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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4 6/1 14-18면
  • 참된 보물을 찾아 십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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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참된 보물을 찾아 십일년
  • 깨어라!—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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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4
깨84 6/1 14-18면

참된 보물을 찾아 십일년

‘레바논’의 ‘베이루트’. 이 도시는 ‘뉴우스’ 표제들을 통하여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내란으로 분열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내게 있어서 그곳은 고향이다. 그리고, 나의 고향 사람들이 증오로 불 타오르고 나의 고향에 전쟁이 발발할 무렵에, 나는 나의 증오를 지상의 어느 보물보다도 더욱 가치있는 평화로 대체하였다. 어떻게 하여 이런 일이 일어나게 되었는지 이야기하겠다.

나는 1949년에 ‘베이루트’에서 ‘아랍’인 부모슬하의 일곱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린 시절에 나는 하나님과 매우 밀접하게 지내고 싶어했다. 그러나, 우리 가족 중에는 그리스도인들이라고 주장하면서도 신앙심이 두터운 사람은 없었다. 교회에 가는 일이 있다 하더라도 매우 드문 편이었다. 그래서 나 혼자 가곤 하였다.

예수나 ‘성모 마리아’의 사진들 앞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나는 종종 눈물을 흘리곤 하였다. 나는 진리를 알게 해달라고도 기도하였다. 교회를 지나칠 적마다 나는 십자 표시를 긋곤 하였다. 나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싶었다. 그래서 나이가 듦에 따라, 사제가 되는 것이야말로 그렇게 하는 최선의 방법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열 세살되던 1962년에, 어머니는 나를 데리고 가, 사제가 되도록 신청하게 하였다. ‘베이루트’에 있는 희랍 정교회의 주 사무 집행 건물에 들어가서 우리는 계단을 올라가 대주교의 사무실로 갔다. 내가 사제가 되고 싶다고 말했을 때 그는 “목소리가 좋은가?” 하고만 물었다. 나는 “예”라고 대답하였다. 그는 내 목소리가 좋은 편인 줄 알게 되자, “자네를 받아들이겠네”라고 말하였다. 얼마나 행복했던가! 나는 보물—사제로서 하나님을 섬기는 보물을 얻은 듯이 느꼈던 것이다.

정말 참된 보물이었는가?

우리가 떠나려 하는데, 교회 본부인 거기에서 근무하는 한 여인이 나를 당혹케 하는 말을 하였다. 그는 “사제가 되지 말아요. 죄가 더욱 커질 거에요”라고 강력히 권고하는 것이었다. 그가 한 말은 무슨 뜻이었는가? 나는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러나 사제가 되기 위해 훈련받던 다음 3년 동안, 그의 말이 종종 기억나면서 그 말이 이해가 되곤 하였다. 왜? 내가 관찰한 것 때문이었다.

‘레바논’에 있는 사제들은 정치에 관여하여 한 당을 지지하는 한편 다른 당은 반대하였다. 내가 아는 한 사제는 사제복 속에 연발 권총을 숨긴 채 다녔다. 사제는 언제라도 전투나 전쟁에 참여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는 점이 내게는 그릇된 것으로 보였다. ‘그리스도나 그의 사도들이라면 그와 같이 하였을 것인가?’ 하고 나는 의아하게 생각하였던 것이다.

또한, 사제들은 돈에 대한 욕심이 많았다. 연보 돈을 차지하려고 서로 싸우며 욕설을 하는 것을 보았다. “이건 내 것이야”라고 사제들은 말하곤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들이 여자 친구들과 함께 지내는 것을 보았다. 어떤 사제가 ‘미사’를 거행할 때마다, 그의 여자 친구가 오곤 하였다. 많은 사람들은 그들의 행위가 죄받을 일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그 사제의 여자 친구가 와서 사제 다음의 더 좋은 자리를 차지하려고, 한 나이든 여인을 밀어 내는 것을 보았을 때, 나는 그 사제를 미워하기 시작하였다. 그럼에도 여전히 나는 교회는 옳으며, 단지 사제들이 나쁠 뿐이라고 생각하였다.

