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1 05월호 20-23면
  • 음악을 합당한 위치에 둠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음악을 합당한 위치에 둠
  • 깨어라!—1981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음악적 성향
  • 경력을 쌓기 시작함
  • 음악계에서의 성공
  • 내가 믿고 싶었던 것
  • 또 한 사람의 음악가의 도움을 받음
  • 새로운 인생 행로
  • 균형을 유지함
  • 음악이 내 생활의 전부였다
    깨어라!—1985
  • 음악은 나의 인생의 전부였다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83
  • 음악이 내 인생을 지배하였다
    깨어라!—1977
  • 재즈 드럼 연주자가 참된 행복을 발견하다
    깨어라!—1988
더 보기
깨어라!—1981
깨81 05월호 20-23면

음악을 합당한 위치에 둠

‘필라델피아’의 여덟살난 소년으로서 나는 내가 어딘가 남다르다고 느꼈다. 어느날 나는 면도날을 집어 들고 내 손가락을 베고는, 만일 나도 다른 사람들처럼 피를 흘린다면, 내 운명도 결국은, 죽어 관 속에 들어 가고만 동네 아래쪽의 이웃 사람과 똑같은 종말을 당하게 되어 있는 것일거라고 생각한 적이 있다. 나는 피가 뿜어나오는 것을 바라보았다. “‘베니 존슨’, 너 역시 죽을 거야”라고 나는 혼잣말을 하였다.

그 다음 5년 정도 동안, 나 혼자 있을 때면, 간혹 죽음에 대한 염려가 내 정신을 메우곤 하였다. 나는 두 손을 내려다 보고, 움직여 보고, 한 두 마디의 말을 하면서 내 목소리를 들어 보곤 하였으며, 거울에 내 자신을 비추어 보곤 하였다. 나는 무서웠다. 나는 언젠가 내가 더는 존재하지 않게 될 것임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죽고 싶지 않았다. 나는 살고 싶었다. 그러나 내게 할당된 시간이 굉장한 길이는 아닐 것이므로 이제 나는 시간과 경주를 벌이고 있는 것 같았다.

음악적 성향

내가 음악에 흥미를 나타냈기 때문에 아홉살 때 어머니는 내게 ‘피아노’를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14세에 ‘테너 색서폰’도 배우게 됐다. 나는 ‘색서폰’을 굉장히 좋아하게 됐다. ‘라이어낼 햄프턴’ 악단이 ‘얼’ 극장에 올 때마다 나는 가서 한음 한음을 음미하면서 나도 그 악단의 인기 ‘색서폰’ 연주자인 ‘아넷 코브’처럼 연주할 수 있었으면 하고 바랬다.

제2차 세계 대전중이던 그 무렵, 야망을 품은 우리 십대 음악가들 여럿이 함께 모여 많은 연습을 하였다. 우리 집에서의 어느 연습 시간중에 훨씬 나이가 많은 친지(親知) 한 사람이 이렇게 말하였다. “언젠가는 너희도 모두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고 마약을 복용하게 될거야.” 나는 화가 나서 우리의 정신에 있는 것은 음악뿐이라고 그에게 대꾸하였다. 그러나 그는 똑같은 말을 반복하고는 이렇게 덧붙였다. “두고 보면 알거야.”

그가 내게 일으킨 분노는 일종의 방위 기제(防衛 機制)가 되었다. 나는 “깨끗한” 음악가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나는 그런 일들을 피할 수 있었지만, 그 날 밤 연습에 참가했던 친구들을 포함하여 이전의 친구들 다수는 그 후 그러한 것들에 걸려들고 말았다. 사실상 몇명은 마약 과용으로 이미 사망하였다.

경력을 쌓기 시작함

1948년에 나는 교사가 될 준비를 갖추기 위하여 ‘워싱턴 D. C.’에 있는 ‘하워드’ 대학교에 입학하였다. 그러나 내가 진정으로 사랑하는 것은 여전히 음악이었다. 나는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음악가가 되는 공상에 깊이 잠겨 ‘색서폰’ 연습에 열중하게 되었다. 심리학, 공개 연설 및 기타 학과의 과정들이 내가 ‘호른’을 더 잘 연주하게 되거나 새로운 곡을 작곡할 수 있도록 도움이 될 것인가? 어느날 나는 짐을 꾸리고 다시는 학교로 돌아가지 않았다.

나는 학교 밖의 그 지방 ‘나이트 클럽’들에서 많은 연주 활동을 했었기 때문에, 세상에 달려들 준비가 다 되었다고 여겼다. 나는 악단용 편곡 한곡당 7‘달러’씩 받았으며(17곡), 악단들은 내가 만드는 곡을 모두 연주하였다. 나는 돈에는 관심이 없었다. 내가 원한 것은 바로 경험이었다.

