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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3 1/1 11-14면
  • 난폭한 성질을 제어하게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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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난폭한 성질을 제어하게 되다
  • 깨어라!—19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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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3
깨83 1/1 11-14면

난폭한 성질을 제어하게 되다

쨍그렁! 아버지가 손을 한번 휘두르자 사나이의 유리잔이 빙그르르 돌며 마루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러자 사나이는 고함을 지르며 항의하면서 한동안을 밀쳐대더니, 퍽! 사나이의 주먹이 아버지의 얼굴에 정면으로 꽂혔고, 아버지의 얼굴에서 피가 흐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버지를 돕기 위해 뛰쳐나갔다. 다른 사람들이 싸움에 합세했다. 순식간에 그 ‘프랑스’ ‘카페’는 난장판이 되었다. 유리잔이 깨어지고, 의자가 날아가고, 탁자가 부서졌다. 대 소동을 연락받은 경찰이 긴급히 현장에 출동했다. 단순히 경찰복을 보았을 뿐인데도 내게 있어서 그것은 마치 황소가 투우사의 ‘망토’를 본 것 같았다. 나는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내가 붙들릴 때 쯤엔 경찰관 세명이 쓰러져 있었다. 이렇게 되어 아버지와 나는 수갑을 찬 채 그 지역 경찰서로 연행돼 갔다.

꽤 오래 전인 1953년 3월의 그 토요일, 아버지와 나는 ‘쇼핑’을 하기 위해 집을 나왔었다. 우리는 직장 친구들을 몇명 만났고, 결국에는 그 지역 ‘카페’를 순회하게 되었다. 아버지는 술에 취하였고, 이윽고 우리 둘은 그런 싸움에 말려들은 것이다. 다음 날 신문에는 “부자(父子)가 손님들에게 싸움을 걸어—경관 세명 중상”이라는 표제 아래 우리의 이름이 실렸다. 우리는 한달간 구류를 살았으며, 벌금을 전부 갚는 데 1년이 꼬박 걸렸다.

이것은 나를 난폭한 생활로 끌고 갔을 뻔했던 ‘에피소우드’ 중 한 가지에 불과하다. 그러나 그 후로 나는 난폭한 성질을 제어하는 법을 배웠다. 어떻게 배웠느냐고? 그에 앞서 먼저, 나의 자란 환경과, 내가 어떻게 그런 성질을 갖게 되었는지에 대해 이야기하겠다.

부전자전

나는 1929년 (서부 ‘프랑스’의) ‘르망’에서 출생하였다. 그 해는 대 공항이 미국을, 다음엔 서구를 강타한 해였다. 1930년대초에 ‘프랑스’에는 실업자들이 많았다. 아버지—벽돌공—는 훌륭한 일군이셨으므로 겨우겨우 건축 공사장에서 일자리를 구하긴 하셨다. 경제 상황이 더욱 악화되어 가자 아버지는 정치와 노동 조합 및 노동자의 권익에 관심을 갖게 되셨다. 아버지는 호전적이 되셨고, 과음하기 시작하셨다.

아버지는 종종 저녁 아주 늦게 귀가하셨는데, 그때가 되면 어머니는 아버지의 나쁜 신경질을 참아내야 하셨으며, 그런 발작은 번번히 구타 그리고 기물 및 가구의 파괴로 이어지곤 하였다. 토요일 밤은 우리들에게 특히 고통스러운 날이었다. 주급날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누나와 나를 침대에 눕혀 놓으시면, 우리는 덜덜 떨면서 아버지가—술 취하시어—집에 오실 때를 기다리곤 하였다! 때때로 아버지는 사냥을 하러 나가곤 하셨는데, 귀가하실 때면 아버지와 친구 분들은 술 취하신 채, 공중에다 엽총을 쏘아대면서 들어오시곤 하였다.

내가 신경질적이고 잔인하며 이기적인 사람으로 자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다. 하루는, 내가 한 친구와 함께 못된 짓을 하고 오니, 아버지가 자전거를 빼앗아 창고에 넣고 잠궈버리셨다. 자기 아들에게 주게 자전거를 달라고 요청하는 친구분과 아버지 사이의 대화를 엿들은 나는 기어이 창고로 뚫고 들어가 큰 도끼를 가지고는 자전거를 산산이 부순 후 그 조각들을 정원에 묻어버렸다. 말할 필요도 없이, 아버지가 그 사실을 아셨을 때, 나는 늘씬하게 얻어 맞았다.

