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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된 정복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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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2/1 17-20면

교회의 이름으로 자행된 정복

“만일 예수가 오늘날 살아 있다면, 그는 자유의 투사가 되었을 것이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의 한 저명한 공직자가 한 이러한 말은 현대 그리스도교국 내의 동향을 잘 나타내 준다. ‘아프리카’의 한 주교는 혁명에 성공한 사람들의 “의를 위한 폭력”을 찬양하였다. ‘프로테스탄트’ 교회들은 국가주의 ‘게릴라’ 단체들에 자금을 대주고 있다. 사제들은 “해방 신학”을 위해 투쟁하려고 무기를 들었다. 점점 더, 종교적 임무를 가진 사람들이 자신들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언제라도 폭력을 휘두를 것 같아 보인다. 독자는 이러한 일들이 옳다고 느끼는가? 본 기사에서는 “그리스도인”이 무력을 사용한 하나의 역사적 실례를 논하고 있다. 그 실례에는 얼마의 진지한 교훈들이 내포되어 있다.

황금, 영광, 그리고 복음. 이 세 가지 것들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화를 부채질하였다고들 한다. 식민지 개척자 중 한 사람은 “하나님께 대한 봉사를 위하여 ·⁠·⁠· 그리고 또한 부자가 되기 위하여” ‘아메리카’에 갔다고 고백하였던 것이다!

1992년은, 그러한 식민지화를 개시시킨 사건인 ‘크리스토퍼 콜룸부스’의 최초의 대서양 횡단 500주년이 되는 해로 주목될 것이다. ‘콜룸부스’의 서사시적 여정으로 인해 흥분을 자아내는 ‘아메리카’ 대륙 탐험 시대가 도래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는? 막대한 부(富)가 대서양을 건너 ‘유럽’으로 쏟아져 돌아왔고, ‘유럽’의 종교는 낯선 땅에 심어졌다. 그 대가는? 주로 ‘아메리카’ 원주민들이 그 대가를 치렀는데, 그들은 외래인들의 완력, 배약 행위, 잔혹성 및 생소한 질병 등에 굴복하면서 많은 인명 손실을 보았던 것이다.

이 외래인들은 정복자들로 일컬어지게 되었다. 역사가 ‘J. F. 배논’이 묘사한 바와 같이, 그들은 “성자와 악마의 기묘한 결합체”였다. 그들이 용맹했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의 위업들 중 얼마는 모든 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기는 하다.

미지의 숲, 산맥 및 늪지의 수십 ‘킬로미터’를 통과하는 ‘파나마’ 지협을 지나 태평양을 본 최초의 백인이 된 ‘바스코 누녜스 데 발보아’에 대해서, 또 현재의 ‘멕시코’에 사는 ‘애즈텍’인들을, 부하들과 함께 두루 퍼져 들어가 정복한 ‘에르난 코르테스’에 대해서 들어보지 않은 사람이 누구이겠는가? 그리고, 현재 ‘페루’로 알려진 거대한 ‘잉카’ 제국을 2년 여에 걸친 격렬한 전투 끝에 정벌한 ‘프란시스코 피사로’와 그의 형제들이 있었다. 또 다른 사람은 ‘페드로 데 발디비아’인데, 그는 남쪽을 향하여 나아가서 ‘칠레’를 정복하였고, ‘아라우카니안 인디언’들을 추방하였다.

그들은 확고한 기존 제국들을 어떻게 그리도 빨리 정복할 수 있었는가? 거기에는 많은 이유들이 있었다. 예를 들어, ‘코르테스’가 ‘애즈텍’인들을 쳐서 이길 수 있었던 것은 필시 부분적으로는 ‘애즈텍’ 제국 내의 내부적 불안에 기인하였을 것이다. 또한 ‘애즈텍’인들은 처음으로 ‘유럽’의 돌화살, 화승총, 검, 기마병 등에 맞서야 하였다. 그런데다 당시 ‘애즈텍’ 통치자인 ‘몬테수마’는 ‘코르테스’가 돌아온 신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이유야 어떠하든 간에, 정벌을 성공리에 마친 정복자들에 뒤이어 곧 “신세계에 항구적 근거지를 창설할 온갖 장비를 갖춘 농부, 광부 및 사제들”이 들어 왔다. 그러나, 종교는 그러한 정복과 어떠한 관계가 있었는가?

