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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라!—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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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4
깨94 9/1 19-24면

산다는 것이 쉽지 않을 때

나는 아주 어린 나이에 인생의 가혹한 현실에 직면해야 하였다. 오늘날 세상살이가 참으로 고르지 못하다는 점에 독자도 동의할 것이다. 그런 삶이 우리 모두에게—결국엔—닥친다. 우리 모두는 질병에 걸린다. 물론 별다른 큰 병 없이 늙는 사람도 있겠지만, 그 다음에 우리 모두는 죽음에 직면하게 된다.

내가 죽음에 대하여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가 왜 그렇게 되었는지, 그리고 내가 겪었던 일로부터 어떤 면으로 유익을 얻었는지 설명하고자 한다.

아홉 살 때

나는 1968년 9월에 뉴욕 브루클린에서 다섯 자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신체 장애인이었고, 어머니가 현금 출납원으로 일하여 우리를 부양하였다. 내가 아홉 살이 되었을 무렵, 어머니는 내 배 한쪽이 부어 오른 것을 알아차렸다. 어머니는 나를 지방 의료 센터로 데리고 갔다. 의사가 만져 보니 큰 덩어리가 있어서, 며칠 후에 나는 킹스 카운티 병원에 입원하였다.

엄마가 떠난 뒤, 나는 겁이 나서 울었다. 다음날 연한 파란색 옷을 입은 두 사람이 나를 수술실로 옮겼다. 내 기억으로는 회복실에서 깨어나기 전에 맨 마지막으로 본 것이, 머리 위의 눈부신 불빛과 내 입에 무엇이 놓이던 일이었다. 의사들은 빌름스 종양이라고 하는 것(암의 일종)과 한쪽 신장 그리고 간의 일부를 성공적으로 제거하였다.

나는 5주 동안 중환자실에 있었다. 의사들은 날마다 붕대를 갈아 주었다. 의사들이 반창고를 떼어 낼 때 나는 비명을 지르곤 하였다. 의사들은 고통을 덜어 주려고, 어떤 사람을 들어오게 해서 내 주의를 다른 데로 끌게 하였다. 그 사람이 개구리 이야기를 많이 해주던 생각이 난다.

중환자실에서 나온 뒤에도 나는 4주 더 입원해 있었다. 그 기간에 방사선 치료가 시작되었다. 그 치료는 고통스러웠는데, 방사선 때문이 아니라 배를 대고 엎드려 있어야 했기 때문이다. 수술받은 것 때문에 여전히 배가 아팠던 것이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마다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나는 1977년 11월 말경에 퇴원하고 나서도, 통원 환자로 계속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방사선 치료가 끝난 다음에는 화학 치료를 받기 시작하였다.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날마다 아침 일찍 일어나서 강한 약품 주사를 맞으러 병원에 가야만 했다. 의사는 주사 바늘을 혈관에 찔러 넣고 약을 직접 혈관에 주입하곤 하였다. 나는 주사 바늘이 무서워서 울곤 하였는데, 엄마는 나에게 병이 나으려면 이렇게 해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화학 치료에는 끔찍한 부작용이 뒤따랐다. 속이 메스꺼웠고 여러 번 구토하였다. 혈구수가 떨어졌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병에 매여 살다

이듬해 봄 부활절 일요일에, 우리가 교회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내 혈구수가 낮아서 코피가 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어머니가 별수단을 다 써 보았지만 피는 계속 나왔다. 의사들이 거즈로 내 코를 막아서 출혈을 멈추게 하니까, 이제는 피가 입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는 출혈로 몹시 허약해져서 병원에 입원하였다. 나에게 문병 오는 사람들은 내가 감염되지 않도록 장갑을 끼고 마스크를 쓰고 옷 위에 가운을 입어야 했다. 일 주일이 지나 혈구수가 다시 올라가서 퇴원해도 될 정도였다.

