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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간질을 견디며 사는 법을 배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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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리는 간질을 견디며 사는 법을 배웠다
  • 깨어라!—19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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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90 7/1 12-15면

우리는 간질을 견디며 사는 법을 배웠다

나는 목쉰 비명 소리에 잠을 깼다.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보니, 아내, 샌드라가 지른 소리였다. 아내는 침대에서 마구 경련을 일으켰고, 눈은 뒤집힌 데다가 숨이 멎은 상태였다. 입술은 시퍼렇게 변했고, 입에서는 피거품이 나왔다. 아내가 죽을 것 같았다. 이렇게 하면 정신을 차리겠거니 생각하고 아내의 얼굴을 찰싹 때렸다. 경련이 계속되어서 급히 전화로 의사를 불렀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내가 설명할 것이다.

그날 아침 깨어났을 때, 나지막한 목소리들이 들렸고, 나는 다른 침대에 누워 있었다. 소리를 들으면서 그저 눈을 감고 있었다. 남편의 목소리에다 어머니 그리고 의사의 목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눈을 뜨고서 그들이 근심하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일어나 앉으려고 하자 격심한 두통이 일어났기에, 그들의 염려가 나에 관한 것임을 알았다. 이렇게 해서 우리 가족은 간질 곧 오늘날에는 이른바 발작병이라고 하는 것을 접하게 되었다. 그때는 1969년이었고, 남편 데이비드와 나는 겨우 23세였다.

우리의 인생 목표가 변경되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양육되었으며 다섯 살 때 부모와 함께 공개 전파 활동에 참여하기 시작했다. 나의 성서 연구생 한 명이 침례받는 것을 지켜보면서, 선교인이 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방학중에는 전 시간 봉사라는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곤 했다. 1964년에 고등 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즉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데이비드의 참으로 훌륭한 성서 강연을 들었을 때, 그리고 그 역시 여호와께 대한 특별한 봉사를 천직으로 원한다는 것을 알았을 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 짐작이 갈 것이다. 우리는 결혼했으며, 여호와의 길을 배우도록 다른 사람을 돕는 데서 함께 매우 훌륭한 성공을 거두어 왔다.

1970년 4월에 선교인이 되도록 워치타워 길르앗 성서 학교에 초대를 받았을 때에 우리가 느낀 흥분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신청서를 작성했다. 나는 신청서에 별지를 첨부하여, 비록 걱정할 정도는 아니지만 지난해에 두 차례 발작한 적이 있다고 언급했다. 우리는 곧, 내가 발작 없이 3년을 보낸 후에야, 우리를 외국에 파견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임을 알리는 친절한 편지를 받았다. 며칠 안 가서, 나는 세 번째 발작을 겪었다.

길르앗에 갈 수 없었으므로 우리는 뉴욕(미국)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세계 본부에서 일하기를 희망했다. 그 해 늦여름에 당시 워치 타워 협회 회장 네이선 노어가 사회한 한 모임에서 우리는 신청을 했다. 그는 우리와 면담하면서, 벧엘의 일이 내게 왜 어려울 것인지를 친절하게 설명했다. 그는 내가 3년 간 발작이 없어야만 비로소 벧엘 봉사에 받아들여질 수 있음을 설명했다. 그렇지만 그는 우리의 신청서를 집어서 호주머니에 넣었다. 6주가 지나서 우리는 펜실베이니아 주(미국)에서 특별 파이오니아로 봉사하라는 임명을 받았다.

고통스러운 간질에 대처함

처음에는 몇 달 건너 발작이 있었으나, 그 무렵에는 더욱 자주 있게 되었다. 나는 대발작을 일으키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기에 단지 느끼는 대로 알 따름이다. 먼저 이상 감각, 곧 햇빛이 어른거리는 나무숲 사이를 질주할 때 느끼는 감각에 비교될 수 있는, 쏜살같이 움직이는 듯하면서 몽롱한 감각 상태에 빠진다. 이렇게 잠시 계속되다가 곧 의식을 잃는다.

