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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가톨릭’ 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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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가톨릭’ 수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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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가톨릭’ 수녀였다

‘벨기에’ 주재 「깨어라!」 통신원 취재담

“나는 수녀가 되어서 영원히 예수님의 소유가 되어야지. 그분만이 내 생활의 전부야.” 일곱살 된 어린 소녀가 그러한 결정을 내린 것은 1916년 성찬식에 참여한 후 어느 날이었다.

내가 바로 그 소녀였다. 1909년 8월 28일에 ‘벨기에’의 ‘네우프샤토’의 독실한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나는 어려서부터 그러한 욕망을 품고 있었다.

그것을 나의 이상으로 삼았기 때문에 나는 기도드리는 것이 즐거웠고 작은 희생을 하고 다른 사람들을 섬기는 것을 좋아하였다. 나는 ‘네우프샤토’ 교회에서 기도하는 데 여러 시간을 보냈다! 매일 저녁 교회 종소리만 들리면 몇명의 교구민들과 사제의 인도에 따라 묵주 신공을 암송하였다.

사실 그때에 나는 하루에 열한가지나 되는 묵주 신공을 암송하였다! ‘미사’와 성찬식이 나의 매일의 행사였다. 그러나 방학 때에는 하루에도 대여섯번의 ‘미사’에 참석하였고 그 다음에 장기간의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

사범 교육 2학년을 마친 여름 방학 중에 나는 명상의 시간을 갖기 위하여 어느날 오후에 ‘네우프샤토’ 숲으로 갔다. 나는 아직도 그곳 풀밭에 누워 ‘리시욱스’의 「젊은 ‘테레사’의 생애」라는 책을 재독하던 나의 모습을 그릴 수 있다. 나는 ‘테레사’가 예수님에 대한 깊은 사랑을 표현하였다고 믿었기 때문에 ‘테레사’와 같이 되고 싶었다. 나는 어떠한 희생이 따르더라도 헌신적인 수녀가 되어 예수님의 사랑받는 아내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1926년 8월 어느날 무릎을 꿇고 팔을 십자가에 달린 사람처럼 벌리고 여러 시간 동안 기도를 드린 후에 나는 부모님이 집에 돌아오기를 기다렸다. 부모님이 돌아오자마자 나는 나의 결심을 이야기하였다. “아버지, 저는 아버지를 슬프게 해 드리고 싶은 마음은 없어요.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저를 수녀원으로 부르셨어요” 하고 말하였다. “너는 아직 어리다. 너의 앞길에 대하여 주의 깊이 생각해야 돼” 하고 아버지는 말씀하셨다. 나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아버지, 저는 그 문제에 대하여 십년 이상 생각해 왔어요.” 한참 동안 이야기한 끝에 아버지는 결국 이렇게 말씀하셨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내가 너의 길을 방해하지 않겠다. 네 뜻대로 해도 좋다.”

집에서 떠나다

사제는 ‘데임스 루이스 수녀원’으로 편지 문의를 하였다. 나는 ‘루바인’에 와서 면담하라는 초대를 받았다. 1926년 9월 5일 어머니와 함께 나는 그곳으로 갔다. 우리를 맞아준 분은 창립자 ‘루이스’ 여사였다. 그는 병석에 있으면서도 명랑하고 유쾌하고 친절하였다.

어머니는 내가 2년을 더 있어야 졸업을 하는데 학교를 마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느냐고 말하자 창립자는 “아닙니다. 즉시 들어와야 합니다. 우리가 책임지고 따님이 학업을 마치도록 하겠읍니다” 하고 말하였다. 이런 말을 하기는 안됐지만,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입원 날짜는 1926년 9월 16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그날은 우리가 ‘루르데스’에 다녀오기로 이미 정한 날이었으므로 어머니는 이렇게 질문하였다. “‘루르데스’에 다녀올 수 있도록 날짜를 연기해 주실 수 없읍니까?” “안됩니다. 댁의 따님은 이 수녀원에 들어오든지 ‘루르데스’로 가든지 한 가지를 택해야 합니다” 하는 것이 대답이였다. 나는 “수녀원에 들어가겠읍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드디어 눈물을 머금고 가족과 헤어질 날이 왔다. 아버지가 나를 ‘에제링겐’의 ‘샤토우’로 데려다 주셨다. 거기에서 지망생(수녀 후보생)들이 6개월간의 시험 기간을 거쳐야 하였다. 아버지와 작별하고 나는 다른 스무명의 소녀와 동시에 지망생의 어깨 ‘망토’를 입고 머리덥개를 썼다. 그리하여 나는 성 ‘오거스틴’의 교단 수녀 선교사의 지망생이 되었다. 나는 참으로 행복감을 느겼다.

수녀가 되기 위한 준비

지망생 시절에는 엄격하기 짝이 없는 침묵을 지키는 것이 우리에게 요구되었다. 아프거나 문제가 있어도 우리는 그저 참거나 단지 선생(여선생)에게만 이야기할 수 있었다. 이처럼 침묵이 강요되었기 때문에 우리들 사이에 사랑이 고무되지 아니하였다.

