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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96
파96 11/1 22-27면

50년 넘도록 ‘건너다님’

에마누엘 파테라키스의 체험담

사도 바울은 19세기 전에 다음과 같은 독특한 초대를 받았습니다. “마케도니아로 건너 와서 우리를 도와 주십시오.” 바울은 “좋은 소식을 선포”할 이 새로운 기회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사도 16:9, 10) 내가 받아들인 초대는 그렇게 오래 전까지 거슬러올라가지는 않지만, 50여 년 전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 6:8의 영을 가지고 새로운 구역으로 ‘건너가’는 것에 동의하였습니다. 나는 수없이 여행을 한 덕분에 영원한 여행자라는 별명을 얻었지만, 나의 활동은 관광 여행과 유사한 데가 거의 없었습니다. 호텔 방에 들어서자마자 무릎을 꿇고 나를 보호해 주신 것에 대해 여호와께 감사드린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습니다.

나는 1916년 1월 16일, 크레타 섬의 히에라페트라에서 종교심이 매우 강한 그리스 정교회 가정에 태어났습니다. 유아 때부터, 어머니는 일요일이면 나와 세 누이들을 교회에 데리고 가곤 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집에 머물면서 성서를 읽는 것을 더 좋아하였습니다. 나는 아버지를 존경하였습니다. 아버지는 정직하고, 선하고, 너그러운 분이라서 아홉 살 때 아버지가 사망하자 나는 큰 마음의 상처를 받았습니다.

다섯 살 때 학교에서 다음과 같은 내용을 읽은 기억이 납니다. “우리 주위의 모든 것은 하느님이 계심을 명백히 알려 준다.” 성장하면서 나는 이 말이 옳음을 절대적으로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11세 때 글짓기에서 시편 104:24을 주제로 택하기로 하였습니다. “여호와여 주의 하신 일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주께서 지혜로 저희를 다 지으셨으니 주의 조성물이 땅에 가득하니이다.” (난외주 참조) 나는 자연의 경이에 매혹되어, 원래의 나무 그늘에서 벗어나 바람에 실려 갈 수 있도록 작은 날개를 갖춘 씨와 같은 단순한 것들에도 매료되었습니다. 작문을 제출한 그 주에 교사는 그 글을 학급 전체에게 읽어 주었고, 그런 다음 전교생에게도 읽어 주었습니다. 당시 교사들은 공산주의 사상에 대항하여 싸우고 있었기 때문에 내가 하느님의 존재를 변호하는 것을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나로서는 창조주에 대한 나의 믿음을 표현한 것이 기쁠 따름이었습니다.

나의 의문들이 풀리다

1930년대 초에 여호와의 증인과 처음 만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에마누엘 리오누다키스가 크레타 섬의 모든 읍과 마을에서 전파하고 있었습니다. 나는 그에게서 몇 부의 소책자를 받았는데, 「죽은 자는 어디 있는가?」라는 제목의 소책자가 특히 내 눈길을 끌었습니다. 나는 죽음을 병적으로 두려워해 아버지가 임종을 맞은 방에 들어가는 것조차 하지 않았을 정도였습니다. 이 소책자를 여러 번 읽고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한 성서의 가르침을 알게 되자 나는 미신적인 두려움이 사라지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 년에 한 번씩, 여름철에, 증인들이 우리 읍을 방문해서 나에게 읽을 출판물을 더 갖다 주었습니다. 성경에 대한 이해가 조금씩 증가하였지만, 나는 여전히 그리스 정교회에 나가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구출」(Deliverance) 책이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그 책은 여호와의 조직과 사탄의 조직 사이의 차이점을 명확하게 밝혀 주었습니다. 이 때부터 나는 성서와 입수할 수 있는 워치 타워 협회의 출판물을 더 정기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스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령 아래 있었기 때문에, 밤에 몰래 연구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배우고 있는 것에 대한 열정이 넘쳐 알게 된 점에 대해 모든 사람에게 이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오래지 않아 경찰은 나를 감시하기 시작하였고, 출판물을 수색하기 위해 밤낮으로 아무 때나 나를 수시로 찾아왔습니다.

1936년에 처음으로, 약 120킬로미터 떨어진 이라클리온에서 열리는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증인들을 만나게 되어 정말 기뻤습니다. 그들 대다수는 소박한 사람들로서 대부분 농부였는데, 그들은 이것이 진리임을 내가 확신할 수 있도록 도와 주었습니다. 그 때 그 곳에서 나는 여호와께 헌신하였습니다.

