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발레’ 직업—그 아름다움과 추함
나는 비명을 지르며 땅에 쓰러졌으며, 의식을 잃었다. 나는 방금 떠난 무대 근처로 옮겨지고 있을 때에 깨났다. 즉시 두개의 나무 받침대 위에 판자 한 장을 놓아 대강 대를 만들어 나를 눕혔다. 커다란 조명등이 나를 비추었다.
방에 있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겁에 질려 나를 둘러쌌다. 얼굴에서 피가 솟구치고 있었으며, 조명등이 번쩍이고 있었다. 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며 꽉 다문 이빨 사이로 이렇게 말했다. “아무 일도 아니야, 아무 일도 아니라구! 알아 듣겠어?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이야!”
무엇이 “아무 일도” 아니란 말인가? 이 남자와 나를 둘러싸고 있던 사람들은 누구인가? 어떻게 해서 나는 이런 상황에 처하게 되었는가? 그 결과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답하고 싶지만, 먼저 내가 세살 때로 거슬러 올라가야겠다.
나는 ‘텔레비젼’에서 본 ‘발레리이나’에게 감동을 받고 마음을 빼앗긴 전형적인 조그만 소녀였다. 그래서 내가 자라면 ‘발레리이나’가 되겠다고 결심하였다. 그래서 무용은 내가 살아가는 이유가 되었다. 때가 되어 나는 전문 ‘발레’ 무용가가 되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였다.
경력을 쌓으면서, 무용하기 위해서나 회견에 응하기 위해서 많은 ‘텔레비젼 프로’에 출연하였다. 여러 차례의 출연 중 한번은 ‘캐롤 버어넷트’가 출연하는 ‘마이크 더글러스 쇼우’에 나갔다. 그 ‘쇼우’가 있기 불과 며칠 전에 우리가 ‘버어넷트’ 양과 함께 ‘캉캉’ 춤을 추게 될 것이라는 통고를 받았다. 우리가 TV ‘스튜디오’에 갔을 때, 그들은 우리 모두는 관중을 향하고서 제대로 춤을 출 것이지만, ‘캐롤 버어넷트’는 줄 중앙에서 관중에게 등을 돌리고는 모든 것을 틀리게 하게 되어 있다고 설명했다. 그리고 물론, 마지막에는 그가 돌아서서, 관중이 틀리게 춤을 춘 사람이 누구인지 알게 될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다. TV ‘스튜디오’에서는 음악이 ‘캉캉’에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녀”라는 곡으로 바뀌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이야기해주는 것을 소홀히 하였다. 빠르기가 크게 바뀐 것이다! 그들은 우리에게 한두번의 예행 연습만을 시키고는 실제 관중이 있는 앞에서 ‘쇼우’를 녹화하였다. 나는 아직도 우리가 춤을 “제대로” 추게 되어 있었다는 점을 관중이 이해하였는지 의심스럽다.
정신을 훈련시킴
어린 시절부터 훈련을 받으면서 여러 가지 것들이 내 생각에 깊이 뿌리박혔다. 첫 번째 것은 예술 단장(‘발레’ 교사와 안무가의 일을 겸하는 사람)에 대한 절대적인 순종이었다. 두번째는 무용단과 무용 예술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었다. 어떤 일이 있어도 “공연은 진행되어야 했다.” 그리고 세번째로, 개인이 가진 재능을 최대한도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발레’를 위해 먹고, 자고, 숨쉬고 ‘발레’만을 위할 각오가 되어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계약을 체결하자 심지어 (거의 남아있지 않은) 나의 사생활에 관련된 결정이라 할지라도 내 마음대로 결정할 수 없었다.
