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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2
깨92 1/1 4-7면

극적인 성장

여호와의 증인은 결코 그들이 사는 나라의 정부 당국에 위협적인 존재였던 적이 없으며, 현재 그것은 인정받는 사실이다. 「크라스노야르스키 콤소몰레츠」 신문은 소련에서 지난 여름에 열린 한 대회를 평하면서, “마침내 우리 나라의 이념주의자들은 여호와의 백성이 공공 법과 질서에 결코 위협적인 존재가 아님을 인정하였다”고 피력하였다.

그와 비슷하게 소련 신문 「보스토치노시비르스카야 프라우다」는 이렇게 보도하였다. “여호와의 증인 조직은 엄격히 종교적이기 때문에, 그들은 정치 분쟁에 참여하지 않으며, 그 성원들에게 어느 정치 진영을 지지하도록 권하지도 않으며, 오직 성서와 그 저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의 권위를 지지한다.”

초기의 성장

여호와의 증인은 수십 년 간 동유럽에서 활동적으로 일하였다. 이미 1930년대 말에 루마니아에는 2000여 명의 증인이 있었고, 폴란드에는 1000명이, 체코슬로바키아와 헝가리에는 수백 명이, 유고슬라비아에도 수십 명의 증인이 있었다. 광대한 소련에 소수만이 있었으나 하룻밤 사이에 사정이 달라졌다.

소련 정세 전문가인 월터 콜라즈는 저서 「소련의 종교」(Religion in the Soviet Union)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1939-40년에 소련으로 병합된 지역들을 통하여” 여러 증인들이 러시아에 들어왔는데, “그 지역들에는 소규모이지만 매우 활동적인 여호와의 증인 그룹들이 있었다.” 그렇게 하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루마니아의 동부 지역에 사는 증인들은 갑자기, 그야말로 하룻밤 사이에 소련으로 옮겨진 것이다!

여호와의 증인이 소련에 들어가게 된 또 다른 주목할 만한 경로는 독일의 강제 수용소를 통해서였다. 어떻게 그러한가? 제2차 세계 대전중에, 러시아인 수감자들은 수천 명의 독일 증인과 함께 그런 수용소에 있었다. 그 독일 증인들은 그리스도인 중립을 확고히 유지한다는 이유로 수용소에 수감된 것이다. (요한 17:16; 18:36) 그들은 히틀러의 군대에 가담해서 다른 나라에 사는 동료 그리스도인들을 죽이거나 그런 문제로 다른 누구를 죽이는 죄를 범하기보다는 차라리 고통과 죽음을 당하기로 하였다.—요한 1서 3:10-12.

그러하기에, 콜라즈가 기술한 바와 같이, “믿을 수 없는 말처럼 들릴지 모르지만, 독일 강제 수용소는 여호와의 증인의 소식이 러시아로 들어간 통로 중 하나였다. ‘증인’의 용기와 확고 부동한 태도를 칭송하고, 그런 이유로 증인의 신앙에 마음이 끌린, 독일의 러시아인 수감자들이 그 소식을 가지고 간 것이다.” 라벤스브뤼크 여자 수용소의 경우만도 수십 명의 젊은 러시아인들이 여호와의 증인이 선포한 성서 소식을 받아들였다고 한다.

여호와의 증인이 된, 동유럽 나라들의 수감자들은 전쟁이 끝난 후 본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본국에서 하나님의 왕국 통치만이 영속적인 평화의 유일한 희망임을 열심히 가르쳤다. 그렇게 하여 동유럽의 증인의 수는 극적으로 증가하였다. 1946년 4월경 소련에서 4000명 이상의 증인이 전파하였으며, 그 수는 신속히 두 배가 되었다. 1946년 9월, 루마니아의 증인들은 부크레슈티에서 대회를 열었으며 약 1만 5000명이 참석하였다.

