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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음악이 내 인생을 지배하였다
  • 깨어라!—19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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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77
깨77 10/8 8-12면

음악이 내 인생을 지배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트러미”라는 별명으로 나를 잘 알고 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루이 암스트롱’ 및 기타 유명한 ‘오케스트라’와 함께 ‘트럼본’을 연주하였다. ‘트럼본’을 부는 나의 독특한 기법으로 인하여 “그녀는 달콤해” 또는 “마아쥐” 등의 노래가 ‘베스트 셀러’ 음반이 되었다.

1930년대 후반과 1940년대 초반에, 나는 또한 많은 ‘히트’ 곡을 내 놓았다. 잘 알려진 것 가운데 두 가지를 예로 들면, “테인트 홧 차 두, 잇츠 더 웨이 댓 차 두 잇”과 “홧 차 노우, 조우?”가 있다. 나는 또한 ‘빌리 홀리데이’를 위해 “트래블린 라이트”를 작곡하였다. 그 여자는 ‘폴 화이트맨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그 노래를 취입하였는데, 그 판의 판매 실적은 100만을 돌파하였다.

30년대 후반에 ‘지미 런스포오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하는 동안, 나는 여러 편의 영화에 줄연하였다. 후에, 나는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글렌 밀러 스토리”, “5페니”, “상류 사회” 등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음악은 내게 명성과 부를 가져다 주었다. 그러나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희생을 치르게 하였다. 하지만 내가 그 이야기를 하기 전에, 어떻게 음악이 내게 그토록 깊은 영향을 미쳤는지, 그러나 왜 내가 내 인생을 거의 다 망치다시피 하게 되었는지에 대한 내 과거를 이야기하는 것이 좋을 것같다.

남부 구석으로부터

나는 철도 노무자인 ‘오스보온 영’과 그의 아내 ‘애니 이밴절린’ 사이에서 1912년에 ‘조오지아’ 주 ‘사바나’에서 세 자녀 중 외아들로 출생하였다. 그 당시 ‘사바나’는 매우 미신이 강한 도시여서 여러 가지 불유쾌한 일이 많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러한 서글픈 일 중 하나는 ‘쿠 클룩스 클란’(KKK 단)이라는 것이 있었다. 그들은 흑인 지역에서 끊임없이 가두 행진을 하여 흑인들에게 ‘그들의 신분을 알고 그것을 벗어나지 않도록’ 위협을 주려 하였다. 나는 그들이 흰 천으로 자루 모양을 한 옷을 입고 흰 두건을 써서 얼굴을 가린 채 말을 타고 거리를 달려 올 때 느꼈던 공포를 지금도 기억하고 있다. 그들은 목적을 잘 달성하였다. 우리 어린이들은 무서워서 달아나 숨었던 것이다.

음악은 생활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우리가 사는 지역에 “홀리 로울러”라는 교회가 있었다. 그 교회는 상당히 소란스러웠지만 동시에 ‘리듬’도 풍부하였다.

또한 그곳에는 많은 음악인들이 있었는데, 그들 대부분은 ‘블루우스’ 가수들이었다. 우리 어린이들은 ‘사우드 캐롤라이나’ 주 ‘차알스튼’에서 찾아온 ‘젠킨스’ 고아 ‘밴드’에 의하여 깊은 영향을 받았다. 우리는 그 악단을 좇아서 뒤를 따라 가며 온 도시를 행진하였다.

우리 도시를 찾아온 ‘쇼우’단 가운데는 의사 ‘래비트 훗’의 ‘쇼우’단이 있었다. 그는 조그마한 병—아마 약이라고 생각됨—을 그 당시로는 상당히 큰 돈인 1‘달러’씩 받고 팔았다. 그는 길 모퉁이에 천막을 치고 ‘쇼우’를 하곤 하였다. 그는 작은 악단과 ‘코메디언’들 그리고 무희들을 거느리고 있었다.

