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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에즈’ 운하의 장래는 어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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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수에즈’ 운하의 장래는 어떠할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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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2/22 17-19면

‘수에즈’ 운하의 장래는 어떠할 것인가?

지난 세기의 한 출판물에서는 ‘수에즈’ 운하를 가리켜 “세기의 기적”이라고 칭송한 바 있다. 이 운하는 전장(全長)이 100‘마일’ 이상이며 ‘수에즈’ 지협(地峽)을 관통하여 지중해와 홍해를 연결해 준다.

1869년에 개통되자, ‘수에즈’ 운하는 동서 여행의 새로운 항로로 등장하였다. 동 운하는 ‘유럽’으로부터 ‘인도’까지의 항해 거리를 거의 4,000‘마일’이나 단축시켰다. 왜 그런가? 왜냐하면 선박이 이 수로를 이용하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喜望峰)을 돌아 항해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동 운하는 나라들의 경제와 세계 무역 확대에 크게 기여하였다.

그러나 1967년 6월의 ‘아랍’-대-‘이스라엘’의 6일 전쟁 중에 ‘수에즈’ 운하 통행은 정지되었다. 다수의 선박이 그곳에 침몰되어 그 수로를 막아버렸던 것이다. 또한 기뢰(機雷), 폭탄 및 기타 전쟁 파편물 등이 물밑으로 가라앉았다. 이러한 축적물들 중의 상당수는 1968-1970의 “소모전(消耗戰)”과 1973년 10월의 ‘아랍’-대-‘이스라엘’ 분쟁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수에즈’ 운하를 재개통하는 가능성에 관한 여러 안이 나오게 되었다. 물론 이 운하를 재사용하려면 많은 쓰레기를 제거하는 것이 필요하다. 1974년 초 ‘이집트’군(軍), 영국 해군 잠수 부대, 그리고 약 500명의 미 육군 및 해군 관계자들이 동 운하를 소해(掃海)하는 협동작업을 시작하였다. 동 수로가 재개통되려면 약 1년이 걸릴 것으로 생각된다. 개통 후에 ‘이집트’ 정부는 전 운하 지대에 대한 치밀한 계획을 계속 추진시켜 나갈 작정이었다.

이제 ‘수에즈’ 운하는 장래에 세상 문제들과 관련을 갖게 될 것이므로, 우리는 이러한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역사가 이 인공 수로에 관하여 밝혀주는 바는 무엇인가? ‘이집트’ 정부는 이 운하에 대하여 어떠한 계획을 세우고 있는가? 그리고 ‘수에즈’ 운하가 재개통되면 세계 무역과 경제 성장에 어떠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예상되는가?

고대 역사를 지닌 수로

‘수에즈’ 지협을 관통하는 최초의 인공 운하가 이미 통용 기원전 14세기에 존재했었다! 그것은 ‘부바스티스’(현재의 ‘자카지그’ 근처)에서 시작하여, ‘나일’ 강으로부터 오늘날의 ‘비터’ 호두(湖頭)에 자리잡은 ‘헤로오폴리스’까지 ‘와디 투밀랏’을 따라 연결되었다.

결국, 진흙 퇴적물들이 옛 ‘헤로오폴리스’ 만(灣)의 일부분을 메우고 말았다. 그리하여, 기원전 7세기에 이르러, 성서에 언급되어 있는 ‘바로 느고’가 ‘비터’ 호 남쪽에 운하를 굴착하기 시작하였다. (역대 하 35:20-36:4; 예레미야 46:2) ‘느고’는 그 운하를 완성시키지 못하였다. 그의 노동자들은 여러 사람씩 죽어 갔다. 역사가 ‘헤로도투스’에 따르면, “그는 결국 ‘그가 야만인들을 위하여 수고하고 있다’고 경고한 신탁(神託)의 결과로, 그 역사(役事)를 단념하고 말았다.” 그 수로가 그의 적들에게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마침내 ‘페르샤’인들이 ‘나일’ 유역을 정복하였으며, ‘다리오’ 대왕이 그 운하를 완성시켰다.