내 훈련의 또 다른 부면은 공연을 부드럽게 계속하기 위해, 예기치 않은 일로 인해 마지막 순간에 변화를 가하거나 즉각적인 결정을 내리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설명하자면, 한때 나는 아주 빠르게 옷을 갈아 입었으며, 의상 책임자가 출연 신호가 있기 수초 전에 내 의상의 ‘지퍼’를 올려 주었다. 그러나 무대 반대쪽 끝에서 자기 의상 책임자와 함께 서있던 나의 짝이 미친듯이 손을 흔들어 대며 지금 막 의상의 ‘지퍼’가 고장났다는 몸짓을 하고 있었다! 옷을 꿰매거나 ‘핀’으로 꽂아 줄 시간조차 없었다. 하나의 의상은 ‘지퍼’를 채우고 또 하나는 채우지 않았으므로, 관중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출연 신호가 나고 춤추어 나아가면서 나는 동시에 내 ‘지퍼’가 내려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우리 두 사람은 ‘펜실베이니아’ 주 ‘필라델피아’에 있는 음악 예술원 무대로 등장했으며, 우리가 그 곡이 끝나기 전에, 옷을 벗는 저속한 춤을 추는 무용가로 바뀌는 최초의 ‘발레’ 무용가가 되지 않나 생각했다! 다행히도 우리는 ‘발레’ 무용가로 계속 남아있었다.
나의 십대 초기 시절에 소녀들에게 단발머리가 유행했다. 내 머리는 길었다. 나는 머리를 고무줄로 묶어 둥글게 말아올린 모양의 가발을 쓰기에 충분할 만큼만 남겨두고 머리카락을 짧게 자르면 양쪽에 모두 적합한 머리를 가질 수 있다고 결정했다. 이론적으로는 훌륭하게 들렸다. 실제에 있어서는, 이야기가 달랐다. 둥글게 말아올린 가짜 머리를 고정시키기 위해 적어도 100개나 되는 머리핀을 사용한 다음에, 나는 ‘헤어 스프레이’로 머리를 “칠”하고 공연 준비를 마쳤다. 무대를 가로지르며 여러 차례 ‘피루엣’(한쪽 다리로 도는 것)을 할 때까지는 모든 것이 괜찮았다. 나는 멈추었지만, 나의 둥근 가발은 계속 돌아가서, 마치 날아가는 접시처럼, 불빛 속에서 반짝이는 금화처럼 어두운 관중 속으로 날아갔다! 관중은 미친 듯이 웃어댔으며, (부드럽게 말해서) 감독은 잔뜩 화가 나 있었으며, 나는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이었다! 전문 무용가는 무용화의 조그만 실밥조차도 무대 위에서 보여서는 안 되기 때문에, 모발을 잃어버린 것이 얼마나 큰 “죄”인지 상상할 수 있을 것이다. 나머지 단원들은 내가 크게 난처해졌음을 알고 화가 가라앉을 때까지 나를 옷장 속에 감추어 두었다.
신체를 훈련시킴
내가 설명하고 있는 것은 전문 ‘발레’ 무용가의 훈련에 대한 것이지, 독자의 자녀가 무용의 우아함에 이끌려 연습삼아 ‘발레’ 교습을 받고자 할 때 독자가 기대할지도 모르는 훈련이 아니라는 것을 여기서 말해 두고자 한다.
그러나 전문적인 직업을 위해 훈련하는 것은 신체적으로 많은 부상을 입을 잠재적인 위험성을 안고서 신체를 격심하고 지속적으로 단련시키는 것이다. 나의 경우에는, 일곱살 되었을 때 한 주일에 한번씩 교습을 받기 시작했다. 곧 두번, 세번, 네번으로 증가하였으며 마침내 한 주일에 15회의 교습을 받았다. 전문적인 수준에 도달하기 전에, 아마 나는 1년에 8회 정도 공연하였을 것이다.
