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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상적인 ‘잉카’족 세계
  • 깨어라!—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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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0
깨80 05월호 37-40면

인상적인 ‘잉카’족 세계

‘라마’ 시를 떠나자 마자, 우리가 탄 비행기는 신속히 ‘안데스’ 산맥 방향으로 기수를 높였다. 곧 우리는 고대 ‘잉카’ 세계의 심장부인 ‘쿠스코’에 착륙했다!

‘잉카’ 제국은 매우 작은 지점에서 ‘벨기에’, ‘룩셈부르크’, ‘네델란드’, ‘프랑스’, ‘스위스’ 및 이태리를 합친 것만한 크기로 급속히 성장했다. 그리고나서는, 그 눈부신 성장의 속도보다 더 빨리 소수의 ‘스페인’ 탐험가들의 손에 갑작스런 멸망을 당했다.

‘잉카’족은 누구였는가? 그들은 어떠한 삶을 누렸는가? 무엇이 그들의 멸망과 소멸을 가져왔는가?

한 제국의 태동

우리의 ‘페루’인 안내자는 최초의 ‘잉카’, ‘망코 카페크’가 태양신에게 지시받은 한 지점 위에 ‘쿠스코’ 시를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고 설명해 주었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볼 때, ‘잉카’ 역사는 기원 1200년경에 시작된다. 그 당시에, ‘잉카’족은 수많은 ‘안데스’ 부족 중 하나인 ‘쿠스코’의 영주에 지나지 않았다. 보다 정확히 말하여 “잉카”는 황제의 칭호이다. 그러나 현대 사용법에 의하면 그 제국의 백성을 ‘잉카’라는 말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스스로를 ‘카페크-쿠나’ 즉 “영광스러운 자들”이라고 불렀다.

‘잉카’의 전운은 서서히 움텄다. 때가 되자, 그들은 강력한 ‘창카’ 부족과 정면으로 충돌하게 되었다. 그러나 ‘창카’족은 순순히 굴복하려 들지 않았다. 사실, 그들은 ‘쿠스코’를 기습 공격하였으며, 그 도시를 침공하였다. ‘비라코차 잉카’는 피신을 했으나, 그의 아들 ‘파차쿠테크’는 끝내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방어대를 조직했고, 결국 ‘창카’족을 격파했다. 이제 판도는 ‘타우안틴수유’(“세계의 네 지구”) 즉 ‘잉카’ 제국의 흥왕에의 길을 열어 주었다.

그의 아버지의 사망 후, ‘파차쿠테크’는 (“지구를 뒤흔드는 자”를 의미함) 1438년에 ‘잉카’가 되었다. 그와 그를 계승한 아들의 통치 아래 그 제국의 영토는 사방 984,195평방 ‘킬로미터’ 즉 현재의 ‘페루’, ‘에쿠아도르’, ‘볼리비아’ 및 ‘칠레’를 합친 것 만큼이나 넓게 확장되었다. 이 확장의 대부분은 1463년과 1493년 사이의 단 30년이라는 기간에 이루어졌는데, 그것도 이 지구상에서 가장 험준한 지형 위에서 이루어졌다.

복지 국가

‘파차쿠테크’는 투사로서 뿐아니라 도시 계획과 행정면에서도 탁월했다. 도시 기구에 관하여 논평하면서, 우리의 안내자는 ‘잉카’ 제국을 한 복지 국가로 묘사하여 우리를 놀라게 했다. 굶주리는 자는 아무도 없었고 반면에 게으름은 결코 용납되지 않았다고 그는 설명해 주었다.

모든 사람은 할당된 지역에 살고 있는 한 가문 즉 ‘아일루’에 속해 있었다. 그들은 토지와 농작물과 동물들을 분배받았다. 토지는 ‘아일루’에 속해 있고, 그 성원들에게는 대여될 뿐이었다. 매년 가을이 되면 그 토지는 재분배되었다. 가족의 크기에 따라 토지는 증감되었다.

그들의 주요 생업은 농업이었다. 백성은 모두를 위해서 즉 국가를 위해서, 사제 계급을 위해서 그리고 자신들을 위해서 경작해야 했다. 국가 소유의 토지에서 경작된 곡물은 흉작을 당한 백성은 물론 귀족들과 관리들 그리고 군인들을 위해 저장되었다.

