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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0
깨90 7/1 3-5면

새로운 이교

「깰 때이다」 프랑스 통신원 기

천구백팔십팔년 6월 30일은 로마 가톨릭 교회 역사에서 획기적인 날이 될 것이다. 그날 프랑스 대주교 마르셀 르페브르가 로마 교황청을 정면으로 반대하고 나선 것이다. 그는 자신이 스위스에 세운 전통주의 가톨릭 신학교에서 네 명을 주교로 축성하였다.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르페브르와 네 명의 새로운 주교가 파문되었다. 이렇게 해서 1870년 이래 가톨릭 교회에 최초의 분열이 생긴 것이다. 1870년에는 이른바 구 가톨릭교인들이 교황의 무류성 문제를 놓고 모교회에서 떨어져 나가는 일이 있었다.

분열의 근원

로마 교황청과 르페브르 대주교의 우파 보수주의 가톨릭 운동 사이의 의견 대립은 꽤 오랫동안 심화되어 왔다. 분열의 근원은 1962년에서 1965년 사이에 열린 제2차 바티칸 공의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공의회를 소집한 교황 요한 23세는 모임의 목적을 두 가지로 정하였다. 하나는 아조르나멘토(쇄신)이고 또 하나는 소위 그리스도교 교회 모두를 재결합하자는 것이었다.

가톨릭 고위 교직자 르페브르 대주교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참가하였지만 그 두 가지 목적 중 어느 쪽에도 찬동하지 않았다. 르페브르는 철저한 전통주의자로서 가톨릭 교회는 쇄신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는 주관을 가지고 있다. 그는 “교회 밖에서는 구원이 없다”는 가톨릭의 전통적 견해에 온 마음을 다해 동의하기 때문에 “그리스도교인”이 재결합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비가톨릭교인 모두가 로마 가톨릭 신앙을 따르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종교의 자유를 반대

르페브르 대주교는 파문된 지 1년 후에 자신의 운동을 지지하는 보수주의 가톨릭교인들을 대표하여 말하면서 “우리는 단정코 종교의 자유 사상과 그 결과, 특히 내 자신이 용납할 수 없음을 알게 된 교회 일치 운동에 반대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는 혁신을 하자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가톨릭 전통을 충실히 따랐다. 1832년 8월 15일, 교황 그레고리우스 16세는 미라리 보스 회칙을 발표하였으며, 이 회칙에서 양심의 자유를 “잘못된 견해, 아니 더 정확하게는 미친 것”으로 정죄하였다. 32년 후 교황 비오 9세는 유론표(謬論表: Syllabus of Errors)를 발표하였으며, 여기서 “모든 사람에게는 이성적 판단으로 자신이 참이라고 믿는 종교를 받아들이고 그 믿음을 공표할 자유가 있다”는 사상을 정죄하였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교회 일치 운동을 배척함으로써, “교회의 단일성” 즉 “유일하고 거룩한 가톨릭 사도” 교회가 있을 뿐이라는 가톨릭 교의에 대한 애착을 나타낸 것에 불과하다.

“프로테스탄트식” 미사에 격분함

르페브르 대주교와 그의 추종자들이 특히 못마땅해 하는 문제는 제2차 바티칸 공의회로 인해 가톨릭의 전통 전례가 개혁된 점이다. 반역한 고위 교직자 르페브르는 그러한 개혁으로 인해 미사가 “프로테스탄트화”하였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라틴어 대신 현대어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삼는 정도가 아닌데, 르페브르는,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의 마음을 끌려고 너무 많은 사항이 변경되었으며, 교황 바오로 6세가 승인한 전례는 라틴어로 집전될지라도 “이단적”이라고 생각한다.

르페브르 대주교는 라틴어로 전통적 미사가 지속되게 하려고 1970년에 스위스 에콘에 신학교를 세웠다. 이 신학교는 르페브르가 같은 해에 창설한 성 비오 10세 사제 형제회에 의해 운영되었다. 르페브르는 자신의 운동이 세력을 얻게 되자 유럽과 남북 아메리카에 보수주의 가톨릭 신학교를 더 설립하였다. 이런 곳에서 수백 명의 젊은이가 사제직을 위해 극단적 보수주의 훈련을 받는다.

반역한 고위 교직자 르페브르는 200명이 훨씬 넘는 신학생을 전통주의 사제로 서품하였으며, 1976년에 교황 바오로 6세가 금지하였는데도 그렇게 하였다. 이 사제들은 소수도원에서 라틴어로 미사를 집전하며 불법적으로 가톨릭 교회를 점유한다.a 로마 교황청은 세계 전역에 르페브르를 추종하는 전통주의 투사들이 약 십만 명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그 외의 교회 관리들은 그 수가 오십만 명에 달할 것으로 본다. 르페브르 자신의 주장에 따르면 수백만 명의 가톨릭교인이 그의 견해에 동조한다.

계승자가 필요함

가톨릭 교회의 경우, 주교는 사제를 임명할 수 있다. 하지만 교황만이 주교 서품을 승인할 수 있다. 새 사제들을 임명할 주교가 필요하기 때문에 연로한 르페브르는 자신이 죽은 후에 사제 형제회마저 폐쇄될 위험이 있음을 절감하였다. 이런 일이 있을 것을 기대한 듯이 보이는 로마 교황청은 르페브르와 협상을 벌여 질질 끌다가 마침내 최종 제안을 하였다. 로마 교황청이 승인한 주교 서품을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그가 직접 주교를 임명하는 일로 인해 파문당하든지 하라는 것이었다.

1988년 6월 30일, 반역한 고위 교직자 르페브르는 수천 명의 추종자가 참석한 의식에서 네 명의 전통주의자를 주교로 축성하였다. 파리의 일간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은 이렇게 보도하였다. “르페브르 대주교가 네 명을 주교로 축성한 일은, 교황이 24명의 주교를 승진시켜 추기경단에 등용한 로마 교황청 추기경 회의에 어두운 그림자를 던졌다. 로마 교황청은 르페브르 대주교의 행동으로 인한 ‘쓰라린 아픔’을 나타내려고 특별 연주회를 취소하였다. ‘그날은 애도의 날’이라고 [프랑스] 추기경 드쿠르트레는 말하였다.”

가톨릭 교회 내의 이러한 분열은 로마 교황청에 아픔을 초래하였을 뿐 아니라 세계 전역의 수많은 진실한 가톨릭교인을 당혹케 하고 혼란케 하였다.

[각주]

a 본지 1988년 1월 1일호에 발행된 “반역자 대주교” 기사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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