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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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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 깨어라!—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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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1
깨91 1/15 3-6면

‘드디어 장벽이 무너져 내렸다’

“그렇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습니까?” “내 생전에 그것을 보게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무엇으로 인해 그런 말들을 한 것인가? 1989년 11월에 악명 높은 베를린 장벽과 그것이 의미하는 모든 것이 붕괴되기 시작한 것에 관한 말이다.a 동베를린 사람들이 서베를린으로 쇄도해 들어갔다. 일부 사람들은 자본주의의 즐길 만한 화려한 것들을 맛보려고, 또 다른 사람들은 가족과 재회하려고 들어갔다.

장벽에 생긴 그러한 틈은 수문을 열어 놓았다. 많은 사람은 동유럽이 두번 다시 이전 상태로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냉전은 끝났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보다 훨씬 중요한 일은 동서를 갈라놓은 이념 장벽이 붕괴된 것이다. 사실상 냉전이 갑자기 사라졌다. 퇴역한 미 육군 대령 데이비드 해쿼스가 「뉴스위크」지에서 이렇게 기술한 바와 같다. “냉전은 끝났다. 멸공 강경론자들도 이제는 그것이 끝났음을 인정한다.”

독일 신문 「슈투트가르트 차이퉁」에 따르면 심지어 NATO(북대서양 조약 기구)도 1990년 7월, 런던에서 열린 한 모임에서 냉전이 끝났음을 인정하였다. 「저먼 트리뷴」지는 “대서양 동맹이 냉전 시대의 종언을 고하다”라는 제하에 그 슈투트가르트 신문의 이러한 글을 인용한다. “[소련 진영국들과의] 41년에 걸친 대립 후 나토의 16개 국 지도자들은 새로운 전략의 길을 열었고 냉전 시대에 작별을 고하였다. ·⁠·⁠· 적의는 동반 관계로 대치될 수밖에 없었다. 안전과 안정은 ·⁠·⁠· 더는 주로 군사적 수단에 의해서가 아니라 균형, 대화, 전 유럽의 협력이라는 정책에 의해 보장받게 되었다.” 평화를 위협하는 분쟁의 무대는 이제 유럽에서 중동으로 옮겨졌다.

민주주의에 따르는 대가

국민에게 이른바 자유 선택권을 부여하는 민주주의는 최신 유행의 정치 형태다. 그리고 거의 누구나 그 유행을 따른다. 그러나 치러야 할 대가가 있다. 동서간의 따사로운 관계와 자본주의 민주 체제는 값싸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아시아위크」지의 한 사설은 이렇게 논평하였다. “더는 도저히 소련 진영으로 불릴 수 없는 나라들이 경제 혼란에 빠져 있다. ·⁠·⁠· 민주주의에는 대가가 따른다. ·⁠·⁠· 민주주의에는 장점이 많지만 그중 완벽한 안정이란 없다.” 이른바 보다 자유로운 민주 사회로의 그러한 변화를 위한 대가는 누가 지불하는가?

폴란드, 동독 및 여타 지역의 수많은 사람은 중앙 통제 경제에서 자유 시장 체제로의 변동이 우선 실직과 역경을 초래함을 실감하고 있다. 산업체들이 능률을 추구하고 보다 경쟁적이 됨에 따라 인력이 남아돌게 되었다. 그 외의 사회 부문들—군대와 무기 산업—역시 심한 영향을 받았다. 어떻게 그러한가?

동서간의 상호 두려움과 적의가 사라지자 대규모 군대의 필요성이 감소된다. 수십만 명의 군인과 그 가족들은 이제 민간인 생활과 그로 인한 온갖 압력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방위비 예산이 삭감될 것이다. 무기 공장에 주문량이 줄어들 것이고, 제조업자들은 투자를 달리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근로자들은 다른 지역으로 이사하여 새로운 기술을 배워야 할 것이다.

동유럽의 이 엄청나고 소란스런 변화로 인해 근본적으로 새로운 국제 정세가 창출되었다. 이 모든 일은 어떻게 있게 되었는가?

중대한 단어, 중대한 변화

이러한 변화에 중대한 역할을 한 것은 소련이 표방한 내정 불간섭이라는 수정된 태도다. 이제까지는, 소련이 헝가리(1956년)와 체코슬로바키아(1968년)를 침공한 일에 대한 공포로 인해 동유럽의 개혁 세력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폴란드가 1980년대에 연대(連帶: Solidarity, 자주 관리 노동 조합) 운동 그리고 보다 민주적인 정권으로의 점진적 이동을 겪은 일은 소련이 이제까지 취한 군사 개입 정책이 달라졌음을 보여 주었다. 폴란드의 경험은 공산 단일 체제가 실제로 와해되었음을 그리고 평화롭고 점진적인 변화가 상당한 대가를 치르면서 이룩될 수 있음을 시사하였다. 그러면 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한 것은 무엇인가?

일부 정치 평론가들에 의하면, 동유럽의 모든 변화의 토대를 이룬 것은 소련 대통령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인도하에 있는 소련 지도권의 실용주의 정책이었다. 1990년 2월에 고르바초프는 이렇게 언명하였다. “소련 공산당은 페레스트로이카[사회 개혁]를 시작하였으며 그 개념과 정책을 수립하였다. 생활의 모든 부면과 국민의 전 영역에 걸친 의미 심장한 혁명적 변화들은 그러한 기초 위에 이 나라에서 착수한 것이다. ·⁠·⁠· 규모와 독창성에 있어서 특이한 급변이 페레스트로이카 체제 내에서 일어나고 있다.”