나는 우리 지방의 젊은 깡패들 중에서 “거물”이 되었으며, 못된 일을 꾀하는 친구들에게는 언제든지 쾌히 충고를 해주었다. 우리가 하던 못된 장난 중 한 가지는, 예기치 않게 교회의 종을 울리거나 근처의 함석 지붕에 돌을 던짐으로써 만과(晚課, 저녁 기도 예배)를 방해 놓는 일이었다. 스스로의 생활을 통해서 나는 아버지의 본을 따르고 있었다. 아버지는 다른 사람들의 눈총을 맞았었고, 두려움의 대상이었는데, 나도 똑같은 일을 하고 있었다.

권투 선수가 되다

그러다가 나는 학교를 그만 두고, ‘캐비닛’ 제조자의 도제(徒弟)가 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기 직전인 1945년 3월에, 어머니가 암으로 사망하셨다. 대부분의 여자들이 갈구하는 사랑과 행복을 유린당한 채 어머니는 고된 일생을 살으셨다. 어머니의 죽음은 내게 큰 충격이었고, 인생이란 의미가 없어 보였다.

내가 전쟁 기간 중 관찰한 것들은, 나의 폭력 취미를 치료하는 데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다. 그리하여 나는 오락삼아 권투에 열중하기로 하였다. 체육관에서 ‘펀칭 백’을 때리거나 연습 상대와 ‘스파링’함으로써 나는 쌓였던 울분을 발산시키곤 하였다. 나는 훌륭한 권투 선수가 되었으며, 마침내 ‘프랑스 아마추어 챔피언’전의 준준결승에도 올랐다.

나의 권투 실력은 내 자만심에 부채질을 하였고 불우한 소년 시절의 결과로 갖게 된 열등감을 극복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권투 외의 나의 주된 오락은 마을 무도회에 참석하는 일이었다. 시비조의 태도를 취하다 보니 나는 언제나 자신을 방어해야 할 어떤 “합당한 이유”를 찾을 수 있었고, 고쳐주어야 할 필요가 있는 어떤 “그릇된 일”이 늘 눈에 뜨이는 것 같았다. 그러면 항상 서슴없이 끼어들어 “선한 싸움”을 벌였다.

난폭한 군인, 난폭한 남편

1950년 나는 징집되어 군복을 입고 ‘알제리’에서 복무하게 되었다. 여기서도 나의 난폭한 성질은 내게 문제를 초래할 따름이었다. 사소한 어떤 이유로 나는 한 동료 군인을 늘씬하게 패주었다. 일단의 장교들 앞에 소환된 나는 거기서도 욕설과 냉소로만 일관하였다. 그들은 내가 우두머리가 아니며, 나를 가르쳐 줘야겠다고 말했다. 나는 삼 주일간 ‘콘크리트’ 독방에 수감되었다. 정말 이상하게도 내가 처음으로 “여호와”라는 이름을 들은 것은 거기서 다른 수감자로부터였다. 이 이름은 나의 뇌리에 깊숙히 새겨졌다. 이런 일 후에 나는 ‘알제리’ ‘비스크라’에 있는 징계소(懲戒所)로 보내졌다.

제대한 후 나는 자동차 공장에서의 이전 직업으로 되돌아 갔으며, 다시 권투를 시작했는데, 이번에는 ‘프로’로서의 인가를 갖고서였다. 1952년에 나는 후에 아내가 된 처녀를 만났다. 그러나 결혼이 나의 난폭한 생활 방식을 변경시키지는 못했다. 한번은 내가 감자를 좀 사러 나간 적이 있었는데, 내가 너무 오래 나가 있자, 아내는 내게 무슨 일이 생겼는지 알아 보려고 나왔다가, 내 자전거가 ‘카페’ 밖에 서 있는 것을 보았다. 소리를 지르며 들어 온 아내는 몇몇 난폭한 친구들과 함께 탁자에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였다. 나는 사람들의 조소를 느끼며 아내를 따라 나왔다. 하지만 집에 도착하자마자 나는 아내를 두들겨 주었다. 사람들은 이윽고 아내에게 나와 헤어지라고 충고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의 결혼 생활은 또한 첫아기를 잃음으로 인해 큰 손상을 입었다. 2년 후 아내가 다시 임신을 하였으나 이번에도 아기는 죽었다. 한 ‘가톨릭’ 수녀가, 하나님께서는 측근에 두실 천사를 많이 필요로 하시는 거라고 우리를 납득시키고자 하였으나, 그 말은 우리에게 아무런 위안이 되지 못하였다. 사실상 그것은 하나님이 안 계시다는 나의 확신을 강화시켜 주었다. 우리는 절망의 늪에 빠졌으며 결혼 생활은 파탄으로 치닫고 있었다.

