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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적수 교황들이 있었던 시대
  • 깨어라!—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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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1
깨71 8/22 13-17면

적수 교황들이 있었던 시대

“신학자들이 교황과 목사를 민주적으로 선출하라고 권고하다.” ‘벨기에’ ‘부르셀’에서 개최되었던 200명의 지도적인 ‘로마 가톨릭’ 신학자들과 학자들의 회의에 관하여 최근 신문은 위와 같이 보도하였다. 또한 600명의 ‘로마 가톨릭’ 신부들이 추가로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교회의 미래에 관한 세계 회의”1라고 불렀다.

이 주교회의가 열리기 1년미만 전에 교황 ‘바오르’ 6세가 직접 참석한 가운데 즉 140명 이상의 주교, 대주교, 및 추기경이 참석한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는 또한 교황 통치권의 분리를 강조하였다. 이 회의에 관한 보도들은 다음과 같은 표제들을 붙였다. “분열된 회의”2 “교황이 공격당하다.”3 그리고 “반역이 교회의 약화를 초래함을 교황이 경고하다”4 교황이 “나를 복종하라”5라고 항변하고 ‘카톨릭’ 교회 내부에 “실제로 교회 분리론자의 격동”6이 존재한다고 불평한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교황의 오랜 한 사제 친구는 생각에 잠겨 이렇게 말하였다. “현재 그[‘바오르’ 6세]는 세계에서 가장 고독한 사람일 것이다.”7

“교회 분리론자의 격동”에 관하여 말하자니 한번에 둘 그리고 세명의 교황까지 있으면서 동시에 교황권을 주장하였던 때가 회상된다. 특히 이것은 서방 교회의 대분열시에 그러하였다.

‘베네딕트’ 9세가 14세의 나이로 교황에 선출된 것은 1032년이었다.8 「가톨릭 백과 사전」은 “그는 ‘베드로’의 직분을 욕되게 하였다.”9라고 알리고 있다. 다른 자들은 그가 “그 자리를 점유하는 동안 어느 누구보다도 더욱 방종한 한 사람이었다.”10라고 알리고 있다. 그의 “방탕한 생활”a 때문에 ‘로마’의 한 세력에 의하여 1044년 그의 직위에서 좇겨났다. 그리고 “최고조의 혼란의 와중에서” ‘실베스터’ 3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그러나 ‘베네딕트’ 9세는 그해 복귀되어 새로 선출된 ‘실베스터’ 3세9를 추방하는데 성공하였다! 그런데 그는 결혼하기를 원했다. 하지만 예정된 신부의 아버지는 ‘베네딕트’가 교황직을 사임하지 않는 한 딸을 줄 것에 동의하지 않았고 그는 사임하는 것을 동의하였다.8 그러나 이것은 그에게 수입원을 막아버렸다. 그는 거액의 돈을 받고 그의 대부(大父) ‘존 그리티안’에게 교황권을 팔아 넘겼다. ‘존 그리티안’은 그때 정식으로 선출되어 ‘그레고리’ 6세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 그럼에도 ‘베네딕트’는 결국 신부를 얻을 수 없었으므로 흥정을 파기하였으며 교황권을 산 ‘그레고리’ 6세를 몰아 내고자 하였다.11

그러한 상황에 관하여 「가톨릭 백과 사전」은 다음과 같이 알리고 있다. “‘로마’의 상태는 실로 한심스러웠다. 성 ‘베드로’의 ‘라테란’ 궁전과 성 ‘마리아’ ‘메이저’에 세명의 적수 교황권 주장자들이 올라 앉았다. 그들 중 두 사람은 ‘베네딕트’ 9세와 ‘로마’ 귀족의 경쟁적인 파벌을 대표한 ‘실베스터’ 3세였다. 세째 위치는 ‘그레고리’ 6세로서 독특하였다.”—그는 교황권을 얻기 위하여 거금을 지불하였으며 교황으로 선출되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 교황권을 그에게 판 자가 돌려 줄 것을 원하였다.12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인 독일 왕 ‘헨리’ 3세는 이러한 상황에 대하여 분개하였다. 그는 세명의 적수 교황권 주장자들 중 아무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그 대신 종교적 고위 성직자와 정치적 고관들로 된 많은 수행원을 대동하고 ‘로마’로 가서 회의를 소집하였다. 이 회의에 적수인 두명의 교황이 추방되고 교황직을 돈으로 산 ‘그레고리’ 6세는 사퇴하도록 종용되었다. 그 때 한 독일인 주교인 ‘클레멘트’ 2세가 교황이 되었다. 그러나 황제가 ‘로마’를 떠난지 얼마 안되어 ‘베네딕트’ 9세는 교황권을 주장하기 위하여 돌아왔다. ‘헨리’ 3세가 급히 ‘로마’로 돌아왔으므로 ‘베네딕트’는 도망하여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9 그런데 그 당시 세속 통치자들이 가끔 교황 선출에 있어서 주도적 역할을 하였다는 것은 주목할 만하다. 사실 한동안 독일 왕이 교황의 계승을 지배하는 것이 전통적인 관례가 되었다.10

