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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나는 참 지혜를 깨달았다
  • 깨어라!—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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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8
깨88 12/1 24-27면

나는 참 지혜를 깨달았다

어린 소년 시절에 한 불교 승려는 나를 보더니 이름을 타이어(語)로 “지성” 혹은 “지혜”를 의미하는 파니아로 하도록 제안했다. 부모는 독실한 불교 신자였으므로 그 말에 따라 기꺼이 나의 이름을 바꾸었다.

60년 전 내가 태어난 곳인 타이는 인구의 90퍼센트 이상이 불교를 믿는다고 공언하는 나라다. 불교는 약 2,500년 전 인도에서 창시되었으며 그 다음 아시아의 여러 나라로 보급되었다. 불교는 보다 나은 것—고통으로부터의 자유—에 대한 희망을 제시하며 그것을 개인의 노력을 통해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긴다.

불교에 의하면, 인생에서의 현재 위치는 현생과 전생에서 저지른 행위의 결과(갈마)라고 믿는다. 욕망이 모든 고통의 원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모든 욕망을 제거하는 것이 목표다.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하여, 사람은 재생의 순환에서 벗어나 많은 사람에게 무존재를 뜻하는 열반이라고 하는 상태에 이를 때까지 수많은 존재 또는 윤회를 거쳐야 할지 모른다.

고타마 부처는 “깨달음”을 통해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했으며, 불교 신자는 그의 가르침을 따르는 것이 지혜의 길이라고 믿는다.

타이에서의 성장기

나는 타이의 수도 방콕에서 태어났다. 제 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기 전 10년 동안 방콕에서의 생활은 북적거리는 대도시가 되어 버린 오늘날의 방콕보다 훨씬 조용했었다. 당시에 전차와 버스도 있기는 하였지만 인력거, 마차 그리고 페달식 삼륜 자전거가 일반적인 교통 수단이었다. 수로 즉 클롱에서는 배가 교통 수단의 역할을 했다.

여러 해 동안 가족은 수로 옆 말뚝 위에 지은 수상 가옥에서 살았다. 방콕의 수로 지역에 사는 사람들은 주로 물을 중심으로 생활해 나갔다. 클롱은 목욕과 설겆이 및 세탁을 하는 데 이용되었다. 배가 바로 문턱에까지 와서 온갖 종류의 식품과 상품을 팔았으며, 심지어 우편물도 배로 우송되었다. 고온 다습한 기후여서 우리 어린이들은 수영과 다이빙 및 물놀이를 했다.

여섯살이 되자, 학교에 다니기 시작했다. 의무적으로 초등 교육을 받아야 했기 때문에 대다수의 도시 어린이들은 나처럼 학교에 다녔다. 당시에는 남학생과 여학생이 배우는 교실은 분리되어 있었으므로 이성간의 접촉은 거의 없었다. 데이트라는 말은 사실상 들어 보지 못했다.

나는 축구와 타이식 권투를 포함하여 운동을 좋아했다. 타이식 권투란 수백년 전에 발달된 특이한 무술이다. 선수는 글러브를 낀 주먹뿐만 아니라 맨발, 다리, 무릎 및 팔꿈치를 사용하여 서로 치고 찰 수 있다. 어머니는 내가 이 위험한 운동에 열의가 있음을 알고는 더 이상 그것을 하지 못하도록 금지시켰다. 그래서 육체미 운동으로 방향을 바꾸었다.

내가 젊었을 때, 사원의 축제에서 베풀어지는 여흥은 노소를 막론하고 타이 사람을 즐겁게 했다. 그 축제는 종교적인 것과 관련이 있었으며 그때에 사원 유지를 위한 기금을 마련했다. 떠들썩한 군중이 모여 들었으며 그들과 더불어 상인들이 온갖 종류의 식품과 다과류를 팔기 위해 사원 마당에 진열대를 설치하곤 했다.

축제에서 가장 인기있는 무대 공연은, 리카이라고 하는, 생음악과 즉흥적인 대화로 이루어진 민속극이었다. 배우들은 화려한 색깔의 복장을 하고 분과 연지로 짙게 분장을 했다. 그들은 꼭두 새벽까지 계속해서 청중을 웃겼다. 오늘날, 현장 공연은 대개 옥외 영화로 바뀌었다.

어린 시절의 종교적 영향

학교에서는 매일 수업을 시작할 때에 국기 게양식과 국가 봉창이 있었다. 그후에 학급은 불교의 종교 언어인 팔리어로 기도를 하곤 했다. 학교 수업 과정에는 불교인의 기본 윤리 및 도덕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그 밖에는 종교적 가르침을 그리 많이 받지 않았다.

