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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5부: 기원 1095-1453년—칼에 의존하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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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15부: 기원 1095-1453년—칼에 의존하는 일
  • 깨어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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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9 8/15 21-25면

과거로 비추어 본 종교의 장래

제 15부: 기원 1095-1453년—칼에 의존하는 일

“사람들은 종교를 위해 언쟁하고, 종교를 위해 글을 쓰고, 종교를 위해 투쟁하며, 종교를 위해 죽는다. 종교를 위해 사는 것을 제외하고는 무슨 일이라도 한다.”—찰스 케일러브 콜턴, 19세기 영국의 교직자

초창기의 그리스도교는 자신들의 종교를 실천하는 신자들로 축복을 받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믿음을 변호하기 위하여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휘둘렀다. (에베소 6:17) 그렇지만 나중에, 1095년부터 1453년 사이의 사건들이 예시하는 바와 같이, 명목상의 그리스도인들은 참 그리스도교를 실천한 것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칼을 사용하는 데 의존하였다.

6세기 무렵, 서로마 제국이 쇠퇴하였다. 그 제국은 동방의 대응하는 제국, 즉 콘스탄티노플을 수도로 하는 비잔틴 제국으로 대치되었다. 그러나 매우 불안정한 관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던 두 제국의 교회는 곧바로 서로의 공통의 적, 즉 급속하게 뻗어나는 이슬람 세력에 의해 위협을 받고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동방 교회는, 아무리 늦어도, 이슬람교인이 이집트 그리고 북 아프리카에 위치한 비잔틴 제국의 그 밖의 지역을 점령했을 때인 7세기에는 그 점을 인식하였다.

서방 교회는, 그로부터 일세기가 채 못 되어, 이슬람교인이 스페인을 거쳐 프랑스로 들어와서, 파리에서 약 160킬로미터밖에 안 되는 곳까지 다가오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스페인의 많은 가톨릭 교인이 이슬람교로 개종하는 한편, 그 밖의 사람들은 이슬람 풍습을 받아들이고 이슬람 문화를 포용하였다. “그 손실에 격분한 교회는 스페인의 교인들 가운데 불타는 복수심을 불어넣기 위해서 끊임없이 일하였다”라고 「초기 이슬람교」(Early Islam) 책은 알려 준다.

여러 세기 후, 스페인의 가톨릭 교인은 그 땅의 대부분을 되찾은 후에, “이슬람교인인 신민들을 공격하고 무자비하게 박해하였다. 그들은 강제로 사람들의 믿음을 부인하게 하였고, 사람들을 나라에서 추방하였으며, 스페인-이슬람 문화의 흔적을 모두 뿌리뽑기 위해서 과감한 조처를 취하였다.”

칼을 들이대고 위협하다

1095년에 교황 우르반 2세는 유럽의 가톨릭 교인들에게 문자적 칼을 잡을 것을 호소하였다. 그리스도교국이 전적 권리를 가지고 있다고 주장하던 중동의 성지에서 이슬람교를 몰아내야 한다는 것이었다.

“정의의” 전쟁이라는 사상은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예를 들어, 스페인과 시실리에서 이슬람교인을 대항하여 벌였던 전투에서도 이미 그 사상이 일어났었다. 그리고 우르반 2세의 호소가 있기 적어도 10년 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7세는 “하느님의 원수 모두를 대항해서 싸우기 위한 밀리티아 크리스티를 구상하였으며 이미 동방에 군대를 파견할 것을 생각하였다”라고 프린스턴 신학교의 카를프리트 프뢸리히는 말한다.

우르반 2세의 조치는 부분적으로 비잔틴 황제 알렉시우스의 원조 요청에 대한 응답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교국의 동쪽 부분과 서쪽 부분 사이의 관계가 개선되고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교황은 또한 분쟁하던 자매 교회들의 재연합이 이 일을 계기로 이루어질 가능성이 있다는 생각으로 고무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그는 클레르몽 공의회를 소집하였으며, 그 공의회에서는 이 “신성한” 거사에 자진적으로 가담하는 사람들이 전대사[全大赦: 죄로 인한 모든 잠벌(暫罰)을 면제하는 일]를 받을 것임을 선언하였다. 반응은 기대 이상으로 적극적이었다. “데우스 볼트”(“하느님이 원하신다”)가 동방과 서방에서 사람들을 규합하는 구호가 되었다.

