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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교회—“멸종 위기의 종”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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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국 교회—“멸종 위기의 종”인가?
  • 깨어라!—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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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2 2/15 17-19면

영국 교회—“멸종 위기의 종”인가?

최근에 영국에서는 수많은 교회들이 문을 닫았기 때문에 한 신문의 표제는 교회들을 “멸종 위기의 종(種)”이라고 선언하였다. 약 1,000개의 사용되지 않는 교회들과 예배당들이 지난 15년 동안에 헐리게 되었다. 합동 통신은 “매년 평균 85개의 영국 국교회의 교회들이” “과잉”, 즉 불필요한 것으로 밝혀졌다고 보도하였다.

영국 교회의 이러한 급격한 쇠퇴의 이유는 무엇인가? ‘칸사스’ 시티 「스타」지의 ‘런던’ 통신원 ‘브라이언 던닝’은 다음과 같이 대답한다. “그 이유는 극히 간단하다. 즉 교회를 채울 교인이 충분치 않다는 것이다. 만원이던 다수의 교회들이 지금은 텅텅 비었다.”

세례 받은 국교회 교인들의 10‘퍼센트’ 미만이 부활절같이 붐비는 절기에만 교회에 나간다. 왜 그토록 수가 적은가? ‘던닝’은 이렇게 설명한다. “한 가지 이유는 영국의 ‘공식적’ 그리스도교의 특수한 역사에 있다. 왕 ‘헨리’ 8세가 ‘로마’와의 관계를 단절한 이래, 영국 교회는 국가, 즉 ‘국교’ 신앙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교회의 쇠퇴에 기여하게 되었는가? 영국 교회의 교직자인 ‘로날드 미카엘’은 이렇게 진술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이러한 결탁 관계가 숨통이 막힐 지경임을 알게 된다.” 그는 심지어 ‘캔터베리’의 대주교까지도 “그의 교회가 역사로 인해 함정에 빠져 있음을 시인하고 있다”고 쓰고 있다.

영국 교회가 “멸종 위기의 종”이 되게 하는 데 한몫 거든 그 역사란 어떤 것인가? 과거를 살펴 본다면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교회의 뿌리

영국 교회의 뿌리는 거의 500년을 소급하여 ‘로마 가톨릭’ 교도인 왕 ‘헨리’ 7세의 시대로까지 소급한다. ‘헨리’의 큰 아들 ‘아더’는 ‘스페인’의 ‘아라곤’의 ‘캐더린’과 결혼하였다. 그러나 곧 ‘아더’는 사망하였다. ‘스페인’과의 왕실 관계를 지속하려는 노력으로 왕 ‘헨리’ 7세는 ‘캐더린’이 그의 둘째 아들 ‘헨리’와 결혼하도록 결정하였는데, 그가 후에 ‘헨리’ 8세가 되었다.

그러나 ‘가톨릭’ 교회법에 따르면, 젊은 ‘헨리’가 그의 사망한 형의 아내와 결혼한다는 것은 불법이었다. 그러나 왕 ‘헨리’ 7세는 그 당시 교황이었던 ‘율리우스’ 2세와 친분이 매우 두터워서 교황에게 특면을 요청하였었다. 영국 왕을 기쁘게 하려고 교황은 그것을 승인하여 그 결혼이 성립될 수 있게 하였다.

1509년, 자기 부친이 사망한 후, 젊은 ‘헨리’가 왕위를 계승하여 이미 말한대로 ‘헨리’ 8세가 되었다. 그 후 곧 그는 ‘캐더린’과 결혼하여 그 여인에게서 몇 명의 자녀를 얻었다. 유일하게 ‘메리’(후에 역사에서 ‘유혈의 메리’로 알려짐)만이 유년기를 넘어 생존하였다. 남자 후계자를 절실히 원하던 ‘헨리’는 어떻게 하면 그가 ‘캐더린’에게서 합법적으로 벗어나 자기에게 아들을 낳아 줄 수 있는 보다 젊은 아내와 결혼할 수 있을지 궁리하였다.

