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워치타워
온라인 라이브러리
한국어
  • 성경
  • 출판물
  • 집회
  • 깨87 4/15 17-21면
  • 제 3부: 1935-1940년 사경을 헤매는 국제 연맹

관련 동영상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동영상을 불러오지 못했습니다.

  • 제 3부: 1935-1940년 사경을 헤매는 국제 연맹
  • 깨어라!—1987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히틀러의 주특기”
  • 무대 연습—무엇을 위해?
  • 유럽에 번개가 치다
  • 이제 어찌될 것인가?
  • 이상의 종말
    깨어라!—1986
  • 정치적 메시야들은 평화를 가져왔는가?
    깨어라!—1985
  • 제 4부: 1940-1943년 공포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나라들
    깨어라!—1987
  • 경쟁 관계에 있는 두 왕이 20세기에 들어서다
    다니엘의 예언에 주의를 기울이라!
더 보기
깨어라!—1987
깨87 4/15 17-21면

1914년 이후의 세계

제 3부: 1935-1940년 사경을 헤매는 국제 연맹

‘국제 연맹’은 출생시부터 병약한 아이였다. 1920년에 개최된 최초의 ‘국제 연맹’ 모임은 “국가들의 세계적 동맹이라기보다는, 자국의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국제 연맹’을 이용하려 들면서 국가적 이익을 추구하는, 유럽 주요 열강들의 회의였다”고 역사가 H. 가츠케는 말한다. 국가주의적 사고 방식을 버리지 않는 한, 그 아이의 생명은 끊임없이 위태로울 판이었다.

1930년대 초엽에, ‘국제 연맹’ 회원국 중 다수는 불만을 품었음이 분명하다. 예로서, 이탈리아는 세계 원자재에 있어 자국이 공평한 몫을 차지하지 못하는 데다, 투자 전망을 바라보며 세계 시장에 진출하는 일마저 거부당했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1935년에 국익을 추구하고자 에티오피아를 침공하였다. 일본도 그와 유사한 불만을 품고서, 1937년에 중국으로 쳐들어갔다. 이 두 경우에 ‘국제 연맹’은 무력하여 중재에 나서지 못했다.

아직 20세도 안 된 ‘국제 연맹’은 그 지지자들의 기대 만큼 씩씩하고 건강한 십대가 아님이 분명했다. 일찌기 역사가 헤르만 그라믈이, “제네바의 [‘국제 연맹’ 본부] 분위기가 초상집 같다”고 한 1936년부터 ‘연맹’의 말기에 이른 병은 불안을 느끼게 하였다. 이탈리아와 일본의 무례한 태도에도 속수 무책인 ‘연맹’이기에, 아돌프라는 남자의 횡포에 대해 말 한번 제대로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히틀러의 주특기”

그렇다. 독일도 불만을 품었다. 독일은 유럽의 주도권을 되찾아 보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920년대에 독일군 참모 총장 한스 폰 제크트 장군은, ‘새로운 전쟁을 일으키지 않는 한 독일의 혁신적 승격은 불가하다고 주창했다’고 독일의 한 교과서는 기술한다. 히틀러 역시 군사적 행동이 필요할 것이라는 점을 배제하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독일의 군 역사 연구 기관은, “정권의 모든 주요 수단[1933년에서 1939년 사이]은 재무장의 목적에 직접, 간접으로 기여했다”고 지적한다.

히틀러의 관점에서, “8,500만의 독일 ‘민중’은 단일 ‘인종 핵심체’를 구성하였다. 히틀러의 위장된 다윈식 접근법대로라면, 이 ‘인종 핵심체’는 ‘영토’를 무력으로 획득해야만 했다.” 그러하기에 튀빙겐 대학교의 현대사 교수인 게르하르트 슐츠는 이렇게 설명한다. “새로운 영토의 무력 정복이 히틀러의 주특기였다.”

사실상 히틀러가 어디부터 정복해 나갈지를 결정하는 데, ‘국제 연맹’이 도움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날 무렵, 프랑스와 독일 사이에 있는 지역으로서 여러 세기 동안 두 나라의 쟁탈지였던 자를란트 즉 자르는 ‘국제 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있었다. 그러나 후에, ‘연맹’의 위임 통치 아래 남아 있을 것인지, 아니면 프랑스나 독일의 일부가 될 것인지를 자르 주민이 투표로 결정하게 하는 방안이 세워졌다. 1935년에 일반 투표를 실시하기로 하였다.

