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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흥미있는 ‘바티칸’ 관광
  • 깨어라!—19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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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5
깨75 7/8 8-11면

흥미있는 ‘바티칸’ 관광

이제 당신도 과거에 점술가들과 관련이 있었던 한 언덕을 방문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누마폼필리우스’—‘로마’의 전설적인 2대 왕—가 백성에게 그의 ‘바티시니아’ 즉 신들의 선언문이라고 하는 것을 낭독했다고 한다. 그로부터 수세기가 지난 후, 사람들은 그 근처에 있는 ‘네로’의 원형 경기장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참혹한 죽음을 목격하였다.

옛날의 점술가들은 사라졌다. 원형 경기장 내의 야만적이고 끔찍스러운 광경에 환호성을 올리던 군중들도 사라졌다. 오늘날 ‘바티칸’ 언덕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가 점유하고 있다. 완전히 ‘로마’ 시로 둘러싸여 있으며, 거의 전체 주위가 담으로 둘려있는 ‘바티칸’ 시는 면적이 108.7‘에이커’ 밖에 되지 않으며, 그곳의 인구는 1,000명을 하회하며, 그중에서도 많은 수는 거기에 살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칸’은 전세계 577,600,000명의 ‘로마 가톨릭’ 교도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다.

1929년의 ‘라테란’ 조약에 따라 교황을 그 통치자로 하는 별개의 주권 국가로서 ‘바티칸’ 시국(市國)이 설립되었다. 그 조약은 ‘이탈리아’의 왕 ‘빅토르 엠마누엘’ 3세를 대리하여 ‘베니토 무쏠리니’가 서명하였으며, 교황청의 대표로는 ‘가스뻬리’ 추기경이 서명하였다.

일설에 의하면 ‘바티칸’ 시를 약 8분 내에 걸어서 횡단은 할 수 있지만, 이곳에 소장되어 있는 모든 예술품과 학술 자료들은 일생을 두고 보아도 다 볼 수가 없다고 한다. 교황 ‘바오로’ 6세가 1975년을 “성년”으로 선포하였기 때문에, 틀림없이 수백만의 사람들이 ‘바티칸’을 방문하고자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그곳을 방문한다고 가정해보자. 그리고 방문하면서, 위압을 당한 어떤 순례자들이 간과할지도 모르는 몇가지 특징을 깊히 음미해 볼 수 있도록 충분한 시간 여유를 가지고 걸음을 옮겨 보도록 하자.

성 ‘베드로’ 광장

우리는 이제 ‘티베르’ 강 서쪽편을 걸어서 ‘바티칸’을 들어가는데, 좌우에 284개의 기둥과 88개의 벽기둥으로 되어 있는 ‘지오바니 베르리니’의 사중(四重) 주랑(柱廊)이 있다. 그 네 줄의 기둥들이 타원형으로 성 ‘베드로’ 광장을 둘러싸고 있다. 그 주랑의 꼭대기에는 140개의 “성자”와 순교자들의 상이 있다.

그 광장의 중앙에는 높이가 80‘피이트’ 이상이고 무게는 100만 ‘파운드’쯤되는 붉은 색 화강암 방첨비(方尖碑)가 서 있다. 그 방첨비의 기원은 무엇인가? 이것은 원래 ‘갈리굴라’ 황제가 고대 ‘헬리오폴리스’로부터 약탈해 와서 ‘네로’가 완성한 타원형 노천 경기장에 세웠던 것이다. 그 방첨비에는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에게 바치는 봉헌 비문이 새겨져 있다. 19세기 전의 그리스도인들은 이 ‘이집트’산(産) 방첨비의 그림자 속에서 비참한 죽임을 당하곤 하였다. 그 후에 이것은 어떻게 이곳 성 ‘베드로’ 광장으로 오게 되었는가?

