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태의연한 탄압이 재연되다
지난 1972년부터 1975년까지 3년간, ‘모잠비크’는 인접국인 ‘말라위’로부터 피해 나온 30,000명 이상의 여호와의 증인들의 피난처였다. 극심한 박해로 인하여 본국에서 피난해온 이들 ‘말라위’인 남자, 여자, 어린 아이들은 ‘모잠비크’ 내에 있는 10개의 난민 수용소에서 어느정도 평온을 찾았다. 본 기사를 집필할 당시에 들어온 최근 보도에 의하면, 아직도 거기에는 상당수의 난민들이 있다고 한다. 이 모든 점에 대하여 전세계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모잠비크’ 국민에게 감사를 느낀다.
그러나 현재 어떤 분자들이 ‘모잠비크’ 원주민 여호와의 증인들을 극심하게 공격하기 때문에 이 피난처가 무자비한 박해의 도가니로 화할 우려를 낳고 있다.
‘모잠비크’ 내의 ‘라디오’와 신문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을 반대하는 선전을 쏟고 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포르투갈’ 식민주의가 남기고 간 첩자들”, “이전의 ‘피데스’ (‘포르투갈’ 비밀 경찰)”, “사회질서를 전복”시키려는 목표를 가진 자들이라고 묘사되었다. (「노티시아스」지, 1975년 10월 9일자) 1975년 10월 22일자 「에이 트리뷰나」지는 그들을 가리켜 “종교적 광신주의에 열렬히 매달려 ··· 세금을 내지 않으며, 사회 질서를 존중하지 않으며, 국민의 동원체제와 조직화를 폐지”하려하고, “무정부 상태”를 가져오려 한다고 하였다.
이점을 다른 소식통에서 알려 주는 내용과 비교해 보라. 한때 폭도들이 한 도시 전체를 소란속에 몰아넣고, 일단의 군중이 그 도시의 관리들 앞에 모여 이렇게 외친 일이 있다. ‘천하를 어지럽게 한 이 사람들이 여기도 왔읍니다. 그들은 모두 법을 경시하는 자들입니다.’
이 후자의 보도는 1,900년 전에 일어났던 사건에 관한 것이다. 그리고 그 당시의 그런 비난은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과 그의 동료 ‘실라’를 지탄하는 소리였다. (사도 17:6, 7) 그러나 그런 말은 거짓말이었으며 완전히 허위였다.
전세계 200여 나라에서 준법 정신이 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잘 알려진 여호와의 증인들을 가리켜서 그런 말을 할 때, 그것은 전적으로 허위이다. 오늘날 ‘모잠비크’에서 그들이 받고 있는 그러한 비난은 근본적으로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받은 비난이나 다름이 없다. 그리고 그 당시와 똑같은 탄압이 현재 참다운 그리스도인들에게 고통을 주고 있다.
‘모잠비크’ 내에서 그러한 형태의 탄압은 1975년의 정권의 교체를 계기로 시작된 것이 아니다. 그리고 이 점은, 그곳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포르투갈’ 식민주의를 옹호하고 있다는 주장이 허위임을 폭로해 준다. 사실을 살펴보면 그 비난이 터무니 없는 거짓말임을 알 수 있다.
과거 40여년 동안, ‘모잠비크’ 내의 여호와의 증인들은 독재자들의 탄압을 받아왔다. 그들은 ‘피데’(‘포르투갈’ 비밀 경찰)의 손에 무자비한 박해를 무수히 받아왔다. 이제 역사적 사실이 알려 주는 점을 살펴 보자.
역사 기록을 살펴봄
1925년에, 남‘아프리카’ 금광에서 일하던 몇명의 ‘모잠비크’인들은 성서의 가르침을 설명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출판물 몇권을 받았다. 그들 중 몇명은 그해에 ‘빌라 루이사’ (‘모잠비크’의 수도인 ‘우렝소 마르케시’의 북쪽)에 있는 자기 집으로 돌아가서, 자기들이 배운 것들을 이웃에게 이야기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외국 선교사들이나 또는 ‘포르투갈’의 첩자들이 아니라 ‘모잠비크’ 본토인이, 그 나라에 여호와의 증인들이 전세계에 전파하고 있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소식을 소개하였다.
