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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인(神人)에 대한 정성—그 이유는?
  • 깨어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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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0
깨90 1/1 6-9면

신인(神人)에 대한 정성—그 이유는?

오늘날 많은 사람은 제 2차 세계 대전중과 그 이전에 천황에게 바쳐진 정성의 깊이를 이해하기가 어려울지 모른다. 다카하시 미쓰코는 이렇게 회상한다. “히로히토의 사진이 학교의 특별한 사당에 있었고, 학생들은 아침마다 멈추어 그 사당을 향해 숭배를 해야 하였다.”

사카모토 마사토는 이렇게 기억한다. “천황이 지나갈 때 우리는 고개를 푹 수그리지 않으면 안 되었다. 천황은 아주 외경감을 자아내는 존재라서 보통 인간이 똑바로 쳐다볼 수 없다고 믿게 되었다.” 사실, 어린이들은 천황의 얼굴을 쳐다보면 눈이 먼다는 말을 들었다.

일본의 군사, 정치 지도자들은 천황에 대한 정성을 주입하는 교육 체계를 사용하였다. 전쟁 기간을 포함하여 50년간 교사로 지낸 마쓰모토 가즈오는 이렇게 말한다. “나는 학생들에게 ‘기꺼이 죽으라’고 가르쳤다. 많은 청소년을 전장으로 보냈다. 이 비난받아 마땅한 일을 나의 과거에서 지울 수 없다.”

일본의 청소년은, 천황의 신민은 아오히토구사 즉 “자라는 인간 잡초”이며, 천황의 방패 역할을 하여 그를 보호해야 한다는 말을 들었다. 필리핀에서 몇 차례 자살 공격에 참가하였고 살아 남은 마시코 도시오는, “우리는 천황을 위해 죽는 것이 신민의 최고 영예라고 가르침을 받았다”라고 설명하였다.

많은 사람은 사실상 천황의 구원의 힘을 믿었으며, 그래서 두려움없이 마구 전투에 뛰어들었다. 예를 들어, 이시구로 슈니치는 국민이 “신국[神國]”으로 가르침을 받는 나라에 속한 군인이기 때문에 자기 몸에 총알을 맞아도 튀어나갈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전세가 일본에 불리하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이사무 소년은 어머니에게 불안감을 표현하였다. 신도를 믿는 그의 어머니는 “걱정 말거라” 하며, “가미카제a(신풍:神風)가 적들을 날려버릴테니 우리는 결코 지지 않을 것”이라는 널리 옹호된 견해를 되풀이하면서 그를 안심시켰다.

신이지만 통치자가 된 적은 거의 없음

일본에서 천황 숭배의 역사는 오래 되었으며, 천년이 훨씬 넘는 동안 국민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종교 전승은 좀처럼 소멸되지 않는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교국에서도 사람들은 ‘부모에게 좋은 종교면 나에게도 좋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누구나 이것을 믿는데, 그들이 다 잘못되었을 리는 없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여러 세기에 걸쳐 수억의 사람은 그들의 지도자가 신이라고 잘못 믿어 왔던 것이다! 일본 천황의 역사를 간략하게 고려해 보자.

여러 세기에 걸쳐 천황의 역할은 상당히 다양했다. 「일본 고단샤 백과사전」은 이렇게 설명한다. “천황에게는 신들을 달래거나 누군가를 대신하여 신의 은총을 구할 수 있는 마력이 있다고 생각되었다. 그러나 또한 그의 인격을 둘러싼 외경감 때문에 천황이 세속 정무에 신경을 쓴다는 것은 부당한 것으로 간주되었다. 정책을 수립하고 시행하는 일이 포함된 그러한 업무는 천황을 섬기는 각료들에게 속한 것이었다.”

그러므로 천황은 주로 사제 역할을 하였지 정치인 역할을 한 것이 아니다. 앞서 언급한 백과사전은 이렇게 기술한다. “일본 역사에서 천황이 진정한 의미로 두 가지 역할을 겸한 긴 기간이 있었다면 7세기 후반의 덴지 통치로부터 8세기말과 9세기초의 가무 통치에 이르는 기간뿐이었다.”