내가 침례를 받은 것은 결코 잊지 못할 일입니다. 1938년의 어느 날 밤, 리오누다키스 형제는 칠흑 같은 어둠을 뚫고 나의 성서 연구생 두 명과 나를 해변으로 데리고 갔습니다. 기도를 한 후에 그는 우리를 물 속에 잠갔습니다.

체포됨

처음으로 전파하러 나간 날은, 솔직히 말해서 참으로 다사 다난한 하루였습니다. 사제가 된 옛 학우를 만나 함께 훌륭한 토론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후에 그는 주교의 명령에 따라 나를 체포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하였습니다. 우리가 읍장 사무실에서, 이웃 마을로부터 경찰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밖에 군중이 모여들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사무실에 있는 그리스어 신약 성경을 집어들고 그들에게 마태 24장에 근거한 연설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사람들이 처음에는 듣고 싶어하지 않았지만, 사제가 중재해 주었습니다. “연설하게 해도 됩니다. 우리가 사용하는 성서입니다” 하고 그는 말하였습니다. 나는 한 시간 반 동안 연설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하여 나의 봉사의 직무 첫날은 또한 첫 공개 강연을 하는 기회도 되었습니다. 내가 연설을 마쳤는데도 경찰이 도착하지 않았기 때문에, 읍장과 사제는 일단의 사람들을 시켜 나를 읍에서 쫓아내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길이 꺾어지는 첫 모퉁이에서 나는 그들이 던지는 돌에 맞지 않기 위해 가능한 한 빨리 뛰기 시작하였습니다.

다음날 주교를 동반한 두 명의 경찰이 직장에 와서 나를 체포하였습니다. 나는 경찰서에서 성서를 가지고 그들에게 증거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내가 소지한 성서 출판물은 법에서 요구하는 주교의 검인을 받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는 개종 권유와 불법 출판물 배포 죄로 고발당하였습니다. 나는 풀려 나 재판이 있을 때까지 기다렸습니다.

재판은 한 달 후에 있었습니다. 나는 변론하면서, 전파하라는 그리스도의 명령에 순종하고 있었을 뿐임을 지적하였습니다. (마태 28:19, 20) 재판장은 빈정거리듯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습니다. “이보게, 그 명령을 하신 분은 십자가에 못박히셨다네. 자네에게 그와 비슷한 처벌을 가할 권위가 나에게 없다는 것이 유감이구먼.” 그러나 낯모르는 어떤 젊은 변호사가 일어나 나를 변호하기를, 공산주의와 무신론이 이렇게 만연한 때에 하느님의 말씀을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는 젊은이가 있다는 사실에 대해 법정은 자랑스럽게 여겨야 한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내게 다가와, 법정 서류철에 들어 있는 나의 변론문을 따뜻하게 치하해 주었습니다. 그는 내가 매우 젊다는 사실에 깊은 감명을 받고, 무료 변호를 해주겠다고 제안하였습니다. 나는 최소 3개월 형은 받을 것이었는데, 단지 10일간의 금고형과 300드라크마의 벌금형을 받았습니다. 그러한 반대는 여호와를 섬기며 진리를 옹호하려는 나의 결심을 강화시켜 줄 뿐이었습니다.

또 한번은, 체포되었을 때, 재판관은 내가 성서를 힘들이지 않고 인용하는 것에 유의하였습니다. 그는 주교에게 자기 사무실에서 나가 달라고 요청하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이 할 일은 끝났습니다. 내가 이 사람을 다루겠습니다.” 그런 다음 그는 자기 성서를 꺼내 왔고, 우리는 오후 내내 하느님의 왕국에 관하여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이러한 일로 말미암아 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일을 계속하도록 격려받았습니다.

사형 선고

1940년, 징집되자 나는 징집에 응할 수 없는 이유를 설명하는 서신을 띄웠습니다. 이틀 후 체포되어 경찰에서 몹시 구타당하였습니다. 그런 다음 알바니아 전선으로 이동되었고, 싸우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군법 회의에 회부되었습니다. 군 당국은 나의 옳고 그름을 아는 것보다는 나의 선례가 군인들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에 더 관심이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나는 사형 선고를 받았는데, 법률상의 미비점 때문에 사형이 10년 중노동형으로 감형되어 한시름 놓았습니다. 그 후 생애의 몇 달 동안을 매우 좋지 않은 환경의 그리스 군 교도소에서 보냈는데, 지금도 그로 인한 신체적 후유증을 앓고 있습니다.

