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구 선수로서의 나의 직업—두가지 다른 사랑으로 바뀌다!
내가 농구를 좋아하기 시작한 것은 7세 때였다. 나는 근처에 있는 차도로 내려가 하루에 두세 시간씩 농구 ‘고울’에 공을 던져 넣곤 하였다. 고등학교 졸업반이었을 때, 나는 키가 197‘센티미터’였고 몸무게는 84‘킬로그램’이었다. 그 해에 우리 ‘티임’은 고등학교 선수권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나는 UCLA(‘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캘리포오니아’ 주립 대학교)에 장학금을 받고 들어가 ‘존 우우든’ ‘코우치’ 밑에서 훈련을 받았는데, 졸업하기 전 3년 동안 우리 ‘티임’은 두 차례나 전국 대회에서 우승하였다.
대학을 졸업한 첫 해인 1975년은 무척이나 바쁜 해였다. 나는 5년 동안 대략 160만 ‘달러’(한화로 약 13억 6천만원)를 받기로 한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와의 계약에 서명하였다. 일주일 후에 나는 ‘밀워키 벅스’로 이적되었다. 한달 뒤에 ‘린다’와 결혼했고, 한달 뒤에 그는 아기를 가졌다.
아뭏든, 나는 NBA(미국 농구 협회) 관할의 경기들이 몹시 다르다는 것을 속히 깨달았다! UCLA에 있을 때는 88‘게임’을 연속 승리했었는데, ‘밀워커 벅스’와의 첫해에 우리는 44‘게임’을 패했다! 나는 노련한 ‘프로’ 선수들과 맞서서 하루 건너 매일 밤 시합을 치르었다. 그것이 직업이었다. 그것이 곧 생활이었다. 특히 경기가 한창인 철에는 빈번한 여행으로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이것을 사랑했다!
그러나, 얼마 안있어 내가 훨씬 더 사랑하게 된 다른 두 가지가 생기게 되었는데, 그것은 ‘프로’ 농구 선수로서의 나의 직업과는 조화되지 않는 것이었다.
아마도 그러한 갈등의 씨앗은 내가 ‘린다’를 처음 만난 때인 1972년에 뿌려졌는지도 모른다. 나는 즉시 그에게 반했다. 그는 그 해에 그보다 앞서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으나 무활동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는 대화에서 자주 종교 이야기를 하였다.
“성서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세요?” 하고 그는 묻곤 하였다.
“괜찮은 신화책이지” 하고 나는 대답하곤 하였다.
나는 엄격한 ‘가톨릭’교인으로 성장하긴 했지만, 당시 대학에 다니면서 매우 관대하면서도 철학적이었다. 그래서 토론에 너무 말려들지도 또 토론이 너무 길어지지도 않았다.
그런데 1974년에 뜻하지 않게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왕국회관’에 참석하게 되었다. 내가 고등학생이었을 때 한 친구—그의 이름은 ‘브라이언 굿’이었다—가 있었다. 그는 나를 미워했다. 그것은 운동에서의 경쟁적인 적수로서 그러한 것이었다. 그의 부모는 ‘증인’이었는데도 그는 그 종교와 아무 관련도 없었다. 마약을 사용하며,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그 친구는 정말 밉살스러웠다. 몇해 뒤 내가 ‘린다’의 집에 갔을 때 ‘브라이언’이 그곳에 있었다. 그는 결혼하였고 머리를 짧게 깎고 ‘넥타이’를 맨, 참으로 깔끔한 외모였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이었다.
후에 그와 그의 아내는 ‘캔자스’ 주에서 전 시간 전파 활동을 하였는데 대회에 참석하려고 그 나라를 횡단하던 중 자동차 사고로 둘다 사망하였다. 장례식이 왕국회관에서 있었다. 그래서 나는 ‘브라이언’에 대한 조의를 표하기 위해 그곳에 가게 된 것이었다.
아주 묘한 장례식이었다. 장례식 연사는 모두가 ‘브라이언’을 다시 볼 것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 말은 내 귀에는 마치 ‘브라이언’이 살아있기라도 한 것처럼 들렸다. 그의 가족들이 앞자리에서 조용히 울고 있었지만 슬프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 분위기였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연사는 희망적인 일들에 대해 말하고 있었고 나는 ‘아, 이것은 참으로 훌륭한 연설이다! 그들은 ‘브라이언’을 다시 보게 될 것이며 그와 함께 여러 가지를 하게 될 모양이구나!’ 하고 생각하면서 앉아 있었다.