일련의 군사 원정이 시작되어 두 세기의 대부분을 뒤덮을 정도가 되었다. (24면 네모 참조.) 처음에 이슬람교인들은 침입자들을 비잔틴 사람들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침입자들의 실제 기원을 알게 된 후로, 이슬람교인들은 그들을 프랑크족이라고 불렀는데, 프랑크족은 나중에 프랑스가 그 이름을 따온 게르만 민족이었다. 이 유럽 “야만인들”의 도전에 맞서기 위해서, 이슬람교인들 사이에는 지하드, 즉 성전(聖戰) 혹은 거룩한 투쟁을 지지하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영국 교수 데즈먼드 스튜어트는 이렇게 지적한다. “훈계와 본으로 이슬람 문명의 씨를 심은 학자나 상인 한 사람이 있으면, 이슬람교를 전투에의 부름으로 받아들이는 병사도 한 사람이 있었다.” 12세기 후반 무렵, 이슬람 지도자 누레딘은 시리아 북부와 메소포타미아 상부의 이슬람교인들을 통합하여 하나의 효율적인 군대를 구성하였다. 그러므로 “중세의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의 종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잡은 것처럼, 이슬람교인들은 예언자[마호메트]의 종교를 옹호하기 위하여 무기를 잡았다”라고 스튜어트는 계속 말한다.

물론, 종교의 대의를 옹호하는 것이 언제나 동기를 부여하는 힘이었던 것은 아니다. 「유럽의 탄생」(The Birth of Europe) 책에서 지적하는 바에 의하면, 대부분의 유럽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군은 “명성을 얻거나, 전리품을 모으거나, 새로운 땅을 개척하거나, 여러 나라를 통치하는 것—혹은 단지 화려한 모험을 통해 단조로운 일에서 벗어나는 것—과 같은 물리칠 수 없는 기회를 제공하였다.” 이탈리아의 상인들은 또한 지중해 동부 지역에 무역 전초 기지를 설립할 수 있는 기회를 바라보았다. 그러나 동기에 관련 없이, 모두는 분명 자신의 종교를 위해—그리스도교국의 “정의의” 전쟁이든 이슬람교의 지하드이든 간에—기꺼이 죽고자 하는 것 같았다.

칼이 뜻밖의 결과를 초래하다

「종교 백과사전」은 이렇게 알려 준다. “십자군은 동방의 이슬람교인들을 대항하기 위한 것이었지만, 십자군들의 열심은 십자군들이 모집된 나라들, 다시 말해서 유럽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행사되었다. 십자군들 사이에 흔히 볼 수 있는 동기는 예수의 죽음에 대해 복수한다는 것이었으며, 유대인들이 그 첫 번째 희생자가 되었다. 유대인들에 대한 박해는 1096년에 루앙에서 일어나, 보름스, 마인츠 및 콜로뉴에서 곧바로 대학살이 뒤따랐다.” 이 일은 나치 독일의 대학살 당시에 나타난 반유대주의 정신의 전조에 불과하였다.

십자군은 또한, 1054년에 동방의 미카일 케룰라리우스 총주교와 서방의 훔베르트 추기경이 서로를 파문한 이래로 점증하던 동서간의 긴장을 고조시켰다. 십자군이 점령 도시들에서 그리스 교직자들을 라틴 주교들로 대치하자, 동서간의 분열은 보통 사람들을 자극하기에 이르렀다.

두 교회 사이의 틈은 제 4회 십자군 기간중에 완전히 벌어졌는데, 전임 영국 국교회 캔터베리 참사회원 허버트 와담스에 의하면, 그때 교황 인노켄티우스(이노센트) 3세가 “표리 부동한 농간”을 부렸다고 한다. 한편으로, 교황은 콘스탄티노플에서 자행된 약탈 행위에 대해 분개하였다. (24면 네모 참조.) 교황은 이렇게 기술하였다. “라틴 사람들이 악의 본을 세우고 마귀의 일을 한 탓에, 이미 그리스 사람들이 그들을 개보다 더 미워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가지게 되었는데, 어떻게 그리스 교회가 사도좌(使徒座)에 다시 정성을 바칠 것으로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다른 한편으로, 교황은 그곳에 서방 총대주교 아래 라틴 왕국을 설립함으로써 그 상황을 기꺼이 이용하였다.

두 세기 동안 거의 끊임없는 싸움을 벌인 후에, 비잔틴 제국은 너무 약화되어 오스만 투르크의 맹공격을 견딜 수 없게 되었다. 오스만 투르크는 1453년 5월 29일, 마침내 콘스탄티노플을 점령하였다. 비잔틴 제국은 단지 이슬람의 칼뿐 아니라 로마에 있는 제국의 자매 교회가 휘두른 칼에도 그에 못지 않게 난도질당하였다. 분열된 그리스도교국은 이슬람에게 유럽으로 들어오기에 편리한 기지를 넘겨 주었다.

