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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망자로서의 생활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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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망자로서의 생활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
  • 깨어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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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88 7/1 19-22면

도망자로서의 생활이 내 인생에 끼친 영향

때는 1941년 가을, 유난히 심한 비가 내린 후의 달밤이었다. 내가 크레타 섬의 한 마을에서 자갈길을 따라 조심스럽게 걷고 있을 때, 복면을 한 몇 사람이 어둠 속에서 나타나 나를 덮쳤다. 그들 중 한 사람이 내 목에 칼을 들이대고는 내가 누구인지를 밝히라고 요구했다. “필리포스 파스칼라키스!”라고 나는 대답했다.

다른 한 사람이 복면을 벗으면서 ‘이 사람도 우리와 같은 처지군. 그를 보내 줍시다!’라고 말했을 때 내가 얼마나 안도감을 느꼈겠는지 상상해 보라. 그 사람과 그의 동생은 몇주 전에 그들의 삼촌을 죽여서 크레타 경찰에 쫓기는 몸이었다. 그러나 나는 경찰뿐만 아니라 나치스에게도 쫓기고 있었다. 자신들에 대해 누설하지 말도록 경고한 후에, 그들은 나를 놓아 주었다. 이 일은 제 2차 세계 대전중, 지중해상에 있는 크레타 섬에서, 전쟁 포로였다가 도망하면서 내가 겪은 섬뜩한 경험 중 하나에 불과하다.

내가 크레타에 있게 된 경위

나는 1919년에 오스트레일리아 남동부의 작은 농업 도시인 코로와에서 태어났으며, 독일이 1939년 9월에 폴란드를 침공함으로써 제 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기 직전에 결혼하였다. 전쟁 선전은 즉시 애국적 정열을 일깨웠고 수천명의 젊은 오스트레일리아인은 군복무에 뛰어듦으로써 그에 응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제 1차 세계 대전의 기억 때문에 애국심이 다소간 무디어져서 직접 개입하는 발언을 삼가하였다. 그러나 어머니는 나와 형에게 우리가 옳다고 느끼는 일을 하도록 충고하였다.

다음 달인 1939년 10월, 나는 오스트레일리아 제국 군대에 입대하여 곧 영국으로 가게 되었다. 나는 영국에서 거의 1년간 지낸 다음 그리스의 전투 지역으로 항해하게 되었다. 독일군이 지중해의 많은 지역을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아프리카의 희망봉 근처, 최남단으로 가서 위로 홍해와 수에즈 운하를 거쳐 그리스에 도착하였다.

크레타에서 도망자가 됨

독일군이 1941년 4월에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나는 그곳에 있었으며 그리스에서 남동쪽으로 105킬로미터 가량 떨어진 크레타 섬으로 퇴각해 간 연합군 부대 소속이었다. 그 다음 달, 독일군이 상륙하여 연합군 부대 대부분을 크레타 섬에서 내몰았을 때, 나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그러나 한달 후에, 세명의 다른 포로와 나는 탈출하는 데 성공했다.

우리는 숨을 만한 곳으로 도주하여 크레타인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 그들의 진지한 관심과 우호적인 태도는 각별한 것이었다. 우리 네명의 탈옥수는 함께 다니면 즉시 주의를 끌 수 있기 때문에 헤어지기로 결정했다. 나는 도망자로서 다음 2년 동안을 카니아 현의 티플로스 강 동쪽 마을에서 보냈다. 나는 그곳에서, 겨울과 여름에 옥외 생활을 하는 냉혹하고도 고된 현실을 알게 되었다.

배고픔은 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신발을 구하는 일은 음식을 얻는 일보다 훨씬 더 큰 문제거리였다. 크레타 섬의 돌길을 걷다 보면 한 켤레의 가죽 장화는 몇달 만에 닳아 버리기 일쑤였다. 더구나 가죽은 극히 귀한 것이었다. 발에 물집이 생기고 부르트는 일 그리고 병에 걸리는 일은 흔한 일이었다. 언어 역시 문제가 되었다. 살아 남기 위하여, 나는 그리스어를 배워야 하였다.

나에게 동정적인, 대주가였던 읍장을 구슬려서 나는 위조 신분증을 얻어낼 수 있었다. 한 젊은 크레타인 의사가 신분증을 만들었다. 내가 택한 그리스 이름은 필리포스 파스칼라키스였다. 나는 이 이름을 그 신분증에 자필로 서명하였다. 내가 성을 파스칼라키스라고 지은 것은 부활절(파스크)에 금식하는 교회의 위선적인 관습을 경멸했기 때문인데, 그것을 경멸한 이유는 모든 사람이 이미 굶주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독일군의 점령은 주민에게 심한 고난을 가져왔지만 그리스 정교회 교직자들은 도움을 베풀지 않았다. 그들 자신은 집과 땅이 있으면서도 굶주리는 주민에게서 식량과 돈을 강제로 거두었다. 더구나 그들은 많은 의식과 형식주의로 사람들의 생활을 지배했으면서도 진정한 영적 계몽을 주지 못하였다. 내가 알게 된 크레타인들의 좋은 특성은 그들의 교직자에게서 종종 발견할 수 있는 편협과 매우 대조가 되었다.

