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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95 5/1 18-24면
  • 공산당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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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당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 깨어라!—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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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석방되어 계속 전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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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시험받았지만 용감하였던 시기
  • 내 생활 방식의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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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5
깨95 5/1 18-24면

공산당의 금지령하에서 보낸 40여 년

야르밀라 할로바의 체험담

때는 1952년 2월 4일 자정이 지난 후이며, 장소는 체코슬로바키아, 프라하의 우리 아파트이다. 우리는 계속 울리는 초인종 소리에 깨어났다. 그 때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어머니와 아버지 그리고 남동생 파벨과 나를 각기 다른 방에 가두고 경비병을 한 명씩 붙여 놓은 다음, 집안을 샅샅이 뒤지기 시작하였다. 거의 12시간이 지났는데도, 그들은 여전히 뒤지고 있었다. 그들은 찾아낸 서적의 목록을 모두 작성한 다음, 서적을 상자에 담았다.

그리고 나서 나에게 차에 타라고 지시하였고 검은 안경을 씌웠다. 나는 이상한 예감이 들어, 간신히 안경을 조금 움직여 어디로 데려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거리가 낯익었다. 우리의 목적지는 그 악명 높은 국가 보안대 본부였다.

그들은 나를 차 밖으로 떼밀었다. 얼마 후 안경이 벗겨졌을 때 살펴보니 내가 있는 곳은 작고 지저분한 방이었다. 제복을 입은 한 여자가 내게 옷을 벗고 두툼한 작업복 바지와 남자용 셔츠를 입으라고 지시하였다. 눈을 가리기 위해 천으로 내 머리를 묶었다. 나는 눈이 가려진 채 그 방에서 끌려 나와 끝이 없을 것만 같은 복도를 따라갔다.

마침내 그 감시원은 멈추어 철문을 열고 나를 안으로 밀어 넣었다. 내 머리에서 천을 잡아채더니 등뒤에서 문을 잠갔다. 나는 감방에 갇힌 것이다. 감방에 있는 40대로 보이는 한 여자가 나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그도 나와 같은 옷을 입고 있었다. 좀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일종의 우스운 기분이 들어,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한번도 이같이 수감된 적이 없는 19세 소녀였지만, 나는 여전히 생기에 넘쳐 있었던 것이다. 얼마 안 있어 매우 기쁘게도, 우리 가족 가운데 나 외에는 아무도 수감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라는 나라에서 여호와의 증인이 되는 것은 위험한 일이었다. 그 나라는 공산당 치하에 있었으며 증인들에 대해 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어떻게 우리 가족은 금지된 조직과 그토록 깊은 관련을 맺게 되었는가?

우리가 증인이 된 경위

프라하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프로테스탄트의 배경 가운데서 자랐으며, 아버지의 종교적 신념은 매우 진지하였다. 아버지는 1920년대에 어머니를 만났는데, 어머니가 의학을 공부하러 프라하에 왔을 때였다. 어머니는 베사라비아라고 하는 지역 출신이었는데, 그 지역은 어머니가 어렸을 때 러시아에 속해 있었다. 어머니는 유대인이었지만 결혼한 뒤에는 아버지가 다니던 교회에 함께 나갔다. 하지만 어머니는 그 종교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아버지는 강제 노동 수용소로 보내졌으며, 어머니는 간신히 유대인 대학살을 피하였다. 그 때는 우리에게 힘든 시기였지만, 우리는 모두 생존하였다. 전쟁이 끝난 지 2년 뒤인 1947년 중반에, 여호와의 증인이 된 고모가 우리 가족에게 「파수대」를 예약해 주었다. 그것을 읽기 시작한 사람은 바로 어머니였다. 어머니는 즉시 거기에 담긴 소식이 그 때까지 찾아왔던 진리임을 깨닫게 되었다.

처음에 어머니는 다른 식구에게 거의 이야기하지 않았다. 하지만 어머니는 프라하에서 집회가 열리는 장소를 알아내어 집회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몇 달이 채 안 된 1948년 봄에 어머니는 증인들의 순회 대회에서 침례를 받았다. 그제서야 어머니는 우리도 함께 집회에 참석하도록 권하였다. 아버지는 마지못해 동의하였다.