정치와 박해의 칼

십자군은 종교적 정치적 지도력 면에서 교황의 지위를 강화시켜 주었다. 십자군은 “교황에게 유럽의 외교를 장악할 수 있는 권한을 주었다”라고 역사가 존 H. 먼디는 기술한다. 오래지 않아 “교회는 유럽 최대의 정부가 되어 ·⁠·⁠· 다른 어떤 서방 정부보다도 더 강력한 정치 권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이 권좌에 오르는 일은 서로마 제국이 몰락하면서 가능하게 되었다. 교회는 서방에서 유일하게 연합시키는 힘으로 남아 있었으며, 따라서 당시에도 여전히 강력한 세속 통치자, 비잔틴 황제 아래 있던 동방 교회보다 더 능동적인 정치적 역할을 그 사회에서 수행하기 시작하였다. 서방 교회가 지닌 정치적 탁월함은, 동방 교회가 배척했던 사상인 교황 수위권 주장에 신뢰를 더해 주었다. 동방 교회는 교황이 존중받을 만한 인물이라는 것은 인정하면서도, 교황이 교리나 관할권에 있어서 최종 권위를 가지고 있다는 데에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정치 권력과 빗나간 종교적 확신에 의해 움직이던 로마 가톨릭 교회는 칼로 반대를 제압하려 하기에 이르렀다. 이단을 박멸하는 것이 교회의 본업이 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카를스 대학교 역사 교수인 미로슬라프 로흐와 안나 스키보바는, 이단을 처리하기 위해 고안된 특별 법정인 종교 재판이 어떻게 운영되었는가를 이렇게 묘사한다. “일반 관행과는 반대로, 제보자의 이름을 ·⁠·⁠· 밝히지 않아도 되었다.” 교황 인노켄티우스 4세는 1252년에 고문을 허락하는 내용의 “아드 엑스티르판다”(말살령)라는 대칙서를 발표하였다. “13세기 무렵 이단을 죽이는 데 흔히 사용된 방법인, 화형에는 ·⁠·⁠· 상징적 의미가 있었는데, 그런 종류의 처벌을 가함으로써 교회에 피흘린 죄가 없음을 나타낸 것이다.”

종교 재판관들은 수만명의 사람에게 형벌을 가하였다. 그 밖에도 수천명이 화형을 당하였는데, 그 일은 역사가 윌 듀랜트가 이렇게 논평할 정도였다. “역사가에게 요구되고 그리스도인에게 허용되는 모든 것을 참작해 볼 때, 우리는 종교 재판이 ·⁠·⁠· 인류의 기록 가운데 가장 어두운 오점으로, 어떤 짐승에게서도 찾아볼 수 없는 잔학성을 드러낸 것이라고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종교 재판에서 있었던 일들은 17세기 프랑스의 철학자이자 과학자인 블레즈 파스칼의 말을 생각나게 한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사람은 종교적 확신으로 악을 행할 때만큼 그토록 완벽하고 거리낌없이 악을 행할 수는 결코 없을 것이다.” 사실상, 가인이 아벨을 내리친 이래로, 다른 종교 신념을 가진 사람들을 대항하여 박해의 칼을 휘두르는 것은 거짓 종교의 특징을 이루었다.—창세 4:8.

불일치의 칼에 의해 갈라지다

국가주의적 불화와 정치적 술책으로 인해 1309년에 교황의 거처가 로마에서 아비뇽으로 옮겨졌다. 1377년에 거처가 다시 로마로 회복되기는 했지만, 그 직후 새 교황 우르반 6세를 선출하는 일과 관련하여 한층 더한 분쟁이 초래되었다. 그러나 우르반 6세를 선출했던 똑같은 추기경 집단은 또한 아비뇽에 정착한, 경쟁하는 교황인 클레멘스(클레멘트) 7세를 교황으로 선출하였다. 15세기초에는 사태가 훨씬 더 혼란해졌는데, 그때는 짧은 기간 동안이나마 세명의 교황이 동시에 통치했던 것이다!

서방의 분열 혹은 대분열로 알려진 이 사태는 콘스탄스 공의회에 의해 끝이 났다. 그 공의회는 공의회수위설(公議會首位説)이라는 원칙, 즉 교회의 최종 권위는 교황권에 있는 것이 아니라 전체 공의회에 있다는 이론을 일으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1417년에 그 공의회는 마르티누스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할 수 있었다. 다시 연합되기는 했지만, 교회는 심하게 약화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 상처에도 불구하고, 교황권은 어떤 개혁의 필요성도 인정하려 하지 않았다. 성 블라디미르 정통 신학교의 요한 L. 부얌라에 의하면, 그때 개혁을 못한 것이 “16세기 종교 개혁의 기초를 놓았다”고 한다.