이러한 사건이 있은 후 얼마 지나지 않아서 1061년에 ‘로마’ 추기경들은 독일 궁정과 독일 귀족과 먼저 상의하지 않고 ‘알렉산더’ 2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후자들은 얼마의 ‘이태리’ 북부 지방의 주교들과 함께 ‘스위스’ ‘바셀’에서 얼마의 ‘가톨릭’ 고위 성직자 회의를 소집하도록 독일 궁정을 설복할 수 있었다. 이 회의는 고위 성직자 ‘카달루스’를 교황으로 선출하였으며 그는 ‘호놀리우스’ 2세라는 칭호를 얻었다. 그는 1062년 봄 군대를 이끌고 ‘로마’로 행군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을 점령하였다.10 ‘호놀리우스’는 ‘알렉산더’ 2세를 좋아하는 군대에 의하여 파멸당하고 쫓겨났지만 다시 ‘로마’로 행군하여 교황의 요새인 성 ‘엔젤라’ 성을 탈취하였으며 교황청 본부인 ‘라테란’ 궁에서 살고 있던 ‘알렉산더’의 세력을 일년 이상 괴롭혔다. 그때 ‘호놀리우스’ 2세는 북부 ‘이탈리아’의 그의 교구로 도피하였다. 그는 교황 회의에서 파문을 당하였지만 죽는 날까지 그가 합법적인 교황이라고 주장하였다.13

교황의 교황권 계승에 대한 이러한 사건에 대하여 현대 역사가 ‘라토우리트’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알랙산더’ 2세의 전체 통치 기간 동안 ‘가달루스’는 성가신 적수였다. 양편의 군대를 사용한 전쟁의 절반은 바로 ‘로마’에서 치루어졌다. 부정하고도 복잡한 권모술수가 자행되었으며 ‘로마’ 인민의 찬의를 사기 위하여 양편은 돈을 물쓰듯하였다.”10

서방 교회의 대분열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동방 교회의 분열과 구별하기 위한 것이다. 1054년 ‘로마’ 교회의 사자가 동방의 ‘그리이스’ 교회의 책임자를 파문하였을 때 영구화되었다. 동방 교회의 분열로 동쪽의 ‘그리이스’ 교회는 ‘로마’로부터 분리하였으며 더는 ‘로마’ 교황을 머리로 인정하지 않았다.14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1378년에 시작하였다. 거의 70년 전인 1309년에 교황 ‘글레멘트’ 5세는 교황권을 현재 ‘프랑스’의 남동부이며 그 당시 ‘시시리’ 왕의 통치 아래 있었던 ‘아비그논’으로 옮기었다. 한 저명한 역사가에 의하면 도합 7명의 ‘프랑스’인 교황이 그곳에서 통치하였다고 한다.10 ‘로마 가톨릭’ 역사가들은 이 기간을 “‘바벨론’의 속박”15이라고 언급하고 있다. 처음 장소로부터의 이러한 교황권 이동은 어떤 건전한 이유도 없이 이루어진 것같다. 당시 ‘로마’에는 쟁투와 혼란이 연출되고 있었으며 일부는 교황권 자체로 말미암았다.10

이들 중 일곱째이자 마지막 교황인 ‘그레고리’ 11세는 1377년에 ‘아비그논’을 떠나 ‘로마’로 돌아왔으며 그곳에 교황권을 재설립하였다. 1378년 3월 27일11 ‘그레고리’ 11세가 사망하였을 때 일부의 추기경, 사제 및 귀족들과 대다수의 ‘로마’ 인민들은 교황권이 ‘로마’에 남아 있기 위하여 이태리인 교황이 선출되어야 한다는 점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6명의 추기경이 4월 7일 ‘로마’에서 회의를 하였으며 자격이 높게 평가된 것으로 보이는 한 ‘이태리’인 주교를 선출하였다. 이것은 ‘로마’인들이 ‘이태리’인 교황을 달라고 아우성을 치면서 추기경들이 숙의하고 있는 경내로 침범하였을 때 이루어졌다. 같은 날 저녁 추기경의 다수는 다시 회합하고 그들의 선출을 재확인하였으며 그는 ‘우르반’ 6세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16