집회는 프라하의 중심지에 있는 작은 홀에서 열렸는데, 우리 가족 모두가 그 곳에 참석하기 시작하였다. 아버지와 나의 마음에는 호기심과 불신감이 엇갈렸다. 놀랍게도 어머니는 이미 새로 사귄 벗들을 우리에게 소개하였다. 나는 그들의 열심과 합리적인 태도에 그리고 그들이 형제 관계를 매우 소중히 여기는 듯한 모습에 감명을 받았다.

어머니는 우리의 반응이 긍정적임을 보고서, 증인들을 집으로 초대하여 상세하게 토론해 보자고 제안하였다. 증인들이 우리의 성서를 사용하여 영혼불멸과 삼위일체 교리가 성서에 들어 있지 않다는 사실을 보여 주었을 때, 아버지와 나는 몹시 충격을 받았다! 그렇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해지고 그분의 왕국이 오도록 기도해 온 내용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를 배워 알게 되었을 때 우리의 눈이 뜨인 것이다.

몇 주 뒤에 아버지는 다니던 교회의 교직자 몇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였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였다. “형제 여러분, 저는 여러분과 함께 성경의 요점 몇 가지를 토의하고자 합니다.” 이렇게 말을 꺼내고 나서 아버지는 차근차근 교회의 기본 교리를 언급한 다음 어떻게 그것이 성서와 모순되는지를 지적하였다. 교직자들은 아버지의 말이 맞다고 인정하였다. 그러자 아버지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하였다. “나는 결심했습니다. 가족을 대신해서 말하겠는데, 교회를 떠나겠습니다.”

전파 활동이 금지되다

아버지와 함께 집회에 참석하기 얼마 전인 1948년 2월에 공산당이 나라를 장악하였다. 나는 동료 학생들이 교수를 고발하는 것을 목격하였으며, 교사들이 학부모를 두려워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모두 서로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처음에는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이 거의 방해받지 않고 여전히 계속되었다.

우리에게 1948년의 두드러진 일 중 하나는 프라하에서 열린 여호와의 증인의 대회였다. 9월 10일에서 12일까지 열린 그 대회에 2800명 이상이 참석하였다. 몇 주 뒤인 1948년 11월 29일에 비밀 경찰이 지부 사무실을 급습하였고 지부 사무실은 폐쇄되었다. 이듬해 4월, 우리의 활동에 공식적인 금지령이 내려졌다.

우리 가족은 이러한 조치 중 어느 것에도 겁을 내지 않았으며 1949년 9월에 프라하 교외의 숲 속에서 열린 특별 프로그램에 참석하였다. 한 주 뒤에 아버지와 나는 침례를 받았다. 각별히 주의하여 전파 활동을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서두에서 언급한 것처럼 1952년 2월에 체포되었다.

반복되는 심문

몇 차례 심문을 받은 다음, 나는 오랫동안 수감되리라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심문자들은 사람이 소일거리 없이 오랫동안 감금되어 있을수록 더 순순히 협력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부모에게서 배운 교훈이 계속 머리에 떠올랐으며, 그 교훈은 나로 하여금 견디게 해주었다. 부모는 종종 시편 90:12을 인용하여, ‘나의 날을 계수’하도록 즉 나의 날을 검토하거나 평가하여 ‘지혜의 마음을 얻도록’ 격려해 주었다.

따라서 나는 머리 속으로, 전에 암기해 둔 시편 전체와 성서의 다른 장들을 복습하였다. 또한 수감되기 전에 연구하였던 「파수대」 기사들을 묵상해 보고, 혼자서 왕국 노래를 불렀다. 그 밖에도 감금된 처음 여러 달 동안에는 대화할 수 있는 동료 재소자들이 있었다. 게다가 불과 몇 달 전에 기말 고사를 잘 치렀기 때문에, 학교에서 수업 시간에 배운 것들을 복습할 수도 있었다.

심문 내용으로 미루어 보아, 내가 사회한 성서 연구 중 하나에 밀고자가 참석하였고 그가 나의 전파 활동을 신고한 것임이 분명하였다. 당국은 우리 집에서 압수한, 타자기로 친 성서 출판물 역시 나와 관련이 있다고 단정지었다. 사실은 열다섯 살밖에 안 된 남동생이 타자한 것이었다.