그 무렵 히틀러의 인기는 대단했다. 학생들은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내용을 받아 쓰곤 했다. “예수가 인류를 죄와 지옥에서 해방시켰듯이, 히틀러는 독일 국민을 파멸에서 구원하였다. 예수도, 히틀러도 박해를 당했는데, 예수는 처형되었지만 히틀러는 수상 자리에 올랐다. ·⁠·⁠· 예수는 하늘 나라를 위해 건설했고, 히틀러는 지상의 독일을 위해 건설하였다.”

종교 지도자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을 표방하기는커녕, 일반 투표 정략에 적극 가담하였다. 절대 다수가 가톨릭 교인인 자르 주민은 그들 주교가 일러준 이러한 말을 진심으로 받아들였다. “독일 가톨릭 교인인 우리는 조국의 위대성과 번영 및 평화를 옹위할 의무가 있다.” 그리고 가톨릭 노동 조합은 이렇게 경고하였다. “조국에 불충실한 자는 하나님께 충실할 수 없다.”

물론, 모든 사람이 동조했던 것은 아니다. 당시의 저명한 저술가 하인리히 만은 이렇게 경고했다. “당신이 히틀러를 지지하는 표를 던진다면, 당신은 그의 수명을 연장시켜 줌과 아울러, 그의 비행 ·⁠·⁠·, 심지어는 그가 필시 일으키고 말 전쟁에 대해서도 공동 책임을 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그같은 경고의 소리는 희귀했다. 그 때문에 저널리스트, 쿠르트 투홀스키는, 자르가 “영국, 프랑스, ‘국제 연맹’, 국제 노동 조합 및 교황으로부터 버림받았다”고 피력하였다.

상황이 이러하기에 예상대로 히틀러는 일반 투표에서 승리하였다. 90.8퍼센트라는 압도적인 수가 신 독일 제국에 속하는 쪽에 표를 던졌다.

이와 같이 대외 정책에서 최초로 뿌듯한 승리를 맛본 히틀러는 의기 양양해졌다. 이미 임종이 임박한 ‘국제 연맹’은 약해 빠진 나머지, 히틀러가 ‘베르사유 조약’을 어기고 1936년에 라인란트를 재무장시켜도 어쩔 도리가 없었다. 1938년에 히틀러가 오스트리아를 점령해도, 그리고 그해 후반에, 주로 독일인이 거주하던 체코슬로바키아의 수데텐 지역을 병합시켜도 막는 자 없었는데, 수데텐을 점거한 것은 1939년에 체코슬로바키아의 나머지 부분을 침공하려는 전초 공략이었다. 물론 거센 항의가 따랐으나, 그저 항의에 지나지 않았다.

무대 연습—무엇을 위해?

그때까지만 해도 히틀러의 침략전은 무혈로 일관했었다. 위에 언급된 분쟁들은 이탈리아나 일본이 관련된 분쟁과는 달랐다. “파시스트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공격하기 위하여 완전 무결한 준비를 하였으며, 엄청난 물자를 들여가며 또 수많은 선전 기구를 동원해서 감행하였다”고 이탈리아 참조 문헌인 「루오모 에 일 템포」는 기술한다. 그 전쟁은 1935년에 시작되었으며, 1936년에 에티오피아 점령이 완료되었다. 세계는 공습과 독가스 사용에 관해 듣고는 경악하였다.

아시아에서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은 아주 강대해 져서, 1931년에 남만주 철도 폭파 기도에 대한 책임을 중국이 뒤집어쓰게 되자, 그것을 구실로 만주로 진격할 수 있었다. 1937년에는 중국 본토까지 쳐들어가서 상하이, 베이징, 난징, 한커우, 광둥을 비롯하여 막대한 지역을 점령하였다.

한편, 유럽에서는 1936년에 스페인 내란이 벌어졌다. 기다렸다는 듯이 히틀러와 무솔리니는 이 때를 틈타 자신들의 최신 무기와 전법을 시험해 보았다. 만주, 중국, 에티오피아에서의 전쟁처럼, 스페인 내란은 앞으로의 더 큰 전쟁을 위한 무대 연습 역할을 하였다. 한 권위있는 문헌에 따르면, 스페인 내란으로 50여 만명이 죽었다고 한다. 그 내란이 세계의 이목을 끈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그리고 무대 연습이 대서 특필될 만했다면, 다가오는 본 공연은 과연 어떠할 것인가?