곧바로 화학 요법이 다시 시작되었다.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어서 정말 섭섭했다. 친구들이 보고 싶었고 밖에 나가 함께 뛰놀고 싶었다. 의사들은 화학 치료를 받는 동안이나 끝난 뒤에도 곧바로 학교에 다녀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나는 가정 교사의 지도를 받았다.

그 해 여름에도 나는 그전처럼 조지아 주의 조부모 댁에 가고 싶었지만, 허락을 받지 못하였다. 그런데 병원에서는 암 환자들이 뉴저지 주에 있는 유원지에 가도록 마련하였다. 나중에는 기진 맥진해졌어도, 즐겁게 시간을 보냈다.

1978년 말경에 화학 요법이 끝났지만 나는 가정 교사의 지도를 계속 받았다. 그 기간을 다 합치면 3년이 넘는다. 1981년 1월에 다시 학교에 갔을 때는, 너무 오랫동안 집에서 공부하였기 때문에 적응하기가 쉽지 않았다. 때때로 학급을 찾지 못하여 헤매곤 했다. 그래도 나는 학교를 정말 좋아했다. 나는 특히 음악과 타자, 체육 시간을 좋아했다. 어떤 아이들은 친절하였지만, 나를 놀려대는 아이들도 있었다.

재발하다

“너 임신했니?” 하고 아이들이 나에게 묻기 시작하였다. 내 배가 부어 올랐기 때문이다. 의사는 나에게 걱정하지 말라고 하면서 간이 다시 자라나서 그런 거라고 말했다. 그런데 3월에 검진을 받았을 때, 의사는 나를 입원시켰다.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학교에 다닌 지 이제 겨우 두 달 반밖에 되지 않았던 것이다.

내 간에 있는 종양에서 조직을 떼내서 생체 검사를 하였다. 그 절차가 끝나고 나서 깨어났을 때, 내가 제일 먼저 본 사람은 엄마였다. 엄마는 울고 있었다. 엄마는, 내게 암이 재발했는데 종양이 너무 커서 잘라 낼 수 없기 때문에 줄어들게 하는 화학 치료를 받아야 한다고 말해 주었다. 나는 아직 열두 살에 불과했다.

병원에서 화학 치료를 받느라 몇 주마다 한 번에 이삼 일씩은 입원하였다. 예전과 같이 메스꺼움과 구토로 힘들었다. 입맛이 없어지고 머리카락이 모두 빠졌다. 화학 치료는 1981년 내내 계속되었다. 한편 그 해 4월에 나는 다시 가정 학습을 시작하였다.

1982년 초에 수술을 받기 위하여 입원하였는데, 나는 너무 허약해서 체중계에 올라서고 내려올 때도 간호사의 도움이 필요하였다. 화학 치료로 종양이 줄어들어서, 외과 의사들은 간의 다른 부분과 함께 종양을 제거할 수 있었다. 다시 두 달 정도 입원해 있었다. 1982년 중반 무렵에 화학 치료를 다시 시작해서 1983년 초까지 계속하였다.

그 기간 동안 나는 학교에 갈 수 없어서 슬펐다. 하지만 그 때 머리카락이 다시 자랐고 기분이 다시 좋아지기 시작하였다. 살아 있다는 것이 행복했다.

마침내 다시 학교에

가정 교사는 내가 1981년에 잠깐 다니던 학급과 함께 중학교를 졸업하도록 주선해 주었다. 나는 그 일로 가슴이 무척 설렜다. 친구들을 다시 만나고 새 친구들을 사귀게 되어 기뻤다. 1984년 6월 졸업식 날이 되자, 그 특별 행사를 기록으로 남겨 두기 위하여 나는 친구들과 교사들의 사진을 찍었고, 가족들은 내 사진을 찍어 주었다.

그 해 여름에 나는 조지아 주의 조부모 댁에 가서 거의 여름 내내 거기 머물렀다. 8월 말에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바로 학교에 갈 준비를 할 때였다. 그렇다. 나는 마침내 다시 학교에 가게 된 것이다. 나는 정말 가슴이 설렜다!