삼년 후에 나는 사제가 되기 위한 훈련은 중단하였으나, 계속하여 교회에 적극적이었고, 정기적으로 출석하여 합창부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의 목표가 바뀐 것이다. 이제 ‘스포오츠’, 특히 농구가 나의 주된 관심사가 되었다. 더우기 방학 동안에 나는 친형의 공장에서 일하면서 그의 직업을 배워 나갔다. 나보다 스무살이나 연상인 형은 내게 아버지와도 같았다.—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 것이다.

‘증인’들을 접하게 되다

내가 소속되어 있던 교회는 ‘유대’인들을 몹시 적대하였다. 그리고 또한 우리는 ‘여호와의 증인’들을 미워하도록 가르침 받았었다. 우리는 그들이 ‘시온’주의자여서 그리스도를 반대하고 있다고 들었다.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을 사용하기는 하지만, 그것은 단지 겉치레뿐이리라고 나는 생각하였다. 만일 누가 “여호와”라는 말을 하기만 하면 나는 화를 내며 싸우려고 들었다. 우리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증인’들을 집에까지 좇아가 막대기와 돌멩이로 괴롭히고 공격하게 하였다.

그런데, 어느 날 농구 연습을 끝내고, 누이 집을 찾아 갔는데, 그때 처음으로 그 집을 방문한 ‘증인’들을 개인적으로 대면하게 되었다. ‘아랍’인들은 자기 집으로 들어온 사람을 환대하는 관습을 지니고 있으므로, 나도 역시 그렇게 하였다. 그 ‘증인’들이 제기한 얼마의 질문에 나는 대답을 하지 못하고, “다음 주에 오십시오. 그러면 내가 사제를 모시고 오겠읍니다”라고 말하였다.

다음 주에 우리는 만났다. 나는 그 사제가 성서를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자신을 변호조차 할 수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증인’들이 어떠한 영적 인도자도 “부(父)”라고 불러선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자, 그 사제는 단지 ‘좋소, 그러면 나를 ‘신부’라고 부르지 마시오’라고 말할 뿐이었다. (마태 23:9) 성서를 모른다하더라도, 그는 여전히 나의 사제였다. 그래서 나는 ‘증인’들에게 말하였다. “다신 찾아 오지 마시오. 오기만 하면 다리를 분질러 버리겠소.” 실제로 나는 그럴 작정이었다.

운동 선수로서 명성을 얻음

그러는 사이, 나는 ‘아랍’인으로서는 꽤 큰 키인 180‘센티미터’를 족히 넘는 키가 되었다. 그리고 농구는 내 인생의 전부가 되었고, 수년간을 매일 5시간씩 연습했다. 나는 일류 선수가 되기로 결심하였고, 1971년까지는 내 실력에 대해 전국적으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 해에 나는 ‘사우디 아라비아’에서 개최될 국제 시합에 참가할 ‘레바논’의 국가 대표 ‘티임’에 선발되었다.

다음 해에 나는 더 대단한 인정을 받아,’레바논’ 전국에서 가장 우수한 선수들로 구성된 한 학교 ‘티임’의 주장으로 임명되었다. 나는 ‘가드’를 맡은, ‘티임’의 경기 주도자였다. 우리는 전체 ‘아랍’ 국가들의 ‘토오노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이라크’에 가서 거의 승리하였다. 우리는 ‘이라크’ 다음으로 준우승을 하였던 것이다. 1973년에 나는 다시 ‘레바논’의 최우수 ‘티임’의 한 선수로서 선발되었다.

나는 농구의 최우수 선수 중의 하나가 되고자 하는 목표를, 적어도 ‘레바논’에서는 달성하였다. 사람들은 곧 나를 알아보곤 하였다. 나는 유명해졌고, 여자들이 내 주위에 몰려 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내게 가져다 주리라고 생각했던 참된 행복을 가져다 주지 못하였다. 그러한 보물은 진정한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증인’들을 다시 만나게 됨

1973년 초에, 뛰어난 농구 선수인 나의 친한 친구 하나가 ‘증인’들과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나는 그것을 알게 되자, 그에게 즉시 달려가 말하였다: “‘새미’, 이 사람들은 좋은 사람들이 아닐세. 그들과 어울리지 말게나.” 그리고 나는 화를 내면서 여호와의 이름을 저주하였다.

