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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가톨릭’ 수녀였다
  • 깨어라!—1985
  • 소제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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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녀가 되다
  • ‘카이로’에서의 수녀원 생활
  • ‘팔레스타인’과 ‘베이루트’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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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10/1 10-13면

나는 ‘가톨릭’ 수녀였다

오래 전인 1960년에, ‘하이파’에서 ‘사이프러스’행 ‘터어키’ 배를 타고 가면서, 나는 조용히 30년이 넘는 수녀원에서의 생활을 되새겨 보았다. 여전히 수녀복을 입고 있었지만, 나는 나의 서약에서 해방되었음을 알리는 편지를 소지하고 있었다. 그 당시, 내 머리에는 오로지 한가지 생각뿐이었다. ‘레바논’, ‘베이루트’에 가서 직업을 구하는 일이었다.

그러나 나는 왜 수녀가 되었었는가? 그리고 그렇게 오랜 세월이 지난 뒤에, 왜 그만 두었는가?

수녀가 되다

제 1차 세계 대전 직후에, 어린 내가 ‘프랑스’ 남동부에서 수양부모와 함께 살고 있을 때, 한 ‘프로테스탄트’ 전도인이 우리를 방문하였다. 그가 말하는 것 하나하나에 내가 관심을 보이자 그는 나에게 자그마한 “신약 성서”를 한권 남겨 놓았다. 그때부터 성서에 대한 나의 관심은 자라났다.

나중에 나는 성경을 이해하고 싶은 욕망에 관하여 몇몇 동료 ‘가톨릭’ 신자들에게 말하였으나, 그들은 나에게 성서를 읽는 것은 큰 죄에 속한다고 말했다. 성서가 그토록 큰 비밀이기 때문에, 오로지 수녀원에 있는 사람들만 그것을 연구할 수 있게 되어 있구나 하고 나는 추리하였다. 그때부터 나는 수녀가 되기로 결심하였다.

‘카르멜 선교 수도회’의 수녀원장을 만나기로 약속한 장소인, ‘프랑스’ 남부에 있는 수녀원으로 가는 기차를 탔을 때 나는 막 21세의 나이였다. 그 수녀원은 지중해 연안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위치한 작은 마을 ‘기그나’에서 가까운 언덕에 서 있었다. 건물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었는데, 하나는 수녀들을 위한 건물이었고, 다른 하나는 젊은 부인들을 위한 요양소로 사용되었다.

첫날 밤은 요양소에서, 여행 가방이 없이 보냈다. 기차역으로 마중 나온 젊은 여자가 여행 가방을 돌려 주지 않았던 것이다. 다음 날, 나는 벌써 수녀원의 분위기를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곳을 떠나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짐을 돌려 달라고 하자, “당신의 여행 가방은 수녀원 안에서 당신을 기다리고 있다”는 대답을 들었다. 그때 나는 ‘걸어 들어가면, 언제라도 다시 걸어 나올 수 있겠지’ 하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일은 그렇게 간단한 것이 아니었다.

수녀원의 종교 구획에 들어 섰을 때, 나는 육중한 철문과 높은 천정의 고대 건물에 위압되고 말았다. 잠시 후에 수녀원장과 간단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나는 그곳을 떠나기를 원한다는 것을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하였다.

일주일 뒤에 나는 수도회에 들어갈 지망자로 받아들여졌다. 몇개월 뒤에 나는 수련 수녀의 흰 ‘베일’을 받았다. 성서에 관하여는 별로 배우는 것이 없었지만, 그러한 지식은 초보자들을 위한 것이 아닌 모양이라는 생각으로 나는 참고 견디었다. 수녀원에 들어간 지 일년이 채 못되어, 나는 두명의 다른 수녀와 함께 ‘마르세이유’로 보내어졌다. 거기에서 우리는 ‘이집트’, ‘카이로’로 항해하여, 1931년 1월에 그곳에 도착하였다.

‘카이로’에서의 수녀원 생활

우리의 수녀원 및 인접한 학교는 ‘카이로’ 외곽에 있는 꽤 큰 현대식 건물 안에 있었다. 이곳에서 우리는 매일 아침 4:45에 일어나 성당에 가서 45분간을 묵상하는 데 보내곤 하였다. 그 다음 15분간은 ‘미사’ 전에 자기의 방을 정돈하도록 허락되었다.