종교에 호기심을 느끼다

돈과 크레이그는 여느 학생들과 달라서 내 마음이 끌렸다. 그런데 내가 그 아이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을 주니까, 자기들은 크리스마스를 축하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너희들 유대인이니?” 하고 내가 물었다. 크레이그가 자기들은 여호와의 증인이며 크리스마스는 참 그리스도교의 것이 아니라고 설명해 주었다. 크레이그는 내가 그 문제에 대하여 읽어 보도록 「파수대」와 「깰 때이다」 잡지를 몇 부 주었다.

나는 그들의 종교가 특이해 보여서 호기심이 생겼다. 교회에 가면 우리는 같은 말을 계속 되풀이하여 듣곤 하였던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침례를 받으라. 그러면 천국에 가게 될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너무 쉬워 보였다. 나는, 무슨 일이든 너무 쉽다면 내가 천재라서 그렇거나 아니면 무언가 잘못되었거나 둘 중 하나라고 믿고 있었다. 내가 알기로 나는 천재가 아니니까, 분명히 교회의 가르침이 어딘가 잘못되었다는 결론을 내렸다.

그래서 결국 크레이그와 함께 점심 시간에 성서 연구를 하기 시작하였다. 어느 날 크레이그가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에 나를 초대해서 가 보았다. 크레이그를 만나서 그 가족들과 함께 앉았다. 나는 내가 본 장면—다양한 인종의 사람들이 함께 연합하여 숭배하는 모습—에 감명을 받았고 들은 내용에도 감명을 받았다.

크레이그와 내가 각기 새로운 반이 되었을 때, 점심 시간이 서로 달라져서 함께 성서 연구를 계속할 수 없게 되었다. 크레이그의 어머니가 나의 어머니를 찾아와서 나와 함께 연구를 해도 될지 물었는데, 엄마는 거절하였다. 나중에 엄마는 내가 그리스도인 집회에 가도 좋다고 허락했다. 그래서 나는 전화 번호부에 나와 있는 왕국회관에 전화를 걸어서, 집회가 일요일 오전 아홉 시에 시작된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전날 나는 왕국회관으로 가는 길을 알아두려고 서른 구획 정도를 걸어서 거기까지 가 보았다.

다음날 아침에 왕국회관에 도착하였을 때, 한 사람이 내게 다른 왕국회관에서 왔느냐고 물었다. 나는 처음 참석했지만 이전에 잠깐 연구를 한 적이 있다고 말하였다. 친절하게도 그는 나에게 자기와 자기 아내와 함께 앉자고 권하였다. 집회는 교회와 아주 달랐다. 나는 많은 사람이 문답식 회기 중에 아주 열심히 해설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놀랐다. 어린아이들까지도 해설을 하는 것이었다. 나도 손을 들고 질문에 대답하였다. 그 때부터 줄곧 집회에 참석하였고 성서 진리를 이해하는 면에서 발전하기 시작하였다.

다시 재발하다

1986년 12월, 고등 학교 졸업반 때, 나는 정기 검진을 받으러 갔다. 의사는 내 오른쪽 폐에 있는 것을 보고 의심이 나서, 더 정밀한 엑스선 검사를 받도록 다시 불렀다. 그 결과 무언가 잘못되었음이 분명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때 나는 울음을 터뜨렸다.

생체 검사를 하였는데, 의사는 내 폐에서 종양 부위를 채취하기 위하여 바늘을 사용하였다. 그 종양은 암으로 밝혀졌다. 종양이 세 군데나 있었는데, 그 중 큰 덩어리는 심장 동맥 근처에 있었다. 우리는 의사와 상의한 뒤, 수술에 앞서 종양이 줄어들게 하기 위한 두 가지 화학 요법을 쓰기로 하였다. 부작용은 예전과 같아서, 머리카락이 모두 빠지고, 메스꺼움과 구토, 혈구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처음에 나는 우울하였지만 곧 여호와께 많이 기도하기 시작하였고, 그 덕분에 힘이 났다. 졸업식까지는 여섯 달도 채 남지 않았다. 교사들은 잘 이해해 주었고 친절하여, 의사의 소견서나 준비하고 학과에 뒤지지 않게 노력해 줄 것만 당부하였다.