자신들의 종교에 공헌하기 위하여

확실히, 개종은 그 굉장한 모험에서 첫째가는 고려 사항이었다. 정복자 대다수의 고국인 ‘스페인’에서, 두명의 탁월한 통치자들인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는 ‘라틴 아메리카’의 정복에서 그 최대의 표현을 엿볼 수 있는 “국가주의적 및 종교적 열정의 물결에 불을 당”긴 장본인이었다.—「브리태니커 백과사전」.

1493년에 교황 ‘알렉산더’ 6세는 ‘포르투갈’과 ‘스페인’ 탐험가들 사이에 세계를 양분하여 주었는데, ‘스페인’에는 북극에서 ‘베르데’갑 제도의 서방 480‘킬로미터’ 지점의 남극까지 가상선을 그어 그 서쪽에 있는 것을 모두 하사하였다. 이것은 “이교도들을 개종시켜준데 대한 보답으로” 제공된 것이었다. 후에, ‘토르데실랴스’ 조약에서 양 강대국은 이 구분을 비준하면서 그 가상선을 수정하여 훨씬 더 서쪽으로 옮겼다.

흥미롭게도, 이렇게 교황이 연루되어 끼치게 된 영향은 지금도 볼 수 있다. 현대 ‘브라질’ 해안은 발견될 당시 세계의 ‘포르투갈’ 구획에 속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오늘날에도 ‘브라질’은 ‘포르투갈’어를 사용하며, 반면에 나머지 중남미 대부분의 지역은 ‘스페인’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많은 정복자들은 자신들의 임무가 지닌 종교적 측면들을 늘 염두에 두고 있었던 것 같다. 예를 들어, ‘P. J. 마혼’ 교수와 ‘예수회’ 사제 ‘J. M. 헤이이스’는 이렇게 쓰고 있다. “원주민들을 개종시키는 것은 ‘코르테스’가 결코 잊어본 적이 없는 목적 중 하나였다. 1524년으로 되어 있는 황제에게 보낸 보고서들 중 하나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소신이 성스러운 폐하께 보고해드린 것 만큼이나 빈번하게, 소신은 일부 원주민들이 우리의 신성한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여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하는 자진성을 보인 데 대하여 전하께 말씀드려왔나이다. 그리고 그러한 목적을 위하여, 소신은 황제 폐하께서 친절을 보이사 선한 생활을 하고 본이 되는 종교인들을 보내주실 것을 간구하기 위해 사람을 보낸 바 있나이다.’”—「아메리카에서 가톨릭 교회가 겪은 시련과 이룩한 개가」(Trials and Triumphs of the Catholic Church in America).

역사가 ‘윌리엄 H. 프레스코트’는 이렇게 덧붙인다. “‘스페인’ 정부가 내심으로 ‘인디언’들의 개종보다 더 열렬히 바란 것은 없었다. 그러한 지시는 끊임없는 부담을 느끼게 하였고, 이 서반구의 군사 원정대에게 어느 정도 성전(聖戰)의 분위기를 느끼게 하였다.” 그러나, 다음의 내용에 유의해야 한다. “그 변화가 얼마나 갑작스러운 것인지 또는 그 수단이 얼마나 광포한 것인지 간에, 개종의 효험을 마음에 품고 있었음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말로 되지 않을 때, 칼이 아주 훌륭한 해결사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험가들은 종종 성실성과 잔혹성이 묘하게 뒤섞인 심정으로 개종 사업에 착수하곤 하였다. 그 예로, ‘잉카’ 제국의 왕 ‘아타왈파’에게 일어났던 일을 고려해 보도록 하자.

