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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8부: 기원전 563년경 이후—해방을 약속한 깨달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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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 8부: 기원전 563년경 이후—해방을 약속한 깨달음
  • 깨어라!—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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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89
깨89 5/1 15-19면

과거로 비추어 본 종교의 장래

제 8부: 기원전 563년경 이후—해방을 약속한 깨달음

“종교 혹은 철학을 시험한다는 것은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사물의 수를 세는 일이다.”—19세기의 미국 시인, 랠프 월도 에머슨

그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전승에 의하면 그의 이름은 고타마 싯다르타였고, 왕자였으며, 예수께서 탄생하시기 약 600년 전에 인도 북부의 사키아 왕국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는 사키아무니(석가모니: 사키아족의 현인)라고 불렸으며, 의미가 불확실한 칭호인 타타가타(여래)라고도 불렸다. 십중 팔구 독자는 보다 잘 알려진 칭호인 붓다(부처)로만 그를 알고 있을 것이다.

고타마는 궁궐의 호화로운 환경에서 자랐지만, 29세 때에 갑자기 자기 주변의 불행한 일에 대해 자각하게 되었다. 오늘날 악과 고통이 존재하는 이유를 진지하게 궁금해 하는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그는 해답을 얻기를 원하였다. 그는 아내와 어린 아들을 뒤에 남기고, 사막으로 도피하여, 그곳에서 6년 동안 고행 생활을 하였다. 그는 가시덤불 위에 누워 지냈으며, 얼마 동안은 하루에 쌀 한톨만으로 연명하였다. 그러나 그런 일을 했어도 깨달음을 얻지 못하였다.

35세쯤 되었을 때, 고타마는 자신이 중도(中道)라고 부른 보다 온건한 행로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깨달음을 얻을 때까지 한 무화과나무 아래 계속 앉아 있기로 맹세하였다. 마침내, 그는 어느 날 밤에 환상들을 본 후, 자신의 구도(求道)가 상을 얻었다고 느꼈다. 그때 이래로 그는 “깨달음을 얻은 자”를 뜻하는 붓다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러나 고타마 한 사람에게만 붓다라는 칭호가 붙여진 것은 아니었다. 그러므로 영어에서는 언제나 관사를 사용해서, 한 붓다(a buddha)라고 하거나, 고타마의 경우, 고유한 칭호로 붓다(the Buddha)라고 한다.

해방의 길

힌두교 신들인 인드라와 브라마는 붓다에게 새로 발견한 진리를 다른 사람들에게 알려 주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붓다는 그 일을 시작하였다. 붓다는 모든 종교에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는 힌두교의 관용적 태도를 견지하고 있었지만, 힌두교의 카스트 제도 및 동물 희생을 강조하는 일에는 의견을 달리하였다. 그는 힌두교의 베다가 신에게서 기원한 경전이라는 주장을 배척하였다. 그리고 하느님이 존재할 가능성이 있음을 부인하지는 않았지만, 창조주로서의 하느님은 분명히 배격하였다. 그는 인과 법칙에 시작이 없다고 주장하였다. 그리고 힌두교에서 진일보하여, 자신의 첫 설법에서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고 한다. “수도자들이여, 이것이 중도니 중도에 관한 지식은 ·⁠·⁠· 통찰로 인도하고, 통찰은 지혜로 인도하며, 지혜는 평온으로, 지식으로, 완전한 깨달음으로, 니르바나(열반)로 이끄느니라.”

‘니르바나가 무엇인가?’라고 질문하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역사가 윌 듀랜트는 이렇게 말한다. “이 질문에 대해서는 어떤 답을 하더라도 틀렸다고 하기가 어렵다. 그 이유는 교주가 요점을 모호한 상태로 남겨 놓은 데다가, 추종자들이 그 단어에 세상의 온갖 의미를 다 부여하였기 때문이다.” 「종교 백과사전」도, “문화, 역사적 시기, 언어, 학파 그리고 심지어는 개인에 따라 변하기” 때문에, “불교인의 공통된 견해란 없다”라고 동의한다. 한 저술가는 니르바나를 “욕망이 전혀 없는 상태, 시간을 초월한 무한한 공허, ·⁠·⁠· 재생이 없는 죽음의 끝없는 평정”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람들은 니르바나의 산스크리트 어원이 “불어서 끄다”를 의미하는 점과 관련하여, 니르바나는 연료가 떨어질 때 꺼지는 불꽃과 같다고 말한다. 아뭏든, 니르바나는 해방을 약속한다.