얼마 후에 심문자들은 내가 다른 어느 누구도 끌어들이지 않을 것임을 알고는, 나를 설득하여 믿음을 포기하게 하려고 하였다. 그들은 내게 한 사람을 대면시키기까지 하였는데, 그는 이전에 여호와의 증인의 여행하는 감독자로 알려진 사람이었다. 그는 자기도 재소자이면서, 이제는 공산당과 협력하여 투옥된 다른 증인들이 믿음을 포기하게 하는 일에 가담한 것이다. 얼마나 가엾은 사람인가! 몇 년 뒤에, 그는 석방되고 나서 술에 젖은 생활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독방에 감금되다

7개월 뒤에 나는 다른 교도소로 이송되어 독방에 감금되었다. 이제는 완전히 혼자였으므로 시간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는 전적으로 내게 달려 있었다. 요청만 하면 책을 얻을 수는 있었지만, 영적인 것들은, 물론 절대 안 되었다. 그래서 생활 계획표를 만들었다. 독서를 하는 시간뿐 아니라 영적인 것들을 묵상하는 시간을 포함시켰다.

분명히 나는 기도 가운데서 이전 어느 때보다도 여호와와 가까워진 느낌이 들었다. 세계적인 형제 관계를 그토록 소중하게 생각해 본 적도 전에는 없었다. 날마다 나는 좋은 소식이 세계 도처에서 특히 그 시기에 어떻게 전해지고 있을지 상상해 보려고 애썼다. 나는 이 활동에 참여하여 사람들에게 성서 제공 연설을 하는 내 모습을 그려보곤 하였다.

그러나 이 조용한 환경 속에서 마침내 나는 덫에 걸리고 말았다. 나는 언제나 독서하기를 좋아하고 외부에서 들어오는 인쇄물을 탐독하고 있었기에, 특정한 책에 열중하다 보니 영적인 것들을 묵상하기 위한 계획표를 소홀히 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일이 있고 나면, 항상 양심에 가책을 느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나는 검사실로 불려갔다. 특별한 이야기는 전혀 없었고—다만 이전에 심문한 것의 결과에 관한 이야기뿐이었다. 나는 실망하였다. 내 사건을 다룰 재판 날짜가 정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약 반시간 만에 다시 독방으로 돌아왔다. 돌아와서는 정신 없이 울기 시작하였다. 왜 울었는가? 오랫동안 독방에 감금되어 있다 보니 결국 지친 탓이었는가?

나는 문제를 분석하기 시작하였으며, 곧 그 원인을 알아냈다. 그 전날에 나는 독서에 빠진 나머지 또 한번 나의 영적 활동에 고착하지 못하였다. 따라서 생각지도 않게 불려가 심문을 받게 되었을 때, 나는 올바른 신심 깊은 정신 태도를 갖추고 있지 못하였던 것이다. 즉시 내 마음을 여호와께 토로하고는 다시는 영적인 것들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고 결심하였다.

이런 경험을 하고 나서, 나는 아예 독서 시간을 없애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한 가지 더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말하자면, 억지로라도 독일어로 된 책을 읽는 것이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에 점령당하였을 때, 우리는 학교에서 독일어를 배워야 하였다. 하지만 독일이 프라하를 점령하고 나서 저지른 만행 때문에, 전쟁이 끝나자 나는 독일에 관한 것이라면 언어를 포함하여 모든 것을 잊고 싶었다. 그러므로 이제 나는 내 자신에게 엄격해지기 위해 다시 독일어를 배우기로 결심하였다. 그런데 하나의 벌로 간주하였던 것이 나중에는 축복으로 변하였다. 그 점을 설명하자면 이러하다.

나는 어떤 책의 독일어판과 체코어판을 각각 구하여서, 혼자서 독일어를 체코어로 체코어를 독일어로 번역하는 연습을 시작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은 독방 생활을 통해 받게 될지도 모를 해로운 영향을 피하는 하나의 방책이 되었을 뿐 아니라, 후에 좋은 목적에 기여하게 되었다.

석방되어 계속 전파함

독방에서 8개월을 보내고 나니, 그제서야 내 사건이 재판에 회부되었다. 나는 국가 전복죄로 기소되어 2년 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이미 15개월을 복역하였고 또한 새 대통령 선거를 맞이하여 대사면이 내려져서 석방되었다.

복역 중에 나는 가족들이 나를 걱정하지 않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는데, 집에 돌아왔을 때 그 기도가 응답되었음을 알게 되었다. 아버지는 의사였는데, 찾아온 많은 환자에게 성서를 연구하도록 격려하였다. 그 결과 어머니가 매주 열다섯 건의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다! 게다가 아버지는 한 집단의 「파수대」 연구를 사회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또한 워치 타워 협회의 서적 얼마를 독일어에서 체코어로 번역하였으며, 남동생은 그 원고를 타자하였다. 그래서 나는 즉시 영적인 활동에 몰두하여 곧 성서 연구를 사회하게 되었다.