나의 개인 소지품을 모두 버리라고 요구하는 선생과 면담할 때 부끄러워 어쩔 줄 몰랐다. 나는 어릴 때의 습관처럼 이해하여 줄 것으로 기대하고 무조건 선생을 허물없이 신뢰하였다. 그가 간단히 이렇게 말하였을 때 나는 크게 실망하였다. “참회의 의미로 너는 점심 식사가 시작될 때에 네 팔을 십자가에 달린 것처럼 벌려야 한다.” 그때부터 나는 더 이상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어느 일요일 어머니가 면회를 왔다. 면회실에서 나는 꾸밈없고 명랑한 원래의 나 자신으로 변하였다. 이것을 보고 선생은 놀라서 어머니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부인, 댁의 따님은 면회실에 오더니 아주 달라졌군요. 여기서는 이렇게 즐겁고 유쾌한데 평상시에는 아주 심각하고 조용합니다.” 사실 참으로 대조적이었다. 그러나 왜 그랬는가? 왜냐하면 그곳의 생활이 내가 기대한 생활과 달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는 예수께 비교하면 너무 어려울 것이 없으며 내가 여기에 온 것은 그의 아내가 되기 위한 것이라는 생각으로 나 자신을 위로하였다. 그러므로 나는 말없이 참았다. 나는 미래의 수녀로서 참아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한걸음 내딛은 이상 뒤돌아 볼 필요가 없다고 믿었다.

6개월이라는 지망생 시험 기간이 끝났을 때에 지망생들은 일년간의 수도 기간(서원을 하기 전의 수습 기간)을 갖기 위하여 ‘루비안’으로 가지 않으면 안되었다. 수녀가 되는 의식에 앞서서 일주일간의 묵상 기간이 있었다. 수녀복을 입고 흰 ‘베일’을 쓰고, 우리는 교회당으로 행렬을 지어 갔다.

어려움은 증가하다

지망생 시험 기간 중에 있었던 어려움이 다시 나타나고 심지어 더욱 심한 어려움이 기다리고 있었다. 이곳의 여선생은 이전의 여선생과 마찬가지로 신뢰감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나는 그를 무서워하였고 더욱 더 내향적인 사람이 되었다. 매일 나는 정신적 고통을 당하였다. 나는 얼마나 많이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수요일과 금요일에는 5분간의 자기 징계의 시간이었다. 이 시간에 우리는 매듭이 있는 작은 끈으로 만든 채찍을 받았으며 나는 이 채찍으로 나 자신을 때려서 참으로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하는 날 점심 식사시에 우리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수프’를 마셨다.

매주 금요일에 각자는 차례로 식당 입구에서 무릎을 꿇고 수녀원에 있는 모든 수녀의 발에 입을 맞추어야 하였다. 매주 토요일에 우리는 우리의 약점을 이야기하기 위하여 함께 모였다. 수녀들이 모두 순서에 따라 무릎을 꿇고 큰 소리로 범한 외부적인 잘못을 고백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매일 우리는 팔을 십자가에 달린 것처럽 벌리고 “천주경”과 “아베 마리아 기도”를 각각 다섯번씩 반복하여야 하였다. 우리는 매 식사시에 적어도 한 가지 금욕을 하여야 한다는 충고를 받았다. 그리고 매달 묵상 시간에 우리는 여교사에게 보고해야 하고 ‘핀’과 단추, 형상 등등 사소한 것들을 사용할 허락을 받아야 하였다. 우리의 일거 일동은 엄격한 제재를 받았으며 심지어는 이유가 어떠하든지 간에 식당이나 작업장 혹은 교회당을 떠날 때에도 마음대로 할 수가 없었다. 손을 모으고 “나가도록 허락해 주시겠읍니까?” 하고 말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교회당에서는 간단한 몸짓으로 충분하였다.

늦을 때에는 언제나 수녀원장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손을 모으고 용서를 구하여야 하였다. 저녁 기도를 마치고 교회당을 떠나기 전에 우리는 수녀원장 앞에 가서 각자 순서대로 무릎을 꿇었다. 수녀원장은 이마에 작은 십자가를 긋고 “예수와 ‘마리아’와 ‘요셉’께서 축복하시기를 기원하노라” 하고 말하였다.

그 날이 오다

마침내 오래동안 기다리던 1928년 3월 29일이 되었다. 그 날은 나의 수습 기간이 끝나고 드디어 내가 예수의 아내가 되는 날이었다!

“당신은 당신의 자유 의지로 그리스도의 아내가 되고자 하는가?” 하는 등의 몇가지 질문에 “예”라고 대답한 후에 나는 제단 앞에서 서원을 하도록 불리웠다. 나는 “전능하신 하나님 앞과 성모 ‘마리아’ 및 우리의 교부 성 ‘오거스틴’ 앞에서, 성 ‘오거스틴’의 종규와 우리 교단의 규약에 따라서 청빈과 동정과 순종의 생활을 하기로, 그것도 3년 동안 그렇게 하기로” 약속한다고 서원하였다.