내가 ‘필라델피아’에 있는 집으로 돌아 왔을 때 인기 가수였던 “불무스” ‘잭슨’ 악단에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았다. ‘태드 대머런’이 ‘피아노’ 주자였다. 그는 편곡가로서 나의 우상 중 한 사람이었다. 나는 마침내 성공하였다고 느꼈다.

음악계에서의 성공

그 후 내가 다른 악단에 소속해 있을 때 여가 시간에는 ‘재즈’ 곡을 작곡하였다. 악단과 함께 이 도시 저 도시로 여행하면서 나는 이러한 여러 곳에 있는 음악가들에게 그 곡들을 주곤 하였다.

그러한 음악가들 중 한 사람인 ‘존 코울트레인’이 어느날 길에서 만났을 때 “어이, ‘베니’ 지난번에 내가 ‘뉴우요오크’로 가져 간 그 곡을 기억하나?” 하고 물었다. “그런데, ‘마일즈’가 그 곡을 굉장히 좋아해서 우리는 그 곡을 취입했다네.”

나는 뜻밖의 일에 매우 기뻤다. 왜냐하면 ‘마일즈 데이비스’는 일류 ‘재즈’ 취입 가수였기 때문이다. “동료들”(Stablemates)이라는 그 취입곡으로 ‘재즈’ 작곡가로서의 나의 생활은 시작되었다.

그 후에는 누구나가 내가 자기들을 위해 작곡하고 편곡해 주기를 바라는 것 같았다. 그 결과 나는 매일 곡을 쓰게 되었다. 나는 ‘재즈’곡이라 할지라도 무릇 노래란 선율적이어야만 한다는 나의 확고한 신념을 나타내고자 애썼다. 그 후 그 신념은 나의 상표가 되었으며 아마 그 때문에 ‘재즈’ 작곡가로서 내가 성공할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무렵 나는 ‘테너 색서폰’ 연주로도 인정을 받기 시작하였다.

내가 ‘“디지” 기레스피’로부터 자기 악단에 들어와 달라는 요청을 받은 것은 1956년의 일이었다. 그 때 그는 미 국무성에서 후원하는 중동 연주 여행에서 막 귀국했었으며, 곧 남‘아메리카’로 그와 비슷한 여행에 나설 참이었다. 그 악단에 소속해 있는 동안 나는 ‘다운 비트’ 국제 ‘재즈’ 인기 조사에서 “신인 ‘스타’ ‘테너 색서폰’ 연주가” 및 “신인 ‘스타’ 편곡가”로서 1등 상을 차지하였다. ‘길레스피’ 악단은 결국 해산되었으며 나는 ‘뉴우요오크’에 남아 음악 활동의 세계 속에서 확고히 자리를 잡기로 결정하였다.

내가 믿고 싶었던 것

내가 ‘뉴우요오크’에서 지내던 어느날 ‘여호와의 증인’이 나의 ‘아파트’를 방문하였다. 나는 그들이 헌신한 사람들이기는 하지만 시간을 허비하고 있다고 생각하였다. 누가 종교 잡지를 읽을 만한 시간이 있겠는가? 그들이 가버리자 나는 받았던 잡지를 쓰레기통에 쳐 넣었다. 그러나 내가 떨쳐 버릴 수 없었던 것 한 가지는 그들이 참으로 예의 바르고 훌륭한 사람들이라는 점이었다.

어느 주간인가에 ‘뉴우요오크’의 ‘아폴로’ 극장에서 일하고 있는데, 어떤 부부가 손에 잡지들을 들고 무대 입구에 서 있는 것이 눈에 뜨였다. 그 잡지들이 「파수대」와 「깨어라!」지임을 보고 나는 속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아니, 이런! 여기서도 소용없는데!” 그러나 나는 또한, 음악가들 다수가 세상살이로 아주 냉정한 사람들이었는데도 그들 모두가 그 부부에게 친절하고 공손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나는 곧 그 남편되는 ‘폴 화이트’라는 사람이 과거 연예업계에 종사했으며 많은 연예인들과 개인적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와 그의 아내는 사람들에게 열심히 하나님의 목적을 알려 주고 있었다.

마침내 그들이 내게 접근해 왔다. 내가 그들의 이야기를 기꺼이 들은 것은 순전히 호기심 때문이었다. 그 때 나는 다른 동료들이 왜 그처럼 그 부부에게 예의 바르고 정중하였는지를 깨달았다. 이들은 내가 만나 본 사람들 중 가장 친절하고 가장 온유한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이야기한 것들이 내게는 순전히 환상으로 밖에 들리지 않았다. 즉 이 전체 사물의 제도가 끝나고 사람들이 행복한 가운데 지상에서 영원히 살게 될 새로운 제도가 대신 들어 서리라는 것이었다.—베드로 후 3:13; 계시록 21:3, 4.