일년 뒤인 1975년에 나는 ‘밀워키 벅스’에 소속되어 경기를 하고 있었다. 우리 ‘티임’에 ‘엘모어 스미드’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도 그 해에 ‘벅스’로 이적되었다. 그리고 그는 그 해에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아내 ‘제시카’는 이미 ‘증인’이 된 지 3, 4년이 되었었다. 갑자기 내 생활 주변 여기저기에서 증인들이 불쑥불쑥 나타나는 것 같았다! ‘엘모어’와 나는 술자리나 ‘파아티’에 가지 않기 때문에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그는 내게 자기와 함께 성서를 연구하고 왕국회관에 나가자고 항상 말했다. 나는 별로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어느 날 아주 흡족한 연습을 마친 뒤, 복도를 걸어가면서 ‘엘모어’는 내게 이렇게 말하였다.
“‘데이브’, 내가 이번에 처음으로 ‘신권 전도 학교’에서 연설을 하게 되었다네. 자네가 와주면 참 좋겠는데.” 나는 머뭇거리다 핑계를 대고는 집으로 갔는데, 대단히 미안하게 느꼈다! 다음 날 연습을 하면서 나는 ‘엘모어’에게 “여보게 ‘엘모어’, 정말 미안하네, ‘린다’와 함께 다른 집회엘 가기로 돼 있다네”라고 말하였다. 그런데 그는 그 말을 듣고 아주 기뻐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그 후 ‘린다’와 나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공개 강연과 「파수대」 연구에 참석하였다. 증인들은 매우 우정적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 강연과 당시의 「학개」나 「하박국」에 관한 「파수대」 연구에 감명을 받지 못했다. 나는 뭐가 뭔지도 몰랐다. 나는 앉아서 ‘이게 뭐지? 내가 여기서 무얼하고 있는 거지?’ 하고 생각하였다.
얼마 뒤에 농구 ‘시이즌’이 끝났고, 우리는 ‘캘리포오니아’로 돌아갔다. 우리는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나는 직업이 염려가 되었다. 그 해 대부분을 다친 무릎으로 뛰었었는데, 이제 X‘레이’를 찍어보니 슬개골이 부러져 있었다. 그 해는 NBA와 계약한 첫해였고 앞으로 4년이나 남아 있는데 계속 경기를 할 수 있을 것인지조차 알 수 없었다! 무릎 수술이 예정되었고, 병원에 가면서 나는 「신세계역」을 갖고 갔다.
“성서를 가지고 가시겠다구요?”라고 ‘린다’는 놀란듯이 물었다.
“그래, 이 괜찮은 신화책을 읽고 싶어서.”
그날 밤 병원에서 나는 그것을 몇장 읽어 내려 갔는데 족보 얘기가 길게 나오는 곳에서 그만 싫증이 났다. 나는 졸려서 책을 내려 놓았다. 다음 날 아침 수술은 무사히 끝났다. ‘린다’가 나를 보려고 왔었지만 통증으로 진통제를 맞은터라 그가 왔었는지도 몰랐다. 깨어 났을 때 그는 곁에 없었으며 그 때문에 나는 몹시 화가 났다.
며칠 뒤 퇴원하였고, 그때부터 일주일 동안 ‘린다’와 나는 실제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런데 우리가 서로 말하도록 해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밤 나는 친구와 영화를 보러 갔었다. 그것은 ‘오멘’이라는 영화였다. 무서운 공상 과학 소설 영화였다. 그 영화는 악귀들에 관한 것이었다. 영화를 보고 나올 때, 나는 죽음에 대해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 영화는 ‘사단’의 자식에 관한 것이었다. 「계시록」에 있는 두 성귀가 화면에 부각되었다. 그 성귀를 읽으면서 나는 ‘성서에 저러한 말이 있는가? 저러한 일이 일어날 것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한 귀절은 짐승의 수 즉 666에 대한 것이었고, 다른 귀절은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큰 빛이 비췬다는 내용이었다. 그것은 참으로 나에게 두려움을 주었다. 집에 오면서 나는 어떤 악귀들이 혹시 내 어깨 위에 앉아 있지나 않는가 하고 살펴보았다.
집에 와서 침실로 들어와 불을 켰다. 새벽 1:30이었다. ‘린다’가 말했다.
“무슨 일로 불을 켜셨나요?”
“아무 것도 아니요. 아무 것도 아니라니깐” 하며 나는 거듭 중얼거렸다.
‘린다’는 침대에서 일어나 “무슨 일이예요, ‘데이브’, 무슨 일이예요?”라고 물었다.
