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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85 5/15 11-12면
  • 당신은 몇번이나 인생을 살아왔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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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은 몇번이나 인생을 살아왔는가?
  • 깨어라!—19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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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5
깨85 5/15 11-12면

당신은 몇번이나 인생을 살아왔는가?

「깨어라!」 인도 통신원 기

긴 무명 겉옷을 걷어 젖히며, 그 인도인 가장은 이미 깊은 단계에 이른 상피병(象皮病)으로 몹시 흉한 한쪽 다리를 내보였다. 그 다음, 그는 자기 다리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하였다. “이것은 내가 전생에서 받은 업(業)이죠.”

그 남자는 그러한 말로 현생이 오랜 재생의 연속의 한 고리에 불과하다는 ‘힌두’교인들 사이에 일반화된 신앙을 표현하였다. 그들은 현생의 자신들의 처지가 전생에서 뿌린 것을 거두어 들인 것이고, 앞으로 재생에서 거두어 들일 것을 지금 뿌리고 있다고 믿는다.

널리 만연된 신앙

그러나, 환생을 믿는 것은 결코 인도에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그러한 신앙은 ‘힌두’교 지도자 ‘S. 라다크리쉬나’가 쓴 것처럼 “세계의 거의 모든 종교들에” 존재한다. 세계 도처에서—‘아프리카’, ‘아시아’, 북미와 남미, 태평양의 여러 섬들 및 ‘유럽’에서—사람들은 인간 영혼들이 상어, 악어, 호랑이, 곰 고양이, 족제비, 생쥐 그리고 심지어는 나나니벌이나 풍뎅이 같은 곤충들로 옮겨간다고 믿고 있다! 환생이 동물 형태로만 국한된 것이 아니다. ‘아프리카’나 인도의 아이를 못낳는 여인들은 죽은 자의 영혼들이 깃들어 있다고 믿어지는 나무들에 기원을 하곤 한다. 그와 유사한 관습들이 고대 ‘유럽’에도 있었다.

그러나, 환생 즉 영혼의 윤회 신앙은 어떻게 발단되었는가? 사람들이 그 신앙을 믿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리고, 이러한 가르침은 사람들의 생활에 어느 정도 영향을 미쳐왔는가?

그 근원을 파헤쳐 봄

만일 인간 영혼이 한 생명 형태에서 다른 생명 형태로 옮겨가는 것이라면, 그 영혼은 불사(不死)의 것이어야만 할 것이다. 따라서, 환생 이론은 영혼불멸 교리에 기초를 둔 것이며, 그러한 신앙을 가졌던 민족이나 나라들에서나 그 기원을 찾아 보아야 한다. 그것을 근거로, 어떤 사람들은 그 신앙이 고대 ‘이집트’에서 기원하였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 신앙이 역사상 최초로 신비 의식 종교가 시작되었던 고대 ‘바빌로니아’에서 비롯되었다고 주장한다. 의심스러운 종교에 대해 좋은 느낌이 들게 하기 위하여, ‘바빌로니아’의 사제들은 영혼의 윤회 교리를 발전시켰던 것이다. 이리하여 그들은 종교 영웅들이 죽은 지 오래된 유명한 조상들이 환생한 것이라고 주장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신앙이 만발하게 된 곳은 인도였다. ‘힌두’교 선생들은 인간들 사이에서 볼 수 있는 악과 고통의 보편적인 문제들과 씨름하였다. ‘어떻게 이러한 문제들을 의로우신 창조주에 대한 개념과 조화시킬 수 있는가?’라고 그들은 묻곤 하였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와 뜻하지 않은 재난 및 세상의 불평등 사이에 존재하는 갈등을 해결하고자 노력하였던 것이다. 그 결과가 바로 “업의 법칙”—인과 응보의 법칙이었다. 그들은 내세에서 보상받거나 벌받게 되는 한 사람의 생애에서의 공적과 죄과들이 상세히 열거된 ‘대차대조표’를 만들어 냈다.

