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소년들은 묻는다 ···
연애 소설은 무해한 읽을 거리인가?
“연애 소설을 읽는 것은 하나의 도피구예요”라고 어느 열렬한 독자는 말했다. “연애 소설에 몰두하다 보면 기분이 상쾌해지고, 내 문제에 더 잘 대응할 수 있게 되지요.” 이 여자의 말은 정기적으로 연애 소설을 탐독하는 사람들의 전형적 예에 가깝다.
그런 내용은 효과적으로 압박감을 해소해 주는 강장제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청소년들은 그런 소설이 성인들의 쾌락을 슬쩍 엿보게 해주는 것으로서 무해하다고 생각한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단조로운 생활에 흥미를 더하는 하나의 방편이 된다. 대개 짧고 비싸지 않아, 이런 소설을 읽는 일은 수백만 명의 사람들에게 중독성 습관이 된 실정이다. 가장 인기있는 ‘텔레비젼 쇼우’를 즐기는 시청률과 경쟁이라도 하듯, 미국에만도 2,000만명의 연애 소설 독자가 있는 것으로 추산된다. 그리고 이 가운데는 청소년 수효가 두드러지게 많다. 그러면 당신도 연애 소설을 읽어야 하는가? 이 가운데 일부 소설은 대체 어떠한지 조사하면서, 그 질문에 대답해 보기로 하자.
“그리고 그들은 그 뒤로 끝없이 행복하게 살았다”
고금을 막론하고 연애 소설의 주제는 독자들을 매료시켜 왔다. 물론 이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는 남녀의 마음 속에 사랑하고 결혼하고 싶어하는 욕구를 넣어주셨기 때문이다. (창세 1:27, 28; 2:23, 24) 그러니, 대부분의 소설이 연애를 소재로 하고 있다는 점은 놀라울 것이 못된다. 또 이런 것을 반드시 배척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연애 소설은 훌륭한 문학으로서의 자리를 차지하기까지한 경우도 있다. 하지만 현대의 표준하에서는 이전의 이런 소설들이 따분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에, 최근에 와서 작가들은 신종 연애 소설을 마구 써 내는 일이 수지맞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일부 작가들은 줄거리에 극적 효과와 분위기를 더하기 위해 역사적이거나 중세기적 배경을 여전히 활용한다. 또 어떤 작가들은 문체와 배경에 있어서 현대적이다. 그러나 어쨌든 극소수의 예외를 제외하면 이런 현대 연애 소설은 아주 빤한 공식대로 펼쳐진다. 즉 남주인공과 여주인공이 서로간에 싹튼 사랑을 위협하는 엄청난 방해물을 뛰어넘는다는 내용이다.
전형적으로, 남주인공은 건장하고 거만하기까지 하며 자신감이 흘러넘치는 사람이다. 반면 여주인공은 섬세하고 나약한 사람으로, 흔히 남주인공보다 10세나 15세 연하이다. 여주인공은 자신의 아름다움과 진가를 확인하는 데 남주인공의 주의를 필요로 한다. 남자에게 툭하면 멸시를 받으면서도, 여자는 어쩔 수 없이 그에게 이끌린다. 남자가 함께 있기만 해도 온몸의 피가 마구 뛰며 마음의 평형과 생각과 말이 영향을 받는다.
또 거기에는 경쟁적 구혼자가 있게 마련이다. 경쟁자는 친절하고 사려깊은데도, 여주인공의 마음을 움직이거나 관심을 끌지 못한다. 그러다가 마침내 여자는 현란한 자신의 매력을 사용하여 그 냉정한 남자를 상냥한 사람으로 만들고, 남자는 이제 한결같은 사랑을 공언하게 된다. 이전의 모든 의혹은 깨끗이 해명되고 용서되며, 그들은 더할 나위없는 행복 속에 결혼한다!