‘포르투갈’ 독재자 ‘안토니오 살라자’ 통치 기간인 1935년에 남‘아프리카’로부터 온 두명의 증인, ‘프레드 루디크’와 ‘데이빗 노오먼’은 ‘모잠비크’의 증인들의 활동을 돕기 위하여 그 나라에 입국하였다. 그런데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그들은 즉시 ‘포르투갈’ 경찰에 체포되어 추방되었다. 1938년과 1939년에도 그와 비슷한 노력을 하였지만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즉각 추방당하였다.
그러나, 이제 ‘포르투갈’ 당국자들은 더욱 강경하게 되었다. 그들은 「파수대」 잡지를 받은 ‘모잠비크’인들을 체포하기 시작하였다. 어떤 사람들은 2년 이상 감금되어 있다가 재판을 받았다. 어떤 사람들은 12년간이나 유형지인 ‘상토메’에 유배되어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모잠비크’의 북부에 있는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일하도록, 10년 징역형을 받았다.
독재자 ‘살라자’ 치하에서의 이같은 심한 박해는 ‘모잠비크’ 내의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용기와 인내의 시험이 되었다. 그들이 성서를 연구하기 위하여 함께 모일 때는 언제나 체포의 위험이 뒤따랐다. 그동안 많은 사람들이 체포되고 구타당하였으며, 투옥되거나 유형지에 유배되었다.
자유를 위한 노력도 거부되었다. 1955년에 영국으로부터 여호와의 증인인 ‘존 쿡’이 여호와의 증인들의 사업에 대한 공적인 이해를 촉구하기 위하여 파견되었다. 얼마 안있어 그는 비밀 경찰 수사관 앞에 불려가, 오랜 심문을 받았다. 그는 공산주의자이며, 비밀 집회를 개최했다는 혐의로 고발되었다. 그 관리를 직접 만나 여호와의 증인이 공산주의자들이 아니라는 점을 확신시켜 주긴 했지만, 그는 ‘쿡’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하여간, 당신네는 ‘가톨릭’ 교회를 반대하는데, ‘가톨릭’ 교회는 우리의 국교요, ‘가톨릭’ 교회는 우리로 하여금 ‘포르투갈’ 제국을 세우도록 도왔오!” ‘쿡’은 48시간 내에 그 나라를 떠나라는 명령을 받았다.
‘모잠비크’의 일간 신문인 「노티시아스」 1975년 10월 9일자에는 비밀 경찰의 우두머리이자 ‘모잠비크’ 대통령인 ‘사모라 마셀’이 “우리가 ‘포르투갈’ 식민주의자들에게 묶여 구타당하고 있을 때, 이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디 있었는가?” 하고 질문한 것을 인용 보도하였다. 그들은 어디 있었는가? 여호와의 증인 중 다수는, 그 당시 똑같은 ‘포르투갈’ 당국자들에 의하여 투옥되어 있었다고 대답할 것이다.
‘프란시스코 중구자’를 예로 들어 보자. 그는 ‘로우렝소 마르케시’ 형무소에서 1956년에 6개월간, 1964년에 3개월간, 1965년에는 1년간 형을 살았으며, 그리고 1969년에는 ‘마카바’ 형무소에서 2년간 복역하였다. 그의 아내와 다른 10명의 증인들도 그때 체포되었다. 이 모든 일은 그들이 ‘포르투갈’ 정부에 항거하는 명백한 범죄를 저질렀거나 치안 방해죄를 저질렀기 때문이 아니라 단순히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일어난 일이다.
1969년부터 ‘포르투갈’ 비밀 경찰은 여호와의 증인을 박해하려는 활동을 강화하였다. 증인들은 자주 불리어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러면 ‘포르투갈’ 당국자들과 비밀 경찰들이 증인들에게 뒤집어 씌운 주요 비난은 무엇이었는가? 그 당시 활동을 시작하였으며, 현재 ‘모잠비크’ 정부를 형성하고 있는 혁명당 즉 ‘프레리모’에 대항하여 투쟁하기를 거절한다는 것이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국가의 모든 정치 문제와 전쟁에 관하여 중립을 지킨다는 것을 명백히 밝혔다. 그들의 입장은 그리스도 예수께서 ‘로마’ 총독 ‘본디오 빌라도’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과 온전히 일치하였다.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요한 18:36.
