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1 12/15 15-18면
  •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는가?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는가?
  • 깨어라!—1981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어떤 사람들은 믿는데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는 이유
  • 믿음, 하지만 “확신”은 아님
  • “교회”—“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방해 요소”
  • 젊은이들이 강한 믿음을 발전시키도록 도움
  • 창조일까 진화일까?—제1부: 왜 하느님을 믿는 걸까?
    청소년은 묻는다
  • ‘나는 인생을 어떻게 살 것인가?’
    깨어라!—1982
  • 수백만명이 교회를 떠났다—당신도 떠나야 하는가?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75
  • 독일 교회들의 수난
    깨어라!—1971
더 보기
깨어라!—1981
깨81 12/15 15-18면

오늘날의 청소년들은 얼마나 하나님을 확신하고 있는가?

독일, ‘비스바덴’

1981. 9. 8

친애하는 ‘앨런’,

지난번 편지에서 표명한 염려를 이해할 수 있겠읍니다. 종교적인 나라에서 살고 있고, 하나님을 믿도록 양육받아 왔고, 또 같은 젊은이이기에 당신으로서는 이곳 독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한다는 것을 믿기가 어려울 것입니다. 적어도 당신이 최근에 읽은 그 기사는 많은 젊은이들이 그러함을 알려 주고 있읍니다.

물론, 그 기사에 언급된 것과 같은 여론 조사 수치가 우리가 알아야 할지 모르는 모든 것을 언제나 알려 주는 것은 아닙니다. ‘뉴우요오크’에 본부를 둔 어느 여론 조사소 사장은 최근에 설명하기를 여론 조사는 대중이 “어느 주제에 대해 심사숙고해 보았는지 않았는지 ·⁠·⁠· 의 여부에 대해서는 전혀 알려 주지 않는다”고 했읍니다. 여론 조사는 “사람들이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막연한 시발점에 있는지, 격동하는 중간 점에 있는지, 최종적인 결말에 와 있는지 어떤지를 밝혀주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독일의 젊은이들 가운데(그리고 아마도 당신의 나라에서도 역시) 하나님께 대한 믿음이 쇠퇴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들이 있읍니다. 나는 독일에서 살아 온 여러 해 동안, 이 논제에 관해 수많은 젊은이들과 이야기를 나누어 보았읍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에게 뭔가 최신의 자료를 알려 주기 위해서 몇몇 친구들에게 얼마의 대표적인 젊은이들과 회견할 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읍니다. 우리는 그들 중 많은 사람이 매우 명확한 의견을 가지고 있는 반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 단정을 내리는 데 진정한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음을 알게 되었읍니다. 그들의 말은 상당히 깨우쳐 주는 바가 있읍니다. 그 중 얼마를 알려 드리겠읍니다.

어떤 사람들은 믿는데 어떤 사람들은 의심하는 이유

이들 젊은이들은 하나님을 믿는 데 대해 네 가지 기본적인 이의를 제기하였읍니다. 일반적인 이의는 “나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으므로 그분의 존재를 믿을 수 없다”는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15세된 ‘가톨릭’교인 ‘조아킴’은 “내가 자연계에서 보아 온 사물들은 믿기에 충분한 근거가 된다”고 말하였읍니다. 그의 급우인 ‘울리케’도 이에 동의하면서 말하기를 하나님은 “그분이 하시는 일에서 볼 수 있”다고 했읍니다.

두번째 논증은—그러나, 지지하는 증거는 없이 제공된 것임—“과학이 하나님이 없음을 증명했다”는 것이었읍니다. “그와는 반대로”, 과학적인 탐구로 말미암아 “저절로 생겨날 수 없는” 우주의 “질서와 규칙성”, “정밀한 작품들”이 밝혀지고 있다고 말한 사람들도 있었읍니다. 10대 ‘가톨릭’교인인 ‘사샤’는 “만물의 시작이 있음을 과학이 증명”했으므로 만물을 시작케 한 위대한 제일 원인, 즉 하나님이 존재할 것임에 틀림없다고 논증했읍니다.