「아시아위크」지가 이렇게 평한 바와 같다. “오늘날,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개방)와 페레스트로이카(개혁) 운동은, 실패하는 경우도 있지만, 헝가리와 폴란드 및 소련 진영 전역의 개혁자들을 고무해 왔다.” 이 중대한 러시아어 두 단어, 글라스노스트와 페레스트로이카는 고르바초프가 1985년에 소련에서 집권한 이래 세계적으로 사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이 단어들은 공산주의 세계에서 정부에 대해 갖게 된 새로운 태도를 나타낸다.

정치 평론가 필리프 마르코비시는 프랑스의 보수적인 잡지 「르 코티디앵 드 파리」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변화에 대해 기술하면서 그러한 변화가 있게 된 것은 “모스크바 덕분”이라고 말하였다. “왜냐하면, 한 가지 분명한 점으로 소련 정부는 그런 일을 그저 방치한 것이 아니라 체코슬로바키아가, 여느 인민 민주 국가들처럼, 자체의 자유를 방해하는 것에서 분명히 벗어나게 해주었기 때문이다. ·⁠·⁠· 프라하와 동베를린의 경우 대규모 민중 시위로 인해 변화가 촉진되었다. 사람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당국자들이 항복하고 물러날 것을 강요하였다.”

그 결과 민주주의와 독립은 몇 달 사이에 동유럽 전역—폴란드, 동독, 헝가리, 체코슬로바키아, 불가리아, 루마니아—에 걸쳐 마치 정치상의 세인트헬렌스 산 화산 폭발처럼 갑자기 터져 나왔다.

독일 재통합—축복인가, 재앙인가?

이것이 바로, 유럽의 많은 사람이 현재 신중히 고려하는 문제다. 두 독일은 1990년 7월에 화폐를 통합하였으며 10월에는 정치 통합을 이룩하였다. 이로 인해 수많은 사람이 기뻐한 반면 유럽의 많은 사람은 울상이 되었다. 이 중에는 독일 서부의 이전 소유주에게 가옥을 넘겨주어야 할지도 모를 독일 동부의 일부 주민이 포함된다. 영국의 일부 지도자들이 유보적인 태도를 나타냈음에도 불구하고 영국의 한 신문은 “우리는 반드시 신생 독일을 신뢰해야 한다”는 표제를 실었다.

소련은 나폴레옹(1812년)과 히틀러(1941년)의 손에 의한 끔찍한 침공으로 인해 상당한 희생을 치렀기 때문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날 때 동유럽에 완충 지대를 두어 안전을 확보하기를 원하였다. 그래서 1945년 이후 몇 해 안 되어 소련 진영인 여덟 개의 동유럽 공산권 국가가 형성되었다.b 지금 소련은 독일이나 미국에 의해 위협을 별로 받지 않는다고 생각하며, 이제까지 휘어잡고 있던 위성국들을 놓아주었다. 1946년에 처칠이 언명한 철의 장막이 제거되고 새로운 빛이 들어오게 된 것처럼 보인다.

이러한 변화가 우리에게 미칠 수 있는 영향

우리는 이미 여러 나라에서 이러한 변화와 관련하여 겪는 경제 문제를 유의해 보았다. 즉 일부 사람들은 새로운 직업, 새로운 상황,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여야 한다. 한편 많은 사람이 실직과 허덕거리는 생활을 겪게 될 것이다. 이것은 자유 시장 세계의 철학—적자 생존—의 부산물이다.

반면에, 민주화로의 변동은 사람들의 보다 자유로운 이동을 허용한다. 그리고 이것은 국제 관광 여행을 의미한다. 여러 나라들(이를테면 스페인과 이탈리아)이 지난 30년 간 익히 알게 된 바와 같이, 외국 관광 여행은 어느 정부에나 국제 수지 문제에 큰 차이를 가져올 수 있다. 서유럽의 수많은 사람은 동유럽의 유서 깊은 도시들 즉 그 이름만 들어도 지나간 전성 시대를 연상케 되는 도시들—몇 군데만 열거하면, 부다페스트, 프라하, 부쿠레슈티, 바르샤바, 라이프치히—을 방문하고 싶어한다. 사람들은 또한 레닌그라드, 모스크바, 오데사를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기를 원한다. 마찬가지로 동유럽의 사람들은 서유럽을 방문하기를 원한다. 국제 관광 여행은 틀림없이 편견과 무지의 장벽들을 없애는 데 기여한다. 많은 관광객이 깨달은 바와 같이 소위 이전의 원수들과 해변을 함께 사용하면 적의가 곧 사라질 수 있다.

장벽이 무너진 일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의 마음을 끄는 또 다른 부면이 있게 되었다. 즉 다른 나라에 있는 같은 종교 신자들과 자유로운 교제를 할 가능성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로 가능할 것인가? 동유럽의 종교계에는 무슨 변화가 있는가? 다음 기사에서는 이러한 질문과 그 외의 질문을 고려할 것이다.

[각주]

a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을 갈라놓은 베를린 장벽은 길이가 47킬로미터이며, 1961년에 동독이 주민들의 서독 피신을 봉쇄하려고 세운 것임.

b 여덟 나라는 체코슬로바키아, 헝가리, 루마니아, 불가리아, 폴란드, 동독, 알바니아, 유고슬라비아였음.

[5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독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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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란드

루마니아

체코슬로바키아

알바니아

불가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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