‘사바나’를 방문하는 이러한 사람들과 그곳 분위기로 해서 음악은 신속히 내게 커다란 영향을 미치는 주요 요소가 되었다.

학교 교육과 출세의 시작

아버지는 내가 열 두살 때에 돌아가셨다. 2년 뒤에, 어머니는 나를 ‘버어지니아’ 주 ‘록케슬’에 있는 ‘가톨릭’ 군사 학교에 입학시키셨다. 어머니는 ‘가톨릭’교인은 아니었지만, 일을 하며 내 스스로 학비를 조달할 수 있는 조건이어서 그곳으로 나를 보낸 것이다.

나는, 한 주일은 벽돌공과 미장공으로 일하고, 다음 주는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나는 음악을 좋아하기는 했어도 학교에 들어갔을 때는 내가 음악으로 출세해 보겠다는 생각을 특별히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내가 어깨에 총을 메고 뜨거운 태양 아래서 훈련을 받고 있는 동안, ‘밴드’ 부원들은 그늘에 앉아서 악기를 불고 있는 것을 보고 결심을 하였다! 곧 나는 음악부와 깊은 관계를 갖게 되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밴드’ 연습실에서 보냈다.

어머니는 내가 여름 방학 동안 ‘사바나’로 돌아갈 만한 돈을 보내 주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학교에 그대로 남아 농장에서 일을 하였다. 이 ‘가톨릭’ 학교에서 4년을 마치고 떠나면서, 나는 교회는 다시 나가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하도 많이 무릎을 꿇었기 때문에 양 무릎은 헐어 있었다. 우리는 성서에 관하여는 전혀 배우지 않았으며, ‘라틴’어는 나를 혼란에 빠지게 하였다.

1930년 학교를 떠나서, 나는 ‘워싱턴 D. C.’로 향하였다. 그곳에 관하여 내가 아는 것이라고는 이전의 학급 동료 하나가 거기 살고 있다는 것 뿐이었다. 나는 거기서 ‘부커 콜맨즈 핫 초콜렛 오케스트라’의 10대 ‘트롬본’ 연주자로서 ‘데뷰’하였다. ‘트러미’라는 나의 예명을 붙여 준 사람은 바로 ‘콜맨’이었다. 그는 자기 악단의 연주자들 이름을 기억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각자가 연주하는 악기의 이름을 따서 모든 사람들을 불렀다.

우리는 계약에 따라 동부에 있는 여러 주들을 여행하였다. 1931년 여름, 우리는 ‘뉴우저어지’ 주 ‘애스베리 파아크’에 있는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연주하였다. 그는 그곳에 있는 한 ‘댄스 홀’에에서 자기의 집회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는 사람들에게 열을 올리게 하기 위해 경쾌한 곡조로 그 집회를 시작하곤 하였는데, 그렇게 노래를 부르고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는 소리를 들어 보지 못했을 것이다. 그리고 나서 “하나님”은 “주는 기뻐 내는 자를 사랑하신다”는 상투적인 연설을 하고 뒤이어 연보채를 돌려 돈을 거두었다. 아는 바와 같이 그 대공황기에 그런 일을 하였다! 그는 하룻밤 연주에 대하여 2‘달러’를 우리에게 지불하였는데, 이것은 우리에게 큰 돈이었다.

1933년 나는 ‘어얼 하인스 오케스트라’와 함께 ‘시카고’로 갔는데, 그 악단은 내가 함께 연주한 최초의 이름있는 ‘오케스트라’였다. 우리는 ‘사우드 사이드’에 있는 ‘그랜드 테라스’에서 연주하였다. 이 ‘클럽’은 암흑가의 인물들이 운영하고 있었며, 후에 나는 그들 중 상당수가 거기 있었다는으 것을 알게 되었다. 어떤 날 밤에는 ‘갱’들로 가득차곤 했는데, 나는 겁에 질려 연주하기가 퍽 어려웠다. 그 당시는 금주령하에 있을 때인데, 주방장은 우리 ‘밴드’ 연주자들에게 싸구려 술을 2홉 반가량에 3‘달러’씩 받고 팔았다. 이것은 우리로 하여금 신나게 연주하도록 만들어 주었다. 우리는 밤 아홉시부터 새벽 4시까지 연주를 하고 주급 40‘달러’를 받았는데, 그 당시로는 그렇게 나쁜 급료가 아니었다.