또 다른 의심의 이유로 제시된 것은 논증이라기보다는 불평에 가까운 것이었읍니다. “사람들은 하나님이 우릴 도와 주실 거라고 말하지만요, 한번도 그러신 적이 없는걸요”라고 한 소녀는 한탄했읍니다. 모두가 그에 동의하는 것은 아닙니다. 다음과 같은 예를 사용하면 이 소녀의 논증의 취약점은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을 것입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할 때 친구나 친척들이 우리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경험을 때때로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들이 도와 주지 않는 데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을 수 있겠지만 그들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그 이유가 될 수는 없음이 분명합니다. 생각컨대, 잘못은 그들에게 보다도 우리에게 있을 가능성이 더 큽니다.

네번째 이의는 가장 자주 들은 이의였읍니다. “하나님이 계시다면, 그분은 전쟁, 살인 및 오늘날 일어나고 있는 그 모든 가공할 일들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다.” ‘함부르크’의 어느 학생은 이렇게 논증했읍니다. “더 높은 능력을 가진 분이 계시다면, 왜 그분은 이런 일들을 금하지 않으십니까?” 분명 이 학생은 하나님이 이러한 일들을 금지하셨다는 성서의 설명을 간과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이 사람들이 이러한 일들을 행하지 않도록 막아 주지는 못했읍니다. 하지만, 사람의 불순종을 근거로 하나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결론짓는 것이 논리적입니까? 어느 어린 아이의 불순종이 그에게는 아버지가 없다는 것을 증명합니까?

때때로 사람들은 가공할 범죄를 목격하면서도 수수방관하였읍니다. 우리는 그들이 그렇게 한 것이 과연 잘한 것이냐 아니냐에 대해서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러한 방관자의 존재를 의심할 것입니까? 마찬가지로,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이 악을 허락하신 것이 옳은지의 여부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지만, 이것이 그분의 존재를 의심할 이유는 되지 않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문을 해결하기란 어려워 보일지 모릅니다. 그러나 일단 답을 찾고 보면 그 답은 참으로 만족할 만합니다. 여기에는 하나님의 통치권의 정당성과 그분의 말씀의 참됨을 의문시하는 하나의 쟁점이 제기되었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 내포됩니다. 이러한 쟁점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기간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 역시 하나님이 악을 허락하시는 것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나는 성서 욥기(1, 2장)가 훌륭한 설명을 해주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믿음, 하지만 “확신”은 아님

많은 젊은이들은 자기들의 의견을 지지하는 근거를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어떤 사람은 믿는다고는 말하지만 이유는 그리 확실하지가 않습니다. 단지 “부모님이 믿으시니까요”라고 말하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어떤 사람은 믿지 않습니다. 그들은 흔히 이렇게 말하지요. “내가 하나님에 관해 들은 것은 수긍이 가질 않아요.” 그러나 그들은 자기들이 들은 것이 참된지를 알아보기 위해 조사해 본 적이 있읍니까? 그들은 이 논제를 고려해 보는데 얼마나 애를 써 보았을까요?

66명의 학생들로 이루어진 한 집단 중에서 29명은 자기들의 부모가 하나님을 믿는지 않는지를 모른다고 시인했읍니다. 그들의 가정에서 하나님이 일상 대화의 주제가 되지 않음이 분명합니다. 이 논제를 많이 고려하지 않은 이들 젊은이들은 여전히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 막연한 시발점에”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보다 나이든 많은 사람들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독일 잡지 「쉬피겔」지의 한 기사는 대다수 독일인의 믿음이란 “믿음이라기보다는 희망이며, 확신이라기보다는 막연한 가정”이라고 시인했읍니다. 그러나 소위 그리스도교 나라라는 곳에서 이러한 일이 있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입니까?

“교회”—“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방해 요소”

많은 젊은이들은 하나님께 대한 믿음과 “조직화된 종교”에 대한 믿음을 구분합니다. 사실상, 많은 사람들은 정통 교회들이 하나님께 대한 자기들의 믿음을 증진시키는 일을 거의 하지 않았다고 여깁니다. 지난 10년 동안에만도 200만명 이상이 독일의 ‘가톨릭’ 및 ‘루터’ 교회에서 탈퇴한 것도 당연한 일입니다.