‘갈마’(Karma) 곧 “업”은 단순히 “행위”를 의미한다. 만일 어떤 ‘힌두’교인이 사회 및 종교 규범에 순응한다면 그는 “좋은 업”을, 그렇지 않다면 “나쁜 업”을 쌓는 것이라고 한다. 그의 행위 즉 “업”이 계속 이어질 재생에서의 그의 장래를 결정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인 목적은 이 윤회의 순환에서 해방되어 ‘우주의 영’과 결합하는 것인데, 이러한 목적은 사회적으로 용납되는 행실을 하고 특별한 ‘힌두’교 지식을 얻고자 노력함으로써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믿어지고 있다.

환생이 맺은 열매

환생을 믿는 사람의 생활 철학이 인도 철학자 ‘S. N. 다스굽타’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 잘 나타나 있다. “현생에서 어떤 행위를 한다고 해서, 보통 전생의 ‘갈마’ 즉 업에 따라 겪게 되어 있는 현생의 어떤 재해들을 피할 것을 기대할 수는 없다.” 그 결과 생겨난 것이 일반적으로는 인생에 대한 그리고 특히 사회의 악과 불공평에 대한 숙명론적 견해이다.

업의 법칙은 또한 ‘힌두’ 사회의 계급 제도를 유지하는 데 기여하였다. 어떻게 그러한가? 이 신앙은 어떤 사람의 현재의 신분이 그가 전생에서 쌓은 업 즉 행위의 결과라고 가르치고 있으므로, 그 신분은 현생에서는 변할 수 없는 것으로 간주된다. 그러나, ‘스와미 니킬라난다’는 이렇게 설명한다. “그의 신분에 주어진 본분을 이행함으로써, 사람은 장래 생애에서 더 높은 계급으로 태어날 자격을 갖추게 된다.” 그러므로, 비천한 계급에 속한 각 개인은 그의 계급의 규칙과 관습들에 반항하기를 두려워한다. 더우기, 누가 그 사회 계급의 규칙이나 관습들 중 어느 하나라도 어기거나 위반한다면 혈족들에게 벌을 받거나 의절당하기까지 하므로, 처벌과 배척당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도 만연해 있다. 그러한 두려움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아무런 공민권이나 기본 인권마저 누리지 못하고 “불촉천민”(不觸賤民) 즉 추방된 사람들이라는, 가난에 시달리는 계급 신세를 면치 못하고 있다. 현대 입법자들의 노력으로 소위 불촉천민에 대한 학대를 제한하는 데 어느 정도의 성공을 거두어 온 것은 사실이지만, 깊이 뿌리박힌 종교 관습들은 전통에 속박된 그러한 사회 내에서 좀처럼 사라질 줄을 모르고 있다.

환생—신뢰할 만한 것인가?

그러면, 왜 인간들 사이에 고통과 불평등이 존재하는가? 환생이 유일한 설명 혹은 신뢰하기까지 할 만한 설명인가? 서두에서 언급한, 상피병에 걸린 그 사람을 생각해 보자. 그는 그 병의 원인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었기 때문에, 자기가 겪는 고통이 자신이 쌓은 업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러나 만일 사람들에게 상피병을 전염시키는 모기가 들끓는 지역에 그가 살지만 않았더라면, 또는 그가 모기들에 관해 뭔가를 좀 알고 예방책을 강구했더라면, 그는 그 끔찍한 병에 걸려 변을 당하지 않았을 것이 아닌가? 따라서, 그가 겪는 고통은 그의 업이 아니라 바로 “시기와 우연”에 기인한 것이다.—전도 9:11.