붓다는 해방을 성취해야 할 필요성을 네 가지 진리 곧 사성제(四聖諦)로 요약하였다. 즉 인생은 괴로움과 고통이다(고제: 苦諦). 괴로움과 고통은 모두 존재에 대한 갈애(渴愛) 및 욕망에 탐닉하려는 갈애에서 비롯된다(집제: 集諦). 지혜의 행로는 이런 갈애를 억누르는 것이다(멸제: 滅諦). 팔정도(八正道)를 따름으로써 이런 일을 성취할 수 있다(도제: 道諦). 팔정도에는 정견(正見), 정사(正思), 정어(正語), 정업(正業), 정명(正命), 정정진(正精進), 정념(正念), 정정(正定)이 있다.

해외에서 승리하고 본국에서 패하다

불교는 처음부터 즉각적인 호응을 얻었다. 당시 차르바카라고 불린 일단의 유물론자들이 이미 길을 예비해 놓았다. 그들은 힌두교의 경전을 배척하고, 하느님을 믿는 사상을 비웃었으며, 일반 종교를 버렸다. 그들은 실질적인 영향력이 있었으며, 듀랜트가 “새로운 종교가 성장하지 않을 수 없을 정도의 진공 상태”라고 부른 상황을 일으키는 데 한몫을 하였다. 이런 진공 상태는 “구교의 지적인 쇠퇴”와 더불어, 당시의 두 가지 주요 개혁 운동, 곧 불교와 자이나교의 발흥에 기여하였다.

기원전 3세기 중엽, 아대륙 인도의 대부분을 차지했던 제국의 왕, 아소카는 불교를 대중화하는 데 크게 기여하였다. 그는 실론(스리랑카)과 가능한 다른 나라들에까지 포교사들을 파견함으로써 불교의 포교 측면을 강화하였다. 통용 기원 처음 몇 세기중에, 불교는 중국 전역에 퍼졌다. 그곳으로부터 한국을 경유하여 일본에 전해졌다. 기원 6세기 내지 7세기 무렵에는, 동 아시아와 동남 아시아 전역에서 불교를 발견할 수 있었다. 오늘날에는, 세계적으로 3억명이 넘는 불교인이 있다.

아소카 왕 시대 이전에도, 불교는 이미 진전되어 왔다. E. M. 레이먼은 “주전 4세기말 무렵에는, 아테네에 불교 포교사들이 있었다”라고 기술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가 설립된 후에, 그리스도교의 초기 선교인들은 가는 곳마다 불교 교리와 맞부딪쳤다고 레이먼은 부언한다. 사실상, 가톨릭 선교인들이 처음 일본에 갔을 때, 그들은 불교의 새로운 분파로 오해를 받았다. 어떻게 그런 오해가 있을 수 있었는가?

분명히 두 종교에는 많은 공통점이 있었다. 역사가 듀랜트에 의하면, “유물 경배, 성수 사용, 양초, 향, 묵주, 교직자 복장, 배례식에서의 사어(死語) 사용, 남녀 수도자, 수도자의 삭발과 독신 생활, 신앙 고백, 금식일, 성자 시성(諡聖), 연옥과 죽은 자를 위한 의식” 등과 같은 것이 있다. 듀랜트는 이런 것들이 “불교에서 먼저 나타난 것 같다”라고 부언한다. 사실상, 불교는 “두 종교에 공통된 온갖 의식과 형식을 개발하여 사용하는 면에서 로마 가톨릭보다 5세기가 앞섰”다고 한다.

이런 유사점들이 어떻게 발전했는가를 설명하면서, 저술가 레이먼은 공통의 기원이 있음을 암시한다. 레이먼은 이렇게 기술한다. “그리스도교 시대 무렵에 ·⁠·⁠· 이교의 영향력이 불교 숭배의 형태로 분명하게 나타났다. ·⁠·⁠· 그리스도교 교회 내에서 발전한 일부 숭배 의식 [역시] 필시 이교의 영향력에 의해 비롯되었을 것이다.”