정말 그렇기만 하다면, 나는 그것을 믿고 싶었다. 그러나 그러한 일은 있을 수 없다. 그렇지 않은가? 나는 ‘필라델피아’의 ‘믿음의 장막 교회’에서 ‘루이스’ “목사님”이 그런 것들을 설교하는 것을 들어 본 적이 없었다. 나는 그 후 ‘시카고’ ‘리걸’ 극장에서 활동할 때 ‘폴화이트’와 ‘아이다 화이트’ 부부를 다시 만났다. 후에 그들은 ‘플로리다’ 주 ‘마이애미’에서도 내게 전도하였다. 나는 “이 사람들은 정말 헌신한 사람들이든지 아니면 미친 사람들이든지, 혹은 두 가지 다”일 거라고 생각하였다.

또 한 사람의 음악가의 도움을 받음

몇년 후 ‘아트 파머’와 나는 ‘재즈팃’(The Jazztet)이라는 ‘그루우프’를 조직하였다. 나중에 ‘트롬본’ 연주가인 ‘톰 매킨토시’가 합류하였다. 우리는 얼마 후 그가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눈에 뜨이는 사람이면 여종업원이든, ‘클럽’ 주인이든 세면장 사환이든, 동료 음악가이든, 관객이든 누구에게나 자기가 배운 것에 대해 이야기하곤 하였다. 나는 그의 영이 꺾이는 것을 보지 못했으며 그는 결코 거북해 하지도 않았다.

우리는 종종 공연 예약에 따라 여러 도시 간을 ‘스테이션 왜건’을 타고 여행하곤 하였다. ‘톰’이 우리와 함께 다니기 시작하자 우리의 화제는 성서적인 방향으로 극적으로 바뀌었다. 왠지 동료들은 언제나 ‘톰’이 그르다고 주장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는 성서를 참조하여 이렇게 말하곤 하였다. “여기를 확인해 보라구.”

‘톰’이 옳다는 사실이 거듭 거듭 성서로 증명되었기 때문에 오래지 않아 동료들은 그에게 짜증을 내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심지어 ‘톰’이 더는 자기 신앙에 관하여 이야기하지 못하도록 표결을 하기까지 했다. 그러나 그 때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톰’이 제시했었던 자료들이 그들의 호기심을 일으키기에 충분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전과 다름없이 그들은, 대개 질문으로 시작되는 성서적인 화제들을 꺼내곤 하였다. 그리하여 자동차 안에서의 성서 토론은 결코 중단되지 않았다.

‘톰’이 우리 ‘그루우프’에 속해 있는 동안 내게 하던 말이 있는데 그 말은 그가 떠난지 오랜 후까지도 내 정신 속에 늘 메아리치게 되었다. 그는 이렇게 말하였다. “자네는 올바른 일을 많이 하고 있긴 하지만, 그러한 일들로부터 유익은 받지 못할 걸세” 그의 말의 의미는 만일 내가 영원한 생명이라는 하나님의 선물로부터 유익을 받으려면, 그분의 요구 조건의 일부만이 아니라 전체와 일치하는 생활을 해야 할 것이라는 것이었다.—로마 6:23; 요한 17:3.

이제 나는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아야 되겠다고 느꼈다. 그리하여 얼마 후 그 ‘그루우프’가 해체되었을 때, 아내 ‘보비’와 나는 ‘뉴우요오크’로 돌아와서 ‘톰’과 성서를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연구를 통하여 나는 내가 오랫 동안 궁금히 여겨 왔고 염려까지 했던 일들을 이해하게 되었다. 어린 소년 시절에 느꼈던 두려움은 잘못된 것이었다. 죽음을 면할 수 있는 길이 있는 것이다. 인간이 원래는 죽도록 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도록 되어 있음을 나는 알게 되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적 죽음으로 말미암아 인간이 마침내 영원한 생명의 전망을 즐길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요한 3:16.

새로운 인생 행로

오래지 않아, 1967년에 우리는 ‘로스앤젤레스’로 옮겨 갔다. 나는 영화 음악과 ‘텔레비전’용 음악을 작곡하고 싶었다. 많은 기성 음악가들과 나의 친구들은 이미 태평양 연안 지방에 가 있었으며 나를 “어서 오라!”고 계속 부르고 있었다. 그래서 가게 된 것이다.