성질을 제어하는 수단을 발견하다

어느 날 아침 아버지가 나에게 한 ‘여호와의 증인’에게서 받으셨다는 책을 한권 보여 주셨다. 나는 그 책을 쭉 훑어 보았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이 눈에 뜨이고, ‘알제리’에서 군대에 있을 때 그 이름을 들은 기억이 나는 것을 제외하고는 별다른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그 ‘증인’이 아버지를 방문하러 다시 왔을 때, 나는 그에게 성서를 한권 갖다 달라고 요청하였고, 「깨어라!」 잡지를 예약하였다. 하지만 여전히 현역 권투 선수로 뛰고 있던 나는, 그 ‘증인’이 나를 만나러 올 때마다 거의 외출해 있었으며, 따라서 마침내 나는 그에게 더 이상 나를 방문하려고 애쓰지 말라고 일러 주었다. 그러나 「깨어라!」 예약이 만료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갱신하였다.

그 직후 아내와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르망’ 회중의 주임 봉사자인 ‘앙뚜와느 브랑카’의 방문을 받았다. 다정한 남부 ‘프랑스’ 억양으로 그는 하나님의 목적과 부활의 희망을 설명해 주었다. (사도 24:15) 아내는 죽은 두 아기와 또한 사별한 19세의 남동생을 다시 볼 수 있다는 생각에 특히 마음이 움직였다. 나는 그보다는 신중하였으나, 성서 연구를 받아들였다.

물론 새로 얻게 된 성서 지식이 기적적으로 나의 난폭한 성질에 영향을 미치지는 못하였다. ‘앙뚜와느 브랑카’가 ‘마다가스카르’에서 선교인으로 일하기 위해 ‘르망’을 떠난 후에, 두명의 다른 ‘증인’이 우리 부부와 연구하기 위하여 왔다. 아버지는 그런 방문을 알아차리시고는, 우리를 비웃었다. 말다툼이 벌어졌다. 나는 어떤 일이 일어날는지를 알 수 있었다. 아버지는 체구가 큰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는 아버지가 나를 치시기 전에 먼저 아버지를 쳤다. 단 한 대에 아버지는 마루 바닥으로 쓰러지셨다! 그러나 다음 순간 나는 너무나도 부끄러움을 느꼈다. 몸을 일으키신 아버지는 내가 아버지와 함께 지어놓은 그 집에서 나가라고 우리를 쫓아냈다. 아내는 임신중이었고, 이제 우린 잠잘 곳도 없었다. 모두 내 난폭한 성질 탓이었다!

장인 장모는 친절하게도 우리를 집으로 받아들였고, 심지어 우리가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계속하는 데에 동의하시면서, 그것이 나의 생활 방식을 바꾸는 데 도움이 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비치셨다. 이 일 직후에 딸 ‘카트리나’가 태어났다. 이것은 나를 대단히 행복하게 해 주었다. 하지만 아직도 권투의 필요성을 느끼고 있던 나는 자신의 난폭한 성품과 배우고 있는 성서 원칙 사이에서 갈등을 느끼게 되었다. 내적 투쟁이 계속되었으며, 답답한 마음을 풀기 위하여 나는 권투 적수에게 화풀이를 하곤 하였다. 그러나 양심을 편안하게 하기 위하여 나는 상대 선수가 나를 먼저 때리도록 내버려두곤 하였다. 그럼에도, 내 안에 있는 그 무엇인가가 나로 하여금 과거에 내가 하던 식으로 가격하는 일을 하지 못하게 하였다. 하루는 나와 연구하던 ‘증인’이 그 문제를 나에게 솔직히 제시하였다. 권투는 내가 성질을 제어하는 데 도움이 될 종류의 운동이 아니라는 것을. 마침내 나는 포기하기로 결심하였다.

이런 일이 있기 얼마 전, 어린 ‘카트리나’가 자라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이사를 해야 하였다. 그리하여 어느 날 나는 아버지와 화해하고자 찾아뵙기로 하였다. 아버지와 내가 함께 지은 그 작은 나무집을 다른 땅으로 옮겨 지을 수 있도록 내게 팔으실 수 있는지 여쭈어 보기를 원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나와, 여태껏 한번도 보지 못했던 손녀를 만나시고는 즐거워하셨다. 아버지는 내게 일어난 변화를 알아보시곤 기뻐하셨으며, 심지어 내가 집을 다시 짓는 데 도움을 주기까지 하셨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들의 예의바름과 진실성이 아버지에게 좋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 후 ‘증인’들의 한 대회 기간중에 아버지는 심지어 자신의 땅에 ‘증인’들이 천막과 이동식 주택을 설치하게 허락해 주기까지 하셨다.

또 다른 싸움은 시작에 불과했다

나는 1957년에 처음으로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참석하였다. 그것은 ‘시르끄 디베르’라고 하는, ‘파리’에 있는 오래된 ‘서어커스’ 건물이었다. 난폭한 내 기질로 볼 때, 참석한 사람들의 평화스러움과 조용한 즐거움은 내게 가장 깊은 인상을 심어 주었다. 많은 사람들이 내게로 다가 와서는 “봉쥬르” 하며 인사를 했고, 심지어는 나를 “프레르”(형제)라고 부르기도 했다. 나는 집에 돌아와서 아내에게 이 모든 것을 설명해 주었다. 그 해 늦게 아내와 나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으며, 우리 부부는 1957년 11월 23일에 침례를 받았다.

