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이다
‘오스트레일리아’ 주재 「깨어라!」 통신원 취재담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이다. 나의 이름은 ‘와위타’라고 한다. ‘오스트레일리아’에서는 “신 ‘오스트레일리아’인”이라고 부르는 초대 이주자들과 구별하기 위하여 ‘오스트레일리아’에서 태어난 사람들을 “딩컴오시”라고 부른다. 나는 “딩컴오시”이다.
나의 용모는 다른 토착민과 다를 바가 없다. 왜냐하면 우리 토착민의 종족은 여럿이지만 혈통은 같기 때문이다. 우리의 머리형은 긴 편이며 이마는 들어가 있고 눈섭은 불쑥 나와 있다. 우리의 머리털은 고수머리이며, 코는 납작하고, 입은 크며, 이는 희다. 체격은 중간 정도이며, 손발은 길고 가늘다. 피부색은 암갈색이다. 사람들은 우리와 가장 많이 닮은 사람들이 ‘실론’의 야만 ‘베다’족과 인도 고원의 주민들이라고 한다.
나는 수수한 벽돌 집에서 살고 있지만 우리 조상은 이런 식으로 살지 않았다. 다른 면으로도 변하였지만 우리는 이 점에서도 달라졌다. 따라서 우리는 자주 “도보 여행”을 가고 싶어 한다. 강한 충동이 생기면 우리는 우리들의 집을 버려두고 “숲으로 다니며” 우리 조상들처럼 거기서 산다.
이러한 충동이 생기는 이유는 모든 토착민에게 우리 종족의 역사와 초기의 생활 방식을 의미하는 “꿈꾸는 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의 “꿈꾸는 시절”에 대한 향수는 타고 나는 것같다. ‘캡틴 쿡’이 ‘보타니’ 만에 상륙하기 전에 우리 조상들은 지금과 전혀 다른 생활 즉 고되면서도 자유분방한 생활을 즐기고 있었다. 우리 종족과 다른 종족은 상호 협정에 의하여 널리 인정받는 영토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다. 경계가 있었지만 성벽이나 문으로 막지는 않았다. 각 종족의 영토 안에는 ‘프랑스’ 영토 내의 ‘파리’나 영국 영토 내의 ‘런던’과 같은 “거룩한” 지역이 있었다.
우리는 모든 추억이 즐겁기만 하지는 않다. 무서운 만행에 대한 추억도 있다. ‘유럽’인들이 정착하게 되자 그들은 우리의 영토 소유권을 무시하고 우리를 전멸시키려 하였다. 점차적으로 우리는 우리의 고토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낮아졌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심지어 최근까지도 즉, ‘오스트레일리아’가 집단 대학살 문제로 ‘히틀러’와 전쟁을 하고 있던 1942년에도 서‘오스트레일리아’의 한 하원 의원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원주민과 ‘캉가루’가 없어질 때 서‘오스트레일리아’와 ‘오스트레일리아’에 행복한 날이 이를 것이다. ··· 이 문제에 대처하기 위하여 감상적인 생각은 뿌리째 뽑아야 한다. 과감하고 적극적인 행동을 취할 때는 왔다.”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우리는 좀 더 행복한 시절을 보냈다. 우리는 우리의 땅을 사랑했고, 소중히 돌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방식대로 그렇게 하였다. 예를 들면 우리는 소나 ‘캉가루’의 울타리를 두르지 않았다. 우리에게는 ‘트랙터’나 쟁기가 없었다. 우리의 방식이 우리의 필요에는 더 알맞았던 것이다.