“그저 두렵기만 하오!”라고 말하며 나는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성서를 갖고 왔고, 우리는 침대에 누웠다. 그는, 멸망으로 인도하는 길은 넓고 생명으로 인도하는 길은 좁다고 한 마태 복음 7:13, 14을 읽었다. “‘데이브’, 당신은 ‘사단’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어요. 그를 두려워하지 않아도 되요. 여호와를 두려워하세요. 그분이야 말로 우리의 생명을 쥐고 계신 분이니까요”라고 말하며 그는 나를 계속 안심시켰다. 그는 계속 읽어 내려갔고, 갑자기 나는 컴컴한 방에 있는데 누군가가 불을 켜준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에 나는 잠을 이루지 못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침대에 앉아 성서를 읽었다. 우선 「계시록」을, 그 다음에 「디모데 전·후서」와 「데살로니가 전·후서」를 그리고 「로마서」를 읽었다. 이들은 모두 작은 책들이었다. 그것들의 의미가 와닿기 시작했다. 읽으면서, 나는 ‘어째서 전에는 이것을 읽어보지 않았던가? 왜 전에는 이러한 것들을 거들떠보지도 않았단 말인가?’ 하고 생각하였다. 마치 여호와께서 내 마음을 열어 주시는 것만 같았다.
그날 저녁에 동서가 찾아왔다. 그는 침례받은 ‘증인’이었다. 네 시간 동안 나는 그에게 질문을 하였고, 그는 모든 것을 성서로 답변해 주었다. 풀리지 않는 문제는 없었다. 수혈을 금하고, 삼위일체와 영혼불멸이 아닌 이유 모두를 성서를 사용하여 증명하였다. 나는 그 답변에 만족하였다. 1976년 9월달 내내 빛이 비치는 듯했다. 나는 ‘엘모어 스미드’와 그의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렇게 말했다.
“상상할 수 있겠나?”
“무얼 말인가?”
“내가 ‘증인’과 성서 연구를 하고 있다네!”
그들은 믿지를 못했다. 그것은 ‘엘모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NBA에는 ‘여호와의 증인’이 한 사람 있었으나, 이제는 두 사람이, 그것도 같은 ‘티임’에 있게 된 것이다!
이듬 해인 1977년 8월에 나는 침례를 받았다. 나는 호별 방문 전파 사업을 좋아했다. 1978년에는 보조 ‘파이오니아’ 즉 ‘하나님의 왕국’의 좋은 소식을 전파하는 데 한달에 평균 60시간 또는 그 이상을 바치는 봉사를 하였다. 한편 NBA에 있으면서 내게 가장 화려했던 해 역시 1977-78년 ‘시이즌’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농구가 전파 사업을 할 수 있는 시간을 빼앗아 가는 것을 아까와 하기 시작하였다! 여전히 농구시합을 사랑하긴 했지만, 나는 전파 사업을 더욱더 사랑하기 시작했다!
또한 나는 가족들과도 더욱 가까와졌다. ‘린다’와 나는 이제 매우 가까왔다. 우리에겐 두살된 딸, ‘크리스탈’이 있었다. 일년 뒤인 1979년에, 우리 아들 ‘시인’이 태어났다. 등쪽에 발생한 ‘디스크’ 때문에 당분간 농구를 할 수가 없었다. 고통스럽기는 했지만 오히려 축복인 셈이었다. 매일 가족과 함께 있으면서, 모든 집회에 참석하고, 개인 연구도 하면서, 다시 보조 ‘파이오니아’ 봉사도 하였다. 내가 ‘프로’ 농구를 그만 두어야겠다고 결심한 것도 바로 그 여름이었다. 계약 기간은 끝났지만 나는 1979-80년 ‘시이즌’ 후에 은퇴하기로 하였다.
그 결정은 절실하게 필요한 것이었다! 나는 힘을 되찾기 시작하였고 두 다리가 기운을 찾자, 다시 주전 선수로 훈련에 들어갔다! 꼬박 1년을 시합에 나가지 못하다가, 나는 다시 주전으로 ‘게임’을 치르었다. 우리는 결승전에 올랐다. 우리는 우승하였다.
마지막 시합을 치른 뒤 열흘 후에, 나는 구단주 사무실을 찾아갔다.
그는 “‘데이브’, 자네는 자유 계약 선수가 될 수 있다네”라고 말하며 액수에 관해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는 내가 자유 계약 선수가 되어 돈을 더 많이 벌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가 말하는 도중에 “나는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을 겁니다”라고 나는 말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가? 더 이상 ‘게임’을 하지 않겠다니. 그럴 수 없을 걸세!”
“그렇게 할 겁니다. 나의 목표와 가치관은 변했고, 농구는 그것들과 양립할 수 없읍니다.”
“그렇지만 자네는 농구를 사랑하네!”
“그것은 사실입니다.”
“아참, 그렇지” 하고 그는 밝은 표정을 지었다. “자네 ‘여호와의 증인’이지? 자네의 조직도 돈이 필요할 텐데, 그렇지 않은가? 우리가 자네와의 계약 몫을 그들에게 지불해 주겠네.”