같은 해인 1969년에 ‘모잠비크’ 남부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여러 회중의 장로들은 경찰서에 호출되었다. 이들 장로들은 여호와의 증인들의 활동과 집회가 금지되었다는 통고를 받았다. 심한 방해 가운데서도, 그들은 ‘예루살렘’ 당국자들이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들의 활동을 금지시키려고 압력을 가하였을 때 사도들이 취했던 입장과 일치하게 활동을 계속 수행해 나아갔다. 사도들은 ‘유대’ 당국자들에게 순종하든가 아니면 하나님의 명령에 순종하든가 둘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할 입장이었다. 그들은 법을 잘 준수하는 사람들이었지만, 두가지 명령이 서로 상충되는 이러한 경우에는 담대하게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하고 말하였다.—사도 5:29.
1969년에는, 여호와의 증인들이 ‘프레리모’에 대항하여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 비난의 근거였다. 그러나 1973년에 비밀 경찰은 상당수의 증인들을 체포하였는데, 이번에는 증인들이 ‘프레리모’ 지지자들이라는 것이 그들의 고발 근거였다! 1974년 3월 5일, 그러한 혐의를 받고 세 자녀의 아버지인 한 증인은 ‘마카바’ 형무소의 작은 감방에 수감되었다. 그는 2개월 동안 독방에 감금되었는데, 아무 것도 없이 맨 마루 바닥에서 잠을 잤다. 그의 경우는 ‘모잠비크’에 대한 ‘포르투갈’ 통치 말년에 부당한 취급을 받은 비슷한 여러 경우의 일례에 불과하다.
식민주의의 종결—더 큰 자유의 빛인가, 혹은 편협한 암흑의 연속인가?
1974년 4월 25일이 되었다. 거의 하루밤 사이에, ‘포르투갈’ 본토와 해외 영지 내의 정치적 상황이 극적으로 변하였다. ‘리스본’에 정변이 일어나 48년간의 독재 정치를 종식시켰으며 ‘포르투갈’ 제국을 뒤흔들었다.
‘포르투갈’ 내와 해외 식민 지역 내에서 자유의 전망이 밝아지는듯 보였다. ‘모잠비크’ 주민들은 기뻐 어쩔줄을 몰랐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40년간의 길고도 캄캄한 박해를 벗어날 것인가 궁금하게 생각하였다.
1975년 6월에 ‘프레리모’ 세력에 권력을 완전히 이양하기에 앞서 ‘모잠비크’에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비교적 자유로웠던 이 기간 중 여호와의 증인들은 공개적으로 성서 연구를 할 수 있었다. 그들은 심지어 일반 대중을 초대하는 대규모의 대회들을 개최하기도 하였다.
1975년 4월에 처음으로, 그들은 ‘로우렝소 마르케시’에서 ‘아프리카’인들과 백인들이 함께 섞여 대회를 가질 수 있었다. ‘포르투갈’의 독재 정치하에서는 그런 일이 불가능하였던 것이다. 증인들은 인종적 구별이 전혀 없이 그리스도인 우애를 나눌 수 있었던 것을 기뻐하였다.
그러나 이제 정치 세력들은 정치적인 지지를 행동으로 표현할 것을 크게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행동 대원들은 사방으로 모든 사람들을 찾아다니면서, “프레리모 만세”를 외치며 오른쪽 주먹을 치켜들어야 하는(공산주의자들의 경례 방법처럼) 정치 집회에 참석하라고 하였다.
여호와의 증인들은 어떠한 입장을 취하였는가? 그들은 계속 비정치적 입장을 유지하였다. 그들은 ‘무소리니’ 통치 때 ‘이탈리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취했던 똑 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 당시 ‘이탈리아’ 국민들은 “총통 만세”를 외치며 ‘파쇼’주의자들의 인사를 해야 하였다. 증인들은, 모든 사람들이 “히틀러 만세”를 외치며 ‘나찌’식 경례를 해야 했던 때의 독일 여호와의 증인들과 같이 처신하였다. 그들은, 제 2차 세계 대전 중 모든 국민에게 일본 천황을 숭배하도록 강요하던 때 일본 점령지내의 형제들이 취한 바와 똑같은 입장을 취하였다.