자연에 관한 풍부한 지식
우리는 영토 전역을 다니면서 저절로 자란 것을 거두어 들였고, 어떤 종족은 그렇게 하면서 흩어졌다. 우리는 항상 한 지역을 다시 방문할 때를 생각하였다. 우리가 다음에 다시 방문하였을 때에 필요한 것을 보존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사였다. 우리는 물이 있는 나무에 구멍을 내어 수액을 받았지만 그 후에 조심스럽게 구멍을 막았다. 우리는 물구덩이를 팠지만, 그 다음에 모래로 덮어 증발을 막았다. 우리는 먹기 위하여 짐승을 잡았지만 결코 새끼와 함께 잡지는 않았다. 우리는 가오리를 잡았지만 번식기에는 잡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의 이러한 특수한 생활 방식으로 우리의 땅을 보살폈다. 우리는 오늘날처럼 농작물을 다량으로 수확하지는 않았지만 우리가 획득한 것은 영양가가 높고 항상 싱싱한 것이었다.
우리의 방법의 성공 여부는 상당한 지식과 기술에 달려 있었다. 우리의 생사 문제는 자연에 대한 풍부한 지식을 우리의 생각에 저장하는 데 달려 있었다. 이 점에 대하여 ‘에이. 피. 엘킨’ 저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이라는 책의 설명을 보라. “토착민에게 있어서 자연은 자연계의 생물과 자연 현상이 공간과 시간에 있어서 연결된 혹은 관련된 체제이다. 하나의 물체가 나타나면, 예로서 ··· 새나 꽃이나 곤충이 보이면, 그것이 여러 세기를 통하여 내려온 관찰의 결과로 비가 오겠다는 징조, 고기가 놀고 있다는 징조, 어떤 특수한 동물이나 파충류의 동물이 많아지겠다는 징조, 마나 낙화생을 캘 때가 되었다는 징조, 혹은 어떤 종류의 열매가 익었다는 징조가 되었다. ··· ‘아카시아’ 나무의 노란 꽃은 ‘맥파이’ 거위 떼가 매년 다니는 같은 길로 날아서 거대한 ‘페이퍼바크’ 나무들을 지나 늪에서 늪으로 다니며 수련의 괴경을 먹을 것이라는 징조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몇몇 나무 가지에 대를 만들어 놓고 기다리면서 거위의 울음소리를 흉내낸다. 그러면 거위는 나무 주위를 돌면서 내려앉는다. 그러나 거위들이 내려 앉자마자 나무 밑에 있던 남자들이 잘 겨냥하여 재빨리 던진 몽둥이에 맞고 땅에 떨어진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기술 중 많은 것이 지금은 없어졌다. 경찰관들이 아직도 숲속에서 실종된 사람을 추적하는 데 토착민을 기용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노련한 추적자들이 급속도로 줄어 들고 있다. 그러나 지난 날 우리의 조상들은 그러한 노련한 기술에 의존하여 살았다. 소년들은 유년기에서부터 땅을 정밀하게 조사하고, 마치 나의 아들이 지금 교과서를 줄줄 읽는 것처럼 쉽게, 그 땅에 있었던 일을 판독하는 방법을 배웠다. 어른이 되면 우리는 어떠한 땅을 보아도, 심지어 딱딱한 바위를 보아도, 그곳을 어떠한 사람이나 어떠한 동물이 혹은 어떠한 파충류가 지나갔는지 언제 지나갔는지 등의 내력을 알 수 있었다. 우리는 그 발자국을 며칠 동안 따라 갈 수 있었다. 그가 남긴 발자국을 보고—전부터 우리가 그를 알든지 모르든지 간에—우리는 그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 수 있었다. 즉 그는 키가 큰 사람인지 작은 사람인지, 뚱뚱한 사람인지 훌쭉한 사람인지, 남자인지 여자인지, 아픈 사람인지 건강한 사람인지, 백인인지 토착민인지 알 수 있었다. 발자국을 따라 가면서 우리는 그가 길에 남겨둔 이야기를 알아 들을 수 있었다.