불교는 세계적인 영향을 미쳤음에도 불구하고, 본국에서는 심한 패배를 당하였다. 오늘날, 인도 인구 중 불교인은 1퍼센트 미만이며, 힌두교인이 83퍼센트를 차지한다.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아마 불교가 너무도 관용적이었기 때문에, 단지 보다 전통이 깊은 힌두교에 다시 흡수되고 말았을 가능성이 있다. 혹은 불교 수도승들이 평신도를 돌보는 일을 게을리했을 가능성도 있다. 아뭏든, 하나의 주요 원인은 이슬람교가 인도에 침투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이슬람 통치권이 들어섰으며, 그 통치권 아래서 많은 사람이, 특히 인도 북부에서 많은 수가 이슬람교로 개종하였다. 사실상, 13세기 말엽에는, 인구의 사분의 일 가량이 이슬람교인이었다. 한편, 많은 불교인이 힌두교로 되돌아갔는데, 분명 힌두교가 이슬람교의 맹공세에 대처하는 데 더 좋다고 생각했기 때문일 것이다. 관용의 종교라는 이름에 합당하게도, 힌두교는 돌아오는 사람들을 다정한 포옹으로 환영하면서, 붓다는 하나의 신, 곧 비슈누의 화신이라고 선언함으로써 사람들이 편한 마음으로 복귀하게 하였다!

붓다의 여러 얼굴

E. M. 레이먼은 “붓다의 형상들을 처음 만든 것은 그리스인이었다”라고 기술한다. 불교인들은 그런 조상(彫像)들이 숭배를 위한 것이 아니라, 다만 위대한 스승에 대한 존경심을 나타내기 위해서 고안된, 정성을 위한 보조물이라고 주장한다. 때때로 서 있는 모습을 한 붓다도 있지만, 대부분은 흔히 발바닥을 위로 향하여 결가부좌를 하고 앉아 있는 모습이다. 양손을 합장하고 있는 것은 명상을 하는 모습이고, 턱을 향해서 오른손을 올리고 있는 것은 축복을 하는 모습이며, 오른손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을 맞대거나 가슴 앞에서 양손을 모으고 있는 것은 가르치고 있는 모습이다.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은 붓다가 니르바나에 이르는 순간을 묘사하는 것이다.

붓다의 자세에 다양한 차이가 있는 것처럼, 가르침 역시 다양하다. 붓다가 죽은 지 200년이 못되어서, 이미 불교의 열 여덟 가지 변형이 존재하게 되었다고 한다. 고타마가 “깨달음”을 얻은 때로부터 25세기가 지난 오늘날, 니르바나에 도달하는 방법에 대한 불교인의 해석은 여러 가지다.

네덜란드 레이덴 대학교의 에리크 취르허는 “불교 내에 기본적으로 세 가지 사조[가 있는데], 각기 나름대로의 교리 사상, 예배 의식, 경전 그리고 도상(圖像) 전통”이 있다고 설명한다. 이런 움직임들을 불교 용어로는 승(乘)이라고 한다. 승은 마치 나룻배와 같이, 사람을 태워서 생명의 강을 건너 마침내 해방의 강변에 도달하도록 해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다. 그런 다음에는 승을 버려도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불교인들은 여행 방법—승의 종류—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고 말할 것이다. 중요한 것은 단지 목적지에 도달하는 것이다.

이런 승들에는 테라바다 불교가 있다. 이것은 붓다가 전파한 것에 매우 가까운 상태로 남아 있는 것으로 보이며, 특히 버마, 스리랑카, 라오스, 타이, 캄푸치아(이전의 캄보디아)에서 세력이 강하다. 마하야나 불교는 특히 중국, 한국, 일본, 티베트, 몽고에서 세력이 강한데, 더욱 많은 사람에게 이르기 위해서 가르침을 적응시킨 것으로서, 보다 자유주의적이다. 그런 이유로 마하야나 불교는 테라바다 곧 소승(小乘)과 대조를 이루어서 대승(大乘)이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탄트라교 혹은 밀교(密教)라고 알려져 있는 바지라야나 곧 금강승(金剛乘)은 의식과 요가의 실천을 결합한 것으로서, 니르바나를 향해 사람이 진보하는 속도를 빠르게 한다고 여겨진다.

그런 세 가지 움직임은 여러 학파로 나누어져 있는데, 각 학파는 흔히 불경의 특정 부분을 특별히 강조하기 때문에, 특정한 기본 요소들을 해석하는 면에서 차이가 난다. 그리고 취르허에 의하면, 어디를 가더라도, “불교는 다양한 정도로 지방의 신앙과 의식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이런 학파들은 곧 상당수의 지방적 분파를 낳게 되었다. 수천 가지 혼잡한 분파와 세분된 파가 있는 그리스도교국과 마찬가지로, 붓다는 상징적으로 말해서, 여러 얼굴을 하고 있다.

