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태—지식에는 책임이 따른다
당신은 옳은 것을 안다면 언제든지 말하는가? 그렇게 하는 것은 바람직한 일인데, 특히 다른 사람의 복지가 위기에 처한 경우라면 더욱 그러하다. 영국의 한 어머니는 이 잡지의 이전 호에서 낙태를 다룬 기사를 읽고는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다.
“「깰 때이다」 [1986년] 7월 22일호 (한국어판은 10월 15일호)에 실린, ‘한 태어나지 않은 아기의 엄마가 보낸 편지’를 이제 막 읽어 보았는데, 가슴이 미어질 듯합니다.
“나는 낙태를 한 적은 없지만, 내가 첫아이를 임신한 지 4개월 되었을 때, 올케는 세째 아이를 임신한 지 2개월째였읍니다. 올케에게는 이제 막 학교에 갈 나이가 된 어린 두 딸아이가 있었고, 또 보수가 괜찮은 직장에 다녔어요. 올케는 가구라든지 비디오, 신형 승용차, 정원수 등을 원했지요. 그러나 아기 때문에 직장을 잃게 되면 그 모든 것을 살 수 없을테니까, 올케는 낙태를 할 마음을 먹었읍니다.
“낙태할 날이 다가오자, 올케는 기분이 들떴죠. 그러나 나는 그 점을 생각하니 더욱 서글퍼지더군요. 그때쯤 나는 뱃속의 아기가 태동하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는데, 올케 아기도 자라고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곤 했죠.
“낙태하기 전날 저녁까지, 계속 나는 올케가 생각을 바꾸기를 바랐읍니다. 나는 올케의 뱃속에 있는 아기가 부드럽고도 편안감을 주는 엄마의 심장 고동 소리를 들으며 태 속에서 아늑하고 안전하게 있을 것을 그려볼 수 있었읍니다. 그러면서도 나는 그 어린 아기가 자그마한 안전 세계에서 찢겨져 없어질 것을 생각하며 움찔해 지곤 하였읍니다. 그런 생각을 하면서 슬퍼서 울먹이곤 하였읍니다. 끝내 올케는 낙태를 하였죠. 내 어린 딸아이는 같은 또래로 자랄 수도 있었던 사촌을 알 수가 없을테죠.
“내 올케는 어떻게 되었느냐고요? 올케는 직장을 잃었지만 다른 직장을 찾았고, 그때 이후로 여러 직장을 다녔읍니다. 올케는 비디오, 신형 승용차, 정원수, 새 옷가지 등을 구입했지요. 하지만 우울증에 빠져 남편과 아이들을 두고는 며칠씩 집을 비우곤 합니다. 그래도 행복할 수 없었죠. 올케가 두 딸을 데리고 우리 집에 왔을 때, 그 조카들은 우리 딸과 열 한달 된 아들 아이를 데리고 놀면서 우리 딸에 관해 이런 말들을 하였답니다. ‘엄마, 이 아이가 귀엽지 않아? 우리한테도 어린 여동생이나 남동생이 있었으면 좋겠다.’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올케의 표정을 엿보았죠. 사실 그는 낙태할 당시에는 자신이 하는 일을 진정으로 깨닫지 못했었기 때문에 나는 올케를 위로해 주고 싶을 뿐입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올케는 아기의 생명보다는 돈을 택한 것이고, 바로 그 때문에 지금은 후회할 거라고 봅니다.
“그런데 이 일로 말미암아 나는 아주 심각한 자문을 하게 되었죠. 나는 아직 침례는 받지 않았지만, ‘여호와의 증인’이라고 할 수 있거든요. 하지만 내가 ‘증인’이 되려면 아직도 먼 것 같은데, 참다운 ‘증인’은 예수처럼 사람들의 신분이나, 하는 일이 어떠하든, 누구에게나 사랑과 동정심을 나타내야 하기 때문이죠. 나는, ‘증인’이 다른 사람에게 나아가 여호와의 이름을 자랑스럽게 전하는 것처럼 내가 생각하는 바를 참으로 말할 수 있을 날이 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읍니다. 내가 그토록 오랫동안 뒷전에서 꾸물거리지만 않았던들, 올케에게 용기있게 증거해서 그 아기를 살릴 수도 있었을 텐데 이제는 늦은 일이지요.”
여기에 제공된 일련의 기사가 바로 그러한 목적에 기여했으면 하는 것이 본지의 발행소가 진심으로 바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