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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5 11/15 8-10면

히로시마에서 받은 나의 상처가 씻겨졌다!

히로시마 시의 에노모토 타에코의 체험담

한 낯선 사람이, 어린 남학생이 입었던 것 같은 타서 눌어 붙고 너덜너덜 헤어진 셔츠 하나를 들고 우리집을 찾아 왔다. 제대로 남아 있는 부분이라곤 셔츠 윗 부분에 달린 옷깃뿐이었다. 하지만, 아직도 선명히 읽어볼 수 있는 것은 가슴 부분에 가로로 쓰여진 미야카와 시로라는 이름이었다. 그것은 바로 내 남동생의 셔츠였다.

1945년 8월 6일 아침, 나는 여느 때처럼 작업을 하러 나갔다. 전형적인 19세 소녀처럼, 나도 당시 나라 전체를 사로 잡았던 애국주의적 열광에 휩쓸려서 ‘여성 자원대’에 가입해 있었다. 아직 어린 학생이었던 남동생도 도심지에 작업을 하러 나갔었다. 아버지는 만주에서 전사하였다. 그리하여 어머니는 집에 홀로 있었다.

그 날 아침 일찍, 적 군용기가 히로시마 근처 사방에 출현했고, 공습 경보가 울렸다. 우리가 군사 훈련을 마치고 건물 내부로 막 들어가려는 순간, 거대한 폭발이 그 지역을 뒤흔들었다. 눈 앞에 보이는 모든 것이 온통 시뻘개졌다. 그 폭발로부터 나오는 열기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떨어진 듯한 느낌을 주었다.—그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정신이 들자, 식구들이 생각났다. 비록 환한 대낮이었음에도, 그 폭탄의 죽음의 재가 형성하는 거대한 장막은 온갖 사물을 섬뜩하게 보이게 하였다. 이내, 검고, 더러운 재가 섞인 비가 내리기 시작하여 두 시간 동안이나 줄곧 내렸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나는 몸서리 쳐지는 광경들을 보았다. 목에서 피가 뿜어 나오는 사람들, 양손으로 두 눈을 감쌌는데 손가락 사이로 피가 줄줄 흘러 내리는 사람들도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전신이 벌겋게 화상을 입고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손과 팔에서 피부가 벗겨져 손가락 끝에 달려 있었다. 반면, 다리에서 벗겨진 피부를 질질 끌며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머리털이 그슬려 곱슬곱슬해지거나 꼿꼿이 서버린 사람들도 있었다.

집에 와보니, 우리 집과 온 이웃집들이 폭발로 인해 무너뜨러져 있었다. 비록 날아온 유리 파편들로 심한 상처를 입긴 했어도, 어머니가 아직 살아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행복했던지! 하지만, 나의 남동생은 어찌 되었을까? 우리는 다음날 새벽까지 기다리다가 시내로 들어가 찾아보기로 하였다.

남동생을 찾아 헤맴

다음 날 시내를 돌아보면서, 단순한 공습이 아니었었구나 하고 깨달았다. 이 폭탄은 대단한 것이었다. 그 참화는 미증유의 것이었다.

시내로 들어 가는 다리를 따라, 시커멓게 타 죽은 시체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고, 한 가운데만이 좁은 통로로 비어 있을 뿐이었다. 이따금 시체더미 속에서 신음 소리가 들렸고, 때때로 갑작스런 동작을 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러면, 나는 무심코 남동생이나 아닐까 하여 달려가 보곤 하였다. 그러나, 그들은 모두 너무 심하게 화상을 입어 부풀었으므로 누가 누군지 분간하기조차 어려웠다. 나는 여러 격리 수용소로 찾아 다니며 줄곧 동생의 이름을 목청터지게 불러 보았지만, 동생을 찾을 수는 없었다.

이 삼일 후에, 사람들은 죽은 사람들의 명단을 공개하기 시작하였다. 군인들은 시커멓게 탄 시체들을 모아 가솔린을 끼얹고는 화장을 해버렸다. 부상자나 죽어가는 사람들을 위해 해줄 수 있는 일이라곤 거의 없었다. 그들에게는 얼마의 물과 일당 배급량인 한 뭉치 쌀밥이 나눠졌다. 그들을 위하여 전혀 의약품이나 치료가 베풀어지지 않았다.

며칠이 못되어 사람들은 머리카락이 빠지기 시작하였다. 너무 허약한 사람들은 파리와 구더기들이 노출된 상처에서 득실거려도 털어내질 못하고 있었다. 태우는 시체와 치료받지 못한 상처에서 나는 악취가 주위에 가득하였다. 이윽고 아무런 외관상의 이유도 없이, 부상자들을 보살필 만큼 건강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죽어가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방사선의 영향으로 죽어간 것이 분명하였다. 나 역시 설사, 허약 및 신경병으로 고통을 겪기 시작하였다.

약 두달 동안이나 찾아 헤맨 후에야, 마침내 동생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 수 있었다. 앞서 언급했던 그 낯선 사람이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그는 폭탄으로 심한 화상을 입고 눈까지 멀은 한 소년에게 물을 먹여 주었다고 설명하였다. 나의 남동생이 결국 죽자, 이 사람은 친절하게도 그 셔츠를 벗겨 우리에게 찾아와서 전해줄 정도로 수고를 아끼지 않았던 것이다.