세금에 관해 말하자면, 이들은 공공 토목 공사의 복무 형식으로 요구되었다. 부가해서, 납세 의무가 있는 모든 건강한 ‘인디언’ 남자들은 어느 때든 군복무에 응하도록 규정되었다.

그 외에 백성들에게 요구된 것은 무엇이었는가? 주목할 만한 ‘잉카’의 요구 조건 중의 하나는 모든 남자는 20세에 결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만일 그가 망설인다면, 족장이 나서서 아내를 선택해 주었다.

우리가 이러한 제도에 대해 깊이 생각하고 있을 때, 안내자는 ‘잉카’족의 또 다른 면을 언급해 주었다. 납세 의무가 있는 10명의 노동자는 한명의 ‘콩카-카마요크’의 감독 하에 있게 되고, 열개의 그러한 조 위에는 그들을 감독하는 한명의 인도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열명의 인도자는 한 마을의 장과 같은 상관의 관할하에 있었다. 한 지역 감독은 10,000명을 관할했고, 10개의 지역들은 4분의 1 지구의 총독인 ‘아포’ 아래 속해 있었다. ‘잉카’ 제국은 네개의 지구로 나누어졌는데, 수도인 ‘쿠스코’에서 갈라지는 네개의 도로에 의해 즉 자연적 분계로 분할되었다. 전체 기구는 매 10,000명당 1,331명의 관리를 필요로 했고 백성 중 마지막 사람까지 다스릴 수 있게 마련되었다.

‘잉카’ “신”

‘잉카’ 문명의 중심은 황제 자신이었는데, “태양의 후손”으로서 최상의 특권을 누렸다. 대개 고문 회의가 ‘잉카’의 ‘코야’ 즉 본 부인의 합법적인 아들 중 가장 유능한 자를 후계자로 선택했다. 황제는 많은 첩들의 후궁을 두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의 친누이인 ‘코야’가 본 부인이었다.

‘잉카’는 국가 종교의 머리이자 정치적 통치자였고 백성에게는 “신”이었다. 그의 통치는 절대적이었고 빈틈이 없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었는가?

대부분의 신뢰받는 행정관 지위는 ‘잉카’의 자손들이 차지했다. 예를 들자면, 네 지구의 총독들은 모두 피를 나눈 친족이었다. 또한 ‘스페인’ 정복 당시의 ‘잉카’인, ‘후아이나 카페크’는 500명의 남자 후손을 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새로이 정복된 주민들은 토목 공사의 주류 조직 안으로 흡수되었다. 그러나 정복된 주민 가운데 불복종자들은 다른 곳으로 이주되었고 ‘퀘추아’어를 말하는 ‘미타코야’라고 불리우는 충성스런 사람들이 그들을 대신했는데 이들이 ‘잉카’ 문화를 전래했다.

‘잉카’ 제국의 기구와 통치가 잘 고안되었다는 증거가 바로 우리 시대까지 남아 있다. 우리의 안내자로 일하는 사람을 포함해서 약 500만이 ‘퀘추아’어를 아직도 사용하고 있다. 그는 현대 ‘코무니다데스’를 고대의 ‘아일루스’에 비교했다. 영농 방법, 백성의 기질, 그들의 음악은 모두 고대 ‘잉카’의 생활 방식을 반영하고 있다.

효율적인 통신 체계

그 방대한 제국을 하나로 결속시키는 것이 어떻게 가능하였는가? 우리의 안내자는 어마어마한 도로망과 교량들 그리고 보발꾼 조직을 언급했다.

산의 지형으로 볼 때 수레 바퀴의 사용은 비실용적이었으므로 ‘잉카’족은 전혀 수레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모든 도로는 ‘라마’ 수송과 보행에 알맞게 건설되었다. 북쪽 ‘툼베스’에서 시작되는 폭 7‘미터’의 해안선 도로는 ‘칠레’에 있는 ‘푸루무아카’까지 장장 4,056‘킬로미터’나 된다. 100개 이상의 교량을 포함하는 보다 협소한 ‘안데스’ 산맥 도로는 5,230‘킬로미터’나 된다.