그러나 추기경들 모두는 즉시 그들의 선출에 대하여 후회하였다. 한가지는 그들 모두가 전연 개혁 정신을 가지지 않았으나 ‘우르반’은 그러하였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우르반’은 고집세고 성급하였으며 오만불손하였다. 교회의 고위 간부들과 회의시 그는 그들과 모욕적인 말을 주고 받았다. 그리하여 추기경들은 그를 반대하는 운동을 무언중에 시작하였으며 몇개월 후 또 다른 교황을 선출하기 위하여 회의를 열어 이전에 ‘우르반’ 6세를 선출한 것은 ‘로마’ 시민에 의한 두려움에 기인하였으므로 무효라고 주장하였다.10 그때 교황 선출 회의는 역사상 가장 짧은 회의 중의 하나였다.16

기분이 상한 추기경들은 ‘로마’가 너무 더운 도시라는 구실로 다른 곳에서 회의를 열었다.16 압도적인 다수의 추기경들은 ‘우르반’을 그리스도의 적이며 배교자라는 낙인을 찍었으며 그의 사임을 요구하였다. 물론 그는 거부하였다. 그들은 교황 선출권한뿐만 아니라 폐위 권한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교황이 공석중이라고 선언한 후 9월 20일 또다른 교황16 ‘클레멘트’ 7세를 선출하였다.10 그리하여 이것이 서방 교회의 대분열의 시작이 되었다.16

‘클레멘트’ 7세는 그 자신이 ‘프랑스’인으로서 교황권을 ‘아비그논’으로 옮길 적기라고 생각하였다. 거의 갑자기 ‘유럽’의 ‘로마 가톨릭’은 두 세력으로 분열되었다. “‘우르반’에게 복종하는 자가 더 많았으나 ‘클레멘트’는 더욱 자신만만하였다.”16 지도적인 “성도”들과 신학자들은 ‘유렆’의 국가들이 일부는 ‘우르반’에게 다른 일부는 ‘클레멘트’에게 가담한 것과 같이 양편으로 갈라졌다. 한 역사가가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각기 완전히 조직된 교황청을 가진 두 교황은 그리스도교국의 충성을 요구하였다. ··· 훌륭히 지지를 받는 두 교황이 존재하였으며 양자는 교황의 전통을 등에 업는 완전한 세력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리고 성실에 대한 급박하고 긴급한 문제를 진작시킬 수 있는 충분한 기간 동안 그들의 계승자와 함께 그리스도교국을 분열시켰다.”17

당시의 교황청의 상태가 교황 비록에 이렇게 기술되어 있다. “그들은 그곳에서 매일 성과 국토와 도시 및 가진 전쟁 무기 그리고 돈에 관하여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청결, 의연금, 정의, 믿음 혹은 신성한 생활에 관해서는 한마디도 들을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한 때의 영적인 교황청이 세속적이고 악마적이며 전제적인 교황청이 되었다. 그리고 그것에 마추어 그들의 공적 생활도 다른 어떤 세속 궁성보다 더욱 좋지 못하였다.”17

‘가톨릭’ 내의 정직한 사람들은 학대를 받았다. 그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부정한 돈 때문에 교회의 평화를 위하여 그의 직책을 기꺼이 포기하는 교황을 보지 못할 것이다.”17 또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다. “한 교황이 어떤 사람을 파문시키면 다른 교황은 그를 사면해 주었다. 한 교황이 어떤 사람을 정당하게 유죄선언을 하면 다른 교황은 부당하게 그의 공소를 정당화시켰다. 그러므로 공의가 상처를 입었고 교회의 중요성이 저하되었으며 성 ‘베드로’의 칼은 그 위력을 상실하였다.”17 그리고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소집된 공의회에서 한 지도적인 ‘로마 가톨릭’ 학자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한 배안에 서로가 담을 쌓고 반박하는 두 선장이 있다.”18 이러한 상태 아래서 4명의 교황이 ‘로마’에서 통치하였으며 두명의 교황이 ‘아비그논’에서 통치하였다. 그 위에 ‘피사’ 공의회의 결과로 두 교황이 이 기간 마지막 때쯤 통치하였다.18