대부분의 불교 가정에는 매일의 기도와 명상에 사용되는 불상이 놓인 작은 제단이 있다. 여기에 촛불을 켜고 향을 피운다. 중국계 가정에는 대개 조상 숭배나 다른 영과 신들을 달래기 위한 또 다른 제단들이 있다.

불교 신자는 모든 종교가 다 좋다고 믿기 때문에 어떤 사상과 관습이 좋은 것이고 이런저런 면으로 자신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느끼면 쉽사리 그것을 받아들이고 동화된다. 그로 인해, 타이 사람 중에는 불교 사원에서뿐만 아니라 수많은 중국과 바라문 사원 중 두 군데 이상의 장소에서 참배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리 가족이 특별히 종교적인 가족은 아니었지만, 종교는 우리 생활에 끊임없이 영향을 미쳤다. 예를 들면, 삭발을 하고, 진노랑의 가사를 걸친 승려가 매일 동트자마자 시주를 받으러 방문하곤 했다. 승려는 신을 신지 않고 걸어오거나 클롱을 따라 배를 노 저어 와서는 집주인이 시주 그릇에 쌀을 퍼주며 다른 음식을 담도록 멈추어 있곤 했다.

나는 아주 어릴 때부터, 승려는 부처를 본받는 생활을 택한 사람이므로 그들을 존경하도록 배웠다. 승려란 대단한 지혜를 가진 사람으로 여겨졌으며 그들의 견해와 교훈을 높이 평가할 것이 장려되었다.

제 2차 세계 대전중에 방콕은 여러 차례의 공습을 받았다. 그래서 어머니는 나를 지방 한곳에 사는 어머니의 친척 집으로 데리고 갔다. 그 지방의 사찰 즉 사원이 근처에 있었으므로 승려들과 친하게 되었다. 그들 중에는 불교 부적을 만들어 배부한 사람도 있었다. 오래 된 법당의 벽장에는 납을 녹여 만든 수천개의 작은 불상이 있었다. 우리 중 많은 소년이 그 불상을 닦는 일을 도왔다. 그렇게 하고 나면, 승려들은 고대 크메르 서체로 불상에다 몇 글자를 새겨 넣고 불상이 행운의 부적으로서 효험있게 하는 주문을 외었다.

나는 목에다 그런 불상을 걸고 다니면 해악으로부터 보호받을 수 있고 틀림없이 행운을 얻을 수 있다는 생각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래서 부적을 모으기 시작했다. 여러 달 동안 승려들과 함께 사찰에서 지냈으며, 그동안 명상과 점치는 일 그리고 다른 영매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속한 사람들은 타이 인구의 1퍼센트도 되지 않았지만 그리스도인은 예수라고 하는 사람을 하나님이라고 믿고 있으며 가톨릭 교인은 ‘하느님의 어머니’를 숭배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신앙은 비현실적인 것으로 보였다. 십자가에서 죽은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창조할 수 있었겠는가? 그 점이 참 지혜라고는 생각되지 않았다.

인생에 변화를 준 사고

전쟁 후, 나는 훌륭한 교육을 받아 보수 좋은 직장을 구하는 데 전념했다. 마침내 상업 학교를 졸업하고 방콕의 어떤 외국인 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1959년 어느 날 아침, 출근하는 도중에 버스 난간을 놓치는 바람에 뒤로 떨어지면서 도로에 머리를 부딪혔다. 승객과 행인들이 운전사에게 차를 멈추라고 소리쳤지만, 운전사가 도로 옆으로 차를 댈 때, 커다란 뒷바퀴에 하체가 깔리게 되었다. 척추와 여러 개의 늑골이 부러졌다.

7개월 후 퇴원했을 때, 허리 아래가 모두 마비되어 있었다. 걸을 수 없다는 생각으로 인해 절망감이 들었다. 의사들이 내게 회복될 가망이 없다고 하였기 때문에 나는 다른 방법을 시도하고자 했다. 어머니는 나를 벽지로 데리고 갔으며, 거기서 수도원, “진료소” 및 병 고침이 행해진다고 사람들이 주장하는 다른 곳을 가보았다. 색다른 의사, 요법사 및 영매술자들을 만나게 되자, 그들의 진료법을 연구하게 되었다. 마술과 점치는 일에 관한 교본을 구해서 혼자 연습하기 시작했다.