이들 교통로의 효율성을 생각해 보라. 7.2‘킬로미터’마다 거리 표지가 있었고 19 내지 29‘킬로미터’마다 휴식을 위한 정류소가 있었다. 부가해서 보다 작은 휴게소들은 교대 보발꾼과 전령들을 위해 필요한 것들을 제공하였다. ‘체크’ 무늬한 반팔 반바지의 특수한 옷차림을 한 각 보발꾼들은 2.4‘킬로미터’를 역주했다. 이러한 방법으로 그들은 단 닷새 동안에 2,012‘킬로미터’ 거리까지 소식을 전달할 수 있었다.

예술과 건축 숲

현지 박물관에서 우리는 ‘잉카’ 예술에 검소한 면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비큐나’ 털로 짜는 고도로 발달된 그들의 기술은 절묘한 품질의 제품을 생산했으나 구상력이 결여된 듯 보였다.

그러나 그들은 금 세공업에 있어서는 매우 탁월했다. 그들의 기예를 높이 평가하고 존중했기 때문에 금세공인과 은세공인들은 구별된 지역에 살았고 세금을 면제 받았다. ‘스페인’ 사람들은 이것들을 보고 정신이 현란케 되었다.

우리의 안내자가 ‘쿠스코’를 묘사한 바에 의하면 금은 어디에나 있었다. 어떤 건물에는 금판이 붙여 있었다. 풀잎을 엮어 만든 신전 지붕에는 가는 금줄을 섞어 짰다. 태양의 신전과 그 경내 도처에는 금으로 만든 물건들로 가득차 있었다.

그러나 ‘잉카’족이 문화에 기여한 여타 공헌이 무엇이건 그것은 그들의 건축과 도시 계획에 비하면 무색한 것이다. 거대한 암석 기념물과 관련된 그들의 기술은 서양 세계에서 볼 수 없는 것이다. 그 건물들의 규모와 수는 실로 엄청나다.

‘쿠스코’ 방비를 위한 요새지인, ‘사크사우만’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공학적 업적 중 하나로 고려되고 있다. 이 건축물은 길이가 549‘미터’이고 층층이 진 육중한 삼겹돌 성벽은 높이가 18‘미터’에 달한다. 이 거대한 기초석 중 얼마의 무게는 100에서 150‘톤’이나 나간다! 전체 요새는 약 300,000개의 돌로 되어 있다.

진정으로, 우리는 그 바위들 사이에 칼날을 삽입할 수 있는지를 알고 싶었기 때문에 시험해 보았으나 헛수고였다! 그들은 이러한 건축물을 짓기 위해 어떤 탁월한 방법을 사용하였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게다가 이 돌들이 그렇게 탁월한 방법으로 짜맞추어졌기 때문에 수십 차례의 지진을 견디어 보존되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무도 다른 건축 목적으로 그 돌들을 캐낼 수가 없었다!

신들과 신성한 물건들

생명과 종교에 대한 ‘잉카’족의 개념은 어떠했는가? 국가와 종교는 일치되어 있었다. ‘잉카’인들은 조물주 ‘비라코차’의 존재를 믿었다. 그의 곁에는 보다 낮은 허다한 신들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태양신인 ‘인티’가 최고의 신이었다. 사실상, 태양신은 ‘잉카’ 문화의 상징이고 태양 숭배는 국교가 되었다.

수많은 신전은 물론 또한 거대한 사제직이 있었다. 정기적으로 열리는 화려한 종교 의식에서 사제들은 희생을 바치고 예언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백성은 그렇게 화려하지는 않지만 거룩한 장소나 거룩한 물건이 관련된 그들 자신의 종교적 표를 갖고 있었다. 그것들은 ‘후아카’라고 불리웠다. 어느 것이든 ‘후아카’가 될 수 있었는데—예를 들자면, 신전, 산, 동물, 강, 바위, 조상들의 묘, 별들일 수 있었다. 농업은 거룩한 것이었고 그것과 관련된 모든 것은 ‘후아카’가 되었다. 태양은 가장 거룩한 대상이었다. 백성은 ‘후아카’들의 은혜 아래 머무는 생활을 했다.

‘잉카’ 통치의 종말

‘잉카’의 화려한 권력의 절정이었던 1527년에 ‘후아이나 카페크’가 사망했다. 그 후 권력 투쟁으로 5년에 걸친 내란이 있었다. 그러나 ‘아타후알파’가 그의 이복 형제인 ‘후아스카르’에 대한 승리를 거둔지 이 주일이 지났을 때, ‘스페인’인 ‘피사로’가 등장했다. 그는 말을 탄 67명의 기사를 포함한 180명을 거느리고 ‘툼베스’로부터 ‘카자마르카’를 향해 출발하였다. ‘아타후알파’는 그들이 접근해 오는 것을 알았었다.