추적하는 데는 상당한 인내와 참을성이 요구된다. 어떤 때는 온종일 하나의 동물을 추적하고 밤이 되면 잔다. 이튿날 다시 추적하여 마침내 목적물을 발견한다. 만일 우리의 부주의로 그 동물이 우리가 가까이 있음을 눈치채고 펄쩍 뛰어 도망하면 마침내 창으로 찌를 수 있는 거리에 육박할 때까지 우리는 똑 같은 일을 다시 해야 한다. 당신은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물이 없는 숲 속에서 노련한 기술이 아니면 죽을 뻔한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신문에서 자주 볼 수 있다.
“숲”으로 다니는 일
나는 “물이 없는” 숲이라는 말을 하였지만 그것은 신 ‘오스트레일리아’인에게만 적용되는 말이다. 우리 토착민들은 물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며 또한 물을 찾아내는 방법을 알고 있다. 그것이 꿈꾸는 시절의 기술 중 하나이다. 당신은 나와 함께 “도보 여행”을 하면서 나의 그 솜씨를 구경하지 않겠는가? 저기 갈색 풀 사이에 초록색이 보이지 않는가? 나는 땅파는 막대기를 가지고 저기에서 물을 모을 수 있다. 내가 이 나무에 구멍을 뚫으면 물이 흘러 나올 것이다. 햇빛에 마른 저 진흙밑에 물을 저장하고 있는 개구리들이 있다. 이 ‘유우칼리’나무 뿌리를 누르면 물이 나온다. 저기 마른 평지를 깊이 파면 물이 있다. 그러므로 방법만 알면 이 메마른 곳에서도 물을 얼마든지 구할 수 있다.
사실 음식도 음료도 있지만 어디에 있는지 알아야 한다. 현대의 한 인류 학자는 한 작은 곳에 사는 토착민들의 식품이 열 여덟가지의 포유 동물과 유대 동물, 열 아홉가지의 새, 열 한가지의 파충류 동물, 여섯가지의 물근원, 열 일곱가지의 열매, 세가지의 채소, 열가지의 과일, 그리고 많은 수중 식물과 버섯과 알들이라고 하였다. 우리가 좋아하는 식품과 요리 방법이 당신의 구미에 들지 않을지 모른다. 사람들이 말하듯이 맛이 다르다. 피곤하고 긴 하루의 여행과 사냥을 마치고 모래나 진흙 화덕에서 서서히 구워지는 연한 ‘캉가루’와 살찐 도마뱀을 금방 따온 딸기와 푸른 잎과 골고루 갖춘 열매와 함께 먹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참으로 맛이 있다! 더욱 중요한 점이지만, 우리의 정력적인 활동에 필수적인 영양분이 이러한 식품에 들어 있다.
“도보 여행”을 할 때 우리에게는 집이 필요치 않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기후에서는 집이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사실 집 때문에 한 곳에 머물러 있으면 음식과 물이 곧 고갈되기 때문에 집이 있으면 불리하다. 우리는 천막도 가지고 다니지 않는다. 수렵생활을 하려면 짐이 가벼워야 한다. 그러므로 필수품—여자들이 가지고 다니는 물자루, 점화 막대기, 연장—을 제외하고는 남자들이 창과 ‘부머랭’만을 가지고 다닐 뿐이다.
종족이 여행할 때는 일정한 양식에 따라 행진한다. 남자들은 선두에서 넓게 퍼져 새로운 추적물을 살피며 간다. 그리고 여자들과 자녀들과 노인들이 훨씬 뒤에서 따라 온다. 모두는 완전한 침묵을 지킨다. 놀랍게도 걸음마타는 어린애들도 마른 나무가지나 마른 잎을 밟지 않고 휘파람을 불지 않는다. 한번 소리를 냈다가는 저녁을 굶는다는 것을 생각해 보라. 우리는 잘 발전된 손짓으로 대화한다. 사실 기본 단어에 대하여 모든 종족에게 공통된 손짓이 있다. 당신은 다른 언어를 쓰는 사람과 대화할 수 있는가?