내가 16세쯤 되었을 때 우리 무용단이 전문 무용단이 되었으며, 공연 회수가 하룻밤 사이에 거의 일년에 80회로 뛰어올랐다. 이 일은 우리에게 엄청나게 많은 것을 요구하였다.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나는 방과 후에 시간제 비서 일을 하고 있었으며, 하룻 저녁을 제외하고는 매일 저녁 여러 시간 교습을 받았고, 이 교습을 마치면 예행 연습을 하였다. 예행 연습이 새벽 1시나 2시까지 계속되는 것은 흔한 일이었다. 금요일 밤부터 일요일까지 우리는 보통 두세개의 공연을 가졌다. 각 공연 전에는 몸을 푸는 시간과 예행 연습이 있었다. 나는 훈련하고, 예행 연습을 하고, 계획된 공연을 하는 데 한 주일에 평균 35시간에서 40시간을 사용한다고 어림잡곤 하였다. “남는” 시간에는 학교들과 연극 단체들을 위해, 「음악인」, 「왕과 나」, 「‘피니안’의 무지개」를 포함해서 음악극들을 안무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나는 낮에는 전 시간 비서직에 근무하였고 한 주일에 평균 45시간에서 50시간의 훈련과 예행 연습과 공연을 하였다. 전문 무용가로서의 수입으로 살아갈 수 있었지만, 가외의 돈을 저축하기 위해 또 다른 일을 하기로 하였다. 내가 일류 ‘발레’단에서 “좋은 기회”를 만들려고 노력 할 때에 그러한 “좋은 기회”가 올 때까지 먹고 살 가외의 돈을 필요로 할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러 시간 동안 무용화를 신고 나면 전문 ‘발레’ 무용가들의 발은 어떻게 되는가? 먼저, 신발이 딱딱하기 때문에 마찰로 인해 물집이 생길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물집이 단단해져 못이 박힌다. 각 못 밑에는 새로운 물집이 생길 수 있다. 그리고 이러한 주기가 계속 반복될 것이다. 마침내 발 끝의 살이 벗겨져 피가 나게 된다. 못이 모두 동시에 단단해질 때가 있으며 그리고 또 여러 곳의 생살이 벗겨지는 때가 있다. 후자가 더 흔하다.
발톱은 어떠한가? 발톱이 빠질 각오를 해야 하며 계속 춤을 추는 동안 새로운 발톱이 다시 자라난다. 이 일은 보통 신보다 여러 치수가 작은 무용신 속에서 일어난다. 하지만 발이 아프다는 이유로 공연에 결코 빠지지 못한다. 거의 항상 발이 아프다. 그것이 피에 흠뻑 젖은 무용신을 신고 공연을 마치게 되는 것을 의미한다 할지라도 참아야 하며, 나는 그렇게 했다. 우리는 적어도 한번 발톱이 모두 빠져버리기 전까지는 참된 전문가로 간주되지 않는다고 배웠다.
어떠한 부상이라도 결코 중하게 다룰 수 없었다. 내가 14세 때에 한번은 교습에 늦었다. 나는 ‘바아르’ 연습(근육을 풀고 뻗는 연습)에 못 참여하고 다리를 일직선으로 벌리고 앉는 동작을 하는 수업에 참여하였다. 근육이 굳어 있어 팽팽했지만 나는 억지로 하다가 그만 뚝하는 소리가 났다! 그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 소리를 듣고는 누구의 뼈가 부러진 것으로 알고 바깥 사무실에서부터 어머니들이 뛰어들어왔다. 우리는 그것이 인대가 끊어진 것이라는 말을 들었으며, 나를 그 날 밤 내내 부상한 채로 걸어다니게 하였다. 나는 울며 용서를 빌었으나, 부상을 지나치게 보호해서는 안 된다는 말을 들었다. 나는 순종하였으며 결코 의사에게 가지 않았다.
11년 후에 그 사고로 인해 생긴 합병증으로 큰 수술을 받았다. 그 어머니들이 옳았다. 나의 오른쪽 골반 뼈 밑부분이 부러졌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오른편에 있는 신경을 상당부분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으며, 근육에 손상을 입었으며, 내 골반뼈의 아랫 부분은 아직도 떨어져 있다.