그렇게 한 후에 나는 제단의 남쪽으로 가서 거기에서 나의 선언을 확증하는 등록부에 서명하였다. 그래서 나는 열 아홉살이 되기 전에 성 ‘오거스틴’의 교단 수녀 선교회의 한 성원이 되었다. 그때에 사제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 서원은 당신의 유일한 위안이 될 것입니다. 그것은 죽을 때까지 유효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과 우리와의 결합을 상징하는 금반지를 우리 오른손 반지 손가락에 끼워 주었다.

같은 의식에 참여한 다른 수녀들과 함께 나는 세상에 대하여 죽은 것으로 간주되었다. 이러한 죽음을 상징하기 위하여 우리는 지정된 곳으로 가서 무릎을 꿇고 매장된 것처럼 관덮개 밑에 얼굴을 대고 있었다. 성가대가 노래를 부르고 ‘라틴’어로 “일어나”라는 말이 들렸을 때에 관덮개가 걷히었다. 우리는 일어서서 우리 자리로 돌아왔다. 그리고 성가대가 부활의 찬송가를 부르고 이어서 “그리스도의 아내여, 와서 그대에게 준비된 면류관을 받으라”라는 또 다른 찬송가를 불렀다.

내가 참으로 예수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을 확신하고 나는 더할 나위없이 기뻐하였다. 나는 “예수님, 저는 영원히 당신의 것입니다. 저를 당신의 마음에 맞는 아내로 만들어 주세요. 나의 유일한 소원은 당신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것이에요” 하는 말을 수없이 반복하였다.

이제 나는 어디에서 수녀 생활을 하게 될 것인가? 수습 기간 중에 수녀원장은 나의 예술적인 재능에 유의하고 나를 ‘필리핀’ 제도로 보내는 임명을 하였다. 나는 ‘마닐라’ 성 ‘테레사’ 대학에서 미술을 가르치는 임명을 받았다. 그리하여 1929년 9월 말에 나는 가족과 함께 며칠을 보내고 또한 여행 비용을 준비하기 위하여 기부금을 모집하는 데 며칠을 보낸 후에 ‘필리핀’으로 떠났다. 임명지로 가기 위한 비용을 충당하는 데 필요한 자금을 각자가 마련하는 것이 습관이었다.

사십 삼년간의 수녀 생활의 결실

1929년 말에 나는 ‘마닐라’에 도착하여 성 ‘테레사’ 교우들로부터 환영을 받았다. 이로써 ‘필리핀’에서의 17년간의 선교 생활이 시작되었다.

나는 그곳에서 마음의 안정은 찾을 수 있었으나 잠시 후 한 가지 일이 나에게 고통이 되었다. 그것은 고해하는 일이었다. 내가 고백하면 고백할수록 사제는 나를 더욱 질책하였다. 내가 더욱 양심적으로 일을 하여도 만족스러운 것 같지 않았다. 다행히 얼마 후에 고해 신부가 바뀌었다.

나는 영어를 조금밖에 몰랐다. 그러므로 원장이 나에게 일학년 소년 소녀들을 가르치라고 하였을 때에 나는 놀랐다. 목요일에는 수업이 없었으므로 미술 개인 지도를 하였다. 그러나 학기가 반이 경과하였을 때에 ‘투바고’로 가서 교회에서 노래를 지도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내가 악보를 보고 ‘피아노’를 칠 줄 알았기 때문이다.

1931년에 나는 ‘투가딘’으로 보냄을 받았다. 거기에서 나는 처음에 5학년을 가르쳤고 7학년까지 계속 가르쳤다. 그러나 그 해 중간에 나는 고등학교 강사로 임명을 받았다.

실망이 커지다

방학 중에 나는 ‘바구이오’로 보냄을 받았으며 그곳에서 내가 결코 다니지 않은 대학교 졸업장을 받았다! 이것은 내가 교사 자격을 갖추고 있다고 가장하기 위하여 취해진 조처였다. 이 부정직한 행위는 나에게 매우 못마땅하였다. 뿐만 아니라 나는 그 다음 학기에 초인적인 노력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었다. 나는 사실 자격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열심히 노력하여 그럭저럭 훌륭한 지식을 갖출 수 있었다. 원장은 나에게 다시는 이동시키지 않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 약속은 이행되지 않았다. 사실, 수녀 생활 전체를 통하여 내가 하나님의 대표자라고 믿은 사람들의 약속으로 인하여 여러 번 크게 실망하였다.