여행은 항상 낮에만 하는 것은 아니다. 몸의 수분을 보존하고 밤에 활동하는 ‘캉가루’를 잡기 위하여 밤에 여행하기도 한다. 야영할 때가 되면 밤의 찬 바람과 낮의 뜨거운 태양을 막기 위하여 잠간 동안에 나무 가지로 “집”을 세운다. 모닥불을 피워놓으면 가정이 되는 것이다.
불을 피우는 일에 대하여 이제 설명하겠다. 우리는 여행하면서 점화 막대기에 습기가 차지 않도록 세심한 주의를 한다. 보다시피 이 막대기는 끝이 뾰족한 연필처럼 생겼고 이 널빤지는 타서 검어진 구멍이 여러 개 뚫려있다. 자, 구경해 보라. 나는 “연필” 끝을 한 구멍에 넣고 두 손바닥으로 꽉 쥐고 재빨리 돌린다. 얼마나 빨리 부싯깃이 타기 시작하는가 보라. 불티가 튀어서 이 마른 부싯깃에 떨어지게 하고 가볍게 불어 본다. 자, 나는 불을 일으켰다. 거의 당신이 성냥을 한번 긋는것만큼 빨리 불을 붙였다! 당신은 우리와 함께 저녁 식사를 하지 않겠는가? 우리는 오리와 곤충의 살찐 유충, ‘에뮤’새 알, 식용 뿌리를 먹고 끝으로 아이들이 따온 장과를 먹을 것이다.
‘부머랭’
당신은 우리가 어떻게 오리를 잡았는지 궁금한가? 이제 설명하겠다. 그러나 먼저 우리의 사냥 무기와 방법을 소개할 필요가 있다. ‘부머랭’으로부터 시작하겠다. 당신은 ‘부머랭’이 얼마나 정밀한 도구인지 생각해 본 일이 있는가? 어느 총포공도 우리가 ‘부머랭’을 만드는 것보다 더 솜씨있게 구경을 만들지 못했다. 칼날의 상대적인 길이와 구부린 각도, ‘프로펠러’ 같은 끈, 표면의 볼록 ‘렌즈’—어느 하나라도 잘못 만들면 ‘부머랭’은 못쓴다. 「오스트레일리아 백과 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수학자들은 귀환 ‘부머랭’의 모양을—크기, 끈, 둘레의 비율에 있어서—조금만 변경시켜도 방정식으로 증명할 수 있는 ‘부머랭’의 나르는 방법이 그에 상응하여 달라진다는 것을 밝혔다.”
당신은 아마, 우리에게 제도판이나 정밀 도구가 없는데 어떻게 그러한 정밀한 무기를 만드는지 궁금할 것이다. 말하자면 어려서부터 배운 설계도가 우리 머리 안에 있다. 우리가 그것을 만드는 데 쓰는 도구는 동물의 이로 만든 끌, ‘툴라’ 즉 볼록 ‘렌즈’ 역할을 하는 언저리를 가진 석영에서 떼어낸 새기는 도구, 반드럽게 하기 위한 부싯돌 조각과 돌뿐이다. 그러나 완성품은 엄밀하게 균형 잡혀 있고 아름답게 광을 낸다! 당신은 ‘부머랭’을 만들 수 있겠는가? 던질 수 있겠는가?
당신은 두 종류의 ‘부머랭’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는가? 귀환 ‘부머랭’은 사냥감을 공격하는데 사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아는가? 사냥감을 잡는 데는 두번째 유형인 던지는 몽둥이만을 사용한다. 이것 역시 아주 정교하게 만들어졌으며 모양은 비슷하지만 칼날이 수평면에 있어서 소리를 내지 않는다. 만일 소리가 난다면 풀을 뜯던 ‘캉가루’가 그것이 날아오는 소리를 들을 것이다. 나르는 속도가 어찌 빠른지 180‘미터’까지 유효한 치사무기이다. 귀환 ‘부머랭’은 경쟁적인 운동에서나 단 한번의 사냥을 목적으로—만찬용 꾀많은 오리를 잡기 위하여—사용할 뿐이다.