이것은 교황 ‘식스투스’ 5세의 명령에 의하여 옮겨져서, 1586년 9월 14일에 ‘바티칸’에 세워졌는데 그날은 ‘식스투스’가 항상 “행운의 날”로 여기던 수요일이었다. 이 날은 또한 십자가 찬송 축제일이기도 하였다. 이 방첨비의 이교와의 연관성을 고려하여 그 교황은 그 단석(單石) 방첨비에 붙은 이교의 신령을 주술로써 쫓아버리려고 시도한 바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

‘가톨릭’ 전설에 따르면, 사도 ‘베드로’가 ‘로마’에서 순교당하였고 장사되었다고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 사도가 그 도시에 간 적이 있다고 말하지도, 암시하지도 않는다.a 그러나, 기원 325년 경에 ‘로마’ 황제 ‘콘스탄틴’은 ‘베드로’의 무덤이라고 추측되는 곳에 대 성당을 건축하기 시작하였다.

1506년 교황 ‘율리우스’ 2세는 그 성당을 재건하기로 결정하였다. ‘도나아토 브라만테’가 이 교회를 지은 여러 건축가들 중의 최초의 사람이었으며, 그들 중에는 ‘미켈란젤로’도 끼어 있었다. 마침내 1626년에 ‘우르반’ 8세에 의하여 봉헌되었을 때, 그 대성당은 ‘라틴’ 십자가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길이가 약 614‘피이트’이며 전체 면적이 약 163,000평방 ‘피이트’인 동 건물은 대략 80,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 그렇다, 이것은 ‘매머드’—세계에서 가장 큰 교회당이다.

대성당의 바닥(이 바닥 층에서 십자가형 구조물의 길고 짧은 팔들이 가로질러져 있다)으로부터 위쪽으로 435‘피이트’ 위에는 ‘모자이크’와 황금 도금이 된 거대한 ‘도움’(반구형 지붕)이 있다. 이것은 직경이 약 138‘피이트’이다. 이 ‘도움’ 속의 16개의 별개의 판벽에는 예수 그리스도, 그의 어머니 ‘마리아’, 사도들 및 “성자들”이 그려져 있다.

대성당의 거대한 ‘도움’ 밑에는 주제단이 있다. 이곳에서는 교황(혹은 교황이 대신으로 지명한 추기경)만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그 제단의 위에는 교황 ‘우르반’ 8세가 잘 보존되어 내려온 ‘로마’의 이교 신전인 ‘판데온’(만신전)에서 가져온 동판들을 사용하여 ‘베르니니’가 그 모양을 고안한 천개가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같은 그러한 거대하고 호화로운 대건물이 있게 된 경위는 무엇인가? 이 점에 대하여 약간의 빛을 밝혀 주는 것으로, ‘앙드레 베레’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마데르노’는 [원래의] 희랍 십자가형 초안을 ‘라틴’ 십자가형으로 바꾸었으며, ‘베르니니’는 화려한 장식들을 도입하고 대주랑의 두 개의 거대한 팔을 달아붙여 그 초안을 확장함으로써 마무리를 지었다. 그들은, 종교 개혁을 직면하여, 전세계에 막강하고도 장중한 그리스도교의 머리인 ‘로마’가 다시 한번 찬란하게 빛를 발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데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가톨릭’ 교회의 위광, 힘, 능력, 한 마디로 표현하여 장엄함’을 표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우리는 바로 이 성당의 물질적인 과시 속에서 ‘로마’의 허식적인 화려함과 이교의 시위적인 겉치레 사이의 본질적인 계속성을 발견할 수 있다.”—「숭배에서의 건축」.