선교사 수녀로 여러 해를 보내면서 나는 수학, 미술, 과학, 물리학, 체조, ‘피아노’ 등 여러 가지 과목을 가르쳤다. 그리고 매일 아침에는 학생들에게 그들이 받은 교리 문답서에 근거한 종교 강의를 하였다. 이러한 종교 강의는 수녀로서의 나의 선교 사명에 비추어 생각해 볼 때 나에게 큰 만족을 주었어야 마땅하다. 그러나 반대로, 종교 교육은 나에게 짐이었으며 큰 고역이었다. 왜 그렇게 괴롭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는가?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해 줄 참으로 가치있는 것이 나에게는 아무 것도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어느 해에, 연례 묵상 기간이 끝난 후 나는 수녀원장에게 가서 묵상 기간 중에 내가 한 결심을 솔직히 털어놓았다. 그때 나는 참으로 대경 실색하였다. 원장은 나에게 “그것은 당신이 걱정할 일이 아니예요. 그보다 당신의 질투심을 경계해야지” 하고 말하였던 것이다. 나는 당황하였다! 나에게는 전혀 질투심이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대변자라고 절대적으로 믿은 원장이 그러한 행동을 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었다. 우리의 마음 속에는 수녀원장이 하나님의 대리자라는 생각이 깊이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몇달 후 나는 병에 걸리게 되었다. 나는 참으로 행복하였다! 아픈데 행복하다고? 그렇다. 수습 기간 중에 우리는 ‘하나님께서는 그가 사랑하는 사람을 시험하며’, 아프다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을 받는다는 증거라는 가르침을 귀가 닳도록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특혜를 받는 백성이 되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몸이 회복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나는 위암에 걸렸으므로 수술을 받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 후에 나는 휴양차 ‘바구이오’로 갔다. 그곳에서 나는 활동을 계속하였다. 시장에서 구걸을 하고 다녔던 것이다.

‘벨기에’로 돌아오다

여러 해가 지나갔다. 2차 대전이 발발하여 우리는 역경과 위험을 견디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난 후 나의 건강은 다시 나빠졌다. 의사는 두번째 수술을 하려 하지 않고 ‘벨기에’로 돌아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필리핀’에서의 선교 생활 17년간을 보내고 1947년 3월에 ‘벨기에’로 돌아왔다.

내가 어느 정도 푹 쉬고 있는 동안 나는 약속대로 ‘필리핀’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리면서 나의 활동을 제한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 약속도 또한 지켜지지 않았다. 그 대신 나는 ‘프랑스’ ‘오빌라’ 지역으로 보냄을 받았다. 그곳에서 나는 학교 교육상 저능한 청소년을 가르쳤다. ‘필리핀’의 학생들의 수업 시간과는 아주 딴판이었다. 나는 수업이 끝나면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모른다. 나 자신이 도덕적으로 그리고 신체적으로 그러한 분위기를 극복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았다.

국가에서는 신체 장애자들을 가르치려면 면허장을 요구하였으므로 나에게는 통신 교육을 받을 것이 요구되었다. 또한 나는 ‘툴루스’에 가서 6주간의 강습을 받았다. 그 강습은 필기 및 구두 시험으로 끝났다. 졸업장을 받고보니 그것은 나에게 의외의 일이었다. 왜? 내가 칭찬을 받았기 때문이다! 나는 이전에는 결코 격려를 받아본 일이 없기 때문에 나는 나 자신이 무가치한 사람이라고 믿게 되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내 속에는 두 사람이 있는 모양이구나. 수녀원 밖의 사람들에게 ‘칭찬받는’ 사람과 수녀원 안에서 ‘암흑에 싸여 있는’ 또 한 사람이 있는가 봐.”

성서를 한 권 구하다

우리에게는 성서를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었다. 그러나 1960년대에 그 당시 나의 흥미를 끄는 다른 낭독물이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성서였다. 그러나 수녀원장은 내가 성서를 갖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나는 성서를 한 권 구할 수 있었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기 위하여 불어 사전이 필요하였는데 집에서 천 ‘프랑’을 보내 주어야만 구할수 있었다. 집에서는 다시 한번 나를 도왔다! 그러나 원장은 그 돈의 삼분의 일도 쓰지 않고 잔액을 다 보관하였다! 나는 차액이 나의 소유라고 생각하고 감히 「예루살렘 성서」를 구입해 달라고 신청하였다. 이번에는 그 요청이 거절되지 않았다.

성서를 입수하고 나는 왜 성서 낭독이 금지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하여 처음부터 끝까지 읽기로 결심하였다. 이상스럽게도 성서를 읽게 되자 나는 이전보다 더 기도하고 묵상하도록 도움을 받았다. 나는 「시편」을 많이 외웠고 기회 있을 때마다 암송하였다. 때때로 나는 다른 수녀들과 이야기할 때에 화제를 성서로 이끌려고 하였으나 소용이 없었다. 흔히 나는 다른 수녀들에게 우리의 대화가 너무 평범하다고 이야기하였다. 그러나 내가 영적 문제를 이끌어 내면 비웃음을 받았다.