크고 작은 부상들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무용가들은 몸을 계속 사용하므로, 올바로 치료할 기회가 전혀 없기 때문에 조그만 부상이라도 흔히 만성이 된다. 우리 무용단에 있는 한 소녀는 특히 어려운 들어올리기를 하다가 여러 개의 갈비뼈 근육에 무리가 가해졌다. 그 이후로 그는 들어올리는 연기를 하려면 끈을 감고서야 공연할 수 있었다. 나는, 그러한 고통스러운 근육 부상 때문에, 단지 공연을 끝마치기 위해 무용가들이 ‘코티손’ 주사를 맞은 두 가지 경우를 기억하고 있다.
전문 ‘발레’ 무용가로서의 나의 경력 가운데에서, 적어도 75 내지 80‘퍼센트’의 시간은 발이건, 근육이건, 심지어 뼈이건 간에, 몸의 어딘가가 아프거나 상처를 입고 있었다.
눈물을 머금고 돌이켜 봄
그 때에 우리의 작은 ‘발레’단은 재정적인 보조를 받았다. 우리 각자는 최초의 계약에 서명하였으며 우리가 사랑하는 것을 하는 것에 대해 보수를 받게 된 것이다! 약 일주일 간은 사는 것이 참으로 즐거웠다. 이사회에서는 나를 무용단의 대표로 선택하였으며 무용가들과 이사회 사이에 생기는 계약에 대한 질문이나 논쟁에 관한 중재자로 선택하였다. 나는 귀따가운 이야기를 들었다. 거의 하룻밤 사이에 우정이 경쟁심으로 바뀌었다. 분노와 논쟁이 불타올랐다. 사용되는 언어는 우리의 섬세하고 우아한 모습과는 거의 어울리지 않았다. 우리는 경쟁이 무엇인가에 대해 알게 되었으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우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잊어버렸다. 이제 그것은 전혀 다른 세계였으며, 그것은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도덕적 분위기는 어떠하였는가? 나는 간음, 동성애, 양성애 그리고 다른 종류의 타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한번은 한 남자 무용가가 예복을 입은 한 아름답고 요염한 여자의 직업적인 사진을 가지고 왔다. 우리는 그가 여자의 사진에서 무엇을 원하는지 궁금해 하였으나 결국은 그 사진이 그 남자 자신의 사진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11세 때부터 이 무용단에서 무용해 왔으며, 아버지 앞의 아이처럼 단장의 감독 아래서 성장해 왔다. 나는 믿고 따랐으며, 성실하였고, 힘든 노력과 재능으로 나의 역할을 얻어내었다. 이미 언급한 부상으로 인해 내 역할이 저지되었지만, 이번에는 또한 독무가이면서 원래의 현대 ‘발레’에서 무용단의 ‘프리마 발레리이나’와 ‘프레미어 당수에르’(무용단의 남자 주역)와 함께 ‘빠 드 트흐와’(三人舞)를 추는 특권을 가졌다.
그러나, 나는 나를 위해 특별히 안무된 역할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했으며, 이것은 내 장래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는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를 가지고 단장에게 갔으며, 그는 내가 할 준비가 되었다는 것에 동의하였다. 그리고 그는 한 가지 조건, 즉 내가 그의 특별한 부도덕한 “부탁”을 들어주기만 하면 나를 위해 그것을 안무해 주겠다고 말했다.
나는 충격을 받았으며 처음에는 그가 농담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곧 그가 정색을 하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제 나는 분노하였다. 나는 그가 나에게 이런 일을 할 것이라고는 믿을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거절하였으며 굴복하지 않았다. 그는 내가 얻은 모든 것들—역할, 돈, 계약—이 그로 인한 것임을 항상 나에게 상기시키면서, 나의 마음을 바꾸게 하려고 계속 노력하였다. 힘든 노력과 재능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이것은 나를 혼란시켰으며, 마음을 상하게 하였으며, 괴롭게 하였다.
새로운 충격
이 일이 있은 지 조금 후에, 나는 한 공연을 마치고 밖으로 나와 길 아래 세워둔 내 차로 향하고 있었다. 내가 문을 열기도 전에, 두명의 청년이 내 뒤에서 나타나 나에게 달려들었다. 한 사람이 내 팔을 잡고 뒤에서 목을 조르고 있는 동안 다른 사람이 주먹으로 내 얼굴을 계속 때렸다. 그 다음에 일어난 일은 이 이야기의 서두에 나와 있다.