1527년에 ‘헨리’는 새로운 교황인 ‘클레멘트’ 7세에게 호소하여, ‘캐더린’과의 결혼이 당초부터 불법적이었다는 것을 전제로 무효로 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클레멘트’는 충성스런 ‘가톨릭’ 교도인 ‘헨리’의 감정을 상하게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그 결혼을 기꺼이 취소시켜 줄 듯 싶었다.

그러나 ‘헨리’가 요청을 한 바로 그 중요한 시기에 ‘클레멘트’ 7세는, ‘로마’를 쳐서 교황을 자기 손아귀에 넣은 독일 황제 ‘찰스’ 5세의 사실상의 포로였다. 설상가상으로 그 독일 황제는 ‘헨리’의 아내인 ‘캐더린’의 조카였던 것이다! ‘캐더린’은 자기 조카의 지지로 그 결혼이 유지될 수 있음을 알았고 교황도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므로 교황이 ‘헨리’의 요구를 들어 준다는 것은 매우 곤란하였다. 독일 황제의 보복은 교황과 교황의 소유에 재난이 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헨리’의 일방적인 행동

교황이 취한 행로는 시간을 두고 자기의 정치적 형세가 변화되기를 기대해 보자는 것이었다. 그러나 ‘헨리’의 참을성은 한계점에 달해 있었다. 그는 이미 장래의 왕후로서 ‘앤 볼린’이라는 매력적인 시녀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헨리’는 영국의 왕위가 두 명의 국외 세력 곧 독일 황제와 ‘로마’ 교황에 의해 위태로운 지경에 있다는 사실은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결혼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단호한 조치를 취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가톨릭’ 추기경 ‘울지’로부터 모든 권위를 박탈하고는 모든 교직자들에게 자기 ‘헨리’ 8세를 영국 교회와 교직자들의 수뇌로서 지지할 것을 요구하였다.

뒤따라 수많은 의회 법령 조치가 있었으며, 각 법령은 영국과 ‘로마’를 결속시키던 유대를 끊도록 고안되었다. ‘로마’ 교황에게 바치던 세금은 중단되었다. 또 다른 법령은 아무도 왕의 결정을 거스려 ‘로마’에 호소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캐더린’은 실질적으로 교황으로부터 고립되었으며 영국에서의 교황권은 무너지고 말았다.

여전히 ‘가톨릭’ 교인이던 ‘헨리’는 ‘캐더린’과의 결혼이 무효라는 주장 하에 비밀리에 ‘앤’과 결혼하였다. 1533년 6월 1일에 ‘앤’은 왕후로서 관을 쓰게 되었다. 7월에 ‘헨리’는 파문당하였다.

개혁이 구체화되다

그러는 동안에도 영국에 있는 교회는 기본적으로 변화되지 않은 채로 있었다. 그것은 여전히 ‘가톨릭’이었다. 그러나 그 나름의 교리와 특징을 지닌 영국의 교회가 되어야 하였다.

‘헨리’ 통치의 마지막 14년 동안에 영국 ‘가톨릭’ 교회를 하나의 국교회로 통합하는 일이 실현되었다. 수위령(首位令)으로써 ‘헨리’는 자신이 영국 교회의 지상의 최고 수뇌라고 선언하였다.

그러나 ‘헨리’는 자신의 ‘가톨릭’ 신앙을 자부하였고 1539년의 의회 법령을 통해 ‘가톨릭’ 교리를 재확증하였다. 진실한 종교 개혁자들은 이 때문에 크게 실망하였지만, 그들의 반대는 성공을 거두지 못하였다. 그들은 1547년에 ‘헨리’ 8세가 죽고 그의 여섯 부인 중 세번째인 ‘제인 쎄이무어’에게서 난 아들 ‘에드워드’ 6세가 왕위를 계승할 때까지 8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였다.