“안돼! 안돼! ‘요셉’, 그렇게 말하지 말게”라고 그는 주의를 주며 말하였다. “증인들과 이야기를 해보게.”

“좋아 알았어. 그러나 만일 내가 ‘증인’들이 성서의 진리를 갖고 있지 않다는 걸 보여 준다면, 자네는 그들과 공부하는 것을 그만두겠나?” 하고 나는 말하였다.

“그래 좋아. 그러나 만일 그들이 진리를 가지고 있다고 밝혀진다면, 자네도 ‘여호와의 증인’이 되겠나?”라고 그는 되받아 말했다.

나는 동의하였다.

우리 친한 친구들은 모두 5명이었다. 나는 나머지 세명에게 이 사실을 알린 다음, 함께 우리의 사제에게 갔다. “우리와 함께 가서 ‘증인’들과 토론해 주십시오”라고 우리는 요청하였다. 그러나, 그는 가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친구들은 말하였다: “사제가 가지 않는다면, 우리도 가지 않겠네” 그러나 나는 ‘새미’와 약속하였고, 그 약속을 어길 수는 없었다.

약속한 시간에, 약 십여명의 증인들이 ‘새미’의 집에 모여 있었다. 그들은 매우 우호적이었으나, 나는 우호적으로 대하고 싶지 않았다. “토론이나 진행합시다”라고 나는 요구하였다. 그래서 솔선하는 ‘증인’이 내가 시작하도록 권하였다. “‘시리아’인들의 신인 ‘엘’이 참 하나님이오. 여호와는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오. 그리고 그는 살인자요”라고 나는 말하였다.

그 ‘증인’은 논쟁하려 들지 않고, 단지 이렇게 물었다: “댁은 성서 전체를 믿으십니까?”

“그렇소”라고 나는 대답하였다.

그러자 그는 시편 83:18을 펴보도록 권하였다. 내가 펴보았을 때, 나는 그저 앉은 채로 굳어 버렸다. 그것은 마치 누군가가 주먹으로 나를 강타한 것과 같았다. 나는 결코 성서에서 “여호와”라는 이름을 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그 귀절은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라 이름하신 주만 온 세계의 지존자로 알게 하소서.’ 나는 바로 그 이름을 종종 저주하였던 것이다!

그 ‘증인’은 다른 귀절도 펴보도록 권하였다. (여호와라는 하나님의 이름이 ‘아랍’어 성서에 약 20번 나온다) 그러나 나는 “아니, 됐읍니다. 만일 내가 이 귀절을 믿지 않는다면, 그건 성서 전체를 믿지 않는 것과 같습니다. 한 귀절로 족합니다”라고 말하였다.

“좋습니다. 더 토론하고 싶군요”라고 나는 제의하며 이렇게 말하였다. “그러나 이야기해둘게 있소. 만일 여러분이 정말로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참된 제자라면,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될 것이요. 하지만 만일 여러분이 그렇지 않고 ‘시온’주의자들이라면, 나는 여러분 모두를 죽이겠소.”

“좋습니다. 우리가 ‘시온’주의자로 판명되면 우리를 죽여도 됩니다.”

그 날부터 나는 이전에는 전혀 해본 일이 없던 일 즉 성서 읽기를 시작하였다. 석달 만에 나는 성서를 독파하였고, 또한 ‘증인’들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 책을 연구하였다. 하나님과 그의 왕국에 관한 지식은 나에게 귀중한 것이 되어 갔다. 예수께서 말씀하신 바대로 였다: “천국은 마치 밭에 감추인 보화와 같으니, 사람이 이를 발견한 후 숨겨 두고 기뻐하여 돌아가서 자기의 소유를 다 팔아 그 밭을 샀느니라.” (마태 13:44) 나는 그 왕국에 관하여—어떻게 해야 그 왕국의 지상 신민이 될 수 있는지에 관하여 배우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이 왕국을 그밖의 모든 것보다 앞세우는 것은 쉽지가 않았다.

