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해결책이 있는가?
범죄는 직접 혹은 간접적으로 우리 모두에게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이제 남은 질문은 ‘해결책이 있는가?’ 하는 것이다. ‘서 버어지니아 상소 대심원’의 리차아드 니일리 판사는 이렇게 제안한다. “범죄의 근본 원인들에 이르는 것은, 기꺼이 착수하려는 사람이 거의 없는 대대적인 사회의 재정리를 의미한다.” (고딕체로는 본지에서) 그는 “과학적 지식도 정치적 결의도 범죄의 근본 원인들을 제거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한다.
왜 그러할 것인가? 그는 범죄의 영향을 받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빈민 지구나, 가세가 기운 근로 계층 지역에 사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직접적인 정치적 힘이 가장 약한 사람들이라고 논술한다. 니일리 판사는 이렇게 기술한다. “범죄 피해자들은 조직된 세력 집단이 아님을 유의해야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는 정치적 영향력이 거의 혹은 전혀 없다. 정치적 힘이 있는 사람들은 주로 일반 범죄 활동 영역 밖에 살며—그들은 공공 교통 수단을 사용하거나 빈민가에 살지 않는다. 그리고 법 시행을 강화하는 것이 어떤 경우엔 그들 자신의 사무직 범죄를 위태롭게 할 것이라고 그 판사는 주장한다. 세계 대부분의 지역에서 그것은 기본적으로 사실이다. 그러므로 다수의 저소득층이 더욱 자주 범죄와 정치적 위선의 피해자들이 된다.
그러나 범죄와의 싸움에서 발전을 방해하는 또 다른 주요 요인은 인간성 자체이다. “강한 욕망, 탐욕, 호전적인 태도 및 과대 망상은 사람들의 타고난 구성 요소이다”라고 니일리 판사는 말한다. 그러한 사실은 가인이 동생 아벨을 살해한 이래 지금까지 분명히 볼 수 있었다.—창세 4:3-11.
그러나, 인간성 내의 악의 요소는 현대 심리학이 직면하려 하지 않는 문제이다. 「깨어라!」지와의 회견에서 새미나우 박사는 이렇게 말하였다. “대체로 정신 위생 분야에 있는 상당수의 사람들은 실제로 악 문제를 직면해 본 적이 없다.”
그러나, 많은 범죄자들은 그들의 ‘강한 욕망, 탐욕 및 호전적인 태도’를 버리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치료 요법과 재활 프로그램에 호응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캘리포오니아에서 수감자들은 어떤 치료 요법으로 접근하는 것에도 반대하였다. “수감자들의 주장은, 치료 요법은 재활에 관한 과학적 지식이 불충분한 데서 비롯된 망상이며 ···, 계속 주장하기를, 그들이 [범죄자가 되기를] 중단한 이유와 상관없이 그것은 어떤 교도소의 치료 요법의 결과가 아니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들은 “교도소의 목적은 간단히 말해서 처벌이다. 따라서, 모든 기결수는 교도소에 들어갈 때 정확히 얼마나 복역해야 카아프카 풍의 (불합리한) 재활 놀이를 할 필요가 없게 될 것인지를 알기 원한다”고 주장한다.—「법원이 실효를 거두지 못하는 이유」(Why Courts Don’t Work), R. 니일리 판사저.
범죄자는 변화할 수 있는가?
그러나 일부 범죄자들은 교화 계획에 기꺼이 협조하였다. 요첼슨 및 새미나우 박사의 계획에서는, 단호한 접근 방법이 사용되었다. 그들은 이렇게 보고한다. “우리가 분명히 밝힐 수 있는 것은, 우리의 관점에서 볼 때 범죄자의 생활 방식 중 어느 것도 보존되는 것이 있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낡고 때묻은 옷에 새 옷을 입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다. 낡은 옷은 오염되고 병적인 것으로 간주하여, 벗어버리고 없애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범죄자는 자신의 낡은 방식을 몰아내고 모든 점에서 책임을 질 줄 알지 않으면 안 된다.”
그와 비슷하게, 성서에서 사도 바울은 이렇게 교훈하였다. “옛 사람과 그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는 자기를 창조하신 자의 형상을 좇아 지식에까지 새롭게 하심을 받는 자니라.”—골로새 3:9, 10.
변화될 수 있다는 사실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하지 못할 유형의 사람들—음행하는 자, 도적, 토색하는 자 및 기타의 사람들—을 열거한 후에 한 바울 자신의 설명을 보아 알 수 있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을] ··· 얻었느니라.” (고린도 전 6:9-11) 오늘날 거의 3백만명의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이 있으며, 그들 대부분은 그들의 사고 방식을 변화시키지 않으면 안 되었다. 변화시키기 전에는 범죄 생활을 영위하던 사람들도 있었다.