그러나 교도소가 나의 전파하는 일을 중지시키지는 못하였습니다. 절대로 그럴 수 없었습니다! 많은 사람이 민간인이 무슨 일로 군 교도소에 와 있는지 의아해하였기 때문에 대화를 시작하기가 쉬웠습니다. 한 성실한 젊은이와 그러한 대화를 나눈 결과, 교도소 뜰에서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38년 후에 나는 그 사람을 순회 대회장에서 다시 만났습니다. 그는 진리를 받아들여 레프카스 섬에서 회중 감독자로 일하고 있었습니다.

1941년, 히틀러의 군대가 유고슬라비아를 침공하자 우리는 프레베자에 있는 교도소를 향해 더 남쪽으로 이송되었습니다. 이송 도중 우리 호송 차량이 독일 폭격기의 공격을 받는 바람에 우리 수감자들은 식량을 전혀 받지 못했습니다. 가지고 있던 얼마 안 되는 빵이 다 떨어지자 나는 하느님께 이렇게 기도하였습니다. “저를 사형에서 구해 주신 다음 제가 굶어 죽게 하는 것이 당신의 뜻이라면 당신의 뜻대로 하시기 바랍니다.”

다음날 한 장교가 점호 도중 나를 한쪽으로 불러내더니, 어디서 왔으며 부모가 누구인지 그리고 왜 교도소에 와 있는지 등을 알아본 다음 자기를 따라오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는 나를 읍에 있는 장교 식당으로 데리고 가서, 빵과 치즈와 구운 양고기가 있는 식탁을 가리키며 마음대로 먹으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러나 나는, 다른 60명의 수감자들은 아무 것도 못 먹고 있기 때문에 양심상 나 혼자 먹을 수가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장교는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모두에게 줄 음식은 없어! 자네 아버지가 우리 아버지에게 매우 관대하게 대해 주었지. 자네에게는 도덕적 의무를 느끼지만 다른 자들에게는 그렇지 않거든.” “그렇다면 그냥 돌아가겠습니다”라고 나는 대답하였습니다. 그는 잠시 생각해 본 다음, 될 수 있는 대로 많은 음식을 담을 수 있는 큰 자루를 하나 주었습니다.

교도소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자루를 내려놓으며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여러분, 여러분을 위한 음식입니다.” 공교롭게도, 전날 저녁에 나는 다른 수감자들이 곤경에 처한 책임이 나에게 있다는 비난을 받았는데, 내가 동정녀 마리아에게 기도하는 일에 가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한 공산주의자는 나를 옹호해 주었습니다. 이제 음식을 보자,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당신들의 ‘동정녀 마리아’는 어디 있소? 당신들은 우리가 이 사람 때문에 죽을 것이라고 말했소. 그런데 바로 이 사람이 우리를 위해 음식을 가져왔소.” 그런 다음 그는 나를 향해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에마누엘! 어서 감사 기도를 해주시오.”

그 후 얼마 안 있어 독일군이 진격해 오자 교도관들이 도망 가 버리는 바람에 감금 상태에서 벗어나는 길이 열렸습니다. 1941년 5월 말, 나는 아테네로 가기 전에 다른 증인들을 찾기 위해 파트라스로 가 보았습니다. 거기서 얼마의 옷과 구두를 얻고, 1년 남짓 만에 처음으로 목욕을 할 수 있었습니다. 독일군은 점령 기간 내내 내가 전파하는 것을 수시로 중단시켰지만, 결코 체포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들 중의 한 사람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독일이라면 여호와의 증인은 총살감이다. 그러나 여기서는 적이 모두 증인이라면 좋겠다!”

전후의 활동

그리스는 싸움을 충분히 하지 못하기라도 한 듯, 1946년부터 1949년 사이에 내란으로 더욱 분열되어 수천 명의 사망자가 생겼습니다. 집회만 참석해도 체포될 수 있는 때인지라 형제들은 강함을 유지하기 위해 많은 격려를 필요로 하였습니다. 여러 명의 형제들이 중립 입장 때문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이 왕국 소식에 반응을 보여, 우리는 매주 한두 명에게 침례를 주었습니다. 1947년 당시, 나는 낮에는 아테네의 협회 사무실에서 일하고, 밤에는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회중들을 방문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48년에는 미국의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참석하도록 초대받는 기쁨을 누렸습니다. 그러나 문제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전에 받은 유죄 판결 때문에 여권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나의 성서 연구생 중 한 명이 어떤 장군과 친분이 있었습니다. 이 연구생 덕분에 몇 주 안 되어 여권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떠나기 불과 얼마 전에, 「파수대」를 배부한 것 때문에 체포되어 걱정이 생겼습니다. 경찰관은 나를 아테네의 국가 비밀 경찰 총장에게 데려갔습니다. 참으로 놀랍게도 그는 나의 이웃 중 한 사람이었습니다! 경찰관은 내가 체포된 이유를 설명하면서 그에게 잡지를 한 묶음 주었습니다. 나의 이웃은 자기 책상에서 모아둔 「파수대」 잡지를 꺼내면서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습니다. “나에게 최근 호가 없는데, 한 부 가져도 될까요?” 이러한 일에도 여호와의 손이 작용하는 것을 보고 나는 참으로 안심이 되었습니다!