그후 얼마 안 있어 냉전이 시작되었으며, 이로 인해 동유럽과 서방 세계간의 여행과 통신이 두절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새로운 집권 세력들은 여호와의 증인을 반대하기 시작하였다. 유감스럽게도 그들은 증인을 위협적인 존재로 보았으며 많은 증인을 구금시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1년경 체코슬로바키아에는 3705명의 활동적인 증인이 있었으며, 헝가리에는 2583명, 유고슬라비아에는 617명, 폴란드에는 1만 5000명 이상의 활동적인 증인이 있었다.

반대를 받으면서도 계속 성장하다

1967년, 모리스 힌더스는 저서 「크렘린의 인간 딜레마」(The Kremlin’s Human Dilemma)에서 여호와의 증인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그가 이렇게 한 말은 소련뿐만 아니라 동유럽의 여러 지역의 증인에게도 적용된다. “그들은 지하에서 활동하였지만 추적당하고 가혹한 구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그들을 막을 길이 없다. 한 곳에서 억압을 당하면 다른 곳에서 ·⁠·⁠· 불쑥 나타난다. 그들은 소련 경찰만큼 불멸의 존재같이 보인다.”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은 1951년 봄에 심한 타격을 받았다. 소련의 유럽 공화국의 증인들 7000여 명이 체포되어 북쪽 끝에 있는 시베리아와 보르쿠타를 포함하여 그 나라의 외딴 지역으로 보내진 것이다. 그 결과는 어떠하였는가?

콜라즈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이것으로 소련에서 증인이 종식된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개종 활동의 새로운 장이 열렸을 뿐이다. 그들은 유배지로 가는 중에 여러 역에 잠깐씩 정거했을 때에도 그들의 믿음을 선전하려고 하였다. 소련 정부가 그들을 추방한 것은 그들이 믿음을 널리 퍼뜨리기에 더없이 좋은 조처였다. 증인은 그들이 살던 마을의 테두리에서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들어가도록 인도된 것이다. 설사 그 세계가 집단 강제 노동 수용소라는 끔찍한 세계에 불과하더라도 그러하였다.”

수용소 안팎

제1세기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으면서도 중단 없이 계속 전파하였던 것처럼, 소련의 여호와의 증인들 역시 그러하였다. (사도 5:42) 범죄 혐의로 수감된 적이 있는 라트비아인인 헬레네 첼미나는 그가 1962년부터 1966년 사이에 보트마 수용소에 있을 때 그곳에 약 350명의 수감자가 있었다고 말한다. “그중에 절반 가량은 여호와의 증인이었다”고 그는 말하였다. 첼미나는 「소련 수용소의 여자들」(Women in Soviet Prisons)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그가 수용소에서 본 것에 대해 이렇게 기술하였다.

“브루클린의 출판물이 비공식적이면서 잘 조직된 통로를 거쳐 많은 양이 훌륭한 모양으로 정기적으로 도착한다. ·⁠·⁠· 철조망이 쳐 있고 사람과의 접촉이 제한된 이 지역에 금지된 출판물이—그것도 미국으로부터 어떻게 들어오는지를 아무도 이해할 수 없었다! 많은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아파트에 「파수대」 몇 부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10년의 강제 중노동형을 선고받았다. 사람들이 그런 출판물을 가지고 있다는 이유로 체포되었으므로 그런 출판물이 수용소 안에 있는 것에 대해 행정 당국이 신경을 곤두세우고 분개한 것도 이해할 만한 일이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인해, 그 무엇도 이 영적 양식의 공급을 막을 수 없었다! 첼미나는 이렇게 지적하였다. “[「파수대」]가 어떻게 수용소에 들어오는지 알아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튼 유죄 판결이 내려지면 모든 수감자의 옷을 벗기고 철저히 검색한다. 수용소에 도착하는 수감자마다 다시 철두철미하게 샅샅이 검색한다. 가방들을 이중 바닥까지 검사한다. 타당한 이유가 없는 한 외부인은 수용소에 들어올 수 없다. 수감자들이 수용소를 떠나 일터에서 일할 때는 무장 경비병들이 에워싸며 누구도 그들에게 접근하는 것이 허용되지 않는다. 수감자들이 저녁에 수용소에 돌아오면 각 수감자를 철저히 검색한다. 그러나 그렇게 감시하는데도 브루클린의 출판물은 여전히 들어온다.”