일거리는 많아서, 나는 ‘시카고’에 계속 머물러 있었다. 그 다음, 1936년에 그곳을 떠나 ‘뉴우요오크’로 갔으며, 거기서 ‘지미 런스포오드 오케스트라’와 함께 연주하였다.

성공, 그리고 이상한 여자

내가 성공과 명성의 달콤한 냄새를 맡게 된 것은 ‘런스포오드’와 함께 일할 때였다. 또한 그의 ‘오케스트라’와 함께 일하기 시작한 직후, 나는 또 다른 영향을 받게 되었다. 그 일은 내가 매우 이상한 여자를 만나게 되었기 때문이다.

처음에 나는 ‘아이다 피츠패트릭’ 부인을 무대 뒤에서 만났다. 그 부인은 우리 연주자들도 들어갈 수 없는 곳인 무대 뒤로 가는 용한 재주가 있었다. 그 부인은 음악인들과 연예인들을 방문하여, 그들에게 성서에 있는 내용에 관하여 이야기해 주는 일에 이력이 나 있었다. 그는 성서는 잘 알고 있었다! 그리고 사실, 우리 음악인들과 연예인들은 방종한 생활을 하고 있기 때문에 그가 가지고 있는 그러한 소식이 필요하였다.

내가 그 부인과 성서 연구를 하기로 되어 있던 어느날, 나는 방짝에게 “‘피츠패트릭’ 부인이 오면, 내가 연습을 하러 가야 한다고 말 좀 해 달라”고 부탁했던 일이 기억난다. 한 시간 후 내가 그 건물을 떠나려는데, ‘피츠패트릭’ 부인이 아래층에 서 있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몹시 놀랐으며, 화가 났다. 그 부인은 “‘영’씨, 연습은 어떻게 됐어요?” 하고 물었다. 그 부인은 확실히 끈질겼지만, 태도는 우아하였다.

그 부인과 함께 연구를 하기 시작한 이후, 나는 내 자신에 대하여 매우 못마땅하게 생각되었다. 왜냐 하면, 우리 음악인들이 하고 있는 못된 짓을 많이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그 점을 좀 설명하겠다.

우리는 그 당시 “하룻밤 흥행지들”을 여기 저기 떠돌아다니며 연주를 하였다. 우리는 매우 피곤하였다. 우리가 흥행을 방금 마친 도시로부터 반경 500 내지 600‘킬로미터’ 내에서는 같은 ‘그룹’이 흥행을 할 수 없다는 조문이 대부분의 계약서에 들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흥행 기획자를 보호하여 주었다. 그리하여 그는 음악인들이 지난번 흥행지로부터 먼 거리를 여행하게 만들어 자기 구역을 보호하였다. 우리는 ‘버스’를 타고 장거리를 뛰었으며, 그리하여 우리의 피곤이 풀릴 날이 없었다. 우리는 정신을 차리기 위하여 ‘벤저드린’을 복용하였으며, 기분을 풀기 위하여 술을 마셨다. 우리 대부분은 이런 회전 목마에 탄 생활을 하였으며 거기서 내려 올 수가 없었다.

나는 여러 해 동안 ‘뉴우요오크’ 안팎을 들락이면서 연주를 하였고, ‘피츠패트릭’ 부인과의 성서 연구도 이어졌다 끊어졌다 하였다. 그러나 늘 여행을 해야 하였기 때문에, 한번에 길게 연구를 해 볼 기회를 갖지 못하였다. 그러는 동안 나는 국내에서 명성을 얻게 되었으며, 연예계에서의 나의 위치를 유지하기 위하여 더욱 더 많은 시간을 빼앗기고 있었다.