이 영리한 새는 보초를 세워두고 먹기 때문에 전략이 필요하다. 여러 명의 사냥군이 퍼져서 조심조심 물가로 기어간다. 물가에서 한 사람이 귀환 ‘부머랭’을 물위로 던진다. 회전하는 칼날 소리가 사냥하는 매의 날개치는 소리와 비슷하다. 비상소리에 깜짝놀라 오리들이 날아오른다. 그러면 던지는 몽둥이의 쉬운 목표가 된다. 이와 같은 방법으로 우리는 오늘 저녁 식사를 위한 오리를 잡았다.
우리가 ‘부머랭’을 설계하고 만드는 재능은 다른 나라의 관심을 모아 왔지만 그것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많은 기술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우리는 우리의 머릿 속에 자연에 대한 광범위한 지식을 저장하였다. 우리는 동물의 습관을 알고 있고, 그들의 울음 소리를 알고 흉내내며, 바람의 방향을 예측하고, 고기잡이용 작살을 만들고 던지며, 가죽이나 나무로 방수 물자루를 만들고, 석영 창을 조각조각 떨어뜨려 톱니를 만들고, 고기 올가미를 만들고, 뗏목을 만들고, 통나무 배를 판다. 우리는 우리의 체취를 진흙으로 감추고 나무 가지로 우리를 위장할 수 있으며, 사냥감이 우리의 기동을 알아차리면 우리는 순간적으로 얼어버린듯이 몸을 굳힌다.
진화의 산물이 아님
당신은 내가 우리의 재능을 들춰내는 이유가 무엇인지 의아하게 생각하는가? 내가 자랑을 늘어놓고 있다고 오해하지 말라. 이렇게 하는 이유는, 우리 ‘오스트레일리아’ 토착민이 일종의 “중간 동물”의 잔존물이라는 무신론적 진화론과 관련된 현대의 이론이 있기 때문이다. 당신은 동물의 본능을 겨우 벗어나 인간과 짐승의 중간쯤 되어 보이는 혈거인의 상상화를 본 일이 있을 것이다. 그러한 혈거인은 거짓된 과학서내에나 존재하지 실제로는 결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우리 토착민이 집을 짓지 않고 동굴에서 살며, 기계를 사용하지 않기 때문에 그러한 사람들은 우리가 그러한 혈거인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증명하려고 덤빈다. 당황하였느냐고? 물론 우리는 당황하였다!
내가 말하려는 요지는 이것이다. 가장 뒤떨어진 사람들과 가장 진보한 사람들과의 차이는 기회에 있다. 인쇄기의 덕분으로 다른 민족은 도서관에 방대한 지식을 저장하였지만 우리는 단지 머리 속에 저장하였을 뿐이다. 기계 공학이 발달하였다고 하여 그러한 민족이 더 고등 형태로 진화하였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착각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들의 지식을 따라갈 수 없지만, 그들은 우리의 지식에 필적하는가? 그 사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점 즉 사람들의 여러 가지 재능이 여러 가지 분야의 문을 열어서 각기 그들의 필요에 맞게 되었다는 점을 설명한다.
몇년 전에 이런 기사가 난 일이 있다. 식인종이 버린 어느 ‘아프리카’ 소녀를 미국 사람들이 구출하여 미국에서 교육을 시켰다. 대학교에서 그 소녀는 그의 동급생들과 어깨를 겨루어 그들을 능가하기까지 하였다. 중요한 것은 출생지가 아니라 기회이다.
언어의 복잡성으로 그 민족을 측정할 수 있다는 말이 있다. 이제 우리의 언어를 살펴 보자. 현재 500가지 언어가 있지만 단일 기원에서 나왔다. 나는 우리가 아직도 손짓으로 대화를 한다고 말한 바 있지만, 우리의 구어는 아주 복잡하다. 문법, 어순, 어휘가 모두 다양하다. 영어에서는 명사의 격이 여섯 가지지만, 우리의 어떤 언어에는 아홉 가지가 있다. ‘프랑스’어에는 성이 두 가지가 있지만 우리의 다른 언어에는 성이 세 가지가 있다. 영어에서는 동사를 여섯 가지로 활용하지만 우리는 열한 가지로 활용한다.