한편, 소련 수용소 밖의 굳센 그리스도인들은 공개적으로 전파하고 가르치는 활동을 계속 수행하였다. 이것은 증인의 봉사를 저지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제작된 출판물과 영화류를 볼 때 분명히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1978년에 「여호와의 증인의 진상」(The Truths About Jehovah’s Witnesses) 책은 그 서문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그 종교 추종자들 가운데 무신론적 교육을 실시”하려는 목적으로 발행되었다.

그 책의 저자 V. V. 코니크는 여러 가지를 지적한 중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장례식과 결혼식에서 공개 강연을 하는 사례가 빈번하다는 점을 언급하였다. 그는 이렇게 기술하였다. “예로서, 1973년 8월에 크라스노다르스키 지역의 크라스나야폴랴나 마을에서 그 조직의 두 성원의 결혼식이 있었는데 약 500명이 참석하였다. 여섯 명의 설교자가 참석자들에게 연설을 하였으며, 그들의 연설은 두 대의 확성기로 울려 퍼졌다. 그런 다음 여호와의 증인이 다른 종교에 속한 사람들과 그리고 무신론자들과 어떻게 대화를 이끌어 가는지를 보여 주는 실연이 있었다.”

그렇다. 동유럽 전역의 여호와의 증인은 그들의 활동이 금지되어 있었는데도 계속 그리스도의 예언적 명령에 순종하여 하나님의 왕국에 대한 좋은 소식을 열심히 전파하였다. (마태 24:14) 마침내 여호와의 증인은 1989년 5월에 폴란드에서 그리고 6월에 헝가리에서 법적 인가를 받았으며, 루마니아에서는 1990년 4월에, 소련에서는 1991년 3월에, 불가리아에서는 1991년 7월에 법적 인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활동은 체코슬로바키아에서도 방해받지 않고 수행된다.

행복한 대회 참석자들

이런 배경을 알 때, 우리는 동유럽 대회에 참석한 수많은 사람들이 울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손뼉을 치며 스타디움 맞은편에 있는 사람들에게 서로 손을 흔들면서 기뻐한 이유를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부다페스트, 프라하, 자그레브는 “국제 대회장”으로 지정되었으며, 다른 나라들에서 오는 수만 명의 대표자들을 맞이하기 위해 특별 마련이 있었다. 소련에서는 7개 도시에서 열린 대회에 7만 4252명이 참석하였으며, 폴란드에서는 12개 대회에 13만 1554명이 그리고 루마니아에서는 8개 대회에 3만 4808명이 참석하였다. 증인들이 불가리아에서는 대회를 열 수 없었지만 그곳의 증인 약 300명이 국경을 넘어 그리스의 테살로니카에 가서 그들의 언어로 프로그램을 즐길 수 있었다.

동유럽의 증인들이 수많은 대회 참석자들을 위해 준비하고 대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생각해 보자. 소련에서는 그런 대회가 열린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의 증인들이 그러하였듯이, 수만 명의 손님을 대접하는 것은 상상하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일이었다. 그런가 하면 내란이 일어날 듯한 위협이 있고 멀리서 폭음이 들리는 자그레브에서 대회를 여는 것을 생각해 보라!

그런 대회들에 대해 다음의 보고를 읽는 것은 흥미 진진할 것임에 틀림없다.

[7면 지도]

(온전한 형태의 본문을 보기 원한다면, 출판물을 참조하십시오)

세 군데 국제 대회 지역과 소련의 일곱 군데 대회 지역

소련

탈린

키예프

리보프

체르노프치

오데사

폴란드

독일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

오스트리아

헝가리

부다페스트

루마니아

유고슬라비아

자그레브

불가리아

알바니아

이탈리아

그리스

터키

[지도]

소련

알마아타

우솔례시비르스코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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