그 보물을 사기 위하여 모든 것을 파는 일

나는 마음이 나뉘었다. 나는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였고, 많은 여자 친구들이 찾아와 나와 교제하기를 원하였다. 외출하여 ‘유쾌한 시간을 즐기는 것’은 내게 엄청난 매력이었다. 식구들은 모두 내가 ‘증인’들과 교제하는 것을 강경히 반대하였으므로, 이러한 부도덕한 생활 방식을 장려하기까지 하였다. 그 보물을 위하여 모든 것을 포기해야 한다는 것은 너무도 큰 일같아 보였다. 그래서 나는 성서 연구를 중단하고 말았다.

거의 이즈음에, 나의 형이 도박으로 큰 빛을 지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대학을 떠나 형의 공장을 건지도록 돕기 위해 전 시간 작업을 하였다. ‘증인’들은 나를 계속 방문하여 인식을 심어 주려고 애를 쓰곤 하였으나, 성공하지 못하였다. 약 육개월 후에 나는 자문하였다: ‘‘요셉’, 너는 어디로 가려는가? ‘증인’들이 진리를 갖고 있음을 너는 알고 있잖은가.’

그러나, 나는 변화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변화할 수 있을 것인가? 나의 결심을 증명하기 위해 무엇보다도 우선 담배를 내버렸다. 그 다음, 나는 전화기로 가서, 내게 연구를 사회하던 ‘패디’에게 전화를 걸었다. “내가 죽으면 그것은 당신 책임이오. 당신은 나와 연구를 해줘야 겠소”라고 나는 말하였다.

“정말 그럴 작정입니까? 오십시오. 오늘 밤에 다시 시작합시다”라고 그는 응답하였다. 그때는 1973년 12월이었다.

즉시 나는 회중 집회에 나가기 시작하였고, 집회 때마다 다른 여자를 데리고 갔다. 그러나 여자측에서 관계를 갖고자 원하였을 때, 나는 설명하곤 하였다: “안돼. 나는 더 이상 그런 짓을 하지 않아.” 그들 중 어느 누구도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았으므로, 나는 드디어 그러한 교제를 모두 끊었다.

나의 농구 ‘코우치’는 격노하였다. 그는 나를 선수로서 키우는 데 여러 해를 바쳤고, 우리는 ‘레바논’에서’ 가장 우수한 ‘티임’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제 내가 그처럼 돌연히 그만두는 것이다. 나는 참된 보물을 꽉 붙잡기로 결심하였다. 1974년 8월 24일, 나는 여호와 하나님을 섬기기 위한 나의 헌신의 상징으로 침례를 받았다.

이듬해, 나는 정규 ‘파이오니아’(즉, ‘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인 ‘캐티’와 결혼하였다. 그 후 1976년에 나는 그리스도인 회중의 장로로 임명되었다. 거의 동시에 나는 내 소유의 공장을 구입하여 금속 도금을 하였는데, 그것은 형이 운영하던 것과 같은 종류의 공장이었다. 나의 고용인은 오로지 다섯명의 ‘증인’들 뿐이었다. 나는 오후 4시에 공장을 닫고, 밤 11시까지 아내와 함께 전도 봉사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20건의 성서 연구를 사회하였다. 그러나 나는 두 가지 활동 사이에서 마음이 나누인 느낌이었다.

그래서 1978년 2월에 나는 그 공장을 매각 처분하고,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였다. 그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다! 왜냐하면, 그 다음 달에 폭탄이 떨어져 그 공장이 폭파되었기 때문이다. 만일 그때 매각하지 않았더라면, 내게 그 공장은 전혀 무가치하게 되어 버렸을 것이다!

어떤 희생도 치를 만한 가치가 있는 보물

이처럼 전쟁으로 분열된 국가에서 하나님을 섬기는 데 오는 제반 위험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사랑깊으신 아버지 여호와와 그분의 왕국 권익을 위해 일하는 것은 나에게 참된 만족과 충족감을 가져다 주었다. 놀랍게도, 1975년에 발발된 내란의 첫해에 대략 15,000명에서 20,000명의 사람들이 살해되었고, 그 이래로 수만명이 더 죽임을 당하였다! ‘레바논’에는 단지 약 300만의 인구가 있으므로, 그것은 미국이 그러한 전쟁에서 수백만명의 시민들을 잃는 것에 필적될 만한 것이었다! 우리가 봉사하는 곳에 흔히 총탄과 폭탄이 날아다니곤 하였다.