주목할 만한 예술품들

대성당 안에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들어 있다. 예를 들어서, 그 안을 거니노라면 ‘미켈란젤로’의 유명한 ‘피에타’, 즉 죽은 예수가 자기 어머니 ‘마리아’의 무릎에 안겨 있는 조각품을 보게 된다. 원래 이것은 어떤 ‘프랑스’의 추기경의 무덤에 장식하려던 것이었다. 우연히 어떤 순례자들이 이 작품을 가리켜 ‘크리스토포로 소라리’의 것이라고 하는 말을 들은 후에 ‘미켈란젤로’는 밤을 이용하여 자기 이름을 새겨넣은 ‘리본’을 하나 부착하였다. 이 띠는 ‘마리아’의 왼쪽 어깨로부터 오른쪽 둔부로 흘러내리게 된 것인데 이것으로 말미암아 그 조각가의 신분이 사람들의 주의를 이끌게 되었다.

‘베르니니’가 만든 정교한 구리 상자 내부에는 여러 세기 동안 특별한 의식이 있을 때 교황들이 사용해오던 하나의 유물이 들어 있는데, 그것은 오랫 동안 “성자” ‘베드로’의 의자로 숭상을 받아온 것이다. 그 전면에는 18개의 상아 널판이 붙어 있는데 그것들은 신화에 나오는 ‘허큘리스’의 12난사(難事)와 황도(黃道) 12궁(宮)에 나오는 것으로 생각되는 여섯 괴물이 그려져 있다. ‘베드로’는 결코 이 좌석에 앉았던 적이 없다. 탄소-14 측정법은 ‘베드로’가 죽은 지 약 700년 후인 9세기에 이것이 만들어진 것임을 지지한다. 한 상아 널판 조각에는 ‘로마’ 황제이자 서(西) ‘프랑크’의 왕이었던 대머리 ‘찰스’의 흉상이 새겨져 있다. 아마 이 참나무 왕좌는 기원 875년 12월에 교황 ‘요한’ 8세에 의하여 행하여진 ‘차알스’의 대관식을 위하여 ‘로마’로 운반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티칸’ 당국이 그러한 기원을 인정(1969년 11월에)한지 몇 해가 지난 지금까지도 이 중세의 의자는 여전히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영예로운 자리를 점유하고 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보좌에 앉아 있는 “성자” ‘베드로’의 동상으로 돌려보자. 이 동상의 머리에는 후광(後光)이 만들어져 있고, 오른쪽 발은 앞으로 뻗혀있다. 1857년, ‘피오’ 9세는 그 생명없는 발가락에 ‘키스’하는 사람들에게는 50일간의 면죄를 윤허하였다. 많은 순례자들은 그것에 ‘키스’하고 나서 십자가 호를 긋곤 하였다. ‘키스’를 하지 않는 왼쪽 발의 발가락들은 뚜렷한 모양을 하고 있다. 그러나 오른발의 발가락들은 마멸되고 말았는데, 분명히 신앙심이 깊은 수천의 사람들이 ‘키스’하고 쓰다듬었기 때문에 그렇게 되었을 것이다. ‘베드로’ 축제일이 되면 이 형상은 보석을 박은 교황의 관과 복장으로 꾸민다.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광경은 말하지 못하며, 보지 못하며, 듣지도 못하며, 또한 “손들을 가졌으되 만져보지 못하고, 다리들을 가졌으되 걷지 못하”는 우상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영감받은 「시편」을 기억나게 해 준다.—시편(성영) 113:13-16, 천주교역.

전통에 따르면, 이 동상은 기원 4, 5세기에 주조된 것이라고 하는데, 일각에서는 13세기에 만들어진 것이라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그러나, 일부 다른 사람들은 이와 견해를 달리하고 있다. 예를 들면, 이것에 관하여, ‘알. 시. 윈드햄’이 지은 한 ‘로마’ 관광 안내서는 이렇게 명시하고 있다. “그 동상은 원래 ‘주피터 카피톨리누스’의 신전에 있는 ‘주피터’ 상이었는데, 교황에 의하여 더 거룩한 목적을 위하여 그 용도가 바뀐 것이다.”