이 모든 일이 19세 소녀였던 내게 준 영향은 충격적이었다. 나는 뭘 생각할 힘마저 잃어버렸다. 또한 두려운 느낌마저 모두 사라졌다. 단지 울고 또 울고 했을 뿐이었다. 눈을 감을 때마다, 희생자들이 얼굴에 공허한 시선을 띠고 정처없이 어둠 속을 떠돌아 다니는 것이 보였다. 나는 얼마나 전쟁을 증오했는지 모른다! 나는 그 폭탄을 투하시킨 미국인들을 증오했고, 전쟁을 그 지경이 되도록 방치시킨 일본 지도자들도 증오하였다.

더 나은 것을 찾았다

그 후 십년 동안, 나는 결혼하여 결국 세 자녀를 갖게 되었다. 그러나, 내 마음에선 줄곧 증오심이 불타올랐다. 이런 감정에서 벗어나려고 안간힘을 써보았지만, 도대체 이 모든 일들을 어떻게 잊을 수 있으랴 싶었다.

나는 여러 종교 단체를 조사해보다가, 세이죠 노 이에 종교에 가입하였는데, 그것은 그들이 가장 사랑이 깊고 너그러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들도 내게 만족할 만한 해답을 줄 수 없었다. 내 남동생이 왜 죽을 수밖에 없었느냐고 묻자, 겨우 이렇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은 젊어서 죽지요. 그게 그의 운명이니까요.”

그 때 우리는 토오쿄오로 이사했다. 하루는 한명의 ‘여호와의 증인’이 우리집을 방문하였다. 그는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말하면서, 사람들이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 것이라는 성서의 한 귀절을 내게 읽어 주었다. (이사야 2:4) 그의 친절과 성서 지식에 감명을 받고 그에게서 두부의 잡지를 받았다. 후에 알게 되었지만, 그 역시 자기 가족 대부분을 히로시마 폭격 때 잃은 사람이었다. 그는 한 부인이 나를 방문하도록 마련해 주었다.

그 부인은 항상 미소 띠고 온화한 표정으로 여러 번 찾아 왔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한 맺힌 심정이었고 냉담하였다. 비록 그분에게서 성서의 소식을 들었지만, 히로시마에 그 날의 참상을 가져온 장본인인 나라의 종교에 어떤 구원의 힘이 있으리라곤 도저히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분에게는 나로 하여금 계속 듣게끔 하는 뭔가가 있었다.

어느날 나는 그분에게 물었다. “댁에서는 나처럼 한 맺힌 마음을 품고 사는 사람도 댁처럼 마음씨가 따뜻한 사람이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나요?”

“예, 가능하지요”라고 그분은 자신있게 대답하면서 이렇게 설명하였다. “나도 성서를 연구한 끝에 현재의 성품을 지니게 되었답니다.”

그리하여, 나는 「보라! 내가 만물을 새롭게 하노라」 라는 소책자를 사용하여 체계적인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다. 그 연구를 통해, 나는 소위 그리스도교 국가들의 행동이 성서에서 가르치는 그리스도교와 일치하지 않다는 것과 그리스도교국 역시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배웠다.

연구를 지속함에 따라 나의 열심은 자라갔다. 나는, 하나님께서 지금껏 악을 허용하신 이유와 오직 하나님의 왕국만이 인류를 고통으로부터 구원할 권능을 갖고 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께서 모든 사람들의 유익을 위해 형주에서 자신의 목숨을 버리심으로 나타내신 사랑에 깊은 감동을 받았다. 조금씩 성서의 소식은 나의 감정을 변화시켰고, 이내 내 마음 속의 원한은 씻겨지게 되었다. 그 대신, 타인에 대해 따뜻한 사랑을 느끼고 그들에게 하나님의 왕국에 관해 말해 주고픈 강렬한 욕망을 느끼게 되었다.

나는 왕국회관에서 열리는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기 시작하였고, 1964년 6월에 침례를 받았다. 그후 7년 동안, 나는 파이오니아(여호와의 증인의 전 시간 봉사자)로서 일할 수 있었고, 12명의 사람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 여호와를 알도록 돕는 특권을 누렸다.

나의 체험을 선용함

남편과 나는 현재 히로시마로 돌아와 살고 있다. 여기서 나는 그 폭격을 기억하고 있는, 나와 같은 많은 사람들을 여전히 만날 수 있다. 나는 그들과 같은 체험을 하였기에, 더 이상 전쟁이 없는 세계에 대한 유일한 참 희망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다가오는 왕국 통치에 있다는 성서의 소식을 그들이 잘 알도록 도와 줄 수 있다.

오늘날 히로시마에는 폭격의 상흔이 거의 다 씻겨졌다. 그러나, 더욱 중요하게도, 그토록 숱한 세월 동안 내 가슴 깊이 품어 왔던 상처와 원한이 씻겨질 수 있었으며, 그 자리에 희망과 사랑이 심겨졌다. 지금 나는 하나님께서 그분의 기억 속에 소중히 간직하고 계시는 그 모든 사람들을 부활시켜 주실 때를 고대하고 있다. 나의 소원은 40년 전 히로시마에서 죽었던 많은 사람들과 함께 현재 내가 누리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즐거움을 나누는 것이다. 그 중에는 나의 사랑스러운 남동생도 있으리라.

[8면 삽화]

1945년 당시 19세의 타에코

[10면 삽화]

딸과 함께 있는 타에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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