나의 건강이 호전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벨기에’의 ‘로울러’로 보냄을 받았다. 이전에도 그곳에서 수술을 받은 일이 있었다. 그 후 나는 ‘헤벨레’ 즉 중환자 수녀들이 수용된 집으로 보냄을 받아 그곳에서 다시 수술을 받았다. 그 후에 나의 건강은 점차 회복되었다. 이 때에 나에게는 가족이 선물로 준 소형 ‘라디오’가 있었다. ‘라디오’의 도움으로 나는 성서 통신 교육을 받을 수 있었으며 열한가지 종교 ‘프로그램’을 들을 수 있었다. 그 결과 나는 성서 연구를 깊게 하는 방법을 알았다. 그러나 나의 기쁨을 다른 사람들에게 전달하지 못하는 것이 안타까웠다.

나는 ‘프로테스탄트’ 교도들이 성서에 대하여 더 많이 알고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러나 어느 날 편지로 나는 나의 통신 교육을 담당하여 준 ‘프로테스탄트’ 목사—나는 그를 가장 신뢰하였다—에게 진화론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질문하였다. 그는 전화론을 믿을 수 있다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나의 신뢰감은 감소되었다. 왜냐하면 진화론은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 것이 분명하였기 때문이다. 나는 거짓이 아니라 진리를 찾고 있었던 것이다.

사랑의 부족

그 다음에 ‘바티칸’ 공의회가 열렸다. 그리하여 ‘가톨릭’ 교회에서는 수녀들에게 그들의 종교 생활을 혁신할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렇게 하기 위한 한가지 일로 나는 질문서를 받았으며 대답을 써 넣어 나의 견해를 피력할 수 있었다.

1968년 1월에 나는 질문서에 대답을 써 넣었다. 여러 가지 질문이 있었지만 그중의 두가지는 “당신은 동료 수녀들(수도원장 혹은 다른 사람들)로부터 당신의 영적 생활에 필요한 충분한 도움을 받고 있는가?”와 “당신은 교회 내에서 진정한 우정을 발견하였는가?”였다.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나는 “아니요” 하고 대답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료 수녀들이나 교회 내에서 참되고 비이기적인 사랑을 찾아 볼 수 없었다. 가면적인 사랑이 있을 뿐이었다.

질문서의 일부는 “수녀원장의 태도”에 대한 것이었다. ‘벨기에’ “헤벨레”에 있는 서기장 사무실에 나는 이렇게 편지하였다. “여러 차례에 걸쳐 나의 동료 수녀들은 나에게 ‘왜 우리는 수녀원장을 대하는 것보다 우리끼리 있는 것이 더 마음이 편할까?’ 하고 질문하였읍니다. 나는 그 이유가 수녀원장들은 수녀들을 가까이 하려하지 않고 수녀들에게서 기대하는 상냥함을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하였읍니다.”

나는 이렇게 계속하였다. “일반적으로 말해서 수녀원장들은 외부 문제에 너무 몰두하고 있읍니다. 그분들은 그들의 임무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모든 수녀에 대한 어머니 같은 사랑—외에 너무 많은 것에 바쁩니다. 그러나 예외 없이 예수님은 사랑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이것이 어머니에 대한 이상적인 개념입니다. 수녀원장들은 ‘종’이 되어야 하는데도 모든 면으로 일반 수녀와 전혀 다른 생활을 하고 있읍니다. 일반 수녀들은 수녀원장과 같은 것들을 대등한 자격으로 즐길 수 있어야 합니다. 바꾸어야 할 것은 ‘이름과 의상’뿐만이 아닙니다. 정신적 견해와 생활 방식도 고쳐야 합니다. 수녀원장이 우리의 사랑과 신뢰를 받기를 원한다면 성실하게 우리를 사랑하고 우리를 신뢰해야 합니다.”

“어딘가 잘못이 있다”

어느날 불유쾌한 마음으로 수녀원 총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우리의 청빈의 서원은 우리로 항상 받게만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많으면 많을수록 더 좋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결코 줄 수가 없읍니다. 심지어 ‘핀’ 하나라도 줄 수가 없읍니다!” 그리고 예수께서는 주는 데 더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다.

그는 솔직하게도 나의 이론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그래서 후에 나는 ‘셰우트’의 수녀원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저의 의견으로는 청빈에 대한 최대의 범죄는 청빈의 서원입니다.” 나는 이렇게 부언하였다. “필요한 것은 그러한 서약을 철회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는 서원은 결코 철회할 수 없다고 말하면서 동의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때 이후로 서원들은 단순한 약속으로 대치되었다! 허다한 모순을 안고 있는 제도에 어딘가 잘못된 것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래서 나는 가까운 장래에 수녀원이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는 말을 반복하였다. 사실 나는 수녀원이 악마적인 사회라는 생각이 커져 갔다. 옳지 않은 남용을 보았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더욱 더 확신하게 되었다. 예를 들면 안락한 생활에 있어서 남용이다. 전적으로 불필요하고 정당하지 않은 지출을 점점 더 많이 하는 것을 나의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그래서 시간이 흐름에 따라 나의 눈은 밝아졌다. 나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이 도저히 불가능하여지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나는 또한 내가 항상 좋아했던 종교 의식이 참으로 무의미한 것임을 인식하게 되었다. 장식품과 꽃, 아름다운 제단 장식, 사제들의 의복과 음악이 모두 훌륭함에도 불구하고 일단 의식이 끝나면 나는 아무런 영적 유익을 얻지 못하였음을 깨달았다. 나는 특히 이러한 경우에 사제를 유심히 관찰하였다. 그 결과 나는 자주 사제에 대하여 실망하고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저렇게 무성의한 일이 어디 있담! 전혀 관심이 없고 자신이 하고 있는 일을 의식하지도 않는 듯한 태도야.” 십자가를 긋는 일도 자동적이었고 무릎을 꿇는 일도 존경심 없는 태도였다.