정치학과 역사를 전공하는 한 학생은 자기가 종교적인 분위기 속에서 자라긴 했지만 “내가 하나님이 계시다는 확신에 도달한 것은 오로지 개인적인 명상을 통해서”였다고 말했읍니다. 사실상, 이들 젊은이들은 “하나님은 좋지만 교회는 싫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일찌기 1968년에 「쉬테른」지는 이미 이렇게 경고하고 있었읍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전체 그리스도인의 3분의 1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을 상실할 위험에 처해 있다.” 그리고서 비난의 화살을 돌리며 부언하기를 “교직자들이 이 일을 조장하고 있다”고 했읍니다.

사실입니다. 오랫 동안 “하나님은 죽었다”는 이론을 조장해 온 교직자들 말입니다. 스스로 해결하라는 “사회 복음”을 지나치게 강조하고 인간의 문제들에 대한 하나님의 해결책인 하나님의 왕국은 무시해 온 교직자들. 하나님의 이름으로, 비이치적이면서 명백히 비성경적인 교리들을 가르쳐 온 교직자들. 하나의 집단으로서 한심스러운 본을 보여 온 교직자들. “교회 자체도 성서의 방식을 따르지 않는걸요.” 한 북부 독일인이 한 말입니다. 그러니 다른 누가 따르겠읍니까?

“교회와 관련된 것은 모든 것이 사기입니다”라고 화를 내며 단언한 한 젊은이의 말은 많은 사람을 대변한 말입니다. 그의 경우 “모든 것”은 “하나님에 대한 믿음”도 내포하였읍니다. 교회들은 창조주를 대표한다고 주장하기는 하지만 실상은 그분을 잘못 대표해 왔으며, 그리하여 수많은 교인들로 하여금 하나님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게 만들고 말았읍니다.

이 점이 간과되지는 않았읍니다. ‘함부르크’로 유학 온 한 젊은 ‘아프리카’인 학생은 눈에 배신당한 기분을 감추지 못하면서 이렇게 맹렬하게 비난하였읍니다. “뻔뻔스런 ‘유럽’인들 같으니라고! 당신네들은 ‘아프리카’에 와서 우리들을 소위 이교로부터 하나님의 숭배로 개종시켰는데, 이제 보니 당신네들 중에는 하나님의 존재를 믿는 사람조차 없단 말입니다!”

잃은 성원들을 되찾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서, ‘카톨릭’과 ‘루터’ 교회들은 하나의 광고 운동을 벌일 것을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는 중인데, 이것이 실현될 경우 잡지 독자들은, 비누와 치약 광고와 함께, 교회가 낸 ‘믿음을 파는’ 광고를 보게 될 것입니다. 신문 보도에 따르면, 이 운동을 준비하고 있는 광고 전문가들은 “‘복음’이 오늘날 사람들이 사용하는 언어로써가 아니라 구식 예복에 싸여서 팔리고 [있다]”는 데 의견이 일치하였읍니다. 이러한 결점을 시정하기 위해서, 그들은 그들의 제품을 팔기 위한 재치있는 표어와 눈길을 끄는 그림들을 준비해 왔읍니다.

그러나 매력적인 옷을 입혀서 믿음을 팔려고 하는 것은 큰 효과가 없읍니다. 포장보다 더 중요한 것은 제품 자체입니다. 사람들, 특히 젊은이들은 그들이 무엇을 믿어야 하는지, 왜 그것을 믿어야 하는지, 그것을 믿는 것이 왜 이치적인지, 그리고 그것을 믿음으로써 어떠한 유익들을 얻을 수 있는지를 알고 싶어합니다. 간단히 말하면 자기들의 질문에 대한 답을 원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교국 교회들과 그 교직자들은 예수의 훌륭한 본을 따라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명백하고 솔직한 답변을 보여 주지는 않고 장황하고 모호한 설명들을 즐겨 내놓아 왔으며, 이로 인해 광고 전문가들 중 한 사람은 이렇게 논평했읍니다. “교회는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방해 요소입니다.”