그렇다. 그들의 입장은 영국, 미국, ‘포르투갈’, ‘스페인’, 기타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나 취하였던 같은 입장이었다. 그들은 정치 구호나 정치적 인사를 거부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어떠한 어려움을 초래한다 할지라도 정치 문제에 있어서 그리스도인 중립을 유지하였다. 수많은 사람들이 여러 해 동안 독일 집단 수용소나 그 지독한 ‘시베리아’의 강제 노동 수용소에서 생활을 하였다.
그러나 전세계 모든 나라에서와 같이, ‘모잠비크’ 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은 로마서 13:1에 있는 성서의 명령에 따라서 국가의 권세자들에게 계속 온전한 존경을 나타내 왔다. 그리고 그들은 세금을 포탈하려 하는 대신 충실하게 바침으로써, 직장에서 근면하고 신뢰성있는 사람이 됨으로써, 꾸준히 법을 준수하는 시민이 됨으로써 그러한 사람들임을 나타내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 가운데 들어있는 그분의 율법에 명백하게 반대되지 않는 한, 여하한 법률도 거스리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1975년 6월 25일부터 발효된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헌법 제 33조는 다음과 같다.
“국가는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국민 모두에게 개인의 자유를 보장한다. 이러한 자유에는 가택 불가침과 통신의 비밀이 포함되며, 법률에 규정된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이러한 자유가 제한을 받지 아니한다.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정부는 국민에게 자신의 종교를 실천 또는 실천하지 않을 자유를 보장한다.”
헌법 제 25조는 다음과 같다.
“모잠비크 인민 공화국 내에서는 아무도 법률에 의하지 아니하고는 체포되거나 재판에 회부되지 아니한다. 국가는 피고에게 변호의 권리를 보장한다.”
이러한 말들이 진정한 의미가 있는가? ‘모잠비크’ 내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일어난 일들을 보면, 그 점에 대해 심각한 의문이 생긴다.
완전 독립 선언이 있기 약 한달 전, ‘조앙 벨로’ 시에서 수 ‘마일’ 떨어진 ‘총구엔’이라고 하는 곳에서 여호와의 증인의 지방 회중은 그들의 정규 성서 연구를 위한 일요일 집회를 보고 있었다. 정치 집회에 가던 ‘로마 가톨릭’ 교도들과 ‘프로테스탄트’ 교도들로 이루어진 일단의 사람들이 성서 연구 집회에 들어와서 집회를 방해하며, 거기 참석해 있는 사람들에게 정치 집회에 참석하지 않는 이유가 무엇이냐고 힐문하였다. 그들은 증인들을 위협하고나서 떠나갔다.
며칠 후 5월 23일에, ‘프레리모’ 군인들이 경찰차를 타고와서, 증인들의 성서 집회에 참석한 사람중 여섯명을 연행하여 갔다. 지휘관은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이들 여섯명을 구타하고 발로 차고 한 다음 감옥에 집어 넣었다.
감옥에서도 강제로 “프레리모 만세”를 외치게 하려고 매일 구타하였다. 그들 중 세명은 새로 관심가진 사람들이었으며, 아직 침례받은 증인들이 아니었다. 그들 세명은 구타에 못이겨 항복하였다. 침례받은 증인들 세명은 자기들의 그리스도인 양심을 거스리기를 확고부동하게 거부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밖으로 끌려 나가, 그들이 들어설 정도의 구덩이를 파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은 머리만 보이게 그 구덩이 안에 강제로 세워진 후 만일 그들이 정치 표어를 계속 거부하면 총살당한 다음 그대로 묻어버리겠다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의 양심을 거스리지 않겠다는 자기들의 결심에서 한치도 물러나지 않았다. 결국 그들은 감옥으로 되돌려 보내졌다.
다행히, 이러한 학대를 ‘로우렝소 마르케시’에 있는 국방장관에게 보고하자 그는 놀라움을 표시하고, 그 지역 ‘프레리모’ 사령관에게 전화를 걸었다. 얼마 안있어 그 증인들은 석방되었다. 그러나 이런 일은 어두운 상황 가운데 비친 하나의 밝은 점에 불과하다.
1975년 6월 25일, 독립일에 새로운 헌법이 완전히 발효하였다. 방금 설명한 바와 같은 종교의 자유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이 이제는 과거지사가 될 것인가? 진보적이고 계몽된 태도가 편협한 불관용을 압도할 것인가?
난폭한 운동이 시작되다
그에 대한 답은 속히, 거의 수일 내에 왔다. 전국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을 중상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도지사들과 기타 정치인들은 ‘라디오’ 방송 연설로 연거푸 공격의 화살을 퍼부었다.