특별히 그때를 제외하면, 일본 천황들은 실제로 통치하지 않았다. 제 9세기 후 천황의 권력이 감소하였고 시간이 지나면서 “장군”을 뜻하는 쇼군이 정치상의 권위를 행사하게 되었다. 형식상으로는 천황이 쇼군을 임명하였지만 실제 통치자는 쇼군이었다. 그렇지만 쇼군 정부는 여러 세기 동안 일본을 다스린 후 1867년에 천황에게 권력을 양도하였다.

그해에 히로히토의 할아버지인 메이지 천황이 일본의 통치자가 되었다. 메이지 천황은 후에 천황을 “신성 불가침”의 존재로 규정한 헌법을 신민에게 하달하였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천황에게 정치적 권위는 부여되었지만 정치적 권력은 주어지지 않았다. 그는 즉위하기는 하였으나 실상 통치하지는 않았다.

헌법은, “국가의 각료들은 각기 천황에게 조언[그리고 지원]을 하고 그에 대한 책임을 질 것”이라고 명시하였다. 「고단샤 백과사전」에 의하면, “그로 인해 사실상 정치적 책임이 천황에게가 아니라 각료들에게 지워졌다.”

그러므로 사실상 정치 권력을 행사한 것은 정부의 각료들이었다. 하지만 천황은 일반 국민에게 국가에 대한 절대 권위를 가진 신으로서 등장하였다. 그래서 통치 계급은 전승에 따른 그리고 공적으로 조장된 천황의 신성을 이용하여 일반 국민을 마음대로 조종하였다. 일본이 현 20세기에 치른 전쟁은 천황의 이름으로 벌인 것이다. 그리고 국민은 전반적으로 천황을 기적의 힘을 소유한 신으로 믿었다.

하지만, 대다수에게 놀라운 일로서, 히로히토는 자신을 신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그는 제 2차 세계 대전 후 미군 사령부에 “내가 신이라고 생각한 적은 결코 없다”라고 말하였다. 히로히토는, “천황은 신이고 일본 국민은 다른 민족보다 우월하다는 그릇된 개념”을 부정한 후 아내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달라진 것이 있소? 이제 내가 더 인간답게 보이나요?”

물론 그 외의 일본인들 역시 신성의 허울을 간파하였고 실체를 분별하였다. 그들은 증거에 입각하여 추리하였다. 예를 들어, 천황 군대에서 4년간 복무한 야마나카 미노루는 이렇게 설명하였다. “여느 많은 사람보다 이르게 천황의 부친은 47세에 죽었고 조부는 59세에 죽었다. 그래서 나는 결코 천황을 신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책임 문제

히로히토의 병과 죽음으로 인해 민감한 질문 즉 ‘일본의 군사 침략에 대해 천황에게 어떤 책임이 있는가?’하는 질문이 재개되었다. 히로히토 개인으로서는 전쟁을 반대하였지만 각료들의 결정을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 대다수의 견해임이 분명하다. 따라서 히로히토는 1941년에 미국을 공격하기로 한 각료들의 계획과 관련하여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들의 결정을 무효화할 수 없었다. 결정을 따르는 것이 일본 헌법의 조항과 일치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한편, 히로히토는 항복 여부의 문제를 놓고 각료들이 옥신각신할 때, 솔선하여 항복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런 다음, 그 결정을 내린 지 며칠 후인 1945년 8월 15일에 그가 국영 라디오 방송으로 항복을 선언하였을 때, 신민은 처음으로 그의 목소리를 듣고 놀랐다. 그는 신민에게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라고 당부하였다.

몇달 후, 영국 정부는 이렇게 발표하였다. “일본인이 항복한 것은 원자 폭탄 때문이 아니라 천황이 항복하도록 분부하였기 때문이다. 천황의 분부가 없었다면 우리는 희생이 크게 따르는 침공을 하여야 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전후에 히로히토를 전범으로 회부하려는 외침이 있었을 때 일본을 점령한 연합군의 미국 사령관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은 그러한 외침을 단호히 배격하였다. 맥아더는 후에 이렇게 설명하였다. “천황을 기소하여 교수형을 시켰더라면 일본 전역에 군사 정부를 설립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며 아마 게릴라 전이 벌어졌을 것이다.”