우리의 사회 제도
우리가 구축한 문화와 문명 또한 존경의 대상이 되지 않는가? 각 종족의 영토가 경계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것이 종족간의 유대를 방해하지 않았다. 가뭄으로 고통을 겪을 때에는 물과 음식을 나눌 필요가 있었다. 사절 신분의 표시로 일종의 ‘토템’ 기둥을 휴대한 사절들에 의하여 외교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 기둥을 휴대한 사람은 다른 영토로 자유로이 통행할 수 있었으며 그리하여 신부 교환이나 물이나 음식을 위한 안전 출입 등을 협의하였다. 그리하여 우호관계가 확보되었다.
각 종족 내의 사회 제도로 역시 잘 짜여져 있었다. 행정권은 족장에게 주어지기도 하였고 원로회에 부여되기도 하였다. 몇몇 종족은 옷을 입고 다니지 않았지만 도덕률은 엄격하였다. 간부와 그의 애인을 누구라도 창으로 찌를 수 있는 권한이 있었다. 아동들의 교육은 어려서부터 실시되었다. 딸들에게는 곤충과 도마뱀을 추적하여 모으고 요리하는 법을 가르쳤고, 아들들에게는 추적, 사냥, 도구를 만들고 사용하는 법을 가르쳤고 종족법과 종족간의 법을 외우도록 가르쳤다.
당신은 다른 데 정신을 팔고 있다! 저 소리가 당신의 정신을 다른 곳으로 쏠리게 하지 않는가? 저 소리는 곧 시작될 오늘 밤의 ‘코로보리’ 춤을 위하여 ‘디저리두’를 연습하고 있는 소리이다. 가서 구경해 보자.
바로 이 ‘코로보리’ 춤에서 우리의 많은 꿈이 종족의 정신에 새겨졌다. 왜냐하면 이 때에 법과 관습과 사냥 방법을 실연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지금 시작하는 춤은 사냥에 대한 교훈이다. 저 사람들이 얼마나 능란하게 ‘캉가루’를 흉내내는가 보라. 그리고 저 쪽의 다른 사람들은 그들에게 살그머니 접근하는 사냥군들이다. 새소리와 동물의 울음소리 흉내를 춤 가운데 삽입한다. 아이들이 얼마나 열심히 보고 배우는가 보라. 이제 그들은 모든 다른 인류를 멸망시킨 홍수에서도 이 종족이 어떻게 구출받았는지의 역사를 이야기하고 있다. 최근 사건도 이 ‘코로보리’ 춤에 혼합한다. 보라, 이제 그들은 그들이 목격한 바 있는 영화 제작을 묘사하고 있다. 각 춤은 어떤 연극, 비극 혹은 희극을 연출한다. 그러나 항상 그러한 연극은 종족의 역사에 뿌리를 박은 것들이다.
어떻게 오늘에 이르게 되었는가?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성서를 선사하였을 때 당신이 방금 춤에서 본 홍수 이야기가 성서에도 나온다는 것을 알고 놀랐다. 그리하여 나는 어떻게 우리 토착민이 저 멀리 ‘시날’ 평야에서 ‘오스트레일리아’까지 오게 되었는가 궁금히 여기게 되었다. 내가 읽은 바로는 아무도 진정으로 아는 것 같지 않았다. 백 사람이면 백 사람 다 추측하는 바가 다른 것같다! 그러나 어떤 사실이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도움이 된다. 즉, 우리는 흑인종이 아니라 ‘아리안’족이며, 우리가 북쪽에서 왔다는 사실이다.