1950년에 길르앗 제16기 학급에서 부요하게 하는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학기를 마치자 나는 키프로스로 임명되었는데, 이 곳에서도 교직자들의 반대가 그리스만큼이나 맹렬하다는 것을 곧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종종, 정교회 사제들의 선동으로 격앙된 광신자들의 무리와 마주쳐야 하였습니다. 1953년에 나는 키프로스 비자가 갱신되지 않아, 터키의 이스탄불로 재임명되었습니다. 여기서도 역시 체류 기간이 짧았습니다. 터키와 그리스 사이의 정치적 긴장으로 말미암아, 전파 사업에서 좋은 결과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른 임명지—이집트—로 떠나야 하였습니다.

그리스의 교도소에 감금되어 있었을 때, 시편 55:6, 7이 생각나곤 하였습니다. 그 성구에는 광야, 달리 말해 사막으로 도피하고 싶은 다윗의 열망이 표현되어 있습니다. 언젠가 내가 바로 사막에 있게 될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하였습니다. 1954년, 여러 날 기차와 나일강 배로 피곤한 여행을 한 후 마침내 목적지—수단의 하르툼—에 도착하였습니다. 하고 싶은 일이라고는 오로지 샤워를 하고 한잠 자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런데 한낮이라는 것을 깜빡 잊고 있었습니다. 옥상 위의 탱크에 저장되어 있던 물에 데는 바람에, 머리의 피부가 다 나을 때까지 여러 달 동안 헬멧을 쓰고 다녀야 하였습니다.

그 곳에 있을 때, 가장 가까운 회중으로부터도 1600킬로미터나 떨어져 있어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 외로이 고립되어 있다는 느낌이 들곤 하였지만, 여호와께서 나를 붙들어 주셨고 일을 계속할 수 있도록 힘을 주셨습니다. 이따금 전혀 뜻밖의 근원으로부터 격려를 받을 때가 있었습니다. 하루는, 하르툼 박물관의 관장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는 개방적인 사람이라, 우리는 훌륭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내가 그리스 태생이라는 것을 알고는, 나에게 박물관으로 가서 6세기의 어떤 교회에서 발견된 유물들에 새겨진 일부 비문들을 번역해 줄 수 있는지를 물었습니다. 통풍도 잘 안 되는 지하실에서 5시간을 보낸 후, 여호와의 이름 네 글자가 새겨져 있는 받침 접시를 발견하였습니다. 내가 얼마나 기뻐했겠는지 상상해 보십시오! 유럽에서야 교회 건물들에서 하느님의 이름을 발견하는 것이 드문 일이 아니지만, 사하라 사막 한가운데서는 매우 이례적인 일입니다!

1958년 국제 대회에 참석한 후, 나는 지구 감독자로 임명되어 중동과 근동 및 지중해 주변에 있는 26개 나라와 지역에 있는 형제들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종종 곤란한 상황에서 어떻게 벗어나야 할지 모를 때가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언제나 빠져 나갈 길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나는 여호와의 조직이 특정 국가들에 고립되어 있는 증인들에게 나타내는 관심을 보고 늘 감명받았습니다. 한번은, 유전(油田)에서 일하는 한 인도 형제를 만난 적이 있습니다. 그 형제가 이 나라에서 활동하는 유일한 증인임이 분명하였습니다. 그는 자물쇠를 채운 자기의 서랍 속에 18개 언어로 된 출판물을 가지고 있으면서 그것을 직장 동료들에게 전하였습니다. 다른 나라의 종교는 모두 엄격히 금지되어 있는 이 나라에서도 우리 형제는 좋은 소식을 전파해야 할 책임을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의 동료들은 그가 속한 종교의 대표자가 그를 방문하도록 파견된 것을 보고 감명받았습니다.

1959년에 나는 스페인과 포르투갈을 방문하였습니다. 당시 두 나라 다 군사 독재 정권 아래 있었고,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엄격히 금지되어 있었습니다. 한 달 동안에 나는 100개 이상의 집회를 사회하면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포기하지 말라고 형제들을 격려할 수 있었습니다.