나를 특히 놀라게 한 것은 교직자가 전쟁에 적극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이었다. 내가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한 사제는 유격대에게 죽임을 당한 독일군들의 수족을 절단하는 것을 눈감아 주었다. 그 사제와 나는 여러 번 마주치게 되었는데, 그도 역시 나치스에게 쫓기는 몸이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 정교회 사제들이 게릴라 군대를 이끌면서, 야수성과 잔학성을 나타내는 것을 직접 목격했다.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는 높은 도덕 표준을 가지고 있었지만 종교적 성향이 강하지는 않았으며 나도 역시 종교심이 없었다. 사실상, 내가 군대에 입대할 때 나는 확고한 불가지론자였다. 더구나 교직자들의 활동은 하나님에 대한 진정한 믿음을 가질 수 없게 만든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내 인생에서 명확하지 않은 다른 기이한 일들이 내 사고 방식에 영향을 주었겠지만, 전시중 교직자들의 영향만큼 강한 것은 없었다.

대부분 산에 숨어서, 여러 시간 진지한 생각을 하면서 보냈다. 때때로 나는 자기 삼촌을 죽인 그 사람, 나에 대해 “우리와 같은 처지군”이라고 말했던 사람에 관해 생각해 보았다. 쫓겨다닌다는 사실 말고도 또 같은 점이 있었다. 나도 역시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나는 정말 그들과 다른가? 나는 이런 문제들을 생각해 보곤 했다. 나는 사람들이 어쩔 수 없이 견뎌야 하는 상황 때문에 끔찍한 일을 저지르는 것을 보았다.

내가 숨어 있던 한 마을에서, 다른 대부분의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아사 지경에 있는 가족과 함께 지내게 되었다. 자기 딸이 먹을 것을 달라고 애걸하자, 그 아버지는 버럭 화를 내며, 내가 보는 데서 딸을 호되게 때렸다. 나중에 그는 울음을 터뜨리면서 자기가 한 일을 깊이 뉘우쳤다. 나는 이와 비슷한 경험을 잊을 수 없었다.

그래서 크레타 섬에서 이곳 저곳으로 도주하며 그 섬을 빠져 나갈 궁리를 하고 있는 동안에, 나는 인생의 당혹스러운 문제들을 생각해 볼 시간이 많이 있었다. 내가 대부분 밤을 보내면서 바라보았던 별들은 너무나 영구하게 보였다. 그러나 인간의 생명과 가치는 너무나 단명하고 불확실한 것이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나는 대답을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에 대답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독일군이나 그들의 지지자들에게 붙잡히지 않으려고 피해 다니면서 2년을 보낸 후, 1943년 봄에 나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외딴 남쪽 해안을 출발하여 북부 아프리카의 토브룩으로 도피하였다. 우리는 어뢰정을 타고 도피하였는데, 이 어뢰정은 지하 저항 운동을 조직하기 위하여 크레타 섬으로 보내진 영국 관리가 주선해 주었다. 이집트에서 몇주를 보낸 후, 나는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오게 되었으며 이곳에서 병원에 입원하여 의료 검사를 받고 나왔다.

내가 돌아온 직후, 1943년 7월 24일자 「오스트레일리아 여성 주간」(The Australian Women’s Weekly)지는 내가 크레타 섬에서 도망자로서 2년간 살아 남은 이야기를 실었다. 아내 그웬과, 내가 해외에 있을 때 태어난 2년 6개월 된 딸, 어니타와 함께 찍은 사진이 실렸고 위조 신분증 사진도 같이 실렸다. 독자는 이 사진들을 복사한 것을 이 기사에서 볼 수 있다.

인생에서 목적을 갖게 됨

가족적인 책임과 어머니의 죽음 때문에 나는 오늘을 위해 사는 식의 행동에서 위로를 찾으려고 했다. 결과적으로 나의 가족은 고통을 겪기 시작했다. 나는 인생에는 분명히 목적이 있어야 한다고 느꼈다. 그러나 어디에서 목적을 찾을 것인가?