‘아타왈파’의 개종

‘잉카’ 제국의 정복자는 ‘피사로’였다. ‘피사로’는 몇명 안 되는 병사를 이끌고 ‘잉카’ 제국을 장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타왈파’를 생포하여 인질로 잡아두는 일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는 ‘잉카’ 통치자와 1532년 11월 16일에 ‘카하마르카’에서 만나기로 약정하였다. 그러나, ‘아타왈파’가 도착하기 전에, ‘피사로’는 그 도시 광장의 삼면에 대포와 병사들을 몰래 배치해 두었다. 얼마 후 그 통치자가 직접 3,000명 이상되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도착하였는데, 그 부하들은 모두 작은 곤봉과 돌팔매 외엔 아무 무장을 하지 않은 상태였다.

역사가 ‘로버트 바아튼’은 이어 벌어진 일에 관해 이렇게 기록한다. “‘비센테데 발베르데’라는 이름의 ‘도미닉’ 교단의 한 수사가 손에 성서를 들고 왕좌 앞에 나아가 그리스도교의 성스러운 힘에 관해 설명하였다. 그는 창조주의 묘사로부터 시작하여,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서 지고(至高)의 희생을 하신 것에 대하여 상당히 장황하게 이야기하였다. 그는 ‘아타왈파’에게 그의 이교도 종교를 버리고, 내세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보호해 주듯이 이제부터 현세에서 그를 보호해 줄 황제 ‘카를로스’ 5세의 종주권을 인정하도록 요구하는 말로 결론을 맺었다.”—「볼리비아 공화국 소사(小史)」(A Short History of the Republic of Bolivia).

그 ‘잉카’ 통치자는 틀림없이 이러한 설교에 매우 당혹했을 것이다. ‘바아튼’에 의하면, 그는 이렇게 대답하였다. “‘그대의 신으로 말하자면, 그는 자신이 창조한 바로 그 사람들에 의해 죽임을 당하였지만, 반면에 나의 신은’하고, 그는 그때 막 산맥의 연봉 너머로 지고 있는 커다란 붉은 태양을 가리키며 말하였다. ‘나의 신은 영원히 살아 있으며, 그 자녀들을 보호해 준다. 도대체 그대는 무슨 권위로 이러한 것들을 말하는가?’” 그 수사는 성서를 가리켜 보이며 ‘아타왈파’에게 건네 주었지만, 그는 그것을 땅바닥에 내던져버렸다. 수사 ‘비센테’는 그의 성서를 주워들고 허겁지겁 달려가 벌어진 일을 ‘피사로’에게 말하였다. 그는 이렇게 말한 것으로 보고되었다. “즉시 공격하시오. 제가 무죄임을 선언합니다.” ‘피사로’가 공격 신호를 내리자, 무방비 상태에 있던 수백명의 ‘인디언’들이 살륙을 당하였고 ‘아타왈파’는 포로로 잡히게 되었다.

‘아타왈파’는 자신의 석방을 위해 ‘피사로’와 교섭을 벌였다. 그는 막대한 황금과 은으로 몸값을 제의하였고, ‘피사로’는 수락하기로 동의하였다. 그러나, 보물이 제시간에 양도되자, ‘피사로’는 약속을 어겼다. ‘아타왈파’를 재판에 회부시켜, 우상 숭배자로서 화형 선고를 받게 하였던 것이다. ‘피사로’의 많은 참모들은 그러한 배약 행위에 항변하였으나—‘발베르데’ 사제만은 예외였다. 결국 ‘아타왈파’는 자신을 그리스도인으로 공언하였고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그는 어쨌든 1533년 8월 29일에 교살형으로 처형되고 말았다.

그리하여 ‘피사로’는 ‘잉카’ 제국의 정복을 완결지었다. 이러는 동안에, “그는 교회들을 세웠고 우상들을 파괴하였으며 가도마다 십자가를 설치하였다.” (「아메리카에서 가톨릭 교회가 겪은 시련과 이룩한 개가」) 그러나, ‘피사로’가 그런 식으로 보급시킨 종교가 참 그리스도교였다고 독자는 생각하는가?

그것은 효과가 있었는가?

군사적인 면에서, 그러한 노력은 하나의 성공이었다. 작은 집단의 정복자들이 자기 고국의 제국을 확장하였으며, 대부분은 자신들을 위하여 영광과 황금을 획득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이 휘두른 폭력으로 그리스도교의 목표를 얼마간 달성하였는가?