계속 열렸던 공의회

불화를 해결하기 위한 공의회가 ‘프랑스’와 그 밖의 여러 곳에서 끊임없이 개최되었지만 그 모두는 헛되었다. 「가톨릭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하였다. “죄악은 구제책이나 중단없이 계속되었다.”18 1409년 이태리 ‘피사’에서 큰 공의회가 개최되었는데 표면적으로는 교회의 분열을 종결지으려는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더욱 악화시켰을 따름이었다. 그 이유는 그 공의회가 세째 교황을 합법적인 교황으로 공표하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에 두 교황이 그들에 대한 공의회의 파면을 거부하였기 때문이다. 결국 “수많은 회의, 계획, 토론(때로는 폭력적인), 시민 권력의 중재, 여러 가지 끔찍한 장면 그리고 연이은 공의회가 개최된 후”18 교회의 분열은 그 막을 내렸다. 이 공의회는 새로이 독일 왕으로 선출되었다가 후에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가 된 ‘시기스문트’에 의하여 소집되었다. 그리고 또한 교황 ‘요한’ 23세b에 의하여도 소집되었다. 삼명의 교황 중 ‘요한’ 23세만이 많은 수행원과 1,600명의 기병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시기스문트’ 왕은 단지 1,000명의 기병을 대동하고 참석하였다. ‘요한’ 23세는 그의 많은 지지자들에 의하여 공의회를 압도하려고 희망하였으나 공의회가 국가 단위로 즉 각 나라가 한 표씩 투표하도록 결정하였기 때문에 좌절되고 말았다.19 그는 사건의 추세를 알고는 건강을 구실로 도망하였다. 공의회는 그의 오랜 비행과 부도덕 및 많은 실제적인 죄의 기록으로 그를 정죄하였으며 그것에 근거하여 그를 파면시켰다.20

공의회는 ‘로마’에 살고 있는 유약한 ‘그레고리’ 12세에게 퇴위를 종용하였으며 그는 그렇게 하였다. 그리고 또한 그 당시 ‘아비그논’에서 다스리고 있는 ‘베네틱트’ 13세에게 퇴위를 종용하려고 노력하였다. 그가 거부하였을 때 공의회는 그가 위증자이며 이단자로서 ‘가톨릭’ 교회의 연합에 대한 방해물이라고 선언한 후 파문하였다.10 2년 후 1417년 11월 11일에 공의회는 한 고위 성직자를 선출하였으며 그는 ‘마틴’ 5세라는 칭호를 갖게 되었다.18

서방 교회의 대분열은 ‘마틴’ 5세의 선출로 공식적으로 그 막을 내렸지만 실제로는 그후 여러 해 동안 계속되었다. ‘베네딕트’ 13세가 살아있는 동안 그는 자기의 파문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1424년 ‘아비그논’에서 그의 계승자 ‘클레멘트’ 8세는 ‘베네딕트’ 13세에게 충성했던 소수의 추기경들에 의하여 선출되었다. 그 역시 1429년 마침내 항복할 때까지 정당한 교황이라고 주장하였다. ‘로마 가톨릭’ 역사가들이 서방 교회의 대분열이 40년간 계속되었다고 말하는 반면 어떤 다른 역사가들은 1378년부터 1417년까지가 아니라 1429년까지라고 말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14

교회 분열의 영향

‘가톨릭’ 교회가 크게 분열된 것은 탐욕적인 사람들이 이기적 야심으로 서로 개혁하려는 결과였다. 그러나 계속 열린 공의회에서 강조된 점은 개혁이 아니라 연합이었다. 비난을 면할 수 없는 것 중의 하나는 ‘보헤미아’인 개혁자 ‘존 후스’를 정죄하고 불태운 일이다.10 ‘로마’ 교회의 내분이 피상적으로 해결됨과 동시 그러한 화가 가해진 것이었다. 그러므로 한 역사가는 이러한 교회의 대 분열이 이름있는 영주인 ‘로마 가톨릭’ 학자이며 고위 성직자인 ‘위클립’에게 강력한 영향을 미쳐 그로 하여금 교회에 반기를 들게 한 것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술하였다. “‘위클립’의 생애의 마지막 6년은 교회의 대분열의 영향의 결과로서 탁월하였다.”17 그리고 또 다른 역사가는 이렇게 기록하였다. “16세기에 절정에 달하였던 종교적 반역 운동의 기초는 1378년 ‘로마’에서 추기경들이 놓은 것이다.”17 사실상 ‘후스’의 추종자들의 운동도 서방 교회의 대분열의 열매이다. 왜냐 하면 ‘후스’는 ‘위클립’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다.10