은밀한 영향
이런 소설에 호소력이 있음은 이해할 만하다. 그러나 한 작가는 “중세기식” 연애 소설을 언급하면서 이렇게 반대의 뜻을 밝힌다. “이런 ··· 소설의 기본 전제는 좋은 사람은 간파하기에 어려우며 ···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이던 사람이 ··· 악당이라는 것이다.” 여주인공은 남주인공의 무감각하고 헤아릴 수 없는 태도를 이렇게 풀이한다. “그이는 나를 좋지 않게 대해도 그건 그이가 나빠서가 아니라 남자답기 때문이야”라거나, “남자들은 까다롭고 냉소적이고 남을 멸시하거나 거만해 보이지만, 그러면서도 낭만과 흥분을 자아낼 줄 안다니까”라고 말한다.
이런 공상적 관념을 받아들이면, 성공적이고 지속적인 결혼 생활을 누리는 데 중요한 특성을 보는 안목이 흐려질 수 있는가? 16세 때 연애 소설을 읽기 시작한 ‘보니’는 이렇게 회상한다. “나는 키가 크고 피부색이 짙고 멋지게 생긴 청년을 찾고 있었어요. 자극적이면서도 오만한 성격의 사람 말이지요.” 그는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어떤 청년과 ‘데이트’하는데 그가 입맞추어 주거나 손을 대려고도 하지 않으면, 아무리 사려깊고 친절하다 해도 그런 남자는 재미가 없었어요. 나는 소설에서 읽은 것 같은 흥분을 바랐지요.” 그러므로 이런 소설을 읽는다면 결혼 배우자로는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사람에게 어떻게 빠지게 되는지를 쉽사리 알 수 있다. “흥분”을 얻으려는 욕구 때문에, 이 사람의 마음에 참으로 무엇이 있는지를 못보게 될 수 있다.
결혼 후에도 계속 연애 소설을 읽은 ‘보니’는 이렇게 말한다. “집도, 가족도 훌륭했는데, 어쩐지 부족한 느낌이었어요 ··· 나는 소설 가운데 그다지도 매력적으로 묘사된 그런 모험과 흥분과 ‘드릴’을 바랐지요. 내 결혼 생활에 무엇인가 잘못된게 있다고 생각했답니다.” 그러나 성서는 남편이 매력이나 “흥분” 정도가 아니라 더 많은 것을 아내에게 베풀어야 함을 ‘보니’가 인식하도록 도움을 주었다. 예를 들면 이런 내용이다. “남편들도 자기 아내 사랑하기를 제몸같이 할찌니 자기 아내를 사랑하는 자는 자기를 사랑하는 것이라. 누구든지 언제든지 제 육체를 미워하지 않고 오직 양육하여 보호하[느니라.]”—에베소 5:28, 29.
또한 연애 소설에 너무나 흔히 나오는 이상적인 끝맺음과 손쉬운 차이점 해결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그런 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다. ‘보니’는 이렇게 회상한다. “남편과 뜻이 맞지 않았을 때, 그것을 그에게 다 털어놓지 않고, 나는 여주인공이 사용한 방법을 흉내내 보았지요. 남편이 남주인공 식으로 반응을 보이지 않자, 나는 부루퉁해졌어요.” 이와 비슷하게 한 작가는 이렇게 말하였다. 이런 소설들은 “복잡한 사교적 관계를 얼버무리고 모호하게 만든다. ··· 실제적인 사교 관계에서는 혼란스럽고 변덕스러우며 두려움을 주는 것인 경우인데도 그러한 소설들에서는 남녀가 서로를 대하는 방법에 대한 묘사법이 안이하게 고정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므로 “아내들아 남편에게 복종하라”고 교훈하는 성서 말씀이 아내들에게는 한결 현실적이며 실용적이 아니겠는가?—골로새 3:18.