현대 ‘재즈’와 영화

‘비이봅’ 또는 현대 ‘재즈’라고 일컬어지는 ‘뉴우 재즈’가 1940년대 초에 사실상 선풍적인 인기를 불러 일으킨 곳은 ‘뉴우요오크’ 시 52번가였다. 그 당시 일급 ‘재즈’ 음악가들은 6번가(현재 ‘아메리카 아베뉴’) 근처에 있는 거리를 따라 있던 조그마한 ‘클럽’들에서 활동하였다. 나는 오래 전에 작고한 ‘빌리 홀리데이’와 함께 그곳에 있는 한 ‘클럽’에서 연주를 하였다. 그 여자는 작고한지 오래지만 연예계에서는 전설적인 인물로서 탁월한 재능을 가진 여자였다. 최근에 “더 레이디 싱스 더 블루우스”라는 그 여자에 관한 영화가 제작되었다.

유명한 예술가들이 거기서 공연을 하였기 때문에, 영화 배우들, 제작자들 및 작가들이 그러한 ‘클럽’들에 자주 모여 들었다. 그러나 또한 뚜장이들, 창녀들, 마약 밀매자들도 많이 있었다. ‘빌리 홀리데이’는 지독한 아편 중독자로서, “마약 밀매꾼들”이 내가 일하는 곳에 항상 들락거렸다. 이러한 생활 방식을 늘 보고 있으면 그런 것이 옳게 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다가 자신이 이러한 일들을 시작하기 때문에 문제에 말려 든다.

내가 보기에 ‘빌리’는 그러한 환경의 희생자였다. 그 여자는 사생활에 있어서 고약한 남자들에게 착취를 당하였을 뿐 아니라 관리 잘못으로 인하여도 착취를 당하였다. 그가 내가 작곡한 “트래블린 라이트”를 취입하였을 때, 그것은 100만장이나 팔렸지만, 우리가 각각 받은 것은 고작 75‘달러’뿐이었다. 우리는 판권에 관한 법률을 몰랐었다. 그리하여 우리는 착취를 당한 것이다.

영화는 내게 호기심을 끌기 시작하였다. 우리는 낮시간을 더 많이 이용하기 위하여 될 수 있는 대로 아침 일찍 시작하였다. 그 다음 밤 장면 촬영을 위하여 밤늦게 촬영에 들어갔다. ‘카메라’ 앞에서 생기있게 보이기 위하여 나는 ‘벤저드린’을 먹었다. 다음에 ‘텔레비젼’이 나왔으며, 그리하여 ‘텔레비젼’을 위한 ‘쇼우 필름’도 만들었다. 연습은 지루하고 녹초가 되게 하는 것이었다. 내가 고혈압에 걸리리라고는 아무도 의심을 안했다.

가족, 그리고 ‘루이 암스트롱’

결국 나는 ‘하와이’로 가기로 결심하였으며, 1947년에 거기서 ‘샐리’를 만났다. 우리는 그 해 늦게 결혼하였으며, 1948년에 우리에게 딸이 태어났다. 아내는 성서를 연구하고 있었으며, 나는 ‘스케줄’이 바빠서 아내처럼 그렇게 부지런히 공부할 수는 없었지만, 아내와 함께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들에 참석하였다. 그러던 중 1952년에 나는 ‘루이 암스트롱’의 제의를 받아 들여 ‘하와이’를 떠났으며, 그와 함께 12년간을 지냈다.