최근에 ‘모한다스 간디’와 다른 지도자들은 다음과 같이 선언함으로써 업—재생의 개념이 주는 영향들에 반격을 가하고자 하였다. “불촉천민의 신분은 하나님과 인류에게 대항하는 반도덕적 행위이다.” ‘간디’와 다른 유사한 생각을 가진 사람들의 그러한 노력은 “불촉천민”의 생활에 약간의 개선을 가져왔다. 이러한 사실은 “불촉천민”으로서의 인생이 자신의 업에 기인한 불변의 것이 아님을 증명하지 않는가? 참으로 그것은 그러한 압제적 생활 방식이, 개선되거나 심지어 변경될 수도 있는 이어받은 사회 제도의 결과에 의한 것임을 증명한다. 그러므로 “불촉천민”인 아기의 운명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이 아니라 실제로는 사람이 만들어낸 것이다.

상업계의 탐욕과 부패는 어떠한가? 비윤리적인 사업가는 매수하거나 갈취하는 길을 택한다. 그러나 사업가는 그렇게 해야만 하는가? 그의 불법 행위는 그가 자유 의지를 잘못 사용한 결과가 아닌가? 따라서 “업—재생”의 개념은 인간이 고통을 당하는 이유를 설명할 수 없다. 이치적인 사람이라면 돌발 사고, 유전 및 자유 의지의 오용 등이 생활상의 여러 가지 재해와 불평등의 논리적 원인들임을 분별해낼 수 있다.—로마 5:12; 전도 7:29.

환생—그것은 참된 것인가?

환생의 교리는 영혼불멸 신앙에 그 기초를 두고 있다. 만일 지상의 영혼들이 불멸이 아니라면, 재생론은 붕괴되고 말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기 위하여 어디로 향할 것인가? 거의 모든 주요 종교 저서들이 이러저러한 형태의 영혼불멸을 가르치지만, 성서는 그렇지 않다.

인간 영혼이 무엇인가에 관하여,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여호와 하나님이 흙으로 사람을 지으시고 생기[생명의 호흡, 신세]를 그 코에 불어 넣으시니 사람이 생령[산 영혼, 신세]이 된지라.” (창세 2:7) 그러므로, 사람—살아 있는, 호흡하는 존재—이 곧 영혼인 것이다. 사람은 자신 속에 별도로 구별되어 있으면서 사망 시에는 언제라도 육체를 떠나게 되어 있는 어떤 것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망 시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에 관하여 창세기 3:19은 이렇게 알려 준다. “네가 얼굴에 땀이 흘러야 식물을 먹고 필경은 흙으로 돌아가리니 그 속에서 네가 취함을 입었음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그러므로, 사망 시에 인간들은 어떤 새로운 생명 즉 재생으로가 아니라, “흙으로 돌아”간다. 분명히 성서는 인간 영혼이 죽는다고 가르친다. 그것은 윤회하지 않는다. “범죄하는 그 영혼이 죽으리라”고 성서는 단호하게 말한다.—에스겔 18:4, 20.

죽은 자들을 위한 희망

영혼이 죽는다면, 죽은 자들에게 무슨 희망이 있는가? 자신의 운명을 해결하기 위해 고난과 고통으로 가득찬 끝없는 재생을 겪는 일을 통해 죄 많은 인간들을 떠나는 것이 아니라, 성서는 “의로운 사람이나 불의한 사람이나 다같이 부활한다”고 대답한다.—사도 24:15, 새번역.

무한한 지혜와 사랑이 있으신 창조주께서는 죽은 자들의 생활 방식을 기억하고 계시다. 그분은 업의 법칙이 우리로 믿게 하듯이, 심판하고 벌을 주시기 위한 근거로 삼기 위해 그것을 기억하고 계신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분은 사람들을 부활시킬 때, 그들이 죽기 전에 지녔던 똑같은 개성과 특징들을 가진 채로 죽은 자로부터 돌아오게 하기 위하여 기억하고 계신 것이다. 그때, 지상의 생명으로 부활된 사람들은 부활된 후에 각자의 생활 행로에 근거하여 심판을 받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인간들로서 그들은 회복된 지상 낙원에서 다시 생명의 전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러한 전망에 관하여 성서는 우리에게 이렇게 보증한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시 21:4.

[11면 삽화]

이 사람은 이런 고통을 당할 만한 무슨 죄가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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