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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2
깨72 1/8 17-18면

파업으로 고통당하는 ‘스웨덴’

‘스웨덴’ 주재 「깨어라!」 통신원 기

‘스웨덴’은 오랫 동안 산업적 평화를 누려왔다. 미국 정치 분석가 ‘마퀴스 칠드스’는 이것이 ‘스웨덴’의 이른바 중도(中道) 정책 덕분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양 극단의 중간을 택한 방식을 말한다. 그것은 경제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주는 개인 기업을 정부와 연결시키는 방법이다.

하지만, 최근에는 ‘스웨덴’의 이러한 방식이 흔들리고 있다. 과거에는, 그 나라의 노동조합과 고용주협회 사이의 투쟁이 임금 타협으로 타결을 보았다. 법에서 협의 기간을 허용하고 있으며, 그 기간에는 노동자들이 파업을 하지도 못하고, 고용주들이 공장을 폐쇄하지도 못하게 되어 있다. 그러나 현재는 그러한 법이 효과를 미치지 못하고 있다.

산업적 평화가 파괴되다

1969년 말경에 그 문제가 처음 시작되었다. 그것은 ‘스웨덴’ 북부의 철광 산업에서 무모한 파업 형태로 나타났다. 정부도 광부 노조도 그들의 행동을 반대하였으나, ‘로우사바라 키루나바라’(LKAB) 국영 광업소에 고용된 4,800명의 광부들은 작업을 중지하였다. 여론 조사에 의하면, ‘스웨덴’ 노동자들의 절대 다수가 광부들을 지지하였다.

57 노동일(勞動日)간의 파업 끝에 임시적인 합의에 도달하였다. 그러나 비슷한 사건이 계속 뒤를 이었다. 1970년에 비슷한 파업이 127건 있었으며, 22,900명의 노동자가 관계되었고, 155,700 노동일의 손해를 보았다.

파업이 중첩되다

1971년에 들어와서도 사태가 개선되지 않고 악화되었다. 파업이 만연되어 전국이 동요되었다. 파업한 사람들 가운데는, 의사, 수의사, 비행사, 기상학자, 공무원, 심지어 의회 사무원과 그 위원들, 철로 배차계 직원들도 있었다. 그 결과 전국 철도가 정지되고, 따라서 철도 수송에 의존해야만 하는 공장의 노동자들도 일을 쉬게 되었다!

최근에 일어난 일로서, 25,000명의 학교 선생들이 해고되는 사태가 일어났다. 그리하여 700,000여명의 학생들이 선생의 감독을 받지 못하게 되었다. 이 때문에 학생들이 이 투쟁에서 편을 든다는 평을 받지 않고 학교에서나 가정에서, 계속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인가 하는 의문이 생기게 되었다.

많은 학생들이 이러한 입장을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이해할 만하다. 어떤 학생들은, “우리가 수업 일수에 손해를 보아 졸업이 지연된데 대하여 정부가 책임을 져야 한다”고 말하는가 하면, 다른 학생들은, “지금까지도 강의를 하도록 허락되어 있는 선생들의 강의를 우리는 마땅히 거부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가장 심한 위기는 아니었다. 정부의 단체 교섭 위원회는, 육군 장교 연맹 회원 3,500여명이 지정된 조정관들의 제의를 지정된 날자까지 수락하지 않는다면, 전원 해고 조치하겠다고 위협하였다. 그러한 일은 일찌기 들어보지 못한 이야기이다. 이전에 어느 정부가 군대 지휘관들을 그렇게 해고한 예는 한번도 없었다!

그 ‘뉴스’는 ‘유럽’ 전역에 즉시 퍼져나갔다. 최소 10개국의 각종 신문 특파원들이 ‘스톡호름’ 육군 본부를 방문하였다. 그들은 해고당하게 될 장교들을 언제 어디서 만나볼 수 있으며, 사진을 촬영할 수 있을 것인지를 알고 싶어 하였다.

성공을 못 거두는 협상

여러 가지 갈등을 조정하려는 협상은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사실상, 투쟁들은 전에 보지 못하던 것들이었다. 제시된 해결책이 하나씩 하나씩 거절되고 말았다. 여러 가지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중재 위원회도 해결책을 찾아내지 못하는 것같았다. 신문에 보도된 바와 같이, 그 때문에 ‘스웨덴’ 전역이 뒤흔들렸다.

‘스톡호름’의 「스벤스카 다그블라데트」지 1971년 2월 25일자는 다음과 같이 설명하였다. “사회적 이상향에 대한 시민들의 반항이다. ‘스웨덴’의 사회 체제가 북‘유럽’의 가공할 우상으로 변화되지 않도록 하려면, 정부나 노동 조합이 커다란 지혜를 짜내야 할 것이다.”

어떤 조치가 꼭 필요하였다. 파업과 공장 폐쇄의 증가로 전국이 마비될 우려가 있었다. 그리하여, 급격한 조처로서 3월 13일부터 시작하여 6주일간은 모두 파업과 공장 폐쇄를 금지한다는 법안이 제출되었다. 이 기간에는, 임금이나 다른 문제에 대하여 이전의 합의 사항이 그대로 계속되게 되었었다. 그 6주일 내에 해당 단체들이 합의점에 도달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법안이 급속히 의회에 제출되어 절대 다수의 찬성으로 통과되었다.

그런데, 6주일이 끝나도 해당 단체들은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하였다.

최후로 도달한 해결책

6월 중순에 들어 와서야 약 400,000명의 정부 고용인들은 그들의 고용주인 정부의 단체 교섭 위원회와의 사이에 평화를 확립하였다. 그러나 개인 업체들은 약 800,000명의 노동자들이 관련되어 있는 데도, 해결책을 찾지 못하였다.

입장은 악화되었다. 전국 노동조합 연맹은 1971년 6월 24일까지 해결을 보지 못하면, 그 날부터 연쇄적으로 선택적인 파업을 시작하기로 작정하였다. 파업자들 가운데는, 요직에 있는 약 90,000명이 포함될 것이었다. 그 목적은 전국의 산업과 상업을 마비시키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스웨덴’ 고용주 동맹은 공장을 완전 폐쇄하겠다고 노동자에게 위협하였다.

드디어 6월 22일, 7개월여에 걸친 협상 끝에 쌍방이 합의를 보았다. 그들은 중재 위원회가 제시한 해결책에 서명하였다. 그 해결책은 3년간 이상 임금을 27.5‘퍼센트’ 인상하기로 한 것이다. 또한 은급을 높이고, 정년 한도를 67세로부터 65세로 낮추고, 연금과 병급(病給)을 높이는 것도 포함되었다. 그 해결책 때문에 약 60억 ‘크로노르’ 곧 11억 6천만불이 더 지출되게 된다.

장래는 어떠한가?

그러나 해결책에 서명하기 전, 고용주 동맹은 물가 동결 규정의 개정을 요구하여 물가를 상당히 올릴 수 있도록 하였다. 따라서 노동자들이 돈을 더 받기는 하지만, 물가와 세금 역시 오르게 된다. 이렇게 되므로, 임금 상승 효과가 대부분 상쇄되고 만다. 어떤 사람의 추산에 의하면, 노동자들의 실제 이득은 약 2‘퍼센트’에 불과하리라는 것이다.

해결책을 찾았는데도 불만의 소리가 높다. 따라서 사람들은 양편이 이러한 합의를 그대로 고수할 것인가 의아해 하고 있다. 평화는 계속될 것인가? 많은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지나 보아야 알 수 있는 문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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