행동 대원들의 교사에 의하여 도처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이 체포되고 ‘프레리모’ 사령부로 연행되어 가서 심문을 받았다. 그들은 빈번히 구타를 당하였다. 한 예로서, 1975년 9월 13일, ‘로우렝소 마르케시’ 지역에 있는 ‘초우팔’의 여호와의 증인 회중에서 일어난 일을 고려해 보자.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장로인 ‘엘리아스 마헤니’는 그 회중의 왕국회관에서 300명의 청중에게 연설을 하고 있었다. 그의 연설이 끝날 때쯤, 그 지방 행동 대원들이 회관으로 들어와 집회를 방해하려 하였다. 그들에게 단호하면서도 정중하게 아직 집회가 끝나지 않았으니 기다려 달라고 부탁하였다.
회중이 마지막 기도에서 “아멘”하기가 무섭게, 이 행동 대원들은 연단으로 올라가서 전 회중에게 “프레리모 만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세번 그런 요구를 하였지만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그러자 그들은 자기들이 ‘프레리모’ 군인들을 불러올 때까지 그대로 회관에 머물러 있으라고 회중에게 명령하였다.
지휘관은 도착 직후 책임자 ‘파드레’(목사)가 누구냐고 물었다. 증인들에게는 ‘파드레’가 없다는 설명을 한 후 ‘마헤니’는 자기가 연설을 한 사람이라고 밝혔다. 그러자 그와 다른 네명이 연단으로 끌려나갔다. 그리고 윗옷을 벗기운 후 “프레리모 만세”를 외치라는 명령을 받았다. 그들이 응하지 않자, 심하게 구타를 당하고 전깃줄로 묶였다. ‘마헤니’의 팔은 아직도 전깃줄에 깊게 파인 상처가 남아있다.
그 다섯명은 인근 군 부대로 끌려갔으며, ‘마헤니’는 사람들에게 “‘프레리모’를 타도하라”고 외치게 하였다는 고발을 받았다. 그것은 고의적이고 사악한 거짓 말이었다. 그리고 군인들은 그를 주먹과 총의 개머리판으로 구타하였다. 또한 다섯 명 모두는 군인들의 허리띠로 맞았다. 그들은 그날밤 더러운 화장실에 감금되었다. 새벽 4시에 그들은 불리어 나가 다시 구타당하였다. ‘마헤니’는 ‘프레리모’와 싸울 군인들을 훈련시켰다는 거짓 비난을 받고 또 다시 구타당하였다. 후에 이러한 혐의는 근거없음이 인정되었다.
날이 새자, ‘프레리모’ 상사 한명이 와서 이들을 심문하였다. 그는 그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당신들이 ‘프레리모 만세’를 부르지 않으면, ‘프레리모’는 당신들을 이 나라에 있게 하지 않을 것이요. 왜냐하면 그들은 10년이나 투쟁하였는데, 그것은 여호와를 위한 투쟁이 아니었오. 그들은 여호와로부터 도움을 받지 않았오. 모든 사람이 ‘프레리모 만세’를 불러야 하오. ‘프레리모’가 ‘모잠비크’의 신이기 때문이요. ‘모잠비크’의 두번째 신은 총이요. 우리는 여호와에 관하여 아무 것도 듣고 싶지 않소.”
여자, 노인, 어린이 등 왕국회관에 있던 나머지 사람들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 모두는 그날밤 그리고 다음날까지 억류되어 있었다. 대다수가 구타를 당하고 철사로 묶였다. 그와 동시에 군인들은 이렇게 외쳐댔다. “너희들의 여호와가 도대체 누구냐? 왜 그가 와서 너희를 도와주지 못하느냐?”
24시간 동안 내내 아무도, 심지어 여자들이나 어린 아이들에게도 잠을 자거나 물을 마시거나 음식을 먹는 일 또는 변소를 사용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집회에서 사용하던 성서와 성서 보조서들은 소각되었다. 이것은 마치 중세 ‘유럽’ 시대가 되살아난 것 같았으며, 암흑 시대와 ‘가톨릭’의 종교 재판이 되돌아온 것과 같았다. 마침내, ‘증인’들은, “프레리모 만세”를 외치는 일을 배우지 않는다면 더욱 심한 고통을 받을 것이라는 위협을 받으며 떠나는 것을 허용받았다.
