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神)”이라 불리운 인간들
「깨어라!」 일본 통신원기
대부분의 국가에서 통치자들은 공개되지 않을 수 없으며 그들의 개성 또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일본 천황의 경우는 상당히 다르다. 그에 관한 개인적인 정보는 널리 퍼지지 않으며 심지어 그의 개인적인 이름도 거의 사용되지 않는다. 그는 평범한 사람에게는 “폐하” 혹은 “황제”를 뜻하는 “덴 노” 혹은 “덴 노 헤이까”로 알려져 있다. 일본인들 대부분은 잠시 생각해야만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다.
그러나 천황은 매우 많은 존경과, 심지어는 경외까지 받고 있다. 정월 초의 연휴중에 궁전 뜰을 대중에게 공개하는 특정한 날에 천황과 그의 가족이 ‘발코니’의 방탄유리 뒤에 모습을 보이는 것을 한번 보려고 수천명이 모여든다는 사실은 그 점을 증명한다.
그러나 20세기에는 천황에 대한 사람들의 개념이 크게 변화하였다. 많은 일본인들이 천황의 혈통과 공식적인 개국 기념일인 기원전 660년 2월 11일을 의심하기까지 한다. 왜 그런 일이 있게 되었으며 진상은 어떠한가?
연구의 증가
사실들을 알아내기는 어렵다. ‘미찌꼬 Y. 아오끼’ 박사는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1945년까지 10년 동안 일본 문명의 시작에 대한 지각있는 연구는 있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그 문제를 연구하는 진지한 연구생들은 직접, 간접으로 박해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그런 연구에 관한 금지령이 해제되었으며 그 후로는 아무도 섬나라 특유의 편견에 종속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인들 사이에 오랫동안 간직되어 온 민족 특유의 정신 자세는 아직도 매우 강하여 일본 문명의 발생에 대한 객관적인 연구를 방해하고 있다”라고 그는 1974년에 기술하였다.
현재는 일본 역사가들이 일본의 정확한 역사를 모아보려고 애쓰고 있으므로 상당한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고고학자들은 열심히 옛 마을과 성들의 폐허를 발굴하고 있다. 또한 분별있는 무덤 발굴도 허락되어 있다. 그러나 기록물들에 관해서는 어떤가?
‘고지끼’(古事記)
사실상 정말로 오래된 기록물은 없다. 역사적으로 중요한 최초의 기록물은 ‘고지끼’라고 불린다. 이것은 8세기(통용 기원 712년)에 완성되었다고 믿어진다. 그것은 일본 천황 혈통이 시작되었다고 주장된 연대와 1,300년 이상의 간격이 있다. 기록되기 전에 수세기 동안 그 기록은 어떻게 보존되었는가? ‘가다리베’(語部)(직업적인 화자 혹은 암기자)를 사용하여 그 기록들을 그대로 간직하였다는 주장이 있다.
‘고지끼’에 관하여 한 문헌은 이렇게 말한다. 그것은 “연로한 여 시종의 기억으로부터 수집되어 주로 간단한 신화와 족보의 명부로 되어 있다” 또 다른 기록물은 ‘니혼 쇼끼’ 혹은 ‘니혼기’이다. 이것은 ‘고지끼’보다 약간 더 자세하며 그보다 약 8년 뒤에 완성되었다. ‘니혼 쇼끼’는 일본어가 아니라 중국어로 기록되었다.
이 두 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천황이 태양 여신 ‘아마데라스-오미까미’(天照大神)의 후손임을 증명하기 위해 고안된 것이 명백하다. 1939년 이전에는 ‘니혼 쇼끼’가 일본에서 역사 연구를 위한 교재로 사용되었다.
이런 기록들은 얼마나 명백한가? 한 예가 그 점을 어느 정도 알려 준다. 일본 최초의 천황은 그가 죽은 후에 ‘짐무’ 천황(神武天皇)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그의 개인적인 이름이 무엇이었는지는 전혀 확실치 않다. 다음 이름 가운데서 마음대로 고를 수 있다. ‘하쓰구니시라스 스메라미고또’ ‘가미-야마또 이하레 비꼬 호호데미’, ‘간야마또 이와레 히꼬 노 미꼬또’, 혹은 왕자 ‘이하레!’
의심을 나타냄
일본 학자들은 이러한 기록들이 천황 혈통의 정확한 시작 연대를 알려 준다고 믿고 있는가? 사실 그렇지 않다. 「빛과 어둠의 오십년—‘히로히또’ 시대」라는 책에 나오는 이러한 진술에 유의하라. 현 천황은 1926년에 아버지인 천황 ‘다이쇼’(大正)가 죽자 즉위하면서 이러한 말을 하였다. “‘히로히또’(昭和)는 이제 거의 2,600년 된 나라의 ‘천황신(天皇神)’으로서 하늘에서 내려온 ‘짐무’(神武)라는 조상의 124대 후손이다. 개국의 정확한 연대뿐만 아니라 초기의 천황 혈통에 대해 학자들이 극도로 의심스러워하지만, ‘사랑하는 백성들’은 단 한 사람도 일본의 새로운 통치자의 ‘확증된’ 신성(神性)을 의심하지 않으리라 생각한다.”
1966년에 정부는 공식적으로 전통적인 개국일인 2월 11일을 공휴일로 선포하였다. 그러나 이로 말미암아 사람들은 혼란된 반응을 나타내게 되었다. 보다 최근의 한 사설은 이렇게 주장하였다. “그 날은 역사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개국일로 확증되지 않았다.”