맥아더는 1945년 9월 26일에 히로히토를 만났으며, 깊은 감명을 받았다. 히로히토 천황은 전쟁에 대한 책임을 회피하려 한 것이 아니라 “전쟁 수행에 있어서 내려졌고 [그의] 백성이 받아들인 모든 정치, 군사 결정에 대해 단독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 바로 자신이라고 하였던 것이다.

하지만 오늘날 어쩌면 일본의 대다수의 사람은 히로히토의 각료들이 조장했을 것임이 분명한 전쟁에 대해 히로히토에게 책임을 돌리지 않는다. 그러므로 한해 전, 천황의 임종이 가까웠을 때, 나가사키의 시장 모토시마 히토시가, “내 자신이 경험한 군사 교육으로 볼 때 전쟁에 대한 책임은 천황에게 있다고 생각한다”라고 감히 공개적으로 한 말이 엄청난 분노를 유발하였던 것이다.

모토시마는 자신이 전쟁중에 신병을 교육한 육군 장교로서 “천황을 위해 죽으라고 사람들에게 말하도록 강요받았”음을 지적하였다. 다른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모토시마는, 신민의 숭배를 받는 천황이 전쟁을 반대하는 목소리를 높였더라면 엄청난 위력을 발휘하였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임이 분명하다.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

“그러나 그것은 역사일 뿐”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을지 모른다. 그럴 수 있으나, 전승에 따른 신앙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일본 중부의 이세에 있는 유명한 신도 신사의 한 신도 사제는 최근에, “많은 사람이 천황과 우리 일본 민족의 조상신인 태양 여신을 숭배하기 위해 이곳에 온다”라고 말하였다.

천황 숭상의 정도는, 천황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있다고 말한 것 때문에 모토시마를 죽이려고 위협한 일로 예시된다. 한 사람은 휘발유 깡통을 들고 모토시마의 사무실에 침입하려다 붙잡혔고, 거의 백대의 확성 트럭이 나가사키의 거리를 메우고 “모토시마를 죽이라”고 방송해 댔다. 천황 숭상은 다른 면으로도 나타났다.

이를테면, 히로히토의 병세가 위독해지자 자숙의 엄청난 물결이 전국을 휘감았다. 축제와 파티가 취소되면서 경사에 부합하는 사업에 타격을 주었다. 학생들은 운동회를 취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심지어 야쿠자 즉 불량배들도 싸움과 총질을 중단하였다. 일본의 생활이 극적으로 영향을 받았으며 그로 인해 「데일리 요미우리」지는 “전국이 천황의 병에 다소 과잉 반응을 나타내 왔다”라고 기술하였다.

그러한 열광 때문에 불안해 한 사람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런 사람들은 그 열광에 공감하지는 않았을지라도 일반적으로 그것을 허용하고 묵인하였는데, 그렇게 하지 않을 경우 불리한 결과가 있을 것을 생각하고 그렇게 하였을 것이다. “이 점에 있어서 전통을 따르는 것이 가장 안전한 일”이라고 한 심리학자는 말하였다. 그러나 이전의 한 군인은 이렇게 개탄하였다. “사람들은 단지 두리번거리면서 다른 사람들이 하는 대로 따라 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우리를 전쟁에 시달리게 한 행태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처신할 것인지 그리고 특히 누구를 숭배할 것인지를 단순히 주위 사람들의 처신하고 숭배하는 바에 따라 결정해야 하는가? 종교상의 근거 없는 신앙으로 인해 무익한 전쟁에 목숨을 바친 수많은 사람을 생각해 보라! 군중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은 파멸을 초래할 수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한 역사적 사건을 숙고해 볼 때, 우리는 ‘알지 못하는 대상’을 숭배하는 것이 참으로 비참한 결과를 가져올 수 있음을 배워야 한다. (요한 4:22) 그러므로 우리가 실제로 아는 대상을 숭배하는지를 검토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이다!

[각주]

a 표적(군함)에 자살 공격을 감행한 일본 공군 병사들 역시 가미카제로 불렸다.

[8, 9면 삽화]

수많은 사람이 천황을 위해 죽었다

[자료 제공]

위: Official U.S. Navy photo.

[삽화]

히로히토는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에게 전쟁에 대한 책임이 자신에게 있음을 인정하였다

[자료 제공]

오른쪽: U.S. Arm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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