기타 야만적인 처사 가운데 또 하나의 예로, ‘로우렝소 마르케시’ 북부, ‘마구데’에서는 13명의 증인들을 체포하여 구타하였으며, 그들의 손가락으로 나무를 파내라고 명령하였다. 그런 다음 팔과 다리를 묶어놓고 대굴대굴 굴렸다. 고대 ‘로마’에서처럼 그 지방 주민들이 초대되어 그리스도인들이 고초를 겪는 장면을 구경하였다.
‘만자카제’ 근방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두개의 작은 회중에 속한 여러 명의 성원들이 투옥되었다. 그때 ‘가자’ 지구 지사가 그 지역에 왔으며, 나머지 증인들에게는 군중 집회에 참석하라고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 요구에 응하였다. 지역 영농 활동에 관한 연설이 있은 후 그 지사는 갑자기 모든 증인들에게 앞으로 나오도록 요구하였다. 그들은 그렇게 하였다. 그러자 그 지사는 남녀 불문하고 그들 모두를 체포하라고 명령하였다. 그들은 심하게 구타당하였으며, 어떤 사람은 너무 심하게 맞아서 귀와 눈으로 피를 흘렸다. 그런 다음 형무소에 수감되었다.
같은 ‘가자’ 지구에서는 증인들의 성실을 깨뜨리려고 2개월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줄곧 구타를 하였다!
그러나 이 모든 일은 앞으로 닥칠 대대적인 공격의 전조에 불과하였다. 수주 내에 공식적인 명령이 하달되었다. 전국에 있는 모든 여호와의 증인들을 체포하라는 것이었다.
이 명령은 조직적으로 그리고 무자비하게 이행되었다. ‘프레리모’ 추종자들은 집집으로 찾아다니면서 주민들에게 “프레리모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하였다. 그렇게 하지 않는 자들은 여호와의 증인으로 간주되었으며, 투옥되었다. 전 가족이, 아이들까지 무자비하게 끌려갔다.
이로 말미암아 현재 ‘모잠비크’에 수감되어 있는 여호와의 증인 수는 수천명에 이른다. 그들과 직접 접촉하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러나 어떤 증인들은 인근 국가들로 피하였다. 그들의 보고에 의하면, 수도인 ‘로우렝소 마르케시’ 내의 형무소들은 이제 “만원”이라고 한다. 형무소들이 만원이 됨에 따라, 수백명의 증인들을 수용하기 위하여 ‘상 요세’ 공동묘지 근처에 특별 수용소를 세웠다. 그 많은 사람들을 수용하기에는 숙소가 부족하기 때문에 대다수의 사람들은 담요도 없이 노천에서 잠을 자야 한다. 그들에게 아무런 음식도 공급되지 않는다. 관리들은 친척들에게 목요일과 일요일에만 음식을 가져다 주는 것을 허용하고 있다. 그러한 동정적인 방문자들도 “프레리모 만세”를 부르기를 거부하면 체포될 위험이 있다.
정부의 계획은 분명히 수많은 증인 남자들을 ‘남풀라’, ‘쿠엘리마네’와 같은 북부 도시로 보내려는 것이다. 그들은 결국 거기서 건축 공사에 노예 노무자들처럼 사용될 것이다. 자녀들은 ‘프레리모’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정치학교에 보내질 것이다. ‘라디오’ 발표에 의하면, 은행에 예치되어 있는 증인들의 돈은 몰수될 것이라고 한다. 가옥과 차량은 정부에서 압수할 것이다.
그렇다. 이것은 낡은 전체주의 방식의 서글픈 재판이다. 즉 개인적 양심의 자유로운 행사를 허용치 않는 전체적인 조직화, 획일적인 사상 통제를 통한 국가 숭배, ‘나찌’의 노예같은 사역과 ‘시베리아’ 강제 노동 수용의 재판이다. 정당의 사상을 주입시키기 위하여 자녀들을 부모들로부터 강제로 분리시키고 있다.