쉽지 않은 학교 생활

내가 몹시 아팠을 때 교실에서 수업을 받는 것도 도전이었는데, 게다가 머리카락마저 빠지기 시작하였다. 내가 가발을 샀을 때, 학교 친구들은 내 머리가 멋져 보인다고 말하였다. 그것이 가발인 줄을 알아차리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한 남학생이 알아차렸다. 내가 교실에 들어설 때마다, 그는 칠판에다 “가발”이라는 단어를 쓰고 자기 친구들과 함께 웃으며 놀려대곤 하였다. 그러한 괴롭힘 때문에 나는 우울해졌다.

그러던 어느 날, 학생들이 많이 있는 복도에서 누가 뒤에서 내 가발을 벗겼다. 나는 황급히 돌아서서 가발을 주웠다. 하지만 아이들 십여 명이 내 대머리를 보았고 나는 속이 몹시 상했다. 나는 계단으로 가서 울음을 터뜨렸다. 다음날 몇몇 학생들의 얼굴을 보니 어제 일로 미안해 하는 기색이었다. 급우들 말이 한 여학생이 남학생에게 돈을 주면서 내 가발을 잡아당기라고 시켰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피에 대한 입장

화학 치료 때문에 나의 혈구수가 뚝 떨어졌다. 설상가상으로, 코피가 나곤 하였는데, 어떤 때는 하루에 두세 번씩 났다. 나는 침례를 받지는 않았지만, 확고한 입장을 취하여 여호와의 증인이기 때문에 수혈을 받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사도 15:28, 29) 큰언니는 어린 조카 한 명을 시켜서 내가 죽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내게 말하게 하였다. 아버지는 화가 나서 수혈을 받으라고 강요하였고, 엄마는 내가 수혈을 받아도 하느님께서 용서해 주실 거라고 거듭 말하였다.

동시에, 의사들은 이렇게 혈구수가 낮으면 심장 마비나 발작이 일어날 수도 있다고 경고하였다. 내가 확고한 입장을 취하기로 결심하였으므로, 의사들은 내가 죽더라도 의사들에게 책임을 묻지 않겠다고 씌어 있는 면책 각서에 서명하게 하였다. 나는 곧 회복되어, 집으로 돌아가서 학교에 다시 다닐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혈구수가 낮았기 때문에, 의사들은 이제 화학 치료 대신에 방사선 치료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1987년 4월 말부터 6월 초까지 매일 방과후에 방사선 치료를 받았다.

졸업, 그리고 침례

졸업식은 특별한 행사였다. 언니와 함께 가게에 가서 드레스를 사고 가발도 새로 샀다. 엄마와 두 언니도 졸업식에 참석하였고, 그 후 우리는 함께 나가서 기념 식사를 하였다.

그 때는 화학 치료나 방사선 치료를 받지 않고 있었다. 하지만 몇 주 후, 의사는 전화를 걸어, 병원에 와서 또 한 차례의 화학 치료를 받으라고 말하였다. 나는 병원에 가고 싶지 않았는데, 한 주 후에 뉴욕 시 양키 스타디움에서 열리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역 대회에 참석할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엄마는 대회에 참석하고 나서 치료를 받으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나는 그렇게 하였다.

나는 대회 중에 가슴이 무척 설렜다. 1987년 7월 25일 토요일에 침례를 받을 예정이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침례장이 있는 오처드 비치로 갔다. 침례를 받은 다음에 스타디움으로 돌아와 그 날의 남은 회기에 참석하였다. 저녁에는 몹시 피곤하였지만, 일요일 아침에도 준비를 하여 대회 마지막 날 회기에 참석하였다.