내가 권투를 그만 둔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이제 나는 손으로 다른 종류의 싸움—“옛 인간성”에 대한 싸움을 하게 되었다. (에베소 4:22, 새번역) 내가 이제 ‘여호와의 증인’의 한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알려지자, 나는 이전 친구들을 많이 잃게 되었다. (베드로 전 4:4) 나와 함께 일하던 어떤 사람들은 내가 새로 찾은 믿음을 비웃었다. 어느 날 그들이 나를 조롱하였을 때, 나는 화를 벌컥 내며 그들 모두를 때려눕혔다. 나는 그들과의 싸움에서 이겼다. 하지만, 자신의 난폭한 성질과의 싸움에서는 지고 말았다.—로마 7:18-23.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하나님의 영과 동료 ‘증인’들의 도움을 받아, 나는 점차적으로 난폭한 성질을 제어하는 싸움에서 발전하였다. 마침내 나는 그리스도인 형제들의 신임을 얻었으며 ‘여호와의 증인’의 ‘르망’ 회중에서 주임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추천을 받게 되었다.

부단한 경계가 필요하다

자제를 배양하려는 나의 부단한 노력은 처음엔 나의 건강에도 영향을 주었다. 신경 질환이 생겼고 건선으로 고통을 받게 되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1965년 11월 우리는 ‘프랑스 알프스’에 있는 도시인 ‘그레노블’로 이사하였다. 이곳에 머문 이래 나의 건강은 급속히 호전되었다.

나는 현재도 그리스도인 장로로 봉사하는 특권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난폭한 생활 방식에 다시 빠져들어 갈지도 모르는 위험성을 여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한번은 내가 성서를 논의하고자 호별 방문을 하고 있을 때, 어떤 남자가 내게 소리를 지르면서 모욕을 주기 시작하더니 주먹으로 문을 쾅하고 닫은 일이 기억난다. 속에서부터 옛날의 그 난폭한 반응이 울컥 솟아 올랐다. 나는 뒤로 물러나 주먹을 꽉 움켜쥐고 후려칠 태세를 취하였다. 그런데 그 때 부끄러운 감정이 나를 엄습하였다. 다행스럽게도 그 남자는 조용히 가라 앉았고, 나도 차분히 그에게서 떠날 수 있었다. 나는 그 사람에 대한, 그리고 나 자신에 대한 여호와의 보호에 대해 그분께 감사드렸다!

또 다른 경우로서 내가 방문한 한 법률가가 난폭해지더니 총을 집어들면서, 내가 즉시 꺼져버리지 않으면 쏘아 버리겠다고 위협하였다. 나는 “‘오르브와르, 머시외’ 이웃 집에 말씀드리기 위해 떠나겠읍니다.”라고 조용히 대답하는 자신에 대해 놀라움을 금치 못하였다. 수년 전에 내가 나타내던 식의 반응과는 천지 차이였다!

‘카트리나’의 출생 이후, 아내와 나는 아들을 둘 갖게 되었고, 우리 다섯 식구는 그리스도인 가족으로서 행복하고 평화로운 생활을 누려올 수 있었다.

종종 “노기 충천”하던 성격이었지만, 하나님의 말씀의 연구와 개인적 적용은 내게 도움을 주어 왔다. 만일 내가 이러한 도움의 근원을 좀더 일찍 인식했더라면, 더 신속히 발전했을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내게 큰 감명을 준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여호와의 능력이었다. 아마도 이것은 나의 호전적인 기질 때문이었을 것이다. 벌받지 않고 하나님의 힘에 대항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다는 것을 나는 배웠다. 여호와는 이제 내가 필요로 하던 나의 진정한 “매니저”가 되셨다. 그분은 내게, 자신을 보호하는 확실한 “방어 자세”와, 다른 사람에게 해를 입히지 않고 왕국 소식의 “펀치”를 먹일 수 있는 정확한 지식을 공급하실 수 있었다! 나는 진실로 여호와께 감사드린다. 그분께서 그분의 말씀과 그분의 ‘증인’들의 도움을 통해서 나의 난폭한 성질을 제어할 수 있게 해주셨기 때문이다.—기고.

[13면 삽입]

“나는 항상 서슴없이 끼어들어 ‘선한 싸움’을 벌였읍니다”

[14면 삽입]

‘나는 난폭한 생활 방식에 다시 빠져들어 가지 않도록 여전히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

[12면 삽화]

난폭한 성질을 발산시키기 위해 나는 권투 선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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