그가 호기심을 가졌었는가? 과신하였는가? 혹은 이 수염 달린 외국 백인들에 대한 어떤 미신을 믿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한가지 분명한 사실은 만일 그가 그들이 위협이 될 것으로 생각했었다면, 그들이 수백개의 협착한 산길을 통과했을 때 전멸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타후알파’는 제 자리에서 기다렸었다.

마침내 ‘스페인’ 사람들이 당도했고 공백 상태에 있는 ‘카자마르카’를 점령하게 되었다. 이제 극도로 대담해진 ‘피사르’는 그 도시에 있는 자기를 ‘아타후알파’가 무장하지 않은 채 방문하도록 초대했다. ‘아타후알파’는 받아들일 것인가? 복병을 매복시키는 전법은 ‘잉카’ 전술에 새로운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32년 11월 16일 저녁에 ‘아타후알파’는 ‘카자마르카’ 광장으로 행진해 들어왔다. 국왕의 정장을 차려 입고 수행원을 대동한 그는 아무런 무장도 하지 않은 채로 들어왔다. 그는 외국인들을 신뢰할 근거를 갖고 있었는가? 아니면 겁장이로 보이기를 원치않은 즉 그것은 체면 유지를 위한 거동이었는가? 그것은 아무도 모른다.

한 천주교 사제가 ‘잉카’를 문안코자 나왔다. 저술가 ‘하몬드 인네스’는 그 후 발생한 일을 이렇게 묘사한다. “그 수도사가 그리스도인 믿음의 기초가 되는 권위로서 성서를 ‘아타후알파’에게 손 건네 주었고, ‘잉카’는 그것을 땅에 던져버린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성 ‘도미니카’ 수도사의 신학적 이론을 따르는 일이 어떠하든 그는 그럴 생각조차 가질 수 없었을 것이다. 체발한 머리를 하고 십자가를 가진 이 가련한 외국인은 그에게 어리석게도, 그의 백성에 의해 죽임을 당한 한 신을 위해 그 자신의 신성을 포기하고 동시에 그 자신보다 더 큰 왕인 ‘차알스’ 황제를 인정하도록 설득하고 있었다. 달리 말하면, 그가 사력을 다해 획득했던 모든 것을 포기하라는 것이었다. 이 뻔뻔스러움에 대한 그의 노여움은 즉각적으로 그 책에 대한 배척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그의 태양을 가리키는 자랑스런 몸짓과 ‘나의 하나님은 아직 살아 있다’고 하는 말이 전해진 것은 아마 정확할 것이다.”

갑자기, 한발의 포성이 들렸고 이어서 ‘스페인’ 기병대가 그 광장을 둘러싼 좁은 입구들로부터 공격을 감행했다. 30분 동안에 그 ‘인디언’들은 제압되었고, 6,000명이 살해되었다. 유일한 ‘스페인’ 부상자는 생포하고자 ‘아타후알파’를 방어하는 동안 칼에 베임을 당한 ‘피사로’뿐이었다. ‘아타후알파’는 포로가 되었다!

‘아타후알파’는 자기가 갇혀 있는 큰 방을 금으로 한번 은으로 두번 가득채울 것을 제안했다. 그렇게 한다면 죽이지 않겠다는 보장을 받았다. 그 나라 각처로부터 금은들이 거두어졌다. 그러나 ‘스페인’ 사람들은 만족하지 않았다. 금에 대한 그들의 욕망은 더 많은 금을 요구했고, 결국 그들은 엄청난 보물을 모으게 되었다.

‘아타후알파’는 살아 있었지만 감금된 상태에 있었다. 그것은 그가 계약을 어겼기 때문이 아니라 그들에게 방해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그들은 그를 반란 배후 조종 혐의로 고발했고 덧붙여 그 국가 내에서 “‘스페인’국에 대한 범죄” 혐의로 기소했다! 재판 결과 “유죄 판결”을 받았다. 그는 내세에 대한 ‘잉카’의 종교적 믿음에 반대되는 화형을 제외한 다른 형태의 형집행을 청원한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그것도 그가 ‘로마 가톨릭’ 교인으로 침례받기로 동의한 후에야 그렇게 행해졌다. 그 때가 1533년 8월 29일이었다.