개혁이 시작되다

‘에드워드’ 6세는 ‘프로테스탄트’ 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았었다. 그는 6년간만 통치했으나 이것은 대주교 ‘토마스 크랜머’가 개혁을 진척시키도록 하는 데는 충분한 기간이었다.

그러나 1553년에 ‘에드워드’ 6세의 요절로 왕관은 ‘아라곤’의 ‘캐더린’에게서 난 ‘헨리’ 8세의 딸 ‘메리’에게 넘어갔다. 자기 어머니처럼 ‘메리’도 철저한 ‘가톨릭’ 교인이자 교황의 지지자였다. 그의 정책은 영국 교회를 교황의 권위 밑으로 되돌리는 것이었다. 초기의 종교 개혁은 역전되고 말았다. 개혁을 하려던 자유 교회 지도자들은 물러 나게 되었다. 대주교 ‘크랜머’를 포함하여 거의 300명이나 되는 ‘프로테스탄트’ 신자들이 화형을 당하였다.

‘메리’가 무자한 채로 1558년에 사망하자, 왕관은 ‘앤 볼린’에게서 난 ‘헨리’ 8세의 다른 딸인 ‘엘리자베드’에게 넘어갔다. 이름만 ‘가톨릭’ 교인인 ‘엘리자베드’ 여왕은 곧 ‘메리’가 취한 모든 종교적인 조처를 무효화하고 ‘에드워드’의 사망 시에 유효했었던 조처들을 회복시켰다.

그러나 1570년 교황 ‘피우스’ 5세는 ‘엘리자베드’ 여왕을 파문하였다. 그는 또한 ‘엘리자베드’에 대한 충절의 의무로부터 여왕의 신민을 해제하였다. 그리고 심지어 영국의 왕위가 공석이라고까지 선언하였다. 그러한 충성의 갈등에 직면한 많은 ‘로마’ ‘가톨릭’ 교인들은 때 이른 죽음을 당하였다. 이제 화해의 희망은 불가능한 것으로 보였다.

그러나 교황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최후 수단으로써, ‘스페인’ 왕 ‘필립’ 2세에게 의뢰하였다. 교황직으로부터의 재정적인 권유로 ‘필립’은 대 함대를 준비하고 1588년에 ‘엘리자베드’와 그의 ‘프로테스탄트’ 나라들을 치러 출항하였다. 그러나 그의 함대는 패배하였고 나중에는 폭풍으로 파선되었다.

그리하여 종교 개혁은 안전하게 되었다. ‘로마’로부터 완전히 분리되었다. 이제 교황권으로부터 완전히 분리된 하나의 국교회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국가와 교회 사이의 이러한 관계는 지역 사회들의 사이가 점차적으로 벌어지게 하였다. 이러한 증거로써, 수년간에 걸쳐 “자유” 교회와 “비국교파” 교회 집단들이 형성된 사실이 있다. 영국 교회의 교직자 ‘미카엘’이 다음과 같이 말한 대로였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교회와 국가 사이의 이러한 결탁 관계가 숨통이 막힐 지경임을 알게 된다. 교회는 스스로를 해방시켜야 한다. 교회가 정부를 의식하고 ·⁠·⁠· 정부 정책의 한 대행 기관 노릇을 하는 것으로 보여지는 한, 그것은 투쟁적인 교회가 될 수 없다.”

국가로부터 대단히 엄격한 통제를 받기 때문에 고위 교직자의 임명과 심지어 기도서의 형식까지도 의회에 의해 결정되고 있는 오늘날의 영국 교회의 현실은 하나의 시대착오적인 것이다. 이러한 현황이 교회 성원들이 끊임없이 교회를 떠나가는 하나의 요인임이 입증되었다. 영국 교회가 오늘날 “멸종 위기의 종”이라고 묘사된다는 것은 이해할 만한 일이다.

[17면 삽화]

‘캔터베리’ 대성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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