젊은이들이 강한 믿음을 발전시키도록 도움

그리스도교국의 교직자들이 실패해 온 일을 성취하기 위해 ‘여호와의 증인’들은 열심히 노력하고 있읍니다. 탐구심이 많은 청소년들의 질문에 대해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이 대답하게 함으로써 그들은 성공을 거두고 있읍니다. 현재는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인 다음 사람의 경험담은 많은 예 중에서 대표적인 것입니다.

“내가 학교 수업 및 견진 수업을 받는 동안에 교직자에게 한 질문들에 대한 답변은 부정확하고 불만족스럽거나 답변이 전혀 주어지지 않았읍니다. 그래서 나는 하나님의 존재를 부인할 수는 없지만 또한 완전히 확신하지도 못하는 상태에 있게 되었읍니다. 하지만 나는 이 문제를 거의 염두에 두지 않았읍니다. 어차피, 학식있는 신학자들조차도 하나님과 성서에 대한 견해가 갖가지이니까요. ‘대학에서 신학을 연구하는 교직자들이 성서를 이해할 수 없다면, 그것은 이해될 수 없고 자체에 모순이 있는 책임에 틀림없다.’ 나는 그렇게 확신하고 있었읍니다.”

위의 말은 오늘날 수많은 젊은이들의 느낌을 알려 줍니다. 많은 사람들이 믿고자 하는 욕망과 필요는 가지고 있지만 그렇게 하기 위한 논리적인 근거는 없는 경우가 흔한 것입니다. 이들은 여전히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 막연한 시발점에” 있읍니다. 이는 한 젊은이가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된 이유를 설명하는 다음과 같은 말로 잘 예시됩니다.

“나는 항상 하나님이 존재한다고 믿고 있었으나 그분이 이 땅 또는 인류에 대해 어떠한 목적을 가지고 계시는지에 대해서는 아는 바가 없었읍니다. 나는 인생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완전한 무지 속에 있었읍니다. 나는 매주 나를 만나러 온 ‘증인’에게 질문을 하고 또 질문했읍니다. 나는 그에게 특별히 까다로운 질문들을 생각해 내려고 노력했으며, 이것들에 대답할 수는 없겠거니 하고 확신했읍니다. 사실은 정반대였읍니다. 그를 당황하게 만들 수는 없었으며, 각 질문에 대해 그는 성서의 대답을 가지고 있었읍니다. 그가 한 것처럼 나에게 성서의 의미를 활짝 공개해 준 사제는 아무도 없었읍니다.”

성서의 대답이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믿음을 강화시켜 줄 수 있고, 하나님께서 머지 않아 그분의 왕국을 통하여 인류의 문제들을 해결하기 위해 개입하실 것이라는 확신을 줄 수 있다는 말을 듣는 것은 얼마나 즐거운 일입니까! 그리고, ‘앨런’, 나는 당신이 이곳 독일의 많은 젊은이들이 하나님의 존재를 믿지 않고 있지만 다른 많은 젊은이들은 믿고 있다는 이야기를 듣고 기뻐할 거라고 확신합니다. 아직도 “결심을 하는 과정에서 ·⁠·⁠· 막연한 시발점” 또는 “격동하는 중간점”에 있는 많은 젊은이들 그리고 “확신”이라기보다는 “모호한 가정”에 가까운 믿음을 가진 많은 젊은이들이 ‘여호와의 증인’들이 무료로 제공하는 훌륭한 교육 기회를 조만간 이용하고 그리하여 그들의 성서 질문에 대한 답을 발견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앨런’, 비록 종이와 ‘펜’으로이기는 하지만 당신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참으로 즐거웠읍니다. 곧 답장이 있기를 바라며 그리스도인 사랑의 따뜻한 인사를 보냅니다.

당신의 변함없는 벗,

[‘사인’, ‘요한’]

[16면 삽화]

“나는 하나님을 본 적이 없다.”

[17면 삽화]

“하나님은 나를 도와준 적이 없다.”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