다시 수혈 문제에 직면하다

다음날 오후에 나는 섭씨 39도의 열과 신장 감염, 극도로 낮은 혈구수 때문에 병원에 입원하였다. 의사는 만일 내가 수혈에 동의하는 서류에 서명하지 않는다면, 법원 명령을 얻어 내어 강제로 수혈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몹시 겁이 났다. 가족들도 계속 압력을 가하였다. 언니가 자기 피를 제공하겠다고까지 제안하였지만, 나는 거절하였다.

나는 확고한 입장을 취하게 도와 달라고 여호와께 많이 기도하였다. 감사하게도, 혈구수가 올라가기 시작하였고, 수혈을 받으라는 압력은 그쳤다. 화학 치료를 계속 받아야 했지만, 적절한 혈관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외과 의사는 약물을 투여하는 장치를 삽입하기 위하여 내 빗장뼈 밑에 조그만 구멍을 냈다.

폐에 있는 종양을 제거하는 문제에 대하여 상의할 때, 외과 의사는 응급 시 외에는 피를 사용하지 않겠다고 말하였다. 엄마가 내게 승낙하라고 말해서 승낙하였다. 하지만 나중에 나는 꺼림칙하였다. 사실상 그것은 수혈에 동의한 것이나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즉시 나는 피를 사용하지 않겠다는 보장을 해줄 외과 의사를 찾기 시작하였다. 찾을 가망이 없어 보였지만, 마침내 한 외과 의사를 찾았고 1988년 1월에 수술하기로 계획하였다.

의사는 내가 살아날 것을 보장하지 않았다. 사실, 수술 전날 밤에 의사는 내 방으로 와서 “노력해 보겠소”라고 말하였다. 나는 겁이 났다. 이제 겨우 열아홉 살이었고 죽고 싶지 않았다. 그런데 폐의 3분의 2와 함께, 세 개의 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하였다. 놀랍게도 나는 단지 일 주일만 입원해 있었다. 집에서 두 달 반 동안 회복한 뒤에 다시 화학 치료를 시작하였고, 예전과 같은 부작용이 뒤따랐다.

이 무렵에 아버지도 암에 걸렸는데, 몇 달이 지난 어느 날 밤, 어머니는 아버지가 침실에서 사망한 것을 발견하였다. 아버지가 사망한 뒤, 나는 직업 학교에 들어가 비서직 훈련을 받기 시작하였다. 나는 신체적으로, 공부하는 면으로, 영적으로 잘해 나갔고, 보조 파이오니아(임시 전 시간 봉사자) 활동에 참여하기까지 하였다.

또다시 재발하다

1990년 4월, 나는 조지아 주 오거스타에서 있은 큰오빠의 결혼식 피로연에 갔다. 거기 있을 때 오빠가 말하였다. “네 다리가 꽤 굵구나.”

“그게 무엇이라고 생각돼요?” 내가 물었다.

“모르겠는데.” 오빠가 대답했다.

“아마 종양일거예요.” 내가 말했다.

뉴욕 시에 돌아와서 나는 의사에게 갔다. 국부 마취를 하고 생체 검사를 해 보니까, 왼쪽 종아리에 또 하나의 빌름스 종양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검사 결과 뼈에는 이상이 없지만 종양이 너무 커서 잘라 낼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전과 같은 화학 치료가 시작되었다.

얼마 후에 구토가 나서 멈추지 않았고 장이 막혔다. 긴급 수술을 하여 장을 뚫었다. 그런데 장이 꼬이기 시작해서 또 수술을 해야 하였다. 헤모글로빈 수치가 거의 4까지 떨어졌고, 의사는 “수혈을 받아야만 합니다. 당신은 죽어 가고 있어요.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겁니다”라는 말을 계속하였다. 나는 묘지와 죽음에 대한 악몽을 꾸었다.