깨어날 때 두통이 따른다. 생각할 수는 있지만 그 생각을 말로 표현할 수는 없다—말이 온통 얼버무려진다. 다른 사람의 말 또한 알아들을 수 없다. 이러한 영향은 몇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없어진다. 하지만, 생소한 장소에서 깨어나 내가 또 경련을 일으켰다는 말을 듣는 것은 낙담케 하는 데다 때로는 낭패감을 갖게 하며, 그것이 그리스도인 대회에서였다면 특히 그러하다.

만일 발작중에 경험 없는 사람이 돌보거나 나 혼자 있게 된다면, 입의 옆 부분을 깨물고 종종 혀를 깨물기도 한다. 그렇게 되면 입이 낫는 데 여러 날이 걸린다. 남편은 나를 돌보는 데 능숙하게 되었으므로, 함께 있을 경우 훨씬 더 좋다. 남편은 나의 입을 보호하기 위해 입 안에 무엇인가를 넣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는 여러 날 동안 아프게 되거나, 한층 더 나쁜 것으로 숨이 막힐 수도 있다.

입을 안전하게 보호할 것이 필요하다. 남편은 일찍부터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는 진리」와 같은 작은 책들이 안성맞춤의 크기이며 항상 손쉽게 이용할 수 있음을 알아냈다. 우리에게는 귀퉁이에 이빨 자국이 난 작은 책들이 꽤 많다.

원인은 무엇인가?

발작은 여러 가지 건강 문제로 인한 증상일 수 있다. 염려해 주는 벗들이 경련에 관한 기사들 및 비뚤어진 척추, 비타민이나 무기질의 불균형, 호르몬 불균형이나 저혈당증, 심지어 기생충에 의해서 어떻게 발작이 일어날 수 있는가에 관한 기사들을 오려 주곤 했다. 나는 제안된 모든 치료법을 충실히 따라 해보았다. 여러 부류의 의사에게 진찰을 받았고 많은 검사를 받았다. 나는 유달리 건강한데도 발작이 계속된다는 것을 알게 될 뿐이었다.

내가 또 발작할 때면 가족과 벗들은 종종 “몸관리를 더 잘해야지”하고 말하곤 했다. 이런 말 때문에 감정이 상하기도 했다. 그 말은 마치 내가 무엇인가 발작을 일으키는 일을 하고 있는 것처럼 여기게 했다. 하지만, 나는 건강을 돌보기 위해 최선을 다하였다. 돌이켜보면, 그들의 반응이 자연스런 것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그들은 우리처럼, 간질에 적응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사도 바울처럼 나는 ‘육체의 가시’를 대처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다.—고린도 후 12:7-10.

우리의 첫아기가 1971년에 태어난 후에 나는 파이오니아 대열에서 물러났고, 우리는 신경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기로 하였다. 검사는 판에 박힌 것이었다. 먼저, 뇌종양이 있는지 판명하기 위하여 뇌 정밀 검사를 받았다. 뇌종양은 없었다. 그 다음 뇌파계로 뇌파를 측정했다. 내가 보기에, 검사에는 우스꽝스러운 면이 있었다.

밤이 되기 전에 많이 자지 말라는 말과 함께 자극성 음료는 조금도 마시지 말라는 말을 들었다. 그 다음날 싸늘한 병실의 매우 납작하고 불편한 침대에 누워 있는 동안, 전극을 얼굴, 정수리 그리고 귓불에까지 붙였다. 그런 다음 기술자가 방을 나가며 불을 껐고, 잠을 자라고 말했다! 심지어 조금만 꿈틀거려도, 스피커를 통해 “가만히 누워 계세요”라는 그의 말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런 상황에서도 나는 실제로 잠을 잤다! 남편은 내가 어디서나, 어느 때나 잠을 잘 수 있다고 말하면서 항상 놀렸다.