우리는 한 마디의 말도 없이 조용한 가운데 식사를 하였는데 그동안 “성인들의 생활”에 관한 낭독을 들었다. 식사를 맨 먼저 마친 사람이 낭독하는 일을 이어받았다. 낮에는 수녀들간의 대화가 금지되어 있었으며, 일에 관한 질문은 예외였지만, 그렇다 해도 면회실이라고 불린 특별한 장소에 가서야만 가능하였다. 사실상의 수녀원은 폐쇄된 건물이었다. 예를 들어, 낮에 외부인이 건물 안에 들어올 때는 당번인 수녀가 작은 종을 울려 다른 수녀들이 자기 방을 떠나지 않도록 경고하였다.

금요일과 ‘사순절’ 중의 수요일에는 시편 51편의 낭독과 더불어 자기 징계 시간이 있게 된다. 수녀들 모두가 어두운 방에 모여, 각자는 세개의 가죽끈으로 된 채찍으로 자신을 채찍질 하는 것이 요구되었다. 당시에 나는 그러한 고통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하여 필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어떤 때는 하루 종일 마시는 것이 금지되곤 하였는데, ‘이집트’와 같이 무더운 나라에서 그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으며, 또한 날카로운 쇠못이 박힌 폭이 약 2.5‘센티미터’인 혁대를 착용하곤 하였다.

동시에, 나는 성변화(聖變化)와 유아 세례와 같은 ‘가톨릭’의 기본 가르침에 관하여 많은 의심을 품게 되었다. 또한, 나는 ‘마리아’를 ‘여 중보자’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성서를 아무리 읽어보아도 그러한 가르침들을 발견할 수 없었다. 하루는 동료 수녀가 이러한 말을 하였다. “25‘로자리오’를 암송하면, ‘성모님’이 은혜를 주실 꺼예요.” 그렇게 하기로 결심하고, 나는 25‘로자리오’(거의 1,300가지의 기도)를 암송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이전과 똑같은 공허한 느낌을 면할 길이 없었다. 그것은 내가 복음서에서 읽은 내용, 즉 예수께서 자기 제자들에게 아버지께 ‘그분의 이름으로’ 무엇이든지 구하면 받으리라고 가르치신 말씀을 확증해 주었다.—요한 16:24.

나는 삼년간의 수도 기간 즉 도제 기간을 수료하였고, 이제 영구적인 서약을 해야 할 때가 되었다. 분명한 태도 표명을 원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프랑스’로부터 이렇게 멀리 와서 수녀원을 떠난다면, 나는 무엇이 될 것인가? 나는 마침내 동의에 서명하고, 성당으로 가서 나의 나머지 생애를 가난과 순결과 순종 가운데 살 것을 약속하였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나는 내가 행여나 서약을 어긴다 하더라도 언제나 하나님과 함께 일을 수행할 수 있다는 추리를 하였다. 교황의 특면을 받은 다른 수녀들을 나는 알고 있었던 것이다.

‘팔레스타인’과 ‘베이루트’로

제 2차 세계 대전이 한창이던 1940년에, 독일 비행기들은 ‘카이로’를 폭격하였다. 그때에 나는 ‘팔레스타인’, ‘하이파’에 있는 수녀원으로 옮겨졌다. ‘수에즈 운하’를 건넌 다음, 밤 열차를 탔다. 이른 아침이 가져온 ‘오아시스’의 장엄한 일출 광경은 ‘팔레스타인’에서 보게 되어 있는 놀라운 풍경을 미리 맛보는 것과 같았다. 나는 특히 성서에 언급된 예수와 그분의 제자들 그리고 다른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그들의 생애를 보낸 이 땅에 매력을 느꼈다.

‘하이파’에 있는 수녀원은 참모 본부로 영국군에게 징발되었다. 따라서, 나는 ‘하이파’에서 약 25‘킬로미터’ 떨어진 ‘갈멜’ 산맥 상부에 위치한 작은 마을 ‘이스피야’로 보내어졌다. 부엌에서 ‘잼’을 만들면서 한달 동안 그곳에 격리되어 있었다.

얼마 안있어 나는 ‘레바논’, ‘베이루트’로 옮겨졌는데, 그곳은 ‘하이파’에서 차로 두 시간 거리에 불과하였다. 그 당시 ‘팔레스타인’은 영국의 위임 통치하에 있었고 ‘레바논’은 ‘프랑스’의 위임 통치하에 있었기 때문에, 쉽게 국경을 넘을 수 있었다. 그 다음 여러 해 동안, 나는 자주 ‘이스피야’에서 휴가를 보냈는데, 한해는 병이 나서 ‘베이루트’로 돌아가지 않고 ‘팔레스타인’에 머물렀다.