어느날 ‘바티칸’ 공의회에서 주교들이 성체 성사의 변혁을 토론하는 것을 듣고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여기에는 어딘가 잘못되어 있어. 진리는 의문의 여지가 없고 결코 변혁하지 않는단 말이야.”

또 다른 경우에 나는 ‘브루게스’의 거룩한 피는 진짜가 아니라는 말을 들었다! ‘벨기에’의 ‘브루게스’라는 소도시의 성혈 회당(The Holy Blood Basilica)에는 순금으로 된 성혈 상자가 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의 피 몇 방울이 보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매년 행렬이 있어 도시의 오래된 부분을 통과하며 성혈 상자는 전통에 따라 전통적인 화려한 행렬과 함께 운반된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생각하였다. “교회가 그러한 모든 성혈 행렬시에 우리를 그렇게 많은 우상 숭배에 빠지게 한 것이 가능한가? 이제 진리를 찾을 때가 되었다!”

나는 이러한 생각을 다른 수녀에게 이야기하고 이렇게 부언하였다. “나는 진리를 찾고 있어요. 그리고 내가 진리를 발견한다면 그때에는 아무 것도 나를 막지 못할 거예요!” 나는 더욱 열심히 진리를 찾게 되었다.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발견함!

1969년 8월경 나는 다른 수녀로부터 책 한권을 받았다. 그 책 이름은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였다. 그는 그 책을 그의 조카로부터 받았는데 그의 조카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

그는 그 책을 나에게 가져와서 이렇게 말하였다. “내 조카가 이것을 주었어요. 그 사람은 참 열심이예요. 그리고 성서를 나에게 갖다 주겠다고 약속했어요. 놀라지 마세요. 그 사람이 글쎄 집집을 방문하면서 전도를 하고 성서 연설까지 한대요!”

나는 주의깊이 들었다. 나는 책을 받으면서 이렇게 말하였다. “흥미를 끄는 걸요. 나는 진리를 찾고 있으니까요.” 즉시 나는 제1장을 읽기 시작하였다. 그 내용이 나의 종교의 가르침과 매우 다르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조금 후에 나는 입원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의사는 나의 건강 상태가 위험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떠나기 전에 나의 모든 소유물을 정리하고 책은 동료 수녀에게 돌려주었다. 그러나 진단은 부정확하였고 나는 즉시 돌아왔다. 나는 그 책을 찾았다. 그러나 실망하였다! 그는 나에게 표지만을 건너주었다. 그가 속의 지면을 뜯어 없앴던 것이다! 나는 그에게 가서 내가 그 책을 읽기를 얼마나 갈망했는지 모른다는 말을 반복하면서 그의 행동에 유감을 표시하였다.

잊을 수 없는 자동차 편승

어느날 수녀원장은 미용 기술을 배우고자 하는 자진자를 구한다고 발표하였다. 나는 자진하였으며 ‘브뤼셀’의 “요레올” 학교 과정을 이수하였다. 1970년 10월 26일에 나는 미용 시험을 치르기 위하여 ‘브뤼셀’의 시험 위원회에 오라는 지시를 받았다.

나는 지정된 시간에 갔다. 그러나 이름이 발표될 때 나의 이름은 포함되지 않았다. 그들도 나를 보고 놀라는 것 같았다. 서기는 나를 보내면서 다음 달에 다시 부르겠다고 말하였다.

이 뜻밖의 자유를 즐기려고 하지 않고 나는 그날밤 자도록 마련된 수녀원으로 갔다. 내가 수녀들에게 첫 기차로 ‘헤벨레’로 돌아가겠다고 하자 그들은 ‘버스’로 가라고 권하였다. 더 싸다는 것이다. 청빈의 서원을 존중하려는 마음으로 그렇게 하겠다고 하였다.

‘버스’ 정류장까지 가기 위하여 나는 전차를 타지 않으면 안되었다. 목적지를 모르기 때문에 같은 전차에 타고 있던 두 남자에게 방향을 물었다. 그들은 ‘버스’ 정류장에 도착하면 알려 주겠다고 약속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말대로 내려보니 적어도 두 정거장 일찍 내렸다! 그래서 나는 무거운 ‘트렁크’ 두개를 들고 목표 지점까지 걷지 않으면 안되었다.