진찰 결과가 나왔다. 아주 작은 뇌 손상이 전측두엽에서 발견되었다. 그러한 손상이 있게 된 것은 십중팔구 난산 때문이거나, 생후 첫 몇 개월중에 매우 높은 열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부모에게 질문이 제기되었으며, 그것은 부모에게 무척 고통스러운 것이었다. 부모는 이 두 가지 원인 다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내가 앓는 종류의 간질은 유전되지 않는다는 것을 우리는 알게 되었다.

발작을 억제하기 위한 투쟁

이제 나에게 섬뜩한 형태의 치료법인 약물 치료의 여러 해가 시작되었다. 처음 복용한 약에 부작용이 일어났고, 두 번째 것은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세 번째 약인 미솔린으로 발작을 억제하는 데 제한된 성공을 거두었다. 그것이 순한 진정제이지만, 하루에 다섯 알을 필요로 했다. 다른 사람들은 그 약이 내게 미친 효과를 알아차렸지만, 이내 그 약에 내성이 생기게 되었다. 나는 간질 환자라는 표시이자 약의 이름을 알려 주는 팔찌를 찼다.

다시 운전 면허증을 취득할 만큼 오래도록 발작이 없었다. 그 무렵은 시골 지역에서 살았기 때문에 운전할 수 있는 특전은 내게 매우 귀중한 것이었으며, 나는 다시금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하고 싶었다. 그러나 1973년 가을, 막 파이오니아를 하려고 한 바로 그때, 또 임신하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지 않았지만, 그 대신에 우리는 가족들을 필요로 하는 애팔래치아 오하이오에 있는 작은 회중으로 이사하기로 하였다. 그 당시 여호와의 증인이 전혀 없던, 4000명의 주민이 있는 작은 읍에 정주했다.

그곳에 이사한 직후, 다른 신경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았다. 비록 경련을 일으키거나 의식을 잃는 일은 없었지만, 곧잘 혼란된 상태에 빠지게 하는 부분적인 발작이 여전히 있었다. 의사는 내가 복용하고 있던 약에다 페노바르비탈이라는 또 다른 약을 첨가했다. 나는 도합 하루에 아홉 알을 복용하였다.

다음 두 해 동안은 말하기도 매우 고통스러운 때였으며 그 약들이 내게 끼친 끔찍한 상태로 인해, 상황을 적절히 묘사할 자신이 별로 없다. 단지 빌립보서 4:7(신세)이 내가 가장 좋아하는 성구가 되었음을 말하고 싶다. 그 성구는 이렇다. “모든 생각보다 뛰어난 하나님의 평화가 ·⁠·⁠· 여러분의 정신적 힘을 지켜줄 것입니다.”

그 약들로 인해 말과 행동이 느려졌고 기억력도 지장을 받았다. 또한 성품도 변해서 많은 시간을 우울해 하고, 화를 내게 되었다. 남편은 공격을 당한다고 느꼈으며, 나답지 않은 행동에 같은 식으로 반응을 나타내지 않기 위하여 기도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에 더하여 우리에게는 보살펴야 할 학령 전의 두 딸이 있었다. 지방 회중의 그리스도인 장로들은 우리가 가장 약할 즈음에 계속 격려를 베풀어 주었다.

1978년 봄에, 남편의 더 나은 판단을 무시하고 약물 치료를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내게는 구제책이 절실히 필요했다. 조심스럽게, 2주마다 반 알을 줄여 나갔다. 그것은 마치 잠에서 깨어나는 것 같았다. 기분이 한결 좋아졌다. 하늘은 더 푸르게 보였다.

계속 발작이 없길래, 1978년 9월 1일에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했다. 남편은 나를 무척 자랑스럽게 여겼으며, 나는 기운이 솟았다. 그런데 진정제는 체내에 누적되기 때문에, 얼마의 시간이 지나서야 체내에서 약 성분이 배출된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한 지 불과 6주 후인 10월 둘째 주에 이전보다 더 심하게 경련이 재발됐다. 그것도 단지 3일 간격으로! 다섯 번째 발작 후에 우리는 새로운 신경과 전문의의 진찰을 받았다.