‘갈멜’산 위의 ‘이스피야’에 있는 동안, 나는 아이들이 번갈아 타기 좋아하였던 당나귀 ‘시자르’와 함께 아이들을 데리고 수녀원 위쪽의 언덕을 걷기를 즐겼다. 소나무 숲과 ‘올리브’나무 숲을 지나 우리는 결국 높은 봉우리에 다다르게 되었는데, 전설에 의하면, 그곳이 바로 ‘엘리야’가 ‘바알’의 거짓 예언자들에게 도전하였던 곳이라고 한다. 아래로 우리는 ‘기손’ 골짜기를 볼 수 있었으며, 그곳은 ‘바알’의 모든 예언자들이 죽임을 당한 곳이다. (열왕 상 18장) 나는 “구약” 역사를 읽을 때 ‘엘리야’에 관하여 배웠고, 특히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서의 그의 담대함과 열심에 나는 탄복하였다. 따라서, 수녀로서 나는 하나님께 대한 나의 헌신의 표로 ‘엘리자 마리아’라는 이름을 택하였다.

떠나려는 노력

세월이 흐르면서 종교 사회를 떠나고자 하는 나의 결심은 점점 더 강해졌다. ‘프랑스’, ‘리용’으로 돌아오라는 부름을 받은 1953년에, 나는 그 지방 추기경에게 편지를 썼다. 그러나 추기경을 대신한 사람이 나를 만나러 오기 전에, 수녀원장은 떠나고자 하는 나의 계획을 알고 나를 약 100‘킬로미터’ 떨어진 ‘생-마르탱-벨레로쉬’로 보내 버렸다. 나는 추기경에게 특면을 요구하는 편지를 더 써 보냈지만 소용이 없었다.

1958년에 나는 다시 ‘레바논’으로 보내어졌다. 몇개월 뒤에 나는 다시 내가 좋아하던 도시 ‘하이파’로 돌아갈 수 있었다. ‘히브리’어를 알고 있었기 때문에, 나는 심부름을 하도록 선택되었고, 그리하여 그 지방 주교에게 편지를 부칠 기회를 포착하게 되었다. 그때부터 일들은 신속히 진전되었다.

나의 편지를 받은 주교는 이틀 뒤에 나와 함께 문제를 토론하기 위하여 왔다. 나는 건강이 좋지 못하기 때문에 떠나고자 한다는 것을 그에게 말했다. 나는 치료를 필요로 하였으며, 수녀원 생활은 나에게 너무 힘이 든다는 것이 증명되고 있었다. 그는 매우 이해심이 많은 사람이었는데, 한 시간의 대화가 있은 뒤에 그는 “만일 원한다면 오늘 저녁에 떠나도 좋다”라고 말하였다. 나는 계속 그와 연락을 취하였으며, 그것은 나중에 큰 도움이 되었다.

며칠 뒤에 주교는 나에게 ‘프랑스’ 총 수녀원장이 나에게 편지를 보냈다는 것을 알려 주었다. 그러나 나는 그것을 받지 못하였다. 그래서 수녀원장을 만나러 갔다. “나에게 편지가 와있을 텐데요”라고 나는 말했다. 책상 서랍 깊숙한 곳에서, 그는 봉투를 하나 꺼내 나에게 건네 주었다. 그것은 내가 서약에서 자유롭게 되었다는 것을 알리는 편지였다.

폐쇄 묵상 기간(아무도 말하는 것이 허락되지 않는 기간)중에, 나는 짐을 싸서 떠날 기회를 포착하였다. 그리하여, 1960년 8월 어느 날 아침, 나는 짐과 한 동안 견딜 수 있는 ‘이스라엘’ ‘파운드’ 몇푼을 가지고 크고 넓은 세상 밖으로 나와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였다. 나는 아는 사람의 집을 찾아 갔고, 그는 나를 며칠간 머물게 해주었다.