‘잉카’인들은 ‘스페인’군이 대로를 통과해 ‘쿠스코’로 진군해 오는 것을 보고도 별 저항을 하지 않았다. 그 수도가 1533년 11월 15일에 함락됐다. 바로 이 사건이 ‘잉카’ 통치의 종말을 가져 왔다.

꼭둑각시 ‘잉카’의 취임이나 정복자 ‘스페인’군 내부의 압력 때문이 아니라, ‘잉카’인의 반란 즉 ‘피사로’의 암살이 ‘잉카’ 세력의 회복을 가져 왔다. 신 ‘잉카’ 제국은 단명이었고 단지 36년간 계속되었다. 어느 점으로 보나 ‘투페크 아마루’가 최후의 ‘잉카’였다. 그는 ‘쿠스코’ 광장에서 목베임을 당했다. 그와 더불어 ‘잉카’의 역사적 시계는 마침내 멈추고 말았다.

현재까지와 미래

‘스페인’ 사람들은 ‘잉카’의 행정 체제를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그래서 많은 법령을 적응시키거나 계속 시행되게 했다. 그러나 한 민족으로서 ‘인디언’들은 결코 ‘스페인’의 풍습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들은 많은 옛 풍습에 따라 생활하고 있으며 그들의 생활에 ‘로마 가톨릭’ 의식을 혼합시키고 있다.

산 꼭대기에 있는 ‘마츄피츄’ 도시는 ‘스페인’인들이 ‘잉카’의 정신을 말살시키는 데 실패했음을 잘 증명한다. 오랜 후인 1911년에, 미국인 탐험가 ‘히람 빙함’이 그 도시를 발견했다. ‘우루밤바’ 강보다 높이 610‘미터’와 2,440‘미터’나 솟아있는 ‘안데스’ 산맥의 두 봉우리 사이에 위치한 이 도시는 ‘스페인’ 침략자들에게 결코 발견되지 않았다. 그것은 군사적 요새지로 건축되었는가? 아니면 태양신 숭배자들을 위한 비밀 은신처였는가? 그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려지지 않고 있다.

한 민족으로서 ‘잉카’인들의 슬픈 종말에도 불구하고 이 민족의 후손들을 오늘날도 ‘페루’, ‘볼리비아’, ‘칠레’ 그리고 ‘에쿠아도르’ 등지에서 볼 수 있다. ‘여호와의 증인’은 이 사람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해 왔다. ‘잉카’인들의 “신성한 계곡” 안팎과 ‘우루밤바’ 계곡의 ‘인디언’들은 기꺼이 성서 서적들을 받아들였다. ‘쿠스코’에는, 세개의 행복한 그리스도인 회중이 있다. 그들 중 일부는 자신들이 고대 ‘잉카’의 후손임을 주장한다.

또한, ‘볼리비아’와 ‘티티카카’ 호수 주변에도 많은 그리스도인 회중이 있다. 이 회중들은 대부분 ‘아이마라 인디언’들로 구성되었지만, ‘볼리비아’에서는 많은 ‘퀘추아 인디언’들도 역시 참 그리스도교를 받아 들였다.

그들이 개인적으로 고대 ‘잉카’족에까지 이르는 그들의 조상을 찾아갈 수 있든 없든 간에, 그들은 매우 가까운 장래에 하나님의 왕국이 모든 언어와 종족의 사람들을 연합시킬 그 때를 학수 고대하고 있다. 심지어 죽은지 오래된 사람들까지도 지상에서의 영원한 생명의 기회를 얻기 위해 돌아오게 될 것이다. (사도 24:15) 고대 ‘잉카’ 세계의 대표자들도 그 행복한 무리 가운데 있을 것인가? 의심할 여지없이 그러할 것이다.—기고

[40면 네모]

「월드북 백과사전」은 “모든 인류는 동일한 조상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많은 인간 집단들은 너무 오랫동안 떨어져 생활해 왔고, 그리하여 다양한 풍습이 서로를 구별짓게 되었다. 바로 이 다양성이 인간 생활의 즐거움을 배가시켜 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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