“약을 먹느니 차라리 죽는 게 낫겠어요”하고 의사에게 말했다.

“약을 먹지 않으면 죽게 됩니다. 그러면 딸들은 어떻게 되지요?”하고 의사가 말했다.

간질을 견디며 사는 법을 배움

그 주에 새로운 약, 테그레톨을 복용하기 시작했다. 발작을 억제하기 위해 하루에 250밀리그램 알약 다섯 알을 필요로 했다. 하지만, 이 약은 내가 복용해 온 약들과는 달랐다. 이것은 체내에 누적되지도, 정신을 변화시키는 영향도 없었다.

그렇지만 다시 잠시 동안 운전할 수 없었다. 그리고 나를 주중 전파하는 일에 데리고 갈 수 있는 누구와도 동떨어진 곳에 살았다. 나는 좌절감을 가졌다. 남편은 이러한 말로써 나를 격려했다. “파이오니아 봉사를 중단하는 것을 봄까지 기다리는 것이 어떻겠소? 지금은 어떤 급격한 변화도 하지 맙시다.”

내가 여호와를 시험한다면, 그분이 나의 노력을 축복하실 것인지 알아보기로 작정했다. 예레미야 애가 3:24-30이 내게 소중하게 되었다. 나는 짐을 내게 ‘메우도록’ 하였고 “기다리는 태도를 보이”기로 하였다. (신세) 또한, 약물 치료를 다르게 곧 친구로서 보기 시작했다.

그 무렵 캐라는 학교에 다녔고 에스터는 네 살이었다. 따라서 에스터는 나의 파이오니아 짝이 되었다. 우리는 추위를 참으며 수북이 쌓인 눈길을 터벅터벅 걷고 또 걸었다. 봄이 될 무렵에는 이미 읍 전체가 우리가 누구인지 알았다.

한편, 나는 약을 주의 깊이 복용했다. 만일 알약을 너무 연이어 먹으면, 심한 환각 상태에 빠질 것이다. 반면에, 두세 알이라도 빠뜨린다면, 대발작을 일으킬 것이다. 첫해 동안에, 그 약이 심한 부작용을 일으키지 않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매 3주 내지 6주마다 혈액 검사를 받았다.

간질 환자는 자신의 일상 활동—식사, 취침 등등—을 좋은 시간표에 따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며, 나는 세심하게 그렇게 했다. 바로 그 해 겨울 내내, 파이오니아 시간을 완수했다. 얼마 후에는 발작이 억제되었으므로 다시 운전할 수 있었고, 지금까지 파이오니아 봉사를 계속 해올 수 있었다.

캐라는 고등 학교를 졸업했으며 역시 지금 파이오니아 봉사를 하고 있다. 에스터는 나와 동반했던 그 해 겨울 이후 줄곧 파이오니아 영을 가지고 있다. 한번은 지역 대회에서, 파이오니아들은 일어서라고 요청받았다. 주위를 둘러보니 네 살 된 에스터가 의자 위에 서 있었다. 에스터는 자신 역시 파이오니아인 줄로 안 것이다!

나는 남편 및 성서 연구를 함께 해온 다른 많은 사람과 더불어 지금까지 여호와를 섬기는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게 여긴다. 남편 역시 파이오니아 봉사를 시작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나의 기도가 응답되었다. 남편은 순회 대회 감독자로서뿐 아니라 대리 여행하는 감독자로서 봉사한다. 우리는 곧 있게 될 하나님의 의로운 신세계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세계적인 규모로 간질 환자를 포함하여, 병고에 시달리는 사람들을 모두 고치실 것임을 확신한다. (마태 4:24)—샌드라 화이트의 체험기.

[15면 삽화]

남편 및 딸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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