유럽에 번개가 치다

세계 무대에서 진행되는 일들을 보면서, 민주 국가들은 불안해 하였다. 대영 제국은 군 징집령을 내렸다. 그 무렵인 1939년 8월에 독일과 소련이 불가침 조약을 맺어 세계를 놀라게 했다. 사실상 그것은 두 나라가 폴란드를 나누어 먹으려는 은밀한 약조였다. 다시 한번 히틀러는 서방 민주국가들이 개입하지 않기를 기대하며, 1939년 9월 1일 새벽 4시 45분에 폴란드로 진군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히틀러가 오판하였다. 이틀 후에 대영 제국과 프랑스는 독일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9월 17일에 소련은 동쪽으로부터 폴란드를 침공했으며, 그달 말에는 폴란드 문제가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은 터졌고, 독일어로 브리츠크리크 즉 “번개전”이라고 부를 정도의 신속한 군사 작전이 개시되었다. 히틀러는 승리의 쾌감을 느끼며 서방 강대국들에게 평화를 제의하였다. “이 점에 대한 그의 진실성 여부는, 아무도 확실하게 알 수 없는 의문”이라고 독일 역사가 발터 호퍼는 기술한다.

처음 몇년간의 전쟁의 특징은 주로 번개처럼 기습 공격을 하여 파괴시키는 방식이었다. 소련은 신속하고도 강제로 에스토니아, 라트비아, 리투아니아에 소련군을 주둔시켰다. 핀란드는 소련군 주둔을 거부하는 바람에 1939년 11월 30일에 소련의 침공을 당했다. 이듬해 3월에 핀란드는 소련의 요구를 들어 주기로 하고 평화를 청했다.

하지만 그러는 사이에, 영국과 프랑스는 핀란드를 돕기 위하여 중립국인 노르웨이를 통과할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핀란드가 평화를 청하자, 더 이상 그렇게 할 만한 구실이 없게된 연합군은 그 계획을 연기하였다. 그들은 나중에 상륙하기 위한 예비 단계로 1940년 4월 8일에 노르웨이 근해에 기뢰를 부설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노르웨이인들이 기뢰 부설 작업을 반대하는 일에 몰두하고 있을 때, 예기치 않게도 독일군이 노르웨이와 덴마크로 들어왔다. 영국군은 노르웨이로 상륙한 뒤 몇차례의 승리를 거두긴 했지만 일주일도 못되어 남쪽의 불안한 보고 때문에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독일이 프랑스를 언제 어디서 침공할 것인가 하는 의문이 여러 달 동안 꼬리를 물었다. 주로 해상전에만 치우친 채로 시간은 흘렀다. 육지는 고요하기만 했다. 일부 저널리스트들은 이제 더이상 브리츠크리크가 아니라, 말 그대로 “연좌전”을 뜻하는 지츠크리크라고 하면서 “허위전”이라는 표현을 쓰기 시작했다.

그러나, 1940년 5월 10일에 시작된 독일의 기습 공격은 허위가 아니었다. 독일군은, 독일과의 국경 지대에 있는 프랑스를 지키는 방어선인 ‘마지노 선’을 우회하여, 북해 연안의 저지대를 지나 벨기에를 쏜살같이 통과한 뒤, 5월 12일에 프랑스 국경에 다다랐다. 5월 14일에는 네덜란드를 집어 삼켰다. 그런 다음 독일군은 프랑스 북부 지역을 휩쓸면서, 등뒤에 영국 해협을 두고 있는 상당수의 영국, 프랑스, 벨기에 군을 꼼짝 못하게 가두었다. 지츠크리크이긴커녕, 그야말로 전면적인 브리츠크리크였다!

5월 26일에는 전쟁 사상 최대 규모에 속하는 구조 작업이 프랑스 됭케르크에서 시작되었다. 10일 동안에 군함을 위시하여 수백척의 민간함을 타고서 340,000에 달하는 군인이 영국 해협을 건너 영국으로 무사히 갔다. 그러나 모든 군인이 도피하지는 못했다. 3주일 이내에 백여 만명이 독일군의 포로가 되었다.

6월 10일에 이탈리아는 대영 제국과 프랑스에 선전 포고를 하였다. 나흘 후에, 독일은 파리를 점령했다. 그달이 가기 전에, 프랑스와 독일은 휴전 협정을 맺었다. 이제 영국은 외톨이가 되었다. 호퍼가 이렇게 묘사한 바와 같다. “히틀러 자신도 예상하지 못했던 브리츠크리크의 속도 때문에, 히틀러는 서 유럽을 지배하게 되었다.”