나의 가족은 나와 함께 여행하려고 애를 썼지만 ‘마리화나’를 피우는 일, 잡스런 말들, 늦은 시간 등 그러한 일들은 그들이 견딜 수 있는 생활이 아니었다. 나는 방이 몇개 달린 집을 빌리고는, 아내와 딸을 ‘쇼핑’ 내보낸 후 방을 걸어 잠그고 다섯 내지 여섯 시간 동안 나팔부는 연습을 하곤 하였다. 나는 내 온 인생을 나팔에 불어 넣고 있었다. 나팔 부는 일과 그것이 벌어 들이는 돈이 나에게는 신이었다.

결국, 나는 ‘로스앤젤레스’에 집을 사서 아내와 딸이 정착하게 하였다. 그러나 나는 대부분의 시간을 나가 살았으며, 어떤 때는 ‘아프리카’나 기타 나라에서 6, 7개월 동안을 계속 보내곤 하였다. ‘유럽’에서는 많은 영화에 출연하였다. 나는 상당히 많은 돈을 집에 부쳐 주었으므로 그것으로 할 일을 다한다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의 가족은 이러한 물질적인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그들은 내가 집에 돌아오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 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내 어린 딸은 아버지를 잘 알지 못한 채 자라고 있었다.

이 사업은 상당히 경쟁이 심하였기 때문에, 정상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끊임없이 나팔을 연습해야 하였으며, 종종 하루 종일을 그렇게 보내곤 하였다. 나는 점점 더 불행하게 되었다. 왜냐 하면 연습하고, 여행하고, 연주하고 집에 돈을 부쳐 주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암스트롱’은 함께 일할 수 있는 훌륭한 사람이었으며, 아마 그것이 또한 내가 나중에 어쩔 수 없이 관심을 기울이게 된 것을 이해하기 어려워한 이유였는지도 모른다.

‘피츠패트릭’ 부인은 ‘암스트롱’을 만날 수 있을 때는 그와 함께 연구를 하였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뉴우요오크’에서 공연을 할 때면, ‘쇼우’ 사이 사이에 ‘암스트롱’ 그리고 나와 함께 연구를 하곤 하였다. 내가 1950년대 후반에 ‘라스베가스’에서 공연하고 있을 때, 아내가 나를 찾아왔으며, 아내가 ‘피츠패트릭’ 부인과 함께 증거하는 일에 함께 참여했었다는 말을 듣고 나는 무척 놀랐다. 후에 ‘피츠패트릭’ 부인은 나에게 “‘영’씨, 뭘 기다리고 있읍니까? 당신이 알고 있는 성서 지식에 의하면, 당신이 알고 있는 바에 따라 행하지 않으면 위험합니다” 하고 말하였다.

내가 ‘로스앤젤레스’로 돌아올 때마다, 나는 성서 연구를 다시 하고 가족과 함께 집회에 가곤하였다. 아내는 그 때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으며, 딸도 공부하고 있었다. 나는 증인들이 나의 아내와 딸 ‘앤드류’에게 베푸는 친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들은 내가 흥행을 위해 여행중임을 알면 별일 없도록 돌보아 주었다.

빠져 나옴

그러던 중 1964년초에, 내게 충격적인 일이 일어났다. 아내가 장거리 전화를 걸었는데, 그가 병이 났다는 것이었다. 앞서도 나는 그만 두고자 할 때마다 더 많은 돈을 제의받곤 하였다. 이번에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아무 것도 나를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나는 여호와 하나님께 기도하였다. 그리고 내가 빠져 나올 힘을 주실 수 있는 분은 바로 그분임을 알고 있었다. 이 일은 ‘오케스트라’ 후원자에게는 좋은 일이 아니었다. 사실상 그들은 매우 화를 내었다. 이전에도 항상 돈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없었다. ‘피츠패트릭’ 부인의 말은 참으로 옳았다. 내가 뭘 기다리고 있었는가? 나는 성서 잠언의 다음과 같은 말의 가치를 모르고 있었다. “지혜를 얻는 것이 금을 얻는 것보다 얼마나 나은고! 명철을 얻는 것이 은을 얻는 것보다 더욱 나으니라.”—잠언 16:16.