신문 기사나 ‘라디오’ 방송에서는, “‘모잠비크’는 여호와의 나라가 아니다.” 또는 “이 광신적인 여호와의 증인들은 재교육시켜야 한다”는 등등의 성명등을 발표하였다. 어떤 자들이 찬동하는 ‘재교육’의 한 가지 형태에 대한 본보기를 보라: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무자비한 박해를 가한 후, 어떤 정당 추종자들은 증인들에게 주먹을 치켜 들고 “프레리모 만세”를 부르라고 요구할 뿐 아니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욕하라고 강압하기까지 하였다! 그들은 또한 증인들에게 주먹을 아래로 향하게 하고 “여호와 타도”라는 구호를 외치라고 요구하였다.
집단 체포가 시작되기 전, ‘키나바네’의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30여 성원들은 소환을 당하여 여러 시간 연설을 들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이 정치 문제에 간여하는 일이나 정치적 구호를 외치는 것을 거부하는 이유를 성서로부터 설명하자, ‘프레리모’ 사령관은 그들을 조롱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가 너희 여호와에게 이 집을 때려 부수도록 5분간을 주겠다.” 5분이 지나자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기꺼이 총을 가지고 여호와를 맞이하겠다. ‘포르투갈’ 병사들은 승리를 달라고 기도를 했지만 패배하였다. ‘프레리모’는 여호와 없이도 싸워 이겼다. 우리는 여호와를 패배 시킬 것이다. 우리는 ‘모잠비크’ 내에서 그의 이름을 원하지 않는다.”
이러한 태도는 자만에 차서 다음과 같이 말하던 고대의 ‘애굽’ 왕 ‘바로’의 태도와 얼마나 흡사한가: “여호와가 누구관대 내가 그 말을 듣고 ‘이스라엘’을 보내겠느냐? 나는 여호와를 알지 못하니 ‘이스라엘’도 보내지 아니하리라.”—출애굽 5:2.
그렇다면, ‘모잠비크’ 내에서의 진정한 문제는 무엇인가?
긴급한 대답을 요하는 질문들
새로운 공화국 헌법을 부인하는 그러한 일이 그 나라에 조금이라도 유익을 가져올 것인가? ‘모잠비크’ 국민은 숭배의 자유에 대한 그러한 사악한 만행으로 인하여 어떤 면으로든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여호와의 증인들이 정치활동에 가담하기를 거부하는 것이 그 나라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려는 신 정부의 노력을 실제로 방해하는 것인가? 사실은 그와 전혀 반대이다.
‘모잠비크’의 신 정부는 여러 가지 훌륭한 정책을 선언하였다. 여기에는 국민들을 위한 더 나은 교육(‘포르투갈’ 식민주의는 인구의 90‘퍼센트’를 문맹으로 만들어 놓았다), 매음과 술취함 등의 금지, 국민들에게 압제로부터 해방을 가져오는 일 등이 포함되어 있다. 실제로 여호와의 증인들은 그러한 정책에 대단한 기여를 하고 있다.
자문해 보라: 문맹자가 들끓는 나라에서 정치 구호를 외치는 것이나 경례를 하는 것이 발전을 이루어 줄 것인가? 그렇게 주장하는 것이 실제적이고 실용적인가?
그와는 반대로, 여호와의 증인들의 본과 활동은 어떠한가? 그들의 전체적인 숭배 방식은 교육과 글읽기에 대하여 적극적인 태도를 갖게 해준다. 어느 나라에서나 그들은 성서 연구 사업의 일환으로 읽고 쓰는 교육을 실시해 왔다.
‘멕시코’에서만도, 과거 28년 동안 그들은 48,000명에게 읽고 쓰는 것을 배우도록 도와왔다. ‘나이제리아’에서는 지난 4년 동안 이 일에 5,000여명이 도움을 받았다. 그리고 ‘모잠비크’ 내에서 지난 2년 동안 여호와의 증인들은 3,930명에게 읽고 쓰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그러므로 이러한 면에서 여호와의 증인들보다 더한 교육열을 가진 사람들은 없다.
정치 구호와 몸짓을 반복하는 것이 사람들의 도덕 표준을 높여줄 것인가? ‘나찌’ 독일에서 또는 ‘파쇼’ ‘이탈리아’에서 또는 인류 역사상 어느 기간에, 지구상 어느 나라에서, 그런 일이 있었는가? 사실은 그렇지 못하였음을, 그리고 그럴 수 없음을 우리에게 알려 준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성서 원칙에 고착하기 때문에, 90여년간이나 전세계에서 생활 표준이 높고, 도덕적으로 단정하고 깨끗한 생활을 하는 사람들로 명성을 얻어 왔다. 그들은 전세계에서 성적 부도덕, ‘알코올’ 중독, 마약 중독, 기타 그와 비슷한 타락된 습관을 극복하도록 수십만명의 사람들을 도와 주었다.