오늘날에도 또한 ‘로마’ 교회 내에 많은 압력이 존재한다. 자유주의 지도자를 기쁘게 하기 위한 변화가 느린 것이 아니라 보수적 요소에 지나치게 굳어져 있기 때문이 ‘디렘마’에 빠져 있는 것이다. 교황 ‘바오르’ 6세가 “교회를 분열시키는 격동”에 대하여 불평하고 복종을 요청한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오늘날 적수 교황들은 없지만 어떤 ‘가톨릭’ 교인들은 이루어지고 있는 변화에 대하여 너무나 거세게 반대하기 때문에 그들은 최근 1969년 ‘로마’ 거리에서 반대하는 노기띈 시위를 감행하였다. “새로운 예배 방법에 대한 더욱 극단적인 반대자들은 ‘바오로’를 이단적 가짜 교황이라고 부르기에 이르렀다.”7

적수 교황들과 알력을 위시한 교황권에 대한 과거와 현재의 역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과 가르침에서 실로 멀리 떨어져 나간 것이 아닌가! 예수께서는 겸손한 마음을 가지셨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 종이 되어야 하리라.”고 충고하셨다. (마태 20:27)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그의 추종자들의 참다운 교회를 형성하는 표지로서 분열과 힘에 대한 의존이 아니라 사랑과 연합이라고 말씀하셨다.—요한 13:34, 35.

그리고 적수 교황들의 행위는 사도 ‘바울’의 다음과 같은 충고를 참으로 멀리 떨어져 나갔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각각 자기 일을 돌아볼 뿐더러 또한 각각 다른 사람들의 일을 돌아보라.”—빌립보 2:3, 4.

만일 예수와 ‘바울’의 이러한 말씀을 따랐다면 지난날의 적수 교황들이 있었겠는가? 오늘날 ‘로마’ 교회 내부에 있는 혼란이 있겠는가? ‘로마 가톨릭’ 교회는 성서가 묘사하는 참 그리스도교와 실제로 일치하는가? 오직 사실은 사실 그대로 대답해 준다.

참조 문헌

1. 「뉴욕 타임즈」지 1970년 9월 18일자, 1면.

2. 「뉴스 위크」지 1969년 10월 27일 호, 73면.

3. 「타임」지 1969년 10월 17일 호, 90면.

4. 「호스톤 포스트」지 1969년 9월 18일자, 10면.

5. 「스프링필드 유니온」지 1970년 1월 29일자, 6면.

6. 「크리스챤 센추리」지 1969년 4월 16일자, 500면.

7. 「라이프」지 1970년 3월 20일자, 30면.

8. 「애틀랜틱」지 1969년 7월호, 76면.

9. 「가톨릭 백과 사전」 제2권, 429면.

10. 「그리스도교 역사」 ‘라토우리트’ 저 466, 464, 469, 489, 625, 627, 630, 631, 666, 667면.

11. 「가톨릭 백과 사전」 제 6권, 791, 799면.

12. 동상 제 4권, 17면.

13. 동상 제 3권, 128, 129면.

14. 「신 샤프-헤르조그 종교 지식 백과 사전」 제 10권, 238면.

15. 「가톨릭 백과 사전」 제 7권, 58면.

16. 동상 제 15권, 216, 217면.

17. The Great Schism, Jordan, 26, 27, 32, 37, 11면.

18. 「가톨릭 백과 사전」 제 13권, 540면.

19. 「신 샤프-헤르조그 종교 지식 백과 사전」 제 4권, 545면.

20. 「가톨릭 백과 사전」 제 8권, 435면.

[각주]

a 예수회 ‘포드함’ 대학교 교수 ‘존 엘. 매켄지’는 그의 저서 「로마 가톨릭 교회」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무자격한 사람들에 의한 교황청의 부패는 거의 믿을 수 없을 정도가 되었다. ··· 교황직에 선출된 협잡군들과 악당들은 영적 통솔력을 확정하는데 전연 관심이 없었다.”—15면.

b 최근의 교황 ‘요한’ 23세는 분명히 지난날의 ‘요한’ 23세는 “가짜 교황”으로 낙인찍었기 때문에 그러한 동일한 이름을 가졌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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