한 사례로서, 이전에 다이아몬드 도둑이었던 사람의 체험담이 「깰 때이다」 1984년 1월 15일호에 실렸다. 그는 영국 런던의 전문 범죄꾼이었다. 결국 성서 연구를 받아들여 “새 사람”을 옷입게 되었을 때, 그는 경찰에 자진 출두하여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였다. 5년간의 감옥형을 복역한 후에, 그는 출감하여 개심한 생활을 하고 있다. 그것은 그에게 쉬운 일이었는가? 그는 이렇게 대답한다.
“나는 인생관을 바꾸기가 쉽지 않았다. 싸우는 일 말고, 내가 이제까지 해본 가장 힘든 육체 노동은 내 차를 청소하는 것이었다. 이제 나는 하루에 8시간의 노동 ···[에] 전념해야 하였다. 나는 생활의 일상적인 일에 대해 신경을 써본 적이 결코 없었다. 이제는 규모있는 생활 방식이 중요하였다. 나는 항상 어떤 종류의 징계도 거만하게 조롱해 왔다. 이제는 내 방법이 항상 옳은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었다.”—9면의 “상습범의 일반적인 특징”과 비교.
그러나 그는 변화하였다. 그것은 노력을 들일 만한 가치가 있었는가? “나는 그것이 쉬운 일이었다고 말하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 일은 분명히 할 만한 가치가 있는 일이었다”고 그는 대답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생활을 변화시키기 원하는 사람은 누구나 성서 원칙들에 순응해야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강한 동기, 즉 지상 낙원에서 영원한 생명을 누릴 기회가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수께서 자기 옆에서 죽어가던 범죄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을 때 하신 약속이다. “참으로 내가 오늘 당신에게 말하는 데, 당신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을 것입니다.” (누가 23:43, 신세) 물론, 그 행악자는 범죄자로서가 아니라 회개한 변화된 사람으로서만 지상 낙원에 거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성공적인 교화 계획이 있다 하더라도, 이러한 오래된 속담은 여전히 참되다. “말을 물가로 데리고 갈 수는 있지만, 물을 마시게 할 수는 없다.” 대다수의 전문 범죄꾼들은 변화에 관심이 없다. 그렇다면 세계 범죄 문제에 대한 해결책은 전혀 없는가? 해결책, 그것도 단호한 해결책이 있다.
범죄는 어떻게 종식될 것인가?
성서는 인류에게 재난들이 증가할 때가 올 것임을 지적하였다. 그러한 재난들 가운데, 예수께서는 “불법의 증가”를 포함시키셨다. (마태 24:12, 신세) 사도 바울은 “마지막 날에 어려운 때가 옵니다. 그때에 사람들은 자기를 사랑하고 돈을 사랑하고 ··· 부모에게 순종하지 않고 ··· 경건하지 않고 무정하고 ··· 절제가 없고 난폭하고 선을 좋아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예언하였다.—디모데 후 3:1-5, 새번역.
인류는 항상 크고 작은 범죄와 해악에 시달려 왔지만, 특히 중대한 해인 1914년 이래 세상의 부패한 사물의 제도의 종말에 관한 성서 예언은 주목할 만한 성취를 보아 왔다. (비교 마태 24장, 누가 21장, 마가 13장 및 계시 6:1-8) 그러므로, 하나님의 의로운 왕국 정부가 지상의 그분의 원수들을 징벌하기 시작할 때는 가까왔다. 그러한 원수들 가운데는 고의로 범죄를 생활 방식으로 택한 범죄자들이 포함될 것이다. “불의한 자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고린도 전 6:9.
그러므로 만일 어떤 사람이 기꺼이 변화하지 않을 경우, 대안은 무엇인가? 성서는 이렇게 대답한다. “행악하는 자는 끊어질 것이[라.] ··· 잠시 후에 악인이 없어지리[라.]” 그렇다. 종교, 정치 혹은 사회 어느 부면에서든지 모든 범죄 요소가 곧 땅에서 일소될 것이다. 하나님의 깨끗케하는 아마겟돈 전쟁에서 “여호와를 기대하는 자”들만 살아남을 것이며, 그들은 “땅을 차지[할 것이며] ··· 풍부한 화평으로 즐”길 것이다.—시 37:9-11; 계시 16:14, 16.
그렇게 하는 것이 유일한 방법이다. 그것은 성서가 이렇게 말한 바와 같기 때문이다. “악인은 은총을 입을찌라도 의를 배우지 아니하며 정직한 땅에서 불의를 행하[는도다.]” (이사야 26:10) “의의 거하는” 하나님의 “새 하늘과 새 땅”이 인류의 범죄 및 죄 문제로부터의 유일한 생존책이며, 그 제도에서는 의를 택하는 사람들만 거하게 될 것이다.—베드로 후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