새로운 생활

나는 ‘베이루트’로 돌아갈 계획을 하였다. 직장을 구하기가 좀더 쉬울 것이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렇게 하기 위하여는 ‘비자’가 필요하였다. ‘하이파’와 ‘예루살렘’에 있는 여러 영사관들에서 ‘비자’를 받는 것은 불가능해 보였다. 한 관리는 이러한 말까지 하였다. “수녀원장은 우리에게 ‘아랍’ 국가로 가는 수녀들은 누구에게도 도움을 베풀지 말라고 부탁하였읍니다,” ‘하이파’에 있는 친구는 나에게 ‘사이프러스’를 경유해서 ‘베이루트’로 가는 것이 쉬울 것이라고 말해 주었다.

그리하여 나는 1960년에 ‘하이파’에서 ‘사이프러스’로 가는 ‘터어키’배를 탔다. 주교의 충고를 따라, 나는 여전히 수녀 복장을 하고 있었으며, 주로 여권 사진 때문에 그렇게 하였다. 내가 계속 연락을 취하였던 주교의 편지 덕택에, 나는 이미 영국 당국으로부터 ‘사이프러스’행 ‘비자’를 받아 놓았었다. 그 다음에 나는 ‘베이루트’로 비행하였다.

점진적으로 바깥 생활에 적응하고 싶었기 때문에, 비종교인의 자격으로 ‘도미닉’ 교단의 수녀원 부엌에서 하는 일을 받아들였다. 이년간 그곳에 머물렀다. 어느 날 ‘카르멜’ 수녀원장이 수도회로 돌아갈 것을 권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우리는 당신의 약간의 탈선을 잊을 것이며, 당신은 장기 근속 수녀의 신분을 계속 유지하게 될 것입니다.” 헤치고 나가야 할 무수한 문제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확실히 돌아가지 않을 결심이었다!

그 후에 나는 부유한 가정에서 가정 교사로 얼마간 일하였으며, 다른 가정 교사들과 함께 할 때면, 나는 성서를 연구한 사람을 아느냐고 그들에게 묻곤 하였다. “그러나 사제는 말고요!”라고 나는 강조하였다.

나의 찾는 일이 보상되다

1964년 2월 어느 날, 평생을 통한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집단 수용소에서 ‘여호와의 증인’을 만났고 결국 ‘베이루트’에서 ‘증인’과 성서를 연구했던 ‘프랑스’인 간호원의 도움으로, 나 또한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나흘 저녁의 토론이 있은 뒤에, 나는 그토록 여러 해 동안 찾아 헤매던 진리를 발견하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증인’은 성서를 연구할 뿐 아니라 배운 것을 실천에 옮기며 다른 사람들에게 그것을 전파하였다. 거대한 장벽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 같았다. 나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내가 읽은 얼마 안되는 것들이 삼위일체, 영혼불멸 및 기타 유사한 교리들이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다는 것을 나에게 확신시키기에 충분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열정을 식게 하는 것이 한 가지 있었는데, 그것은 ‘여호와의 증인’이라는 이름이었다. 나는 이렇게 중얼거렸다. ‘‘아랍’ 국가들에서는 그 이름이 문제가 되겠지. 그들은 우리가 ‘유대’인들이라고 생각할테니까!’ 하지만 이것은 나의 연구를 막지 못하였으며, 1964년 10월에 나는 여호와께 대한 나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나를 자유케 한’ 진리를 발견한 지도 벌써 20년이 넘었다. (요한 8:32) 그렇다. 많은 수녀원에서 찾아볼 수 있는, 고행과 같은 행위가 무익한 것임이 이제 나에게 명백해졌다.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은 얼마나 참된지 모른다. “그들은 조작된 종교와 금욕주의와 자신의 육체 학대 같은 것으로 겉모양의 지혜를 과시합니다만 그런 것들은 육적인 욕정을 억제하는 데 아무 유익이 없읍니다.”—골로새 2:23, 새번역.

나 자신을 세상으로부터 차단시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지식을 나누어 주어 ‘하나님의 말씀’에 들어 있는 놀라운 희망을 알게 하는 것이 나에게는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는지 모른다! 30년간 수녀 생활을 하였으므로, 나는 ‘가톨릭’교인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에 대한 온전한 이해를 가지고 그들과 이야기할 수 있다. 이제 여러 해 동안, 나는 ‘파이오니아’(‘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로 봉사해 오고 있으며, 그리하여 예수께서 우리에게 맡기신 “이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라는 사명을 수행하고 있다. (마태 24:14, 신세)—기고.

[10면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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