불교와 정치

유대교 및 그리스도교라고 공언하는 종교와 같이, 불교는 종교 활동에만 머물지 않고, 정치 사상과 행동을 형성하는 일에도 한몫을 하였다. 저술가인 제럴드 셱터는 “불교와 정치 활동간의 최초의 병합은 아소카[왕] 통치 기간중에 있었다”라고 말한다. 불교의 정치적 행동주의는 우리 시대까지 계속된다. 1987년 후반에, 27명의 티베트 불교 수도승이 라사에서 반중국 시위에 참가한 혐의로 체포되었다. 그리고 1960년대에 불교가 베트남 전쟁에 관여한 일에 관해서, 셱터는 이렇게 결론 내린다. “평화의 길인 중도(中道)가 새로운 가두 시위 폭력으로 왜곡되었다. ·⁠·⁠· 아시아의 불교는 불타오르듯 극렬한 종교다.”

서구 세계의 비참한 정치, 경제, 사회, 도덕 상태에 불만을 느낀 일부 사람들은, 해답을 구하기 위해서 불교를 포함한 동양의 종교로 방향을 돌린다. 그러나 “불타오르듯 극렬한 종교”가 해결책을 제공할 수 있는가? “종교[를] ·⁠·⁠· 시험한다는 것은 그것이 설명할 수 있는 사물의 수를 세는 일이다”라는 에머슨의 기준을 적용한다면, 독자는 고타마의 깨달음을 어떻게 평가하겠는가? 아시아의 다른 몇몇 종교들은 ‘바른 길을 찾는’ 면에서 더 나은가? 답을 얻고자 한다면, 본지의 다음 호를 읽어 보기 바란다.

[18면 네모]

불교와 관련된 사람, 장소, 사물

애덤스 산, 거룩한 곳으로 간주되는 스리랑카의 산. 불교인들은 그곳 바위에 있는 흔적이 붓다의 발자국이라고 말하고, 이슬람교인들은 아담의 발자국이라고 말하며, 힌두교인들은 시바의 발자국이라고 말한다.

보리수, 고타마가 그 아래서 붓다가 된 무화과나무로서, “보리”란 “깨달음”을 뜻한다. 원 보리수의 나뭇가지 하나가 살아 남았다고 하며, 스리랑카의 아누라다푸라에서 경배를 받는다.

불교 수도승, 독특한 복장으로 식별되며, 불교의 한 가지 주된 부분이다. 이들은 진실하고, 사람과 짐승에게 동정적이고, 생계를 위해서 구걸을 하고, 오락을 삼가며, 동정을 지키며 살 것으로 기대된다.

달라이 라마, 티베트의 세속 및 종교 지도자로서, 불교인들에 의해 붓다의 화신으로 간주된다. 1959년에 국외로 추방당하였다. “대양”에 해당하는 몽고어 단어에서 유래한 “달라이”는 폭넓은 지식을 의미하며, “라마”는 (산스크리트어의 구루와 같이) 영적 교사를 가리키는 것이다. 뉴스 보도에 따르면, 1987년의 티베트 시위중에, 달라이 라마는 “시민 불복종은 축복하였지만 폭력은 단죄”하였다고 한다. 그런 일로 인해 달라이 라마가 머물고 있는 나라인 인도는, 정치적 성명을 발표한다면 그곳에 체류하는 것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점을 달라이 라마에게 주지시켰다고 한다.

치아 사원, 스리랑카, 칸디에 있는 불교 사원, 붓다의 치아를 신성한 유물로 보관하고 있는 곳으로 유명하다.

[19면 네모]

차와 불교인의 “기도”

유사점이 있기는 하지만, 불교인의 “기도”는 “명상”이라고 부르는 편이 보다 정확하다. 특히 자기 징계와 깊은 명상을 강조하는 한 형태는 선(禪) 불교다. 기원 12세기에 일본에 들어온 선 불교는 선종으로 알려진 중국 불교의 한 형태에 근거한 것으로서, 보디다르마(보리달마)라는 인도 수도승에게까지 소급한다. 보디다르마는 기원 6세기에 중국으로 건너가서, 중국의 도교(道教)로부터 많은 것을 차용하여 선종을 창시하였다. 한때 그는 명상 도중에 잠이 든 것에 화가 나서 자신의 눈꺼풀을 잘랐다고 한다. 눈꺼풀이 땅에 떨어져서 뿌리를 내리고 처음으로 차의 초본이 자라났다. 이런 전설은 선종 수도승들이 명상 도중에 깨어 있기 위해서 차를 마시는 전통의 근거로 사용된다.

[16, 17면 삽화]

타이, 방콕의 대리석 사원과 같은 불교 사원들은 매우 인상적이다

또한 이 사진에서 사원을 수호하는 불교의 악귀 상과 아래의 불상을 볼 수 있다. 이런 광경은 불교 나라들에서 흔하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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