마침내 나는 가방을 내려놓고 두리번 거리며 ‘버스’ 정류장을 찾았다. 바로 그 때 차 한대가 내 옆에 와서 섰다. 운전사는 “‘루바인’으로 가십니까? 태워다 드릴까요?” 하고 말하였다.

나는 남자와 동승하는 것을 좋지 않게 생각하고 주저하였다. 그러나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과 여행하는 것을 꺼리지 않으신다면 타셔도 좋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을 잘 알지는 못하였지만 이 말을 들으니 믿음직한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나는 제안에 응하였다. 후에 나는 그가 솔선하여 차를 세우고 다른 사람에게 태워준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보통 그는 무료 편승을 원하는 사람의 신호를 받고야 태워 주었다. 또한 오후에 이 길을 간 것 역시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그전에는 항상 오전에 다녔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우연의 일치는 참으로 큰 축복이 되었다!

그는 나의 ‘트렁크’를 실어 주었고 나를 차에 오르도록 도와 주었다. 내가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 이야기를 많이 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나는 그때에 거의 성서에만 관심을 두고 있으며 성서 통신 학교 과정을 이수하였고 종교 방송 ‘프로그램’을 들었다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삼위일체와 같은 여러가지 교리에 대하여 이야기하였다. 나는 놀랐다. 그가 말하는 것은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과는 반대되었지만 성서와는 일치되는 것 같았다. 들으면 들을수록 나는 더욱 놀라워 말문이 막혔다. 나는 그가 말하는 것이 전부 성서와 참으로 일치하다는 것을 인정하였다.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그릇된 길에 미혹되지 않도록 성령의 도움을 기도로써 구하였다.

우리가 ‘루비안’에 도착하였을 때 증인은 작별 인사를 하면서 동시에 책을 한권 나에게 주었다. 아, 그 책은 바로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였다! 나는 그에게 깊이 감사하고 수녀원으로 가는 동안 내내, 그와 토론한 것을 곰곰히 생각하였다. 나는 또한 내가 몇 달 전에 보았던 책을 갖게 되어 매우 행복하였다. 나는 이제 진리를 계속 찾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정확한 지식이 증가됨

한번은 나의 방에서 내가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이 때에 나는 여호와께 기도하였으며, 나의 입장을 설명하고 여호와의 도움을 구하였다. 그 후 어느날 아침에 나는 여호와께 기도를 통하여 나를 올바른 길로 인도할 사람을 보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 날은 다른 날과 달리 오전 11시에 미용 일을 시작하지 않고 오후 2시에 한 수녀의 머리를 만져주기로 약속하였다. 계단을 내려가다가 ‘브뤼셀’에서부터 나를 차에 태워준 그 사람을 만났을 때의 나의 놀라움이 얼마나 컸겠는가 상상하여 보라! 2시에 약속이 있기 때문에 그는 한 시간 뒤에 다시 오겠다고 하였다. 그 때에 나는 자유 시간이었으므로 그를 작은 면회실에서 만나 이야기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정확한 지식을 더 많이 얻기 위하여 내가 성서로 연구를 해야 한다고 말하면서 이 지방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 여자 두 사람이 그 연구를 사회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반갑기 짝이 없는 마음으로 나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첫 연구가 수녀원 안에 있는 나의 방에서 사회되었다!

6개월간 연구한 후에 결정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나는 “내가 개종할 것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지? 그렇게 생각한다면 오해지. 내가 원하는 것은 성서를 세밀히 연구하는 것뿐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나는 이 연구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였다.

마침내 진리를 찾다!

그 후 어느날 증인은 6개월에 한번씩 여호와의 증인들이 개최하는 3일간의 성서 교육 대회에 나를 초대하였다. 수녀원장은 내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외출을 허가하였다. 모두들 즐거운 주말을 보내고 오라고 인사하였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이렇게 혼잣말을 하였다. “나는 현혹되지 않을 결심이야. 단지 듣고 하나하나 관찰하면 되는 거야. 만일 성서에 반대되는 말을 한마디라도 들으면 그것으로 완전히 끝내는 거야.”

대회에서 나는 모든 것이 격려적이라는 것을 발견하였다. 암흑에서 광명으로 옮겨가는 듯한 깊은 인상을 받았다. 나는 증인들이 나타내는 형제 사랑에 깊이 감동되었다. 내가 45년 동안이나 찾던 참다운 그리스도인 사랑을 참으로 발견하였다! 나는 마침내 진리를 찾았다고 확신하였다!

수녀원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더욱 더 내가 최근 몇달 동안에 자주 반복한 말 곧 “우리는 악마적인 제도에 속박되어 살고 있다. 나는 더 이상 위선자 같이 여기에서 계속 살 수 없다”는 말의 참됨을 더욱 더 인식하였다. 나는 여호와께 기도로써 인도를 구하였다.