이 사설은 계속하여 이렇게 질문을 제기하였다. “개국 기념일을 정부가 지지하는 것은 한 때 군 지도자들이 전쟁 이전과 전쟁중에 그들의 목적을 달성코자 이용할 대로 이용했던 전설인 ‘기겐셋스’(紀元節) 즉 ‘짐무’ 천황의 즉위 기념일의 환원을 의미한다는 우리의 생각은 터무니없는 것인가?”
이 사설이 지적하듯이 개국일이 공휴일로 선포된 이래 상당한 논란이 있었다. 그것에 찬성하는 사람들과 반대하는 사람들이 여러 곳에 모여서 휴대용 확성기를 통해 그들의 견해를 표명하였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날의 의미에 무관심하다. 그들은 하루를 더 쉴 수 있게 된 것을 기뻐할 뿐이다.
변화하는 태도
지난 40년 동안 변화가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 「일본 사진 연감」 1941년판은 제국의 2,600주년을 기념하는 특별호였다. 그 서문은 이런 말로 시작되었다. “천황 폐하의 일억명의 국민이 제국 건립 2,600주년을 함께 축하하였다. 그들은 세계 역사상 유례없는 천황 가문의 끊임없는 통치에 대해 축사를 하고 주권자에 대한 열렬한 충성심을 새로이 맹세하였다.”
그 당시에는 아무도 개국 기념일이나 황제와 관련된 기타 어느 것에 대하여도 의문을 나타내지 못했다. 천황은 신으로 여겨졌으며, 그에게 흔들리지 않는 충성심이 바쳐졌다. 전국민은 ‘덴노 헤이까’(천황 폐하)를 위하여 죽는 것을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어떻게 그러한 열의가 생겼는가?
그것은 현 천황의 조부인 ‘메이지’(明治) 천황의 승인으로 1889년에 선포된 헌법으로 인한 자연적인 결과였다. ‘메이지’ 천황은 현대의 일본을 세운 사람으로 여겨진다. 그는 신임하는 부관들의 도움을 받아 특히, 황제는 반드시 경외받아야 한다고 명확히 규정하는, ‘프러시아’식 정부 형태에 기반을 둔 헌법을 제창하였다. 그의 지위는 “신성하고 불가해한” 것이라고 일컬어졌다. 그의 말은 최종적인 것이므로 모든 백성은 무조건 그에게 복종해야 했다.
모든 불교 요소를 제거한 ‘신또’(神道)를 국교로 정함으로써 이것은 더욱 강화되었다. 바로 이 종교를 통하여 사람들은 천황에게 전심을 다하여 충성하도록 교육받았다.
인간에 불과함
그러나 제 2차 세계 대전이 일본의 패배로 끝나자 이 모든 것은 변하였다. 그 장구한 모든 역사를 통해 일본이 패배를 기록한 것은 그것이 처음이었다. 일본인들은 당황하여 어째서 천황이 그런 일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는지 의아해 했다.
승전국들은 천황은 신이 아니며 그전 가르침은 그릇된 것이라는 사실을 천황으로 하여금 선언하게 하는 것이 그를 전범자로 공판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라고 판정하였다.
전쟁이 끝날 때 찍은 사진은 전쟁에서 승리하도록 돕지 못한 것에 대해 양심의 가책을 느껴, 어떤 사람들은 울면서, 천황의 궁전 앞에 엎드려 있는 사람들을 보여 준다. 그러나 1946년 1월 1일에 사람들의 얼굴을 찍은 사진들도 그만큼이나 인상적이다. 그 날 천황은 자신이 신들의 후손이라는 믿음은 잘못된 것이라는 사실을 백성들에게 발표하였다. 그는 그들처럼 인간이었고 멸성이었다.
이것은 국가적인 충격이 되었다. 많은 사람들은 격분하였으며 어떤 이들은 자살을 하기도 했다. 오늘날까지도 그 발표를 믿으려 하지 않으면서 계속해서 그를 신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당신이 지금 30대 혹은 그 아래인 사람에게 묻는다면, 그는 결코 천황을 인간 이상의 어떤 존재로 생각한 일이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진리를 찾아
그렇다, 2,600년이라고 주장해 온 기간에 걸쳐 일본의 천황들은 신이라 불리었다. 그러나 20세기의 우리 시대에 한 때 많은 사람들이 신이라고 여겼던 한 사람은 자기가 신이 아니라는 사실을 현실적으로 인정하였다.
그 때에 많은 사람들이 느꼈던 충격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일본에 있어서 유익한 결과를 가져왔다. 이제 공식적인 신화로부터 해방된 일본 학자들은 그들의 역사를 연구하고 일본이 한 국가로서 존재해 온 오랜 세월 동안에 실제로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게 되었다.
아마 그보다 더욱 중요한 점은 신은 결코 인간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은 많은 일본인들이 참다운 신을 찾도록 길을 열어 주었다는 것이다. 적어도 일본의 93,000 가정에서 개인과 가족들이 그분에 관해 배우기 위해서 성서를 함께 연구하고 있다. 다행히도 많은 경우에 그들의 연구는 성공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일본인 중 66,000명 이상은 단지 일본뿐 아니라 전 우주의 창조주이시며 주권자이신 여호와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그분을 섬김으로써 인간 ‘신’을 섬길 때 받을 수 있었던 것보다 훨씬 큰 축복을 받고 있다.
[14면 삽화]
‘짐무’ 천황의 동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