이 전혀 없었다! 그래서 딸과 사위가 휴가차 멀리 떠나 있는 동안, 부인은 이동 주택으로 이사하였다.

마침내 한 자매가 직접 접근을 시도하여 성서를 연구하는 방법을 보여 주었으며, 성서를 연구하는 데 관심이 있는지를 물었다. 부인은 “언제나 그런 질문을 해올까 하고 생각중이었어요!”라고 대답하였다. 부인은 성서를 진실로 믿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신속히 기본적인 성서 진리를 이해하였다. 부인은 “그 말씀이 성서에 있다면 참일 수밖에요”라고 말하곤 하였다. 하지만 부인은 계속 교회에 다녔는데, 그렇게 하면 동료 교회 성원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 것이다.

약 1년 반 동안 연구한 후, 부인은 성공회의 대주교가 결혼한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교회 기금을 유용하여 자기 비서와 함께 카리브 해로 휴가 여행을 떠났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부인은 그후 대주교가 기금 유용에 대한 책임을 교회의 부제에게 전가시키려 하는 것도 알게 되었다. 그 사건의 전모가 교회 내에서 벌어진 치열한 공개 토의에서 드러나게 되었다. 토의 도중, 부인은 공공연하게 대주교를 “늙은 위선자”라고 부른 다음, 교회 밖으로 걸어 나와 문을 쾅 닫고는 다시는 교회에 가지 않았다.

부인은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처음으로 참석하고 나서 소감을 이렇게 말하였다. “남자 성원들이 참으로 많고 회중 일에 열심히 적극적으로 관여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습니다. 내가 속해 있던 교회에서는, 참석하는 남자들이 정말로 몇 안 되는데다 그저 앉아서 졸 뿐이었거든요.” 그 부인은 1990년 9월 29일에 87세의 나이로 침례를 받았다.

한 순회 감독자는 최근에 그린란드를 방문한 후 이렇게 기뻐하였다. “기적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빙산의 일각에 지나지 않습니다.”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집회에 참석하고 있고, 여러 건의 연구가 시작되며, 새로운 사람들이 야외 봉사에 가담하고 침례를 받고 있다.

일부 새로운 사람들은 여호와와의 승인된 관계를 얻기 위하여 오래 지속되는 투쟁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예를 들면, 앤디(가명임)는 30대 중반의 남자였다. 그는 유니스(가명임)와 동거하고 있었고,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알코올 중독자였다. 이것은 두 사람의 관계를 서서히 약화시켰다. 그는 양심이 괴로우면 이따금 언짢은 방법으로 발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무렵 유니스는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유니스는 자신이 여호와 보시기에 가납될 만한 사람이 되고자 한다면 자기 생활을 청산해야 함을 점차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유니스는 앤디 곁을 떠났다.

앤디는 이 일로 인해서 자신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게 되었다. 그는 술을 택했고, 유니스는 그리스도인 생활 방식을 택한 것이었다. 유니스는 계속 잘 발전하여 침례를 받았고, 지금은 회중에서 열성적인 자매이다.

그후 앤디는 연구를 하겠다고 요청하였다. 그는 어느 정도 영적으로 발전하였고, 배운 점들로 인하여 기뻐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이전 약점으로 되돌아가곤 하였다. 그는 어쩌다 집회에 참석할 뿐이었고 나쁜 교제를 끊을 수 없었다. 1989년에, 지역 대회에 참석한 것이 앤디에게는 하나의 전기가 되었다. 그는 이제 자신이 문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며, 의사에게 가서 도움을 청하였다. 그는 입원하게 되었고, 집에 돌아오자 회중에서 그를 기꺼이 도와주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영적인 문제들을 검토하기 위한 훨씬 나은 기초가 놓였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는 술을 끊었고, 생활은 안정되었습니다. 옛 친구 대신 회중 내의 새로운 친구들을 사귀었습니다. 여호와와의 관계는 더욱 실제적이 되었고, 그제서야 하나님께 기도로 나아갈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 이후로 기도는 제 생활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해 왔습니다. 매우 자주 여호와께 기도하였으며 그분은 저의 기도를 들어주시곤 하셨습니다. 유혹이 너무 강해서 그릇된 일을 하고 싶은 욕망이 나를 거의 압도하려고 할 때면, 언제나 왕국회관에 다니는 친구들과 접했던 것 같습니다. 그 친구들은 새로운 생활 방식에 고착하도록 격려해 주었습니다.”

이제 앤디가 술을 끊은 지 삼 년째 되었다. 앤디에게 도움이 된 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분의 영 그리고 그분의 조직이었다. 그는 전파 활동을 하기 시작하였고 지난 8월에 고트호프(누크)에서 열린 “자유 애호자”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의 숭배에 가담하기로 결심한 사람에게 신체적인 불구는 장애가 되지 않는다. 예를 들면, 이제 17세가 된 켄윈은 그레나다 섬에 살고 있다. 그는 네 살 적에 높은 곳에서 떨어져서, 걷는 기능이 크게 손상되었다. 나이가 듦에 따라 걷는 것이 점점 더 어려워졌다. 15세 때는, 목발에 의지해서 걸어야만 했다. 17세 때, 보행 장애를 치료하기 위한 수술을 받아 보았지만 효과가 없었다.