이 동상의 불확실한 기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에게 바치는 영예이다. ‘베드로’라면 그러한 숭배를 승인하겠는가? ‘이탈리아’ 군대의 백부장 ‘고르넬리오(고넬료)’가 ‘베드로’의 발 앞에 엎드렸을 때, 이 겸손한 사도는 ‘키스’하고 쓰다듬도록 발을 앞으로 내놓지 않았다.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다! 성경은 이렇게 우리에게 알려 준다. “‘베드로’는 그를 일으켜 세우며 “일어나십시오. 나도 사람일 따름입니다.” 하고 말하였다.”—사도 10:25, 26, 공동번역.

‘시스티나’ 교회당

우리가 다음으로 구경할 곳은 교황 ‘식스투스’ 4세의 명칭을 따서 이름을 붙인 ‘시스티나’ 교회당이다. 그의 명령에 따라 1475년부터 1481년 사이에 건축한 이 건물들은 길이가 132‘피이트’, 폭이 45‘피이트’ 그리고 높이가 68‘피이트’이다. 교황의 사유(私有) 교회당인 이 건물은 여러 가지 의식과 교황 선출 모임이 행하여지는 장소로 사용되어 왔다.

‘시스티나’ 교회당은 1508년경에 이미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포함하고 있었는데, 그 때에 ‘율리우스’ 2세가 ‘미켈란젤로’에게 그의 기술을 발휘하여 동 건물의 천정에 그림을 그려넣도록 위탁하였다. 그 완성된 ‘프레스코’ 벽화에는 343명의 인물이 그려져 있다. 주로 창조, 인간의 타락 및 홍수의 장면들이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그 그림들 가운데는 또한 그리스도의 조상들, 그리고 성서의 예언자들 및 이교 예언자들, 즉 무녀(巫女)들이 포함되어 있다.

무녀라고? 그렇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델파이’ 무녀도 들어있다. ‘오리겐’에 따르면, “‘아폴로’의 예언의 영이 그 여자의 음부로 들어갔”으며, 그 후에 그는 미친 상태에서 신탁을 발표하게 되었다는 말이 있다. 그 여자는 악귀에 들렸던 것이다. (사도 16:16-18 비교) 「바티칸 안내서」(1973)에는 “‘미켈란젤로’의 의도는 고대 ‘히브리’와 이교 세상이 ‘메시야’를 기다리고 그에게 희망을 걸고 있음을 묘사하자는 것이었다”고 기술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상 하나님께서는 이교 여예언자들에게 소식을 주신 적이 없다. 더우기, ‘메시야’를 기다리는 경건한 여예언자들, 즉 ‘미리암’, ‘드보라’, ‘훌다’ 및 ‘안나’같은 여인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무녀들을 성서의 예언자들과 나란히 그려놓는다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닌가?—출애굽 15:20, 21; 사사 4:4-7; 열왕 하 22:14-20; 누가 2:36-38.

수년 후(1534-1541), ‘미켈란젤로’는 ‘시스티나’ 교회당의 제단 후벽에 “최후의 심판”을 그렸다. 이 ‘프레스코’ 벽화에는 죽은 자들이 격노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심판을 받도록 소환을 받으며, 그는 많은 자들에게 고초의 지옥의 형벌을 선고하는 그림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동 미술 작품은 지옥은 인류의 일반 무덤으로, 그곳에 들어간 죽은 자는 아무런 의식이 없으며, 아무런 고통을 당할 수도 없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성서와 직접적으로 위배된다! 그리고 예수가 잔인하고, 격노하는 심판관이 될 것이라는 사상도 성서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다. (전도 9:5, 10; 이사야 11:1-5) 그러나, 사제직에 입문하기 전에 두 명의 정부를 취하였으며 네 명의 남아 사생아의 아버지가 되었던 교황 ‘바오로’ 3세는 이 “최후의 심판”을 보자, 무릎을 꿇고 “주여, 주께서 심판 날에 임하실 때 저의 죄악을 책하지 마옵소서”라고 애원하였다는 말이 전해지고 있다.