아마 섬에서 섬으로 건너서 우리의 조상들은 ‘오스트레일리아’ 해안에 상륙하여 대륙 전역에 퍼졌으며, 그들이 정착한 지역에 적응하여 점차 여러 종족으로 나뉘어지고 지방적 특색이 있는 관습이 생겼으며 기본 언어에 다양성이 생기고 상호 경계와 영토가 생긴 것 같다. 그들이 가지고 온 지식과 기술을 그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시켰고 그리하여 시간과 필요에 따라 그들의 지식과 기술이 증가하였다. 그들은 이 메마른 땅에서 생존의 놀라운 솜씨를 보였다. 그들은 다른 나라의 사람들에게 흐른 전반적인 지식의 흐름과 격리되어 있었기 때문에 특수 환경에 의하여 조성된 그들의 생활 형태는 1770년에 상륙한 최초의 ‘유럽’인 정착자들에게 기이하게 보였다.
전혀 다른 두 문명이 이제 충돌하였다. 새로운 주민들은 우리의 영토 경계와 우리의 땅을 돌보는 방법을 몰랐기 때문에 이 땅에 사람이 살지 않는줄 생각하고 이 땅을 개척하기 시작하였다. 처음에 우리는 관용을 보였지만 전쟁이 불가피하였다. 소총과 창이 대결하였다. 조금씩 조금씩 우리의 땅은 새로운 주민들에게 점령되었고 우리 토착민들은 조금 밖에 남지 않았다. 우리의 삼림이 도끼와 불과 ‘불도저’에 사라져 가는 것을 우리는 보았다. 우리는 야생 동물이 멸종 혹은 멸종 직전에 이르는 것을 목격하였다. 땅파는 막대기와 ‘트랙터’가 충돌하여 ‘트랙터’가 이겼다.
전보다 나아졌는가? 많은 땅이 먼지 소굴이 되었다. 표토는 바다로 들어간다. 강물은 더러워졌다. 살충제가 곤충과 새와 동물을 침해하였으며 이제 사람까지도 위협하고 있다. 토착민이 특별 보류지에 살듯이 여러 종류의 희귀한 새와 짐승이, 크기와 수효가 급속도로 감소하는 산골짝에서만 목숨을 지탱하고 있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광대하고 황량한 내륙 지방에서만 소수의 토착민들이 꿈꾸는 시절을 보내고 있다. 최근(1957년)에 ‘멜버른’의 한 신문 기자가 ‘앨리스 스프링스’에서 서쪽으로 960‘킬로미터’ 떨어진 ‘깁슨’ 사막에서 ‘핀투비’족의 한 사람을 만났다. 그는, 그들이 이전에 백인을 본 일이 없으며, 돈도, 물고기도, 밀가루도 본 일이 없다는 것 그리고 그들은 길들인 들개로 사냥을 한다는 것, 설치류 동물과 도마뱀을 먹는다는 것, 벗고 다닌다는 것, 목욕을 결코 않는다는 것, 그리고 가벼운 휘파람으로만 이야기한다는 것 등을 보고하였다.
내가 그들과 함께 살고 싶은 간절한 욕망을 가지고 있느냐고? 그렇지 않다! 나는 한때 그랬지만 지금은 우리의 꿈꾸는 시절로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 나는 근년에 와서 성서를 통하여 인류의 임박한 장래를 알게 되었고 지구 전체가 새로운 ‘에덴’으로 바뀐다는 것을 배웠다. 이러한 것은 우리의 “꿈”에 없었다. 이제 나는 과거 대신에 장래를 동경하며, 장차 ‘오스트레일리아’를 경작하는 데 참여하고 현재의 사막에 물이 흐르는 것을 보며 우리의 조상들이 부활되어 돌아 올 때에 살기를 원하며, 조상들의 “꿈”에 여호와의 왕국에 대한 즐거운 지식을 추가해 주는 특권이 나에게 허용되기를 원하며 그들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우리의 경치 좋은 땅을 낙원의 일부로 가꾸는 데 가담하도록 격려하기를 열망한다.
[18면 삽화]
점화 막대기의 사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