켄윈이 여호와의 증인 선교인과 연구를 시작한 때가 바로 이 무렵이었다. 그는 성서 지식을 받아들이는 면에서 잘 발전하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얻은 지식을 호별 방문 봉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주도록 권유를 받자 주저하였다. 신체 상태 때문에 꺼린 나머지 “마음의 준비가 되면 말씀드리겠습니다”라고 대답하곤 하였다. 그는 「깰 때이다」와 「파수대」를 통해서 신체적인 장애에도 불구하고 정기적으로 집집으로 전파한 증인들의 경험담을 직접 읽어 보도록 권유를 받았다. 이러한 경험담을 읽어 본 후, 그는 “이제 준비가 됐습니다”라고 선교인에게 알렸다.

그는 참으로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는 첫 달에 야외 봉사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전파하는 데 19시간을 바쳤다. 그 다음 달에는 63시간을 보고하였다. 그는 지난 3월에 침례를 받았고, 그 다음 달엔 보조 파이오니아로 등록되었다. 켄윈이 목발을 짚고 봉사 구역의 언덕을 오르내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는 회중의 모든 성원들에게 참으로 두드러진 본보기이자 격려의 근원이다! 언덕들이 그의 전파 활동에 전혀 장애가 되지 않기 때문에, 형제들은 애칭으로 그를 “4륜 구동”이라고 부른다.

태평양의 섬들

“저가 바다에서부터 바다까지와 강에서부터 땅 끝까지 다스리리[로다]”라고 시편 72:8은 예언하였다. 이 말씀 그대로, 더 큰 솔로몬이신 그리스도 예수께서는 태평양의 섬들을 포함하여 땅 전역에 자신의 신민을 두고 계신다.

괌 지부가 돌보고 있는 서태평양의 작은 섬들과 환초의 주민들은 계속 여러 가지 언어로 증거를 받고 있다.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 책이 많은 가정에 배부되었다. 한 섬으로부터 이러한 경험담이 들어왔다. 이 서적을 받은 한 여자는 소속 교회 목회자인 자기 아버지가 강단에서 설교하면서 빨간 책을 사용하는 것을 눈여겨보았다. 아버지는 설교가 끝난 후에 다른 사람들이 알아채지 못하도록 조심스럽게 그 책을 작은 서류 가방에 넣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 여자는 알아채고는 예배가 끝나자 “아빠, 그 빨간 책은 왜 사용하세요?”라고 물었다. 아버지는 “그 책에 들어 있는 내용이 옳기 때문이란다”라고 대답하였다. 그 여자는 그 책을 어디서 구하였는지 물어 보았다. “바로 네 책이다”라고 아버지는 대답하였다. 이러한 일이 있은 후 그 여자와 남편은 지방 증인들의 도움을 받으면서 성서를 열심히 연구하였다. 어느 날 이웃 사람들이 아버지가 목회자인데도 증인들과 함께 성서를 연구한다는 이유로 그 여자를 비웃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그 목회자는 그러한 소문을 듣게 되자 그 사람들을 나무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증인들은 우리에게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하나님의 백성이기 때문에 그들을 비난하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파푸아뉴기니 지부는 모로베 주로부터 다음과 같은 편지를 받았다. “이곳 렝바티의 주민은 큰 산들로 둘러싸여 있고 차도가 전혀 없는, 숲이 무성한 시골에 삽니다. 이곳에는 작은 활주로가 있지만, 비행기가 자주 오는 것은 아닙니다. 1987년에는 야외 봉사를 하고 성서 연구를 사회하는 증인이 한 명뿐이었습니다. 순회 감독자 부부가 우리를 방문하여 보살펴 주었는데, 바로 그때 반대가 들이닥쳤습니다. 왕국의 적들은 우리의 활동을 중단시키고자 하여, 순회 감독자가 보는 앞에서 왕국회관을 불살랐습니다. 이 반대의 결과는 어떠했겠습니까? 현재 7명의 전도인이 있고, 새로 지은 왕국회관에서 집회를 갖습니다. 우리는 왕국 봉사를 하면서 매우 행복감을 맛봅니다. 다른 곳에 사는 모든 형제 자매들이 행복한 마음으로 봉사하듯이 말입니다.”