나는 이렇게 말했다. “아닙니다. ‘증인’이 되는 것은 돈을 내는 것 이상을 의미합니다. 그것은 연구하며, 모임에 참석하고, 집집으로 전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농구는 내가 그런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여섯달이나 내가 그 일에서 떨어져 있게 하였죠. 농구는 또한 가족에 대한 나의 책임도 이행할 수 없게 만드는 데, 그 책임 역시 여호와를 숭배하는 데 있어서 중요한 부분입니다.”—신명 6:6, 7; 에베소 5:25, 28, 33; 6:4.
우리는 다음 날 기자 회견을 가졌다. 그 자리에는 ‘밀워키’의 여러 신문 기자들과 TV 방송국을 대표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밀워키’의 많은 기사 내용들은 호의적이었다. (12면 네모 안 참조) 그러나 ‘로스앤젤레스’에서는 나를 조금 미친 사람으로 묘사했다. ‘이 종교, 이 파 때문에 ‘데이브’가 이상한 생각을 하게 되었지만, 그는 다시 돌아올 것이다’는 식이었다.
흥미롭게도, 내가 은퇴를 선언하자마자 솔깃해지는 제안들이 쏟아져 들어오기 시작했다. ‘벅스’는 다음 해엔 더 나은 보수를 주겠다고 제의했다. ‘로스앤젤레스 레이커스’도 나를 불렀고 그들을 위해 뛰어 주길 원했다. 그들은 ‘캘리포오니아’로 이사올 수 있도록, 그리고 그곳에 집을 마련해 주겠다고 제의했다. ‘시애틀’도 내게 연락을 하였다. 그것은 아주 유혹이 되었다. 여전히 농구를 사랑하였지만, 나는 이제 가족과 여호와를 섬기는 일을 더욱더 사랑하고 있었다. 나는 여호와께서 바로 그때 나와 함께 하시면서, 수백만 ‘달러’가 관련된 제안들을 물리치도록 돕고 계시다는 것을 느꼈다.—잠언 3:13-18; 스바냐 1:18; 요한 1서 2:15-17.
그리고 그때 이후로 그분은 줄곧 나를 축복해 주셨다. 나는 개인 성서 연구와 집회 참석을 할 시간을 갖게 되었다. 나는 회중의 장로로서, 공개 강연을 하며, 종종 그리스도 통치하의 ‘여호와의 왕국’에 관한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하는 데 전 시간을 사용하고 있다. 이러한 영적 활동들은 나를 행복하게 만들고 있다. (마태 5:3) 또한 나는 지금 자라고 있는 내 아들 딸과 시간을 보내며, 그들이 참 숭배에 머물도록 도울 수 있다. 그리고 나는 이제 아내에게 바칠 시간이 있으며 우리의 결혼 생활을 강하게 유지하고 있다.
이 핵 시대에 살고 있는 절대 다수의 인류에겐 황폐한 장래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의 희망은 영광스러운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하의 지상 낙원에 관해, 계시록 21:4은 이와 같이 말한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여호와께로부터의 이러한 축복을 생각할 때, 농구 선수로서의 직업을 포기한 것은 결코 희생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가족과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제는 그것이 나의 행복이다. 뿐만 아니라 지상 낙원에서의 끝없는 생명에 대한 희망도 있다.
원한다면, 동일한 축복받은 희망은 당신의 것이 될 수도 있다. 계시록 22:17은 이렇게 초대한다. “원하는 자는 값 없이 생명수를 받으라.”—‘데이빗 메이어스’의 체험담.
[12면 네모]
‘밀워키’, 「저어널」지의 ‘스포오츠’ 편집인 ‘빌 드와이어’는 이렇게 기술했다.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집집을 방문하기 위해, 농구를 해서 벌 수 있는 연간 500,000‘달러’를 포기하는 ‘메이어스’의 생각은 비정상이다. ··· 그러나 ‘메이어스’를 정신 병자로 간주하려는 사람들은 먼저 그런 결정을 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는 것을 깊이 있게 헤아려야 할 것이다. ···
“그는 그의 가족—아내 ‘린다’와 어린 아들과 딸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가 공훈을 세운) 농구에 대해 말하려 하면 그는 언제나 그의 동료들에 대한 칭찬 및 관중과 심판원들에 대한 말로 신속히 화제를 바꾸었다. 그렇지만 그의 딸이 걸음마를 배운 이야기나 그의 아내가 담배를 끊은 이야기와 같은 가족과 관련된 이야기는 아주 생기있게 하였다.
“공식 기자 회견을 가진 직후인 수요일 밤에 그는 이렇게 말했다. ‘많은 사람들이 내가 제 정신이 아니라고 생각하겠읍니다만, 내가 참으로 하고 싶어하는 전부는 내 가족 및 종교와 같은 내 생활에서 보다 중요한 것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자신의 신앙에 따라 살려는 그의 결단력은 높이 평가되어야 한다.”—1980년 5월 1일자.
[13면 삽화]
가족과 여호와께 대한 사랑—이제는 그것이 나의 행복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