그들은 왜 나를 마구 때리고 싶어했는가? 이 일은, 미국 전역에 걸쳐 인종 폭동과 긴장이 고조되던 때인 1960년대 말에 있었던 일이다. 나는 백인이었고 그들은 흑인이었다. 그래서 나는 사회 욕구 불만의 희생자가 된 것이다.
그러나, 그 다음에, 내가 피를 흘리며 누워 있을 때 단장이 나를 내려다보며 “아무 일도 아니”라고 반복해서 말한 이유는 무엇인가? 그것은 보도 기관이나 우리에게 자금을 대주는 사람들이 그 사건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 우리가 보조금을 받지 못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누군가가 구급차를 불렀다. 그것은 취소되었다. 다른 사람들은 의사에게나 병원으로 데려가라고 말했다. 그 제안도 거절되었다. 중요한 것은 재정적인 이득을 보호하는 것 뿐이었다.
그곳에 누워, 감정적으로 마비되어, 나는 내가 다른 사람들을 위한 돈을 벌기 위해 사용되는 한낱 고기덩이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여러 달 후에 내 계약 기간이 끝났을 때 나는 다른 무용단에 입단하는 것을 방해할 것이라는 위협을 받으며 그곳을 떠났다.
나의 모든 세계가 내 밑으로 꺼져버렸다. 나는 살아갈 이유가 하나도 없는 것처럼 느꼈다. 어떤 사람도 믿을 수 없었기 때문에, 마침내 나는 하나님의 이름인 여호와를 사용해서 밤새도록 기도하였다. 나의 어머니는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과 성서를 연구하였으며, 아버지는 성서 연구를 심하게 반대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할 수 있을 때는 언제나 우리 자녀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그 결과, 나는 얼마의 성서 지식을 가지게 되었지만 그것은 나에게 별로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제 절망에 빠져 여호와께 구하였으며, ‘여호와의 증인’이 어머니에게 친절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 날 밤 하나님에게 만일 그들이 나 자신을 바로잡는 데 도움을 줄 수 있다면 ‘여호와의 증인’을 나에게 보내 달라고 간구하였다.
그 기도를 한 다음 날 나는 새로운 ‘발레’단과 새로운 시작을 하려는 마음으로 ‘샌프란시스코’로 이사를 했다. 그리고 곧 ‘샌프란시스코’ ‘발레’단과 함께 ‘발레’를 시작했다. 내가 새 ‘어파아트’로 이사가서 관리인이 ‘여호와의 증인’과 연합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의 기도는 3주일 내에 응답되었다! 그 여자는 즉시 내가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도록 마련해 주었다. 나는 그곳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나타내 준 친절에 깊은 감명을 받았다. 하지만, 슬프게도, 나는 ‘샌프란시스코’ ‘발레’단의 다가오는 공연기를 위한 청취 검사를 준비하고 일하는 데 몰두하게 되었기 때문에 ‘증인’들이 다시 나를 만나지 못한 채 여러 주일이 지나갔다.
그러나, 이 시기에 두 가지 일이 나에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내가 구타를 당하기 전부터 한 쪽 눈에 문제가 있었으며, 여러 차례 수술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이제 머리를 얻어맞았기 때문에 나는 급격히 시력을 상실하고 있었으며 큰 고통을 받고 있었다. 내가 하고 싶었던 것은 무용뿐이었지만, 새로운 무용단과 함께 춤추는 것이 내가 얻게 될 것으로 그렇게 확신하였던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했다.