1980년에 나는 순회 감독자로 임명받아, ‘베이루트’ 시에 있는 회중들을 영적으로 강화하기 위하여 방문하게 되었다. 그 일을 하는 2년 반 동안에, 수천 발의 유탄과 폭탄이 억수처럼 쏟아지는 경우일지라도 우리는 한 회중도 빠뜨리지 않고 방문하였다. 한 회중의 근처에서 벌어지는 유독 격심한 전투로 인하여, 그 회중을 방문하는 것이 과연 현명한 일인지 의심스러웠던 적이 있었다. 어떤 형제들은 의아하게 생각하였다: ‘그런 상황하에서 누가 집회에 참석할 것인가?’ 우리는 가서 방문하도록 권고받았다. 그 회중에는 45명의 왕국 전도인들이 있었는데, 격심한 전투에도 불구하고 45명 전원이 집회에 참석하였다.

왕왕 밖에서는 폭탄이 폭발하고 있는데도 집회가 열렸다. 봉사에 나가서, 우리는 군인들이 하듯이 총알을 피해 머리를 숙이며 숨기도 하였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봉사에 직접 참여하다 죽는 것은 더 바랄 바 없는 최상의 죽음이 될 것이라고 믿으며 전파 사업을 계속 해나갔다. 한번은 봉사에 나갈 마련을 하였으나, 포격이 하도 극심해서 세시간 동안이나 우리 열명은 조그만 복도에 피한 채 포격이 중지되기를 기다린 적도 있었다. 우리는 왕국 노래를 불렀고, 성서 질문들을 토론하였다.

또 다른 경우에, 나는 봉사에 처음 나온 아홉 살된 소년과 함께 호별 방문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교전 중인 한 남자를 방문하였는데, 그는 내 머리에 권총을 들이대며 죽이겠다고 말하였다. 나는 여호와께 도와 달라고 기도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만일 댁이 나를 죽인다면, ‘여호와의 증인’이 아닌 나의 가족들이 댁을 추적해 잡아내어 죽일 것입니다.” 그는 우리를 놓아 주었고, 우리는 호별 방문을 계속하였다. 그 어린 소년은 참다운 그리스도인 용기를 보여줬던 것이다.

빈번히 우리는 여호와의 보호를 경험하였다. 예를 들면, 우리가 회중 집회 장소로 사용하던 가옥이 전투원들 중의 한명에게 점유당하였었다. 어떤 형제들은 의아하게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여호와께서는 어찌하여 이런 일을 허락하시는가?’ 그런데 여느 때라면 회중 집회가 진행되고 있었을 다음 월요일에, 가공할 전투가 그 동네에서 돌발하였다. 그 전투는 우리의 집회가 열리던 그 가옥에까지 이내 이르렀다. 그 건물은 총탄으로 벌집처럼 되었고, ‘증인’들이 있었더라면 거의 틀림없이 많은 ‘증인’들이 죽었을 것이다. 그 가옥은 다른 당파의 전투원들이 점유하였는데, 나중에 나는 그들과 교섭을 벌여 그 가옥을 되찾았고 다시 한번 집회 장소로 사용할 수 있게 되었다!

전쟁으로 분열된 ‘베이루트’ 시에서 2년 이상을 순회 감독자로서 봉사한 후인 1983년 3월에, 나는 특별 훈련을 받도록 ‘여호와의 증인’의 ‘뉴우요오크’ 본부로 초대를 받았다. ‘캐티’와 내가 거기서 몇 개월을 지낸 것은 우리 생애에서 참으로 인상적인 일이었다. 이제 ‘레바논’으로 돌아가면서, 하나님의 왕국은 다른 어느 것보다도 우리에게 소중한 참된 보물임을 우리의 봉사로써 나타내려는 우리의 결의를 그 어느 때보다도 다지는 것이다.—기고.

[17면 삽입]

우리는 청년들을 규합하여 ‘증인’들을 괴롭히고 공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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