‘로스앤젤레스’에서의 나의 관심사는 전적으로, 그 사업에서 기반을 잡게 되는 것뿐이었다. 나는 ‘색서폰’을 잠시 제쳐 두고는 영화 음악을 작곡하는 일에 온 정력을 쏟았다. 얼마 후 나는 주요한 영화 음악과 아울러 ‘미션 임파서블’, ‘패트리지’ 가족 등과 같은 ‘텔레비전’ 영화 음악을 작곡하게 되었다. 물질적인 면에서는 일이 잘 풀려 나갔다. 그러나 나는 그 외의 어떠한 일을 위해서도 시간이 없는 것 같았다. 우리가 ‘로스앤젤레스’에 처음 왔을 때, 나는 기반을 잡자 마자 ‘여호와의 증인’을 찾아 보겠다고 늘 말하였다. 그런데 도대체 그렇게 되질 않았다. 성서 전도서 5장 10절의 말처럼 내가 물질적으로 성공하면 할수록 나는 점점 더 많은 재물을 원하게 되는 것이었다.—마태 16:26.

그러던 어느날 내가 귀가하였을 때 아내가 현관에서 나를 맞으며 말하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어느 ‘증인’들이 찾아 왔었다구요.” 아내는 그들이 그 다음 주에 다시 올 거라고 말했다. 나중에 알게 된 일이지만 ‘톰 매킨토시’가 나와 관심사가 비슷한—물론, 음악—사람이 우리 집을 찾아가게 하도록 요청했었던 것이다. ‘앨 캐벌린’과 그의 아내가 왔는데, ‘앨’은 그전에 이름있는 악단장이었다.

재개된 연구를 통하여 우리는 마침내 거룩한 것들에 대한 참다운 인식을 배양하기 시작하였다. 얼마 후 아내와 나는 둘 다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는데 우리의 생명을 헌신하였으며 그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다. 그리스도인 장성으로 매진하여 결국 나는 회중의 장로로 임명받게 되었다.

균형을 유지함

물론 나는 음악을 사랑한다. 나는 항상 그래 왔다. 그리고 나는 내가 그리스도인으로서 그 사랑에 대해 올바른 균형을 유지하게 해주실 것을 끊임없이 기도하고 있다. 내가 악기를 아무리 잘 연주한다 하더라도, 또 아무리 훌륭한 노래를 작곡하거나 아무리 멋진 영화 음악을 짓는다 하더라도, 혹은 다른 어떠한 성공을 거둔다 하더라도, 그 중 하나만이 아니라 그 모든 것이라 할지라도, 그러한 것들은 나를 하나님의 새로운 제도에서 살기에 합당한 자로 만들어 주지 못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이제 내가 생명을 바쳐 여호와를 섬기기로 헌신한지도 12년이 넘었으며 내가 증언할 수 있는 것은 우리는 자신의 영성을 유지하기 위하여 항상 정신을 바짝차리고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예를 들면, 침례받고 나서 오래지 않아 나는 그리스도인 집회에 빠지기 시작하였다. 나의 음악이 또 다시 더욱 중요한 영적 관심사를 밀어 내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어느 그리스도인 장로가 친절하게도 무엇이 잘못되었는가에 나의 주의를 환기시켰으며, 그의 도움에 감사를 느낀 나는 곧 조정을 하게 되었다. 음악계에서의 돈과 명성은 내 생활에서 더는 중요하지 않게 되었다. 그렇다면 이 말은 음악가로서 그리고 작곡가로서의 일을 포기했다는 뜻인가?

그렇지 않다. 내 직업이 나쁜 환경에 쉽게 노출시키고 많은 음악가들이 마약을 복용하고 부도덕한 생활을 한다는 점을 나는 인정한다. 그러나 세속 직장으로서, 전문직이든 비전문직이든 간에, 그 환경이 부정직, 부패, 부도덕, ‘알코올’ 중독, 도박, 기타 비슷한 일의 영향을 전혀 받지 않는 직업이 하나라도 있다고 생각하는가? 이러한 일들 및 심지어 마약까지도 오늘날 사회의 각계 각층에 침투해 있다. 어떤 사람이 실지로 어떤 직업을 붙잡고 있으려면 이러한 것들을 피할 수는 없다.

그렇지만, 내가 그랬던 것처럼 만일 직장 생활 때문에 어떤 그리스도인의 영성이 손상을 입기 시작할 경우에는 그의 주의를 환기시켜 주어야 한다. 나는 영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필요한 조치를 취하였다. 그리고 음악가로서 나는 다른 ‘증인’들이라면 결코 이를 수 없는 연예계의 많은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소식을 전할 수 있는 기회를 누려 왔다.

음악이 내 생활에서 옛날보다 훨씬 덜 중요한 자리로 내려앉은지도 오래되었다. 여호와를 섬기는 특권이야말로 나의 가장 귀중한 재산이다. 그분은 자신의 백성이 행복하기를 바라시며 나는 행복하다. 더 나아가서 앞으로 만일 내가 그분의 새로운 제도에서의 생명의 보상을 받게 된다면, ‘색서폰’이 있든지 없든지 간에, 영원히 행복하리라는 것을 믿어 의심하지 않는다.—기고.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