나는 잘 회복되어 10월에는 종양을 제거할 수 있게 되었다. 의사들은 또한 내 종아리도 70퍼센트 정도 잘라 냈다. 내가 다시 걸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 그러나 뉴욕 시에서 다니기 위해서는 걸을 수 있어야 했으며, 치료와 결심 덕분에 나는 걷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보행기로, 다음에는 목발을 짚고, 그 다음에는 지팡이를 짚다가 마지막에는 부목을 댔다. 그렇게 되니까 양손이 자유로워져서 호별 방문 봉사에서 성서를 사용하게 되었다. 키가 155센티미터니까 정상적인 몸무게는 54킬로그램 정도인데, 화학 치료를 받는 동안에는 27킬로그램까지 떨어졌다. 다시 체중이 늘어나고 다리가 굵어지는 동안에 의사들은 계속 부목을 키워 주었다. 마침내 정상 체중에 가까워지자 새로운 부목을 만들어 주었다.

산다는 것이 아직도 쉽지 않다

1992년 여름 무렵, 나는 정상 모습을 되찾은 것처럼 보였고 보조 파이오니아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11월에 편지 한 통을 받고 날아갈 듯이 기뻤다. 내 체험담이 다른 사람들에게 격려가 될 수 있다는 것이며, 그래서 「깰 때이다」에 싣기 위하여 체험담을 쓰도록 권유받은 것이었다. 나의 부푼 마음은 다음 주에 절망으로 바뀌었다.

흉부 엑스선 정기 검진 결과, 한쪽 성한 폐에서 종양이 발견되었다. 나는 울고 또 울었다. 나는 한쪽 신장, 간의 일부, 왼쪽 폐의 대부분, 한쪽 다리의 일부를 잃고도 맞서 싸웠지만, 양쪽 폐를 다 잃고는 아무도 살아날 수 없을 것이다. 또다시 가족들과 친구들은 나를 격려해 주었고, 나는 한번 더 병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종양이 줄어들게 하기 위하여 화학 요법을 시작하였다. 한 의사는 종양을 제거해도 폐는 구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1993년 3월에 나는 수술실로 들어갔다. 나중에 알게 되었지만, 의사들은 속을 들여다보고 나서는 그냥 다시 봉합하였다. 폐를 들어내지 않고서는 종양을 제거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 때 이래로 나는 종양을 죽이려는 시도로 강한 화학 치료를 받고 있다.

죽음에 대한 생각이 왜 나를 엄습하는지 알겠는가? 산다는 것이 내게 쉬웠다면, 사람이 왜 죽는지 그리고 미래에 무슨 희망이 있는지에 대하여 내가 그토록 곰곰이 생각해 보았겠는가? 그랬을 것 같지 않다. 하지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우리가 지금 사느냐 죽느냐가 아니라,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실 수 있는 분인 여호와 하느님의 축복을 얻느냐의 문제라고 나는 확신한다.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살 희망을 두고두고 생각하면서, 내 짐을 그분께 맡겨 버리고, 나와 같은 희망을 가진 벗들과 가까이 지내는 일이 살아가는 데 힘이 되었다.—시 55:22; 계시 21:3, 4.

다른 젊은이들은 건강해서 다행이다. 내 이야기가 많은 젊은이의 마음에 닿아, 헛된 일을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의 봉사에 현명하게 자신의 건강을 사용하게 되기 바란다.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영원토록 좋은 건강을 즐길 수 있다는 것은 참으로 웅대한 축복이다! 거기에는 더는 의사나 병원, 주사 바늘, 시험관이—그렇다. 병들고 죽어 가는 이 낡은 세상을 생각나게 하는 그 어떤 것도—필요 없을 것이다.—캐시 로버슨의 체험담.

[21면 삽화]

중학교를 졸업하던 때

[23면 삽화]

뉴욕에서 열린 순회 대회에서 식품 봉사를 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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