작금에 이르러 외설물이 크게 기승을 부리면서, 사람들에게 온갖 악영향을 미치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시스티나’ 교회당의 천정에 그려져 있는 많은 인물들이 나체라는 것을 전혀 무시할 수 없다. 한 때 “최후의 심판”에 나오는 원래의 나체들이 여러 비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에 교황의 명령으로 후일에 어떤 인물들의 나체를 가리었다고 한다.

정원들, 박물관들 및 유명한 도서관

‘바티칸’에는 또한 아름다운 정원들, 여러 박물관 및 괄목할 만한 화랑들이 모여있다. ‘피오-클레멘티노’ 박물관에 있는 한 제단에는 승리의 여신이 양각(陽刻)으로 얕게 새겨져 있으며, 그 여신은 다음과 같은 명문(銘文)을 담고 있는 방패를 들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원로원과 ‘로마’ 시민은 신이 되신 ‘시이저’의 아들, ‘폰티펙스 맥시머스’이신 ‘아우구스투스’ 황제께 본 제단을 바친다.” 한때 ‘로마’의 이교 제사직의 우두머리가 그리고 후에는 ‘로마’의 황제들이 사용하던 이 ‘폰티펙스 맥시머스’라는 칭호(문자적인 뜻은 “가장 위대한 교량 건축자”임)를 ‘그라티안’ 황제는 그리스도인에게 적합치 않은 것으로 배척하였었다. 그러나 4세기의 교황 ‘다마서스’ 1세는 이것을 기꺼이 받아들였으며, 그리하여 이것은 교황의 칭호의 하나로 지금까지 남아있다.

여러 가지 사본들과 서적들의 보고—‘바티칸’ 도서관이 바로 그것이다. 약 1,000,000권의 인쇄된 도서 외에도 약 90,000개의 사본이 소장되어 있다. 이 중에는 기원 4세기의 귀중한 희랍어 성서 사본인 ‘바티칸’ 사본 1209호가 있다.

“은과 금은 내게 없”다?

‘바티칸’을 방문하는 당신은 필경 그 값비싼 대건물들, 보석이 박혀있는 종교적인 물품들, 유명한 예술품 등에 의하여 감명을 받을 것이다. 교황청은 많은 것을 순수한 헌납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것이 진상의 전부는 아니다. 극도로 많은 비용이 든 성 ‘베드로’ 대성당에 관한 다음과 같은 말이 있다. “‘율리우스’ [2세]와 후일의 교황들이 그 사업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부과한 세금이 그러하였듯이—채택된 ‘도나토 브라만테’의 설계 내용은 맹렬한 반대를 불러일으켰다.” (‘존 알. 헤일’과 ‘타임-라이프’ 문고의 편집자들 공저 「인간의 위대한 시대, ‘르네쌍스’」) 독일에서 ‘도미니카’의 수도승 ‘요한 테첼’에 의한 면죄부 판매를 통하여 수행된 동 대성당 건축 자금의 모금 운동이 ‘루터’가 주도한 종교 개혁의 한 가지 원인이다.

‘로마 가톨릭’ 교회는 미천한 어부이자 예수 그리스도의 사도였던, ‘베드로’ 위에 세워졌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은 그토록 엄청난 재물과 약간의 동냥을 구하던 앉은뱅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던 ‘베드로’의 말을 조화시키지 못하고 있다. “은과 금은 내게 없으나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준다.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 이렇게 말하자 그 앉은뱅이는 일어나 걷게 되었다. 그렇다, ‘베드로’는 인간적인 요소와 영적인 보물에 중점을 두었었다. 그러나 우리가 ‘바티칸’을 구경해 보면 물질적인 것들에 역점을 두어 왔음을 알 수 있다.—사도 3:1-26, 공동번역

[각주]

a 「파수대」 1966년 8월 1일호, 295-300면을 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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