‘로마’인들과 초기의 ‘아라비아’인의 ‘칼리프’들이 그 고대의 수로에 가외의 공사를 착수하곤 하였다. 그러나, 기원 8세기 말 ‘갈리프’ ‘아부 자파 알만술’은 적들에게로 공급되는 물자의 흐름을 봉쇄하기 위하여 동 운하를 폐쇄하였다. 그러나, 근세로 내려오면서 통치자들은 ‘수에즈’ 지협을 관통하는 ‘운하’를 개설하자는 생각을 품곤하였다. 그들 가운데는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있었는데 그는 ‘레페르’에게 그 구상을 실천에 옮겨보도록 지시하였으나, 결국 홍해 수면이 지중해보다 29‘피이트’ 더 높다는 ‘레페르’의 잘못된 결론으로 말미암아 이를 보류하고 말았다.

‘드 레셉스’의 “사막 굴착 공사”

현대의 ‘수에즈’ 운하의 건설은 은퇴한 ‘프랑스’인 외교관인 ‘페르디낭 드 레셉스’에 의하여 실현되었다. 그는 ‘수에즈’ 운하 회사를 설립하고, 동 회사가 그 운하를 완공 이후 99년간 관할하기로 하였다. 그 후에는 운하를 ‘이집트’ 정부에 귀속시키기로 협정하였다. 1859년에 공사가 시작되었으며, 25,000여 ‘이집트’의 ‘펠라힌’, 즉 노동자가 투입되었다. 얼마 후, ‘프랑스’, ‘이탈리아’ 및 ‘발칸’ 반도에서도 노동자들이 왔다.

1869년 11월 17일의 ‘수에즈’ 운하 개통은 대 경사였다. ‘피라이드’ 꼭대기는 횃불이 밝혀졌다. 운하에는 ‘프랑스’의 ‘오제니’ 황후의 ‘요트’를 선두로, 68척의 여러 나라 배들로 이루어진 소함대가 주유(周遊)하고 있었다. 중간 지점인 ‘이스메일리아’에서는 ‘이스메일’ 총독이 약 6,000명을 초치하고 무도회를 베풀었다. ‘포오트사이드’에서는 예기치 않은 불꽃의 폭발로 약간의 사고가 발생하였다. 그래서 운하에 정박된 ‘이집트’의 ‘프리기트’함 한 척을 풀어놓기 위하여 1,000여명을 파송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사막의 굴착 공사”가 성공리에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운하는 ‘파나마’ 운하처럼 배들을 올렸다 내렸다 하는 수문이 불필요하였다.

후기의 발달

1875년 영국은 ‘이집트’ 총독으로부터 176,602주의 ‘수에즈’ 운하 회사의 주식을 매입하였다. 그 이후 동 수로는 주로 영국인과 ‘프랑스’인들로 구성된 위원회의 관리를 받게 되었다. 1888년의 ‘수에즈’ 운하 회의에 의해, 이 운하는 평화시 전시를 막론하고 모든 국가에게 통행의 자유를 허용하게 되었는데, 이 협정은 교전국들에 의해 종종 무시돼 왔다.

운하 지구에 주둔하던 영국군은 1956년 6월에 철병하였으며, 그 다음 달, 영국과 미국은 ‘아스완 댐’ 건설을 위한 재정적 원조 제공을 철회하였다. 이것이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의 1956년 7월 26일자의 ‘수에즈’ 운하 국유화 조치를 몰고 온 요인의 하나인데, 그는 운하 통행료를 ‘댐’ 건설비로 충당코자 하였던 것이다. 1956년 10월 29일, ‘이스라엘’은 ‘이집트’를 침공하였다. 이틀 후, ‘프랑스’와 영국도 동 운하의 국제 공동 관리를 재현시키려는 의도 하에 ‘이집트’를 공격하였다. 분쟁은 ‘유우엔’의 활동으로 1956년 11월 6일에 중지되었으며 1957년 3월에 이 운하는 ‘이집트’의 관리하에 재개통되었다가, 10년이 지나서 1967년 6월의 ‘아랍’-대-‘이스라엘’ 전쟁으로 말미암아 다시 폐쇄되었다.

이 “큰 도랑”을 위한 원대한 계획들

맨 처음 완공되었을 당시 ‘수에즈’ 운하 수면의 폭은 약 230‘피이트’였다. 바닥의 폭은 72‘피이트’였고 깊이는 26‘피이트’였다. 그러나, 동 운하는 더 큰 선박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의 확장 및 수심을 깊게 하는 공사를 거쳤다. 그리하여, 현재의 심도(深度)는 46‘피이트’이며 수면의 폭은 390‘피이트’ 이상이다. 운하를 사용할 때 비록 수로의 대부분은 단선 통행식이지만, 배들은 양쪽 방향으로 항행한다. 선박들은 선단을 이루어 움직이며, 폭이 넓은 호수 지대나 7‘마일’ 길이의 ‘발라’ 우회 운하(迂回運河)에서 양쪽 선단이 서로 지나치게 되어 있다.