나는 ‘로스앤젤레스’로 속히 돌아와 거기서 다시 열심히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드디어 내 눈에는 실제로 내가 그 동안 해 오던 일들이 보이기 시작하였다. 이제 내가 가족에게 얼마나 못할 일을 하고 있었는가를 이해하자, 마음이 아팠다. 신중히 연구를 한 후, 몇 개월 뒤에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으로 침례를 받았다.

나의 아내는 계속 아팠으며, 여러 가지 검진을 해 본 결과 암에 걸렸다는 것이 밝혀졌다. 정신이 아찔하였다. 우리는 ‘하와이’로 돌아가기로 계획하였다. 그러나 의사는 그가 곧바로 병원에 입원해서 ‘코발트’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64년 8월 아내는 치료를 받았다. 그가 퇴원할 때, 나는 그를 다시 검진받도록 하려 하였다.

솔직히 말해서 이것은 내 생애 중 가장 큰 시련기였다. 그 일은 인생에서 진실로 중요한 것들과 비교할 때 명성과 부를 추구하는 것이 얼마나 무가치한 것인가를 일깨워 주었다. 내 아내가 병이 났을 때 나는 누구에게로 갔었는가? 기도로 여호와께 나아갔었다. 내가 그분과 밀접한 관계를 갖는 것이 모든 물질보다 가치있다는 것을 인식하게 된 것은 말할 수 없이 기쁜 일이다.

후에 나는 가족을 ‘하와이’로 데리고 왔다. 아내는 회복되었고, 오늘날까지 건강히 지낸다.

이전 그 어느 때보다 행복함

현재까지 여러 해 동안 나는 내 자신의 조그마한 ‘오케스트라’를 가지고 있으며, ‘호놀룰루’에서 제일 큰 ‘호텔’ 중 하나에서 공연을 해 오고 있다. 그러나 음악은 이제 영적 관심사의 다음 자리에 있게 되었다. 나의 악단 단원 중 몇명은 나의 성서 연구 제의를 받아 들였으며, 그 중 한명은 증인이다. 우리 딸도 증인과 행복하게 결혼하였다. 아내와 나는 우리 동료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회중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한다. 그리고 우리는 공개적인 증거 봉사에 참여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조만간 인류에게 하나님의 왕국이 가져 올 웅대한 축복에 관하여 이야기해 준다.

나는 수많은 제의를 받고 있긴 하지만 음악과 관련된 일로 ‘호놀룰루’를 떠나는 일은 거의 없다. 나는 미국 국립 박물관 예술 공연 분과의 요청을 받아 들였으며, 그리하여 지난 해 9월에 그들은 나의 생활과 생애에 관한 6시간짜리 회견을 녹화하였다.

내가 ‘루이 암스트롱’과 함께 생활할 때의 일을 돌이켜 볼 때 지금 한 가지 생각나는 경험이 있다. 우리가 1961년 일본에 갔을 때였다. 그 때 나는 아직 증인은 아니었지만, 젊은 음악인들의 집단에게 증인들의 그리스도인 활동에 관하여 이야기한 일이 있다. 후에 안 일이지만, 내가 한 말이 감수성이 있는 마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떨어져서, 그 젊은이들 중 몇명이 증인이 되었다.

나는 종종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음악인들에게 이야기하며, 그들에게 “비용을 계산하라”고 권면한다. 내가 한 때 그러하였던 것처럼, 만일 어떤 사람이 자기 인생을 음악이 지배하게 만든다면, 그것은 자신을 파멸시킬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가치관을 똑바로 가질 때에만이 우리는 진정한 행복을 얻을 수 있다. 결국 내가 이러한 일을 할 수 있게 된 것에 대하여 무척 감사하고 있다!—기고.

[11면 삽화]

‘루이 암스트롱’과 나는 12년 동안 함께 연주 생활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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