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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히로시마는 이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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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1
깨91 12/15 6-8면

“히로시마는 이제 그만!”

일본인은 진주만 승리로 인해 의기 양양해 하며 우세한 싸움을 벌이는 동안은 그 일을 기억하였지만, 패전한 후에는 그날이 잊혀지게 되었다. 최근에 일본 정부가 그 공격에 대해 사과하지 않은 것에 대해 질문을 받자 관방 장관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전략적으로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진주만 공격은 결코 칭찬받을 만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에 관한 문제는 샌프란시스코 강화 조약으로 해결되었다.”

그의 말은 태평양 전쟁을 촉발시킨 그 기습 공격에 대해 일부 일본인들이 느끼는 바를 대변해 준다. 해마다 100만 명 이상의 일본인이 하와이를 방문하지만 진주만 공격을 기념하기 위해 건조된 미국 전함 애리조나 호 기념관을 방문하는 사람은 비교적 소수뿐이라고 「마이니치 신문」은 보도한다.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구호가 일부 미국인들에게 쓰디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일본인들은 “히로시마는 이제 그만”이라는 외침으로 그들의 고통을 떠올린다. 1945년 8월에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시를 폭파한 원자 폭탄은 직접 피해를 당한 사람들뿐 아니라 국가 전체에 엄청난 영향을 미쳤다.

생존자들의 체험담을 듣는 것은 우리가 그들의 느낌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예를 들어, 이토코의 경우를 생각해 보자. 그는 학교를 졸업한 뒤 얼마 안 있어 히로시마 해군 연구소에 비서로 취직하였다. 그는 근무하던 건물 안에 있었는데도 원자 폭탄의 섬광을 느꼈으며, 빛 자체에 의해 갈피를 못 잡을 정도로 흔들리는 기분이었다. 이토코는 이렇게 설명한다. “군인들과 함께 도시에서 시체를 처리하는 일을 하였어요. 강에서 군인들이 배를 타고 그물을 내렸다가 끌어올릴 때마다 시체 50여 구를 건졌습니다. 우리는 시체를 강변으로 옮겨 다섯 구씩 모아 화장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시체는 알몸이었어요. 남자인지 여자인지를 구분할 수가 없었고, 시체의 입술은 오리의 부리처럼 부풀어 오른 모양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두 개의 원자 폭탄이 초래한 참상을 잊지 못한다.

대량 파괴 무기가 사용된 이유

나가사키 대학교의 이와마쓰 시게토시 교수는 그 자신이 원폭 피해자인데, 20여 년 전에 피해자들의 참상을 알리고자 서방 신문들에 기고하였다. 「아사히 이브닝 뉴스」지는 이렇게 보도한다. “그는 반응을 보고 말문이 막혔다. 대답의 절반은 원자 폭탄이야말로 일본의 침공을 저지시킨 것이며, 그 폭탄의 피해자가 평화를 호소한다는 것은 이상스럽다는 것이었다.”

대량 파괴 무기가 사용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아메리카나 백과 사전」은 이렇게 말한다. “그[해리 S. 트루먼]는 원자 폭탄이 전쟁을 신속히 끝내고 인명을 구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일본에 원자 폭탄을 사용하기로 결정하였다.” 전후 혼란된 상황을 보고한 일본 언론인 도미오카 겐키치는 원폭 피해자들의 느낌에 대해 무감한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인정한다. “전쟁을 결판내려는 작전이 절정에 이르면서 국가의 운명이 위태로웠을 때인 1945년(쇼와 20년) 3·4월과 8월 사이를 돌이켜보면, 조국 수호를 위해 최후의 결전을 부르짖는 군국주의자들을 정신차리게 만든 약 두 첩[원자 폭탄]의 효험, 특히 달아오른 머리를 식혀 준 그 약의 효험을 무시할 수 없다. 최후의 결전이란 1억 인구의 교쿠사이(항복이 아니라 죽음으로 돌진하는 것)를 의미하였을 것이다.”