여호와의 증인들의 대회중 하나를 논평하면서, ‘나이제리아’ 신문 「데일리 타임즈」는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남자, 여자, 어린 아이들로 이루어진 5,000명 이상이나 되는 사람들이 나흘간이나 함께 기도하고 노래하고 먹고 잠자면서도 단 한건의 도둑질이나 싸움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다는 데 대하여 그들을 칭찬할 만하다. 그런데도 거기에는 질서 유지를 위한 경찰관이 한명도 없었다.” 분명히 그러한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게나 유익한 사람들이다. 범죄와 부패를 막으려는 정부의 부담에 엄청난 짐을 지워 주는 자들과 증인들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식민주의는 ‘모잠비크’의 새로운 정부에 막대한 외국 부채, 총계 수억 ‘달러’나 되는 짐을 지워 놓고 떠났다. 정치 구호와 몸짓이 그런 경제 문제를 해결하는 데 효과가 있을 것인가? 그렇지 않으면, 근면하고 신뢰성있고 정직한 사람들이 수행하는 노동, 더 높은 생활 표준에 기여하는 노동이 거기에 도움을 줄 것인가?
정치 구호를 외치고 몸짓을 하는 것이 납세를 보장해 줄 수 있는가? 가장 큰 목소리로 외치는 자들이 분명히 세금을 바치는 데 가장 정직한 자들인가? 어느 나라이든 탈세자들을 살펴보면, 애국심을 밖으로 전시하는 것이 탈세를 하지 않으리라는 믿을 만한 지침은 아니라는 점을 알려 준다. 그러나 여호와의 증인들은 부과되는 세금을 양심적으로 바치는 면에 있어서, 그리고 영업상의 정직성과 신뢰성에 있어서 어느 나라에서나 견실한 존경을 받아왔다.
1975년 10월 22일자 「트리뷰나」지와 1975년 10월 26일자 「템포」지 등의 신문 선전문에 보면, 필자는 여호와의 증인들에게 “계몽 반대 주의”라는 비난을 씌우려 하였다. 사전에 의하면, 이 말이 “진보하는 것에 대한 반대, 특히 복잡한 언어, 의식을 통한 지식의 전달에 대한 반대”라고 정의되어 있다. 그러나 사실은 어떠한가?
‘아프리카’ 전역을 통하여 사람들은 어떤 다른 종교 집단들보다도 여호와의 증인들이 ‘아프리카’의 모든 종족들을 갖가지 미신으로부터 해방되도록 많이 도와 왔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 이런 미신에는 마법을 행하는 일, 의식에 매어사는 일, 전통적인 기우, 종족 특유의 금기 등이 들어있다. 증인들은 사람들을 도와 인생과 인생 문제에 있어서 진취적이고 실제적인 접근을 하도록 하였으며, 가족의 연합을 이루도록 기여해 왔으며, 직장에서 책임감 있는 사람, 사려깊고 평화로운 이웃이 되도록 도와 왔다. 분명히 이러한 일은 ‘모잠비크’ 뿐 아니라 오늘날 전세계가 매우 필요로 하는 진보와 계몽에 속하는 일이다.
그와는 반대로, 사실을 왜곡시키려하는 자들, 자기들의 진상을 감추려하는 자들, 한 소수파에 대한 적의를 선동하는 선전으로 문제를 불분명하게 만드는 자들은 어떠한가? 그들은 분명히 “계몽주의자들”이라는 칭호를 받을 만한가? 기본적인 자유를 무자비하게 억압하려는 자들은 편협하고 비인도적인 과거사에서나 볼 수 있는 낡은 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인간의 자유를 희생시켜 국가 숭배를 촉진하려는 자들은 과거 수천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고대 ‘앗시리아’와 ‘바벨론’ 제국 시대에 행하던 케케묵은 방식을 따르고 있다. 확실히 그러한 행로는 참다운 진보와 지식의 전달을 향한 전진이 아니라 역행이다. 진리는 강력한 힘이 있으므로 그러한 책략에 호소할 필요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