성적 만족
「오늘의 심리학」(Psychology Today)지는 연애 소설이 그렇게 인기있는 또 다른 이유를 이렇게 지적했다. “독자들은 ··· 다른 여자들이 성적 상대자와 어떤 부류의 관계를 발전시키는지 알고 싶어한다.” 그 기사는 이렇게 덧붙였다. “지난 몇 년 간에 독자들은—성 생활에서든 다른 분야에서든—독립적이며 단호한 여주인공을 요구해 왔고, 출판업자들은 앞을 다투어 이를 공급해왔다.”
어떤 도시에서는 공공 도서관에서도 구할 수 있는, 성적으로 노골적인 연애 소설을 요구하는 사람들 다수가 십대들이라는 점은 흥미롭다. 이런 소설류는 해로울 수 있는가? 18세된 ‘카렌’은 이렇게 설명한다. “그런 책들은 정말 내게 강한 성적 감정과 호기심을 충동했어요. 여주인공이 남주인공과의 정열적인 만남에서 황홀감과 도취감에 빠지는 것은 나도 그런 감정을 느끼고 싶어하도록 충동했어요. 그래서 ‘데이트’할 때, 나는 그런 짜릿한 기분을 되살려 보려고 했지요. 결국 음행을 범하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의 경험은 책에서 읽었고 공상하던 여주인공의 경험과 같았는가? ‘카렌’은 “그런 감정이 작가가 머리 속에서 상상한 것이지 사실이 아님”을 발견하였다.
성적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사실상 일부 필자들의 의도이다. 한 출판업자는 연애 소설 필자에게 “성적인 만남의 장면에서는, 남주인공이 ‘키스’와 애무를 퍼부어 정열과 색정적 충동을 불러일으키는 점에 역점을 두어야 한다”고 지시하고 있다. 더 나아가 작가들은, 연애 소설은 “독자에게 흥분과 긴장과 깊은 감정적 및 관능적 반응을 부추겨야 한다”는 조언을 받는다. 분명히 이런 내용을 읽는 것은 “땅에 속한 지체들, 곧 음행과 부정과 욕정과 악한 정욕 ··· 을 죽여 버리시오”라는 성서의 권고에 따르는 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다.—골로새 3:5, 새번역.
대안
앞의 내용을 검토하고 나서, 많은 사람들은 불건전한 감정을 불러일으키거나 비현실적 기대를 발생시키는 소설류를 피하는 것이 가장 좋다고 현명하게 결론지을 것이다. 독서가 많은 사람의 경우 생활의 압력에서 벗어날 필요를 채우는 역할을 하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무엇을 읽을지에 대해 선택적이 되면 보람이 있다. 우리는 상당한 정도로 환경의 산물이다. 그리고 독서를 통해 우리는 생활에 선한 또는 악한 영향을 줄 수 있는 환경을 스스로 조성하는 셈이 된다. 범위를 넓혀 역사책이나 과학책 같은 다른 종류의 서적을 읽어 보면 어떻겠는가? 성서 및 성서와 관련된 출판물은 특히 보람이 있다.
또한 휴식이나 기분 전환을 하는 데는 다른 유익한 방도가 있음도 기억할 것이다. 우리의 생활을 상상적 모험 위주로 세워나갈 이유가 무엇인가? 성서는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고 말한다. (사도 20:35) 그러므로 다른 사람들을 도움으로써 주는 일을 할 줄을 알아야 한다. 한 청소년(‘여호와의 증인’)은 다른 사람들이 성서에 관해 배우도록 돕는 일에 한 달에 60시간을 바치고 나서 “내 생활 가운데 가장 행복한 때였읍니다”라고 말했다. 이처럼 우리의 생활이 행복하고 바쁘고 만족스럽다면, 피상적 “도피구”를 얻고자 연애 소설을 읽을 필요가 어디 있겠는가?
[20면 삽화]
연애 소설 읽기는 흥미진진할지 몰라도, 거기에서 사랑과 결혼에 대한 건전한 견해를 배울 수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