히틀러의 기대와는 달리, 영국은 평화를 요청하지 않았다. 그리하여 히틀러는 7월 16일에 영국 제도 침략전인 “영국해 작전” 명령을 내렸다. 영국은 또다시 닥치고야 말 번개전에 단단히 대비하였다.

이제 어찌될 것인가?

여러 해 동안 ‘여호와의 증인’은 ‘국제 연맹’이 붕괴될 것이라고 공개적으로 예언해 왔었다.a 이제 번개같이 제 2차 세계 대전이 터지자 살려고 버둥거리던 ‘국제 연맹’은 종말을 고했다. 오랫동안 끌어온 장례식이 거행되었다. 시신은 계시록 17:7-11에 언급한 무저갱에 안치되었는데, ‘증인’은 그 성귀를 근거로 하여 ‘국제 연맹’의 실패를 예언했던 것이다.

하지만 ‘국제 연맹’이 죽고 난 후, 이제 어찌될 것인가? 전쟁은 보다 대규모적인 것, 어쩌면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전쟁”이라고 하는 아마겟돈으로 인도될 것인가? (비교 계시 6:4; 16:14, 16.) ‘여호와의 증인’은 전쟁의 진전 상황을 주시하고 싶었을 뿐 직접 관여하려 하지는 않았다. ‘증인’은 그리스도인 중립을 고수하였는데, 그 때문에—전체주의 국가에서든 민주주의 국가에서든—금지령과 투옥 및 법정 사건과 폭도들의 폭행을 당하면서도 그렇게 하였다. 1940년 전시 중에 ‘증인’의 수는 10만명도 채 못되었지만, 진정한 희망의 소식 즉 설립된 ‘하나님의 왕국’에 관한 소식을 전파하는 데 박차를 가하였다.

그리고 이 희망이야말로 “공포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나라들”이 필요로 하는 그것이다. 다음 호에 이어지는 “1914년 이후의 세계” 제 4부의 제목이 바로 “공포에 사로잡혀, 번민하는 나라들”이다.

[각주]

a 예로서, 「파수대」(영문) 1922년 4월 1일호 108면에서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사단은 ·⁠·⁠· 현재 국가들의 연맹 또는 연합이라고 일컫는 제도하의 범세계 제국 설립을 시도하고 있다. ·⁠·⁠· 이같은 동맹은 부정한 것이며, 조만간 파쇄될 것이다.”

[21면 네모]

그 외의 뉴스 거리

1935년—중국 양쯔 강 범람으로 200,000명 이상 사망

1936년—퀸 메리 원양 정기선이 기록적으로 95시간 57분 만에 대서양 횡단

미국의 흑인 제시 오언스가 베를린 올림픽 경기에서 금메달 네개를 따자 히틀러 격분

1937년—뒤퐁이 나일론으로 알려진 신제품 특허냄

독일의 비행선 힌덴부르크, 대서양 횡단 후 뉴저지 주에 계류중 화염에 휩싸여 36명 사망

1938년—로마 교황청이 프랑코 정권을 정식 스페인 정권으로 인정

과학자 한과 슈트라스만이 중성자 이용하여 우라늄 분리 가능성 발견

독일 내의 유대인 상점이 약탈되고 파괴되는, 이른바 크리스탈나흐트 (유리 조각 밤)가 벌어짐

1939년—터키 지진으로 수만명 사망

최초의 제트 항공기 엔진 개발 및 최초의 헬리콥터 제조

1940년—영국이 신개발 레이다를 공중전에 사용

[20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1940년까지의 추축국들의 유럽 확장세

추축국들 및 점령지

노르웨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

수데텐

룩셈부르크

라인란트

프랑스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알바니아

[18면 삽화]

전쟁은 ‘국제 연맹’의 조종을 울렸다

[자료 제공]

U.S. National Archives photo

[자료 제공]

U.S. Army photo

    한국어 워치 타워 출판물 (1958-2025)
    로그아웃
    로그인
    • 한국어
    • 공유
    • 설정
    • Copyright © 2025 Watch Tower Bible and Tract Society of Pennsylvania
    • 이용 약관
    • 개인 정보 보호 정책
    • 개인 정보 설정
    • JW.ORG
    • 로그인
    공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