자신의 종교를 실천한 것인가?

그리스도교의 창시자께서는 추종자들에게 제자를 삼으라고 교훈하셨지만, 그렇게 하는 데 물리적 힘을 사용하라고는 말씀하지 않으셨다. 사실 그분은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라고 분명하게 경고하셨다. 마찬가지로, 그분은 추종자들에게 거역하는 태도를 나타내는 사람을 신체적으로 학대하라고 교훈하지 않으셨다. 그리스도인이 지켜야 할 원칙은 “마땅히 주의 종은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을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징계”해야 한다는 것이었다.—마태 26:52; 디모데 후 2:24, 25.

문자적 전쟁의 칼과 더불어 정치와 박해의 상징적 칼에 의존함으로써, 그리스도교국은 자체의 창시자로 받아들인다고 공언하는 분의 지도를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미 불일치로 크게 부서진 그리스도교국은 완전히 몰락할 위험에 처해 있었다. 로마 가톨릭교는 “개혁을 절실히 필요로 하는 종교”였다. 그러면 개혁이 있을 것인가? 만약 있다면, 언제 있을 것인가? 누가 개혁할 것인가? 본지 9월 1일호는 그 점을 더 자세히 알려 줄 것이다.

[24면 네모와 삽화]

그리스도인의 선한 싸움이었는가?

십자군은 그리스도인이 싸워야 한다고 교훈받은 선한 싸움이었는가?—고린도 후 10:3, 4; 디모데 전 1:18.

제 1회 십자군(1096-99년)의 결과로 예루살렘을 다시 점령하고 동방에 네 라틴 국가, 즉 예루살렘 왕국, 에데사 백작령, 안티오크 공국 및 트리폴리 백작령을 설립하게 되었다. 역사가 H. G. 웰스가 인용한 한 권위서는 예루살렘 점령에 관하여 이렇게 알려 준다. “살육은 가공할 만한 것이었다. 피정복민들의 피가 거리에 흘러, 사람들이 말을 탈 때면 피가 튀길 정도에 이르렀다. 밤이 되면 ‘기쁨에 겨운 흐느낌’으로 십자군들은 포도주 틀을 밟는 일을 그치고 성묘(聖墓)로 와서, 피로 물든 두손을 모아 기도했다.”

제 2회 십자군(1147-49년)은 1144년에 시리아의 이슬람교인들에게 에데사 백작령을 빼앗긴 일로 인해 일어났다. 이 십자군은, 이슬람교인들이 그리스도교국의 “이교도”를 쫓아내는 데 성공하면서 끝났다.

제 3회 십자군(1189-92년)은 이슬람교인들이 예루살렘을 다시 장악한 후에 일어났는데, 그 지도자 중 하나는 영국의 “사자왕” 리처드 1세였다. 「종교 백과사전」은 이 십자군이 얼마 안 있어 “마찰, 다툼, 협조 부족을 겪으면서 와해되었다”고 알려 준다.

제 4회 십자군(1202-4년)은 자금 부족 때문에 이집트에서 콘스탄티노플로 방향을 돌렸는데, 비잔틴의 왕위를 노리던 추방된 알렉시우스의 즉위를 도와주는 대가로 물질적 지원을 약속받았다. “[그 결과로] 십자군이 콘스탄티노플에서 자행한 약탈 행위는 동방 정교회가 결코 잊거나 용서하지 못한 일”이라고 알려 주면서, 「종교 백과사전」은 이렇게 부언한다. “분열이 확고하게 고착된 연대를 하나 지적해야 한다면, 가장 적절한 때는—심리적 관점에서 볼 때는 아무래도—1204년일 것이다.”

소년 십자군(1212년)은 독일과 프랑스의 어린이 수천명이 목적지에 도착하기도 전에 죽는 사태를 초래하였다.

제 5회 십자군(1217-21년)은 교황이 주도한 마지막 십자군으로, 지도력의 문제점과 교직자의 간섭 때문에 실패하였다.

제 6회 십자군(1228-29년)은 예전에 교황 그레고리우스 9세가 파문한 적이 있는, 호엔슈타우펜 왕조의 황제 프리드리히 2세가 주도하였다.

제 7회 및 8회 십자군(1248-54년 및 1270-72년)은 프랑스의 루이 9세가 주도하였지만, 그가 북 아프리카에서 사망한 후에 몰락하였다.

[23면 삽화]

독일, 보름스의 유대인 공동 묘지—제 1회 십자군을 생각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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