참 지혜와의 만남

4년 동안 벽지에 머무른 후, 방콕으로 돌아왔다. 신체의 상태는 나아지지 않았지만, 새로운 직업을 가지게 되었다. 온갖 연령층의 사람들이 와서 운수를 점쳐 달라고 부탁했다. 행운의 부적도 몇 종류 만들었으며, 그 중 얼마는 한 승려의 도움을 받아 팔았다.

그러던 중 1968년 어느 날, 여호와의 증인의 캐나다 선교인이 방문했다. 그 선교인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해서 이야기했을 때, 여호와의 증인이란 내가 거부감을 느끼는 많은 “그리스도교” 중 하나에 불과하다고 단정했다. 그로부터 6년이 지나서야 다른 증인 부부와 진지하게 성서 연구를 시작했다.

특별히 관심을 끈 것은 성서 예언이었다. 예수께서 자세히 묘사하신 오늘날 우리가 보는 사건과 상태 그리고 성서의 「다니엘」서, 특히 7, 8장의 예언을 보았을 때, 어떠한 점장이도 그런 것을 예언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마태 24장) 게다가 현 상태가 창조주께서 원래 목적하신 바와 다른 이유, 그분과 그분의 주권을 거부한 자들이 야기한 손상을 제거하기 위해 취하신 마련에 관해 알게 되었을 때, 마치 눈을 가린 베일이 벗겨지는 것 같았다.

성서의 소식에 관한 모든 것은 대단한 조화를 이룬 것으로서 “조각 그림”의 조각들이 완벽하게 들어맞았다. 내가 그렇게 높이 평가했던 인간의 지혜는 내게 하느님이란 우리의 생활에서 별로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여기도록 가르쳤다. 그러나 압도적인 증거로 볼 때, 하느님은 중요하지 않은 존재로 간주될 수 없음이 분명하였다. 성서를 통하여 “여호와[전능하신 하나님]를 경외하는 것이 지혜의 근본이요 거룩하신 자를 아는 것이 명철”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잠언 9:10.

참 지혜로부터 오는 축복

일단, 여호와가 참 하나님이고 성서가 그분의 말씀이라는 것을 확신하자, 사물에 대한 견해는 근본적으로 변화되었다. 나는 초기 그리스도인의 본을 따라서 수년에 걸쳐 수집했던 수백가지의 종교 형상과 부적뿐만 아니라 마술에 관한 교본을 모두 없애버렸다.—사도 19:18, 19.

하나님에 대한 두려움과 그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은 또 다른 유익한 영향을 주었다.—그것은 여호와를 인격체로서 사랑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분의 선하심과 인류에게 나타내신 사랑에 대해 인식하게 되자 그분에게 헌신하지 않을 수 없었으며, 1975년에 침례를 받았다. 여호와와의 개인적인 관계는 또한 내가 옳은 일로 알고 있는 것을 실행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 그리고 내가 알게 된 좋은 소식을 다른 사람들에게 열렬히 이야기했다.

인간의 지혜와 경건한 지혜의 차이점을 알도록 다른 사람들을 도울 때, 과거의 나의 경험은 크게 도움이 된다. 나는 참 지혜를 따르고 여호와를 지지하도록 여러 사람을 돕는 특권을 누렸다. 그 중에는 94세에 여호와의 증인으로서 침례받은 어머니가 있다.

참 지혜는 실로 인생을 바꾸어 놓았다. 나는 더 이상 고통의 원인과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찾아서 암중 모색하지 않는다. 이제는 당혹스럽게 하곤 했던 질문에 대한 답을 가지게 되었다. 비록 신체 장애자이지만 내 인생에는 목적이 있다. 영원히 살 희망과 열망을 가지고 있다. 현재 행복과 의미있는 생활을 가져다 주고 웅대한 미래를 제시하는 이 행로를 따르는 것이 참 지혜가 아니겠는가? 내가 그런 종류의 지혜를 깨닫게 된 것이 대단히 기쁘다!—파니아 차야쿨의 체험담.a

[각주]

a 본지 이번 호가 인쇄되기 바로 전에, 타이로부터 이러한 소식을 받았다. “파니아 차야쿨 형제는 한쪽 다리의 절단 수술을 받은 후, 감염으로 인해 최근에 사망하였다. 그는 수혈를 거부하며 최후까지 충실함을 나타냈다.”

[25면 삽화]

불교 신자들은 승려를 도우면 상을 받는다고 믿는다

[26면 삽화]

나는 다른 사람에게 나의 믿음을 알려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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