그러나, 만일 ‘이집트’ 당국이 현재의 계획들을 관철시킨다면 이 “큰 도랑”은 훨씬 커질 것이다. 이 운하는 1978년에는 폭 520‘피이트’에 깊이 62‘피이트’로, 그리고 1980년대에는 630‘피이트’의 폭과 77‘피이트’의 깊이로 확장될 것이다. ‘수에즈’와 ‘포오트사이드’는 자유항(自由港)이 될 것이며, 이 지역에는 국제 공항도 계획되고 있다. 또한, 백만 ‘에이커’의 모래 사막을 녹색 식물 초장으로 만들기 위한 거대한 관개 시설 계획도 추진중이다. 운하 양편에 3개의 주요 도시와 5개의 항구를 포함하여, 농·공업 지대를 건설하려는 계획도 마련되었다.

운하의 재개통 이후의 전망은?

‘이집트’의 ‘수에즈’ 개발 6개년 계획은 수천명에게 일자리를 마련해 줄 것이며, 그리하여 국내의 고용 증진의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또한 외국 자본이 유인(誘引)될 것이다. 사실상, 전세계의 기업인들은 이미 ‘수에즈’ 운하쪽으로 눈길을 돌리고 있다. 예를 들면, 일부 일본인 실업가들은 자유 무역 지대에 공장 건설 문제를 고려 중이다.

약 2년전, ‘유우엔’의 한 연구 결과 ‘수에즈’ 운하의 폐쇄는 해운비의 증가와 무역의 저하 면에서 전세계적으로 연간 17억 ‘달러’의 손실을 초래한다는 사실이 밝혀진 바 있다. 그러므로, 이 수로가 재개통된다면 세계 무역과 경제에 큰 영향을 미칠 것임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동 운하의 재개통은 한때 이 운하를 사용하여 자국의 수출품의 60‘퍼센트’를 외국 시장으로 내보내다가 운하 폐쇄와 함께 부득이 ‘유럽’의 과일 매매를 중지한 ‘소말리아’와 ‘수단’같은 나라에게 도움을 줄 것이며, ‘바르셀로나’와 ‘마르세이유’ 등 지중해의 항구들에게도 유익을 줄 것이다.

막대한 양의 석유도 재개통되는 ‘수에즈’ 운하를 통하여 수송될 것이다. 물론 계획대로 운하를 확장시킨다 하더라도 일부 초대형 유조선의 통행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전세계의 유조선의 약 3분의 1은 크기로 볼 때 그 “큰 도랑”으로의 통행이 가능할 것이다. 그러한 선박들이 ‘페르샤’ 만의 항구들로부터 서‘유럽’의 어떤 지점까지 항해하는데, 희망봉을 우회할 경우에 걸리는 30일에 비하여 ‘수에즈’ 운하를 이용할 경우에는 약 16일이면 가능할 것이다.

그러나 ‘유럽’으로부터 극동까지 희망봉을 돌아 항해하는 고속 선박들은 이미 그 항로 상에 위치한 여러 항구 도시들과 매우 뜻깊은 관련을 맺고 있다. 그 운하가 그러한 해운 활동에 꼭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재개통되는 그 수로가 세계 무역과 경제에 실제로 미치는 영향이 어떠할지는 두고 볼 필요가 있다. ‘수에즈’ 운하가 미래의 어떤 분쟁의 초점이 될 것인지의 여부도 아직 불확실하다. 분명히 오늘날의 낙관적인 계획 입안자들이 예상치 못한 어떤 상황들이 그 “큰 도랑”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수도 있기 때문이다.

[1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지중해

‘포오트사이드’

‘멘잘라’ 호

‘수에즈’ 운하

‘칸타라’

‘이스메일리아’

‘시나이’ 반도

‘팀사’ 호

대 ‘비터’ 호

소 ‘비터’ 호

‘이집트’

‘수에즈’

‘포오트 타우피크’

‘수에즈’ 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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