그렇지만 원자 폭탄이 투하된 일로 인해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들이나 방사선 때문에 병을 앓는 사람들은 생존자들이 원자 폭탄을 일컫는 용어로 피카돈 즉 “불 바람”을 몰고 온 일을 정당화하는 말로 고통을 달랠 수 없다. 일부 원폭 생존자들은 오랫동안 자신들이 무고한 피해자라고 생각해 왔지만, 이제는 이와마쓰 교수가 계속 말한 바와 같이, 자신들이 일본인으로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여러 나라들을 침략하면서 저지른 범죄”를 인정해야 함을 깨닫고 있다. 1990년에 한 원폭 피해자는 히로시마의 연례 반핵 시위 운동에 모인 외국 대표자들 앞에서 일본의 전쟁 범죄에 대해 사과하였다.

과연 죽일 이유가 있었는가?

진주만,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생존자들과 목격자들의 마음속에는 전쟁에 대한 강한 혐오감이 자리잡고 있다. 일부 사람들은, 과거를 돌이켜보면서 그들의 나라가 사랑하는 사람의 희생을 요구할 만한 타당한 이유를 가지고 있었던 것인지 의문을 제기하기도 한다.

전쟁 열기를 불러일으키고 살상을 정당화하기 위해 양측은 말로도 공격하였다. 미국인은 일본인을 “비열한 왜놈”이라고 불렀으며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말로 쉽게 증오심과 복수심이 타오르게 하였다. 일본에서 사람들은 영미인이 기치쿠 즉 “악마 같은 짐승”이라고 가르침받았다. 오키나와의 많은 사람들은 “짐승”의 손에 잡히기보다는 차라리 자살하도록 부추김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와 비슷하게 일본인이 항복한 후 미국 점령군이 가까운 항구에 상륙하자 앞서 언급한 젊은 이토코는 그의 상사로부터 시안화 칼륨(청산가리) 독약 두 봉지를 받았다. 그 상사는 “외국 군인의 노리개가 되지 말라”고 명하였다.

하지만 이토코는 일본계 하와이인 벗들을 통해 차츰 자신의 견해를 넓혀 갔으며, 미국인과 영국인들도 모두 우호적이고 품위 있으며 친절한 사람들일 수 있음을 깨닫게 되었다. 그는 싱가포르 태생의 아일랜드 사람 조지를 만났는데, 조지의 아버지는 일본인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들은 서로 알게 되어 결혼하였다. 이들은 이전의 원수가 우호적인 사람임을 알게 된 수많은 사례 중 하나일 뿐이다. 모든 사람이 “원수”를, 전쟁이 물들인 색안경을 끼고 보는 것이 아니라 편견 없는 자신의 눈으로 보았다면, 그들에게 폭탄이 아니라 사랑을 쏟아 부어 주었을 것이다.

그렇다. 상호 이해에 근거한 개인간의 평화는 세계 평화에 꼭 필요하다. 그러나 1945년 이래 수많은 전쟁이 있었음을 생각할 때, 사람들은 진주만과 히로시마로부터 이 기본적 교훈을 배우지 못하였음이 분명하다. 한편 개인간의 평화도 세계 평화를 가져오기에 충분한 것은 아니다. 그러면 과연 무엇이 있어야 하는가? 다음 기사에서 설명해 줄 것이다.

[7면 삽입]

“진주만을 기억하라!”는 구호가 일부 미국인들에게 쓰디쓴 기억을 불러일으키는 한편, 일본인들은 “히로시마는 이제 그만!”이라는 외침으로 그들의 고통을 떠올린다

[8면 삽입]

상호 이해에 근거한 개인간의 평화는 세계 평화에 꼭 필요하다

[7면 삽화]

워치 타워 협회 선교인, 로이드 배리와 에이드리언 톰프슨, 1950년에 히로시마 평화 기념관 앞에서

[8면 삽화]

원자 폭탄 폭발 후 폐허가 된 히로시마

[자료 제공]

U.S. Army/Courtesy of The Japan Peace Museu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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