탈퇴

대회에서 돌아온 후 바로 그날 저녁에 나는 앉아서 교황에게 보낼 편지를 썼다. 나는 그에게 나의 서약을 특면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리고 수녀원 총장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나는 그 때 ‘바티칸’ 공의회 이후로 우리의 규약과 종규가 불태워졌음을 기억하였다. 결과적으로 우리는 성 ‘오거스틴’의 교단 수녀 선교사가 아니었으며, 나는 그의 종규에 따라 서원을 했던 것이다. 나는 나의 서원에서 특면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판단하였다.

더욱이 나는 더 이상 ‘로마 가톨릭’ 교회를 그리스도의 교회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과 반대되었다. 그래서 나는 배교한 교회의 우두머리에게 어떤 것을 허락하여 달라고 요청할 필요를 더 이상 느끼지 않은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내가 쓴 그 편지들을 부치지 않았다.

내가 믿었던 종교 교리와 성서 진리를 비교하여 보고 나는 ‘가톨릭’ 교회의 주요 가르침이 성서와 일치하지 않음을 더욱 더 인식하였다. 예를 들면 예수는 전능하신 하나님이 아니시다. 또한 삼위일체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미사’와 성찬식은 성경적이 아니다. 그리고 금식하지 않고 성체 배령을 한 이유로 지옥에 갔다는 영혼들 혹은 ‘미사’의 빵을 물거나 만졌기 때문에, 혹은 일요일 ‘미사’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혹은 금요일에 고기를 먹었기 때문에 지옥불에 들어간 영혼들은 어떠한가? 그 모든 일이 지금 허용되고 있다! 이러한 사실들은 내가 진리를 찾았음을 확신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1971년 1월 23일에 나는 대회에서 나를 참으로 친절하게 돌보아 준 증인에게 감사하기 위하여 전화를 걸었다. 그가 나에게 어떻게 하겠느냐고 물었을 때 나는 “떠날 각오가 되어 있다”고 대답하였다.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았지만 이튿날 떠나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생각하니 연령과 기타 문제가 있었다. 그러나 나는 심사숙고한 후에 여호와의 사랑 때문에 무조건 그분께 나 자신을 바치겠으며 그분의 원하는 대로 나를 사용하실 수 있다고 기도하였다. 나는 나의 뜻이 아니라 그의 뜻이 이루어지기만을 기도하였다. 나는 전적으로 그분께 의지하였고 밤새도록 반복하여 기도하였다. 나는 더 이상 의식주를 걱정하지 않았다. 나는 단 한가지 일 즉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가능한한 많은 양같은 사람들을 진리로 이끌어야 한다는 것만을 생각하였다.

이튿날 여호와의 증인 두 사람이 나를 데리러 왔다. 수녀원을 떠나는 일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수녀원에는 약 삼십명의 수녀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모두 놀라서 볼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보관계 수녀가 웬일이냐고 물었을 때 나는 “내가 진리를 찾으면 아무 것도 나를 막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 일이 있지요.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서 진리를 찾았어요. 그래서 그들과 가는 것입니다” 하고 말하였다. 그는 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버렸다.

나는 ‘브뤼셀’의 한 증인 가족과 두달을 지냈다. 그들은 하숙비를 받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은 여호와께 대한 순수한 사랑에서 나온 것이라고 느끼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이다. 나는 마침내 성서에서 “큰 ‘바벨론’”이라고 부르는 거짓 종교 세계 제국의 속박에서 해방되었고 이들 헌신한 그리스도인들의 사회에 있게 되어 매우 행복하였다.

그 후에 나는 여호와께 참으로 나 자신을 헌신하게 되었다. 나는 그분의 증인이 되어 단지 그분의 뜻만을 수행하기를 원하였다. 다섯달 후 즉 1971년 6월 26일에—선교사 수녀 생활 43년 후에—나는 물침례로 이 헌신을 상징하였다.

지금 나는 시간제 가정부로 생계를 유지하고 있지만 후회는커녕 말할 수 없는 행복을 경험하고 있다. 나는 이제야 내가 참으로 선교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수녀 시절보다 훨씬 더 정직한 생활을 하고 있다. 사실 내가 유감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이것뿐이다. 즉 내가 여호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증명하는 데 그리고 이것을 그의 말씀에 대한 정확한 이해로 증명하는 데 그렇게 오랜 기간이 흘렀다는 사실이다.

그러므로 내가 일곱살 된 그 작은 소녀 시절인 1916년에 표현하였던 소원 즉 나 자신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봉사에 바치려는 소원이 이제야 실현된 것이다. 이제부터 나는 예수께서 추종자들에게 명하신 바와 같이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를 삼는 데 남은 생애를 바친다. 나는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고 내가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나누어 줌으로써 이 일을 수행한다. 나는 정직한 마음을 가진 더 많은 사람들이, 아직 시간이 있을 때에,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새로운 사물의 제도에서의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를 받아들여 내가 누리고 있는 것과 같은 즐거움을 맛보게 되기를 바란다.

[8면 삽화]

1928년 3월에 찍은 사진에서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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