한 동안은 그렇게 보였음에 틀림이 없다. “정당하게도 초기 원정을 따라 나선 사제들은 사원과 우상들을 파괴하였으며, 이교를 탄핵하였다. 선교사들이 ‘스페인’으로부터 도착함으로써, 대대적인 개종 사업이 시작되었다. ·⁠·⁠· ‘인디언’들은 매우 큰 열의를 가지고 세례를 받았다.”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그렇지만, 그러한 개종이 얼마나 뿌리깊은 것이었겠는가?

역사가 ‘루기에로 로마노’는 이렇게 논평한다. “오랫동안 복음에 대한 가르침을 받아 왔긴 하지만, 이 나라의 원주민들은 현재 정복 당시보다 그 이상의 그리스도인이 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신앙에 관한 한, 그들은 당시보다 나아진 것이 없기 때문이다. ·⁠·⁠· 오늘날 ‘볼리비아’ 및 ‘페루’ 남부에서는, 동정녀에 동화되긴 하였지만 고대 이교 신 ‘파카-마마’(대지-어머니)가 여전히 활발하게 숭배받고 있으며 ·⁠·⁠· ‘멕시코’에서 ‘과달루페’라는 동정녀 숭배는 여신 ‘토난찐’(신들의 어머니) 숭배에 그 근원을 두고 있다.”—「식민지 정복 과정」(Mecanismos da Conquista Colonial).

그 동일한 저자는 이렇게도 말하였다. “복음 전도는 번번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 왜 그러했는가? 폭력이 또한 복음 전파에 주도적 역활을 하였기 때문이다. ‘불신자들에게 사용한 화약이 마치 주님께 바치는 향과 같았다는 점을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사랑으로 치장한 종교를 제의한들 무슨 소용이 있었겠는가?”

그렇다. 참으로 그리스도인 목표는 그러한 폭력 수단에 의해 결코 달성될 수 없다. 칼을 빼든 상황하에서 이루어진 개종은 참 그리스도교가 요구하는 성품의 변화와 개인적 서약을 가져올 수 없는 것이다. 오히려 “복음 전파자들” 자신이 부패되어 버렸다. 칼을 빼든 복음주의 정복자들에 의해 최초로 개방된 그러한 많은 나라에서, 여전히 극심한 갈등과 분열이 존재하고 있다는 점에 유의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오늘날 일부 사제들과 수녀들은 그곳에서 “해방 신학”을 위하여 현대식 무기에 의한 투쟁을 조장하고 있다.

예수의 접근 방식은 전혀 달랐다. 독자는 그분이 잡히시던 날 밤, 사도 ‘베드로’가 칼을 빼들고 그분을 보호하려 하였을 때, 그분이 보이신 반응을 기억하는가?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네 검을 도로 집에 꽂으라. 검을 가지는 자는 다 검으로 망하느니라.” (마태 26:52) 그 같은 날 조금 후에, 예수께서는 ‘본디오 빌라도’에게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라[왕국]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라. 만일 내 나라[왕국]가 이 세상에 속한 것이었더면 내 종들이 싸워 나로 ‘유대’인들에게 넘기우지 않게 하였으리라. 이제 내 나라[왕국]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한 18:36, 신세 참조.

그러한 대담 무쌍하고 생각을 자극하는 말씀들은, 만일 오늘날 예수께서 지상에 계셨더라면 그분은 확실히 무력에 의존하는 자유의 투사가 되지 않으셨을 것임을 나타내 준다. 그러므로 예수의 발자취를 진실되게 따르고자 하는 사람들은 그러한 폭력에 연루되어서는 안 된다. (베드로 전 2:21-23) 사실이 그러하므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해보아야 할 것이다. ‘코르테스’나 ‘피사로’ 같은 전사들이 대표한 왕국은 과연 누구의 “왕국”이었는가? 그리고 오늘날 누구의 “왕국”을 위하여 ‘프로테스탄트’ 행동 대원들과 ‘가톨릭’ 교직자들은 싸우고 있는 것인가? 예수 그리스도께서 통치하시는 왕국을 위한 것이 아님이 분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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