청소년들은 다른 청소년들이 진리를 배우도록 돕는 데 한몫을 할 수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아홉 살 된 린다는 혼자 앉아 있는 레베카 옆에 앉으라는 지시를 담임 교사로부터 받았다. 린다는 레베카와 사귀었으며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었다. 마침내 린다는 학교에서 점심 시간에 「위대하신 선생님의 말씀을 잘 들음」 책을 사용하여 레베카와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다음에 그들은 에보니라는 다른 학생에게 이야기하였으며 그도 연구에 가담하였다. 그 다음에 또 다른 학생인 사라가 오더니, 그들이 하고 있는 놀이에 끼게 해줄 수 있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린다는 놀이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성서를 연구하는 중이라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자 사라도 가담하였다. 또 다른 학생이 자기도 함께할 수 있는지를 물었다. 이제는 린다가 한 그룹, 레베카가 다른 그룹을 맡아, 두 그룹의 어린이들이 「위대하신 선생님」 책을 연구하기도 한다. 그러자 담임 교사가 호기심을 갖게 되어 그들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를 알고 싶어하였다. 그래서 린다는 담임 교사에게 「위대하신 선생님」 책을 보여 주었으며, 교사는 린다를 칭찬하였다.

금지령하에 있는 나라들

“나를 핍박하는 자에게서 건지소서 저희는 나보다 강하니이다”라고 다윗은 그의 구원자이신 여호와께 외쳤다. (시 142:6) 오늘날에도, 증거 활동을 금지시킨 여러 나라에서, 여호와의 백성은 그분께서 구원해 주실 것을 바라본다. 그리고 여호와께서는 그들의 탄원을 들으시고 그들을 위로해 주신다.

지난 봉사년도는, 아시아의 어느 나라에 사는 여호와의 증인의 경우 금지령하에서 연속 15번째 맞은 해로서, 매우 분주하고도 축복받은 한 해였다. 왕국 전도인—9퍼센트의 증가로—신기록에 달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아직도 주의가 요구된다. 예를 들면, 한 회중은 어느 장로의 집에서 집회를 갖고 있다. 뚜렷한 이유도 없이, 이웃 사람들은 집회를 갖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겨 그 집의 함석 지붕에다 벽돌과 돌을 던지기 시작하였다. 집회에 참석한 일부 형제들은 화가 나서 그런 못된 짓을 하는 자들과 맞상대하고자 하였다. 하지만 그 장로는 침착하게 그들이 완력에 의지할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영을 의뢰하도록 설득하였다. 바로 옆에 사는 이웃 사람들은 장로 형제의 소유지 외벽을 따라서 깊이 1미터, 폭 0.5미터 되는 깊은 도랑을 팠다. 벽이 무너지면 집회를 갖는 일도 중단되리라는 기대에서였다. 장로는 참을성 있게 여호와를 기다렸다. 한 달 후쯤, 주동자였던 이웃 사람이 병이 났다. 그는 병원에 가려고 차를 후진시키다가 그만 부주의하여 그 형제의 벽을 따라 파 놓은 구덩이에 박히고 말았다. 이웃 사람들이 그를 궁지에서 벗어나게 도와주었지만 아무도 그의 건강을 회복시켜 줄 수는 없었다. 그는 그후 건강이 점점 악화되더니 얼마 안 있어 사망하였다. 형제들은 보복하지 않고 참았으며, 예기치 않은 특이한 방법으로 박해자들에게서 벗어나게 된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다.

아프리카의 한 나라에서 집권 정당 산하의 한 청년 단체는 증인들이 당원증을 소지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짐승처럼 취급하곤 하였다. 박해가 지난 24년 동안 잔인하게 계속되었다. 그 기간 내내, 여호와의 백성은 위에 있는 권세에게 불경을 나타내거나 보복하려고 하지 않고 계속 복종하는 태도를 나타내 왔다.—로마 13:1.

증인들은 성서 원칙에 대한 확고한 태도로 인하여 일부 반대자들의 존경을 얻게 되었다. 예를 들어, 한 형제가 약 일년 전에 체포되어 잠시 투옥되었다. 담당 경찰관은 “마침내 붙잡혔군요”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경찰은 그 형제의 신권 활동의 윤곽을 처음부터 알고 있었지만 아무런 조처도 취하지 않았었다. 그러다가 그만 그 형제가 운전하던, 성서 출판물을 실은 차량이 경찰차와 사고가 난 것이다. 그 형제는 비록 형을 받기는 하였지만, 투옥되어 있는 동안 좋은 대우를 받았다.

그 차량의 소유주로 등록되어 있던 형제 역시 경찰서로 출두하게 되었다. 그는 자기 차에 소위 불법 서적이 실리게 된 경위를 설명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심문 도중에 그는 “당신은 여호와의 증인입니까?” 하는 질문을 받았다.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저는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여호와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금지령 이후로 종교를 바꾸지 않았습니다. 저의 가족과 저는 집에서 기도를 합니다. 그리고 그 누구에게도 지장을 주지 않습니다. 관리께서는 이 점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놀랍게도, 그에 대한 모든 혐의가 풀렸으며 차를 운전하고 집에 가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다. 이와 같이 증인들은 그 기간 내내 하나님께 충실을 유지해 왔으며, 여호와께서는 증인들이 증가되도록 해주셨고 포기하지 않도록 힘을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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