절망과 좌절감이 다시 생겼으며, 그 때쯤해서 ‘증인’들도 다시 방문하였다. 그들은 나와 함께 이야기하였으며 나에게 두 가지 성서 연구 보조서를 제공하였다. 나는 다음 봉급 때까지 단지 50‘센트’만 남아 있었으며, 그 돈은 내가 흡연 습관에 빠져 있었기 때문에 담배 한 갑을 사려고 떼어둔 돈을 그 책을 위해 헌금하기로 하였다. 그리하여 그 책들을 받았다. 나는 그 날 저녁에 내 성서의 일부분과 함께 책 한권을 읽었으며, 나는 전체 인류에 대한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발견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인생의 목적도 발견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행복하고 안전한 앞날을 기대함
‘증인’들과 성서를 연구하고 나서, 나는 여호와 하나님의 헌신하고 침례받은 종이 되었다. 이제 나의 목표는 ‘파이오니아’(전 시간 봉사자)가 되는 것이었다. 나는, 13년 동안 무용에 나 자신의 온 영혼을 바치고 나서 여호와께 그보다 덜 바치는 것은 그분이 나를 위해 하신 모든 것에 대해 감사하는 마음이 온전히 결핍되어 있는 것이 될 것이라고 매우 강렬하게 느꼈다.
아, 하지만 무용은 여전히 내 마음 속에 있었으며, 내가 ‘파이오니아’로서 새로운 천직을 시작할 수 있게 된 바로 그 때에, 한 ‘발레’단이 「호두까기 인형」에서의 사랑의 요정역을 나에게 제안했다. 그들은 심지어 회중 집회가 있는 날 저녁은 자유롭게 해줄 수 있으며 무용단의 예행 연습을 나의 계획표에 맞추겠다고까지 말했다. 대부분의 ‘발레’단은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그것은 매우 매력적인 것이었다.
나는 그 문제에 대해 기도했으며, 나의 전문 직업의 결과로써 나에게 일어난 모든 일들과 내가 여호와를 첫째 자리에 둔 이유를 숙고하였다. 나는 이제 내가 경험하고 있는 마음의 평화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나는 그 날 저녁에 그 역을 거절하기로 결심하였으며 동시에 이 사물의 제도 내에서는 결코 무용직에 되돌아가지 않기로 결심하였다.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나는 올바른 결정을 내렸음을 확신한다. 나는 사랑이 많은 남편과 생활하는 축복을 받았으며, 내가 ‘발레’ 직업을 떠난 이래 지난 14년간 계속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해왔다. 현재 나의 남편과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자진적으로 봉사하고 있다.
나는 다른 쪽 눈의 시력을 구하기 위해 마침내 한쪽 눈을 잃게 되었다. 그러나 내가 생명의 길로 가도록 최초로 도운 사람 중 한명이, 내가 웃을 수 있으며 다시 완전히 보게 될 날에 관해 그렇게 확신을 가지고 말하는 것을 보고 자기가 원하던 것을 내가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았을 때 나의 즐거움을 상상해 보라. 그렇다, 하나님의 목적은 땅에서 모든 부도덕과 악을 제거하고 이 땅을 다시 낙원으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모든 인류가 다시 육체적, 감정적, 영적 완전함에 이르러 영원히 살게 될 것이다.
나의 무용에 대해서는 어떠한가? 나는 결코 무용을 영원히 포기한 것은 아니다. 나는 일시적으로 중단하고 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일은 다가오는 지상 낙원에 관해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이다. 그 다음에는 현 제도에서 경험한 고통이나 좌절감없이, 내 마음에 흡족하게 영원히 춤추게 될 것이다. 나는, ‘다윗’ 왕이 즐거울 때에 한 것처럼, 그 때에 춤을 한껏 즐기게 될 것을 기대하고 있다. (사무엘 하 6:14) 그리고 나는 독자도 그곳에서 나와 함께 춤추게 되기를 바란다.—‘엘리자베드 발네이브’의 체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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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중은 미친듯이 웃어댔으며, 단장은 잔뜩 화가 나있었으며, 나는 겁에 질려 죽을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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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경력 가운데에서, 적어도 75 내지 80‘퍼센트’의 시간은 몸의 어딘가가 아프거나 상처를 입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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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간음, 동성애 그리고 다른 종류의 타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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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기도는 3주일 내에 응답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