내가 다니던 직장에 에릭 고스든이라는 젊은이가 있었는데, 그는 다른 사람들과 다른 면이 있었다. 나는 몰랐었지만 에릭은 최근에 여호와의 증인이 된 것이다. 그는 “내가 진리를 발견했다고 깨닫자마자, 곧장 당신을 찾아갔어요”라고 후에 털어 놓았다. 그는 기술적으로 나의 불신을 논박하고 내 아내의 종교적 견해를 바꾸어 놓았다. 심지어 나의 불가지론마저 사라지고 있음을 느꼈다.

다른 증인도 나의 모든 질문에 대답해 주고, 내가 이전에 가졌던 불가지론 대신, 지상 낙원과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형제애에 대한 확실한 희망을 갖도록 도와주었다. 나에게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던 것은 전시에 내가 그토록 혐오했던 종교적 위선을 성서가 단죄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였다. 나는 참으로 큰 실수를 저질렀다! 거짓된 종교적 가르침과 행동을 배척했을 때 귀중한 하나님의 말씀까지 동시에 배척했던 것이다.

1950년에 그웬과 나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서 같이 침례를 받았다. 때가 되자, 1941년에 태어난 어니타, 1947년에 태어난 폴린도 우리의 본을 따랐다. 이 세명의 여자들이 나에게 아내와 딸일 뿐만 아니라, 훌륭한 영적 자매로 발전하는 것을 보는 것은 격려의 근원이 되어 왔다.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도움

딸들이 나이가 들게 되자, 우리는 해외 선교 봉사를 계획하기 시작했다. 1956년에 워치 타워 협회장인 N. H. 노어가 오스트레일리아를 방문하였고, 길르앗 선교인 학교 졸업생들이 들어갈 수 없는 남태평양의 섬들 중 한곳으로 이주하도록 가족들을 초대하였다. 우리는 다른 많은 증인들과 함께 그 초대를 받아들였다. 우리 집을 팔아서 뉴칼레도니아로 이주하는 데 드는 비용을 충당하였다.

우리가 도착했을 때 겨우 두명의 증인이 있을 뿐이었다. 다른 관습에 적응하는 것과 다른 언어를 배우는 일은 하나의 도전이었다. 그러나 크레타 섬에서 훨씬 더 어려운 상황에서 살아 남은 것은 유용한 경험이 되었다. 동료 오스트레일리아인들도 적응하도록 도와주고 그 지방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목적에 관한 좋은 소식을 전해 주는 일은 하나의 특권이었다. 1963년에 더 크게 필요한 곳에서 섬기던 오스트레일리아인 가족들이 뉴칼레도니아를 떠났을 무렵, 여호와의 증인 수는 58명으로 증가해 있었다.

오스트레일리아로 돌아왔을 때, 우리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럽으로부터 수십만명이 이주해 왔고, 좀더 최근에는 수천명이 동남 아시아로부터 이주해 와서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바로 우리 이웃에 살게 된 것이다. 크레타 섬에서 도망자로 생활했었기 때문에 나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면서 다른 환경에 적응하려 애쓰는 새로 온 사람들에게 강한 동료감을 느낀다. 그렇기 때문에 1974년과 1975년 중에 오스트레일리아에 14개의 외국인 회중과 집단이 형성되는 것을 보는 것은 가슴 벅찬 일이었다. 이 수자는 이제 85개로 증가하였다.

제 2차 세계 대전 말에 인간들 사이의 진정한 형제애를 보고자 했던 나의 희망은 놀라운 방법으로 실현되었다. 뉴칼레도니아를 떠난 후, 건강이 좋지 않아 활동을 약간 늦추어야 할 때까지, 수년 동안 나는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시드니, 멜버른, 애들레이드에 있는 회중들을 방문하면서 그러한 형제애를 위해 봉사하는 특권을 가졌다.

우리가 끊임없이 도와주고자 하는 사람들 중에는 농아, 맹인, 외로운 사람 또는 신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손상당한 사람들 외에도, 마약 중독자, 알콜 중독자 그리고 심지어 불가지론자나 무신론자들이 있다. 사람들—그들의 배경, 관습, 약점 및 고민—을 이해하는 것은 영적인 도전으로 남아 있다. 초기 경험을 통해서 나는 결코 사람들의 외양을 볼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감동시키려고 노력해야 한다는 것을 배웠다. 무슨 중요한 목적 때문인가? 여호와의 과분하신 친절로 인해 ‘몇몇 사람들이 구원받게’ 하기 위한 것이다. (고린도 전 9:22, 23)—팔리 제임스의 체험담.

[21면 삽화]

GUNNER FARLEIGH JAMES, escapee from Crete, with his wife and 2 1/2-year-old daughter, Anita. Anita was born after Gunner James went overseas.

[자료 제공]

From The Australian Women’s Weekly, Sydn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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