더 이상 혼자가 아님

20년 남짓 독신으로 전 시간 봉사를 하며 여호와를 섬겼는데, 일정한 거처가 없이 끊임없이 여행하는 일에 갑자기 지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 무렵 튀니지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를 하고 있던 아니 비아누치를 만났습니다. 우리는 1963년에 결혼하였습니다. 여호와와 진리에 대한 그의 사랑, 가르치는 기술을 겸비한 봉사의 직무에 대한 그의 정성, 언어에 대한 그의 지식은 북부 및 서부 아프리카와 이탈리아에서 우리가 선교 봉사와 순회 봉사를 하는 데 진정 축복이 되었습니다.

1965년 8월, 아내와 나는 세네갈의 다카르로 임명되었는데, 나는 그 곳에서 그 지역의 지부를 조직하는 특권을 누렸습니다. 세네갈은 종교에 대해 매우 관용을 나타내는 나라인데, 의문의 여지 없이 레오폴 생고르 대통령 때문일 것입니다. 그는 1970년대에 말라위에서 끔찍한 박해가 벌어진 기간에 말라위의 반다 대통령에게 여호와의 증인을 지지하는 서한을 띄운, 아프리카의 몇 안 되는 국가 수뇌 중 한 사람입니다.

여호와의 풍부한 축복

1951년에 길르앗을 떠나 키프로스를 향해 여행할 때는 가방이 7개였습니다. 터키를 향해 떠날 때는 가방이 5개로 줄어들었습니다. 하지만 여행을 자주 하다 보니, 20킬로그램까지 허용되는 수하물 중량 제한에 익숙해져야 하였습니다. 그 수하물 가운데는 내 서류철과 소형 타자기도 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날 나는 당시의 워치 타워 협회 회장인 노어 형제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형제는 나를 물질주의에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고 있습니다. 형제 덕분에 나는 20킬로그램의 소유물로 살아가면서, 만족하고 있으니 말입니다.” 나는 많은 것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뭔가 박탈당하고 있다고 느낀 적이 한번도 없었습니다.

여행 중에 내가 겪은 주된 문제는 나라들을 출입국 하는 문제였습니다. 하루는, 증인들의 활동이 금지된 어떤 나라에서 한 세관원이 내 서류를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습니다. 내버려 두면 그 나라의 증인들이 위험하게 될 것이므로, 나는 웃옷에서 아내가 보낸 편지를 꺼내며 그 세관원에게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우편물 읽는 걸 좋아하시는군요. 서류 가운데는 들어 있지 않은, 내 아내가 보낸 이 편지도 읽고 싶습니까?” 그는 당황하여 변명하며 나를 통과시켜 주었습니다.

1982년 이래 나는 아내와 함께 프랑스 남부의 니스에서 선교인으로 일해 왔습니다. 나는 건강이 나빠져 더는 예전만큼 일을 많이 하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기쁨이 줄어든 것은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의 수고가 헛되지 않’은 것을 보아 왔습니다. (고린도 첫째 15:58) 여러 해에 걸쳐 내가 연구를 사회하는 특권을 누린 수많은 사람들은 물론, 우리 가족 중 40명이 넘는 사람들이 충실하게 여호와를 섬기고 있는 것을 보는 기쁨을 누리고 있습니다.

나는 ‘건너다니’며 살아온 나의 인생에 희생이 따랐다고 해서 결코 후회하지 않습니다. 요컨대, 우리가 하는 어떤 희생도 여호와와 그분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께서 우리를 위해 하신 희생에 비할 바가 못 됩니다. 진리를 알게 된 지난 60년간을 돌이켜 볼 때, 여호와께서 나를 풍부히 축복해 주셨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잠언 10:22에서 “여호와께서 복을 주시므로 사람으로 부하게 하”신다고 말한 바와 같습니다.

의문의 여지 없이, 여호와의 ‘인자[“사랑의 친절”]가 생명보다 낫’습니다. (시 63:3, 「신세」 참조) 노년에 겪는 불편한 일들이 계속 증가함에 따라, 영감받은 시편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이 내 기도에 종종 언급됩니다. “여호와여 내가 주께 피하오니 나로 영영히 수치를 당케 마소서. 주 여호와여 주는 나의 소망이시요 나의 어릴 때부터 의지시라. 하나님이여 나를 어려서부터 교훈하셨으므로 내가 지금까지 주의 기사를 전하였나이다. 하나님이여 내가 늙어 백수가 될 때에도 나를 버리지 마[소서].”—시 71:1, 5, 17, 18.

[25면 삽화]

아내 아니와 함께 있는 현재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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