새로운 임명

1954년 11월 비가 내리던 어느 날 오후, 초인종이 울렸다. 빗물이 흘러내리는 짙은 회색 비닐 비옷을 입고 현관에 서 있던 사람은 콘스탄틴 파우케르트였다. 그는 전파 활동을 인도하는 사람 중 하나였다. 그는 주로 아버지나 동생 파벨과 이야기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이번에는 나에게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나와서 잠시만 걸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잠시 말없이 걸었다. 몇몇 행인이 우리를 지나쳐 갔다. 희미한 가로등 불빛이 비에 젖은 어두운 도로 위에 어렴풋이 비쳤다. 콘스탄틴은 뒤를 돌아보았다. 거리에는 아무도 없었다. “일 좀 거들어 줄 수 있겠습니까?” 하고 그는 느닷없이 물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러겠노라고 고개를 끄덕였다. “번역해야 할 일이 좀 있다”고 하면서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일할 만한 장소를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집이나, 혹은 경찰에 잘 알려진 사람이 있는 곳은 안 됩니다.”

며칠 뒤에 나는 한 작은 아파트에 있는 책상에 앉아 일하게 되었다. 그 집주인은 내가 거의 알지 못하는 노부부였다. 이 노부부는 아버지의 환자였으며 성서 연구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사람들이었다. 이리하여 나는 교도소에서 독일어를 공부한 것이 가치 있는 일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당시 우리는 서적을 독일어에서 체코어로 번역하였기 때문이다.

몇 주 뒤, 파우케르트 형제를 포함하여 전파 활동을 인도하던 그리스도인 형제들이 투옥되었다. 하지만 우리의 전파 활동은 중단되지 않았다. 어머니와 나를 포함하여 여자들이 성서 연구 집단을 돌보고 그리스도인 봉사의 직무를 수행하는 일을 도왔다. 동생 파벨은 아직 십대였지만 배달원으로 봉사하면서, 이 나라에서 체코어를 사용하는 지역을 두루 다니며 서적과 조직의 지시를 전달하였다.

사랑하는 반려자

1957년 말에, 지난 1952년에 체포되어 15년 형을 선고받았던 야로슬라프 할라가 치료를 받도록 잠시 석방되었다. 동생이 즉시 그와 연락하였으며, 곧바로 야로슬라프는 다시 한 번 형제들을 돕는 일에 온전히 가담하게 되었다. 여러 언어에 능통한 야로슬라프는 번역 일을 거의 도맡아서 하기 시작하였다.

1958년 중반의 어느 날 저녁, 야로슬라프는 동생과 나에게 함께 걷자고 하였다. 조직 일을 토의하기 위해서 늘 이렇게 해 왔는데, 우리가 사는 아파트는 도청당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야로슬라프는 동생과 개인적으로 이야기를 나눈 다음 그에게 공원 벤치에서 기다려 달라고 하였다. 그 동안 우리 두 사람은 계속 걸었다. 내가 맡은 일에 관해 간단하게 대화를 나눈 뒤, 그는 건강도 좋지 않고 장래도 불투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자기와 결혼해 달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깜짝 놀랐으나 깊이 존경하는 사람에게서 받은 진지하고도 솔직한 청혼인지라, 망설이지 않고 승낙하였다. 우리가 약혼을 하게 되자, 나는 기름부음받은 그리스도인인 야로슬라프의 어머니와 가깝게 지내게 되었다. 야로슬라프의 부모는 1920년대 말에 프라하에 있던 초기 증인들 가운데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두 사람 모두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나치에 의해 투옥되었으며, 야로슬라프의 아버지는 공산당 치하에서 1954년에 옥사하였다.

결혼하기 전에 야라(우리는 야로슬라프를 그렇게 불렀음)가 당국에 소환되었다. 당국은 그에게 만성 늑막염 수술—당시 그 수술을 받으려면 수혈을 받아야 하였을 것임—을 받든가 그렇지 않으면 남은 형기를 복역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였다. 야라는 수술받기를 거부하였으므로, 거의 10년 이상의 형기를 복역해야만 하였다. 나는 그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시험받았지만 용감하였던 시기

1959년 초에 야라는 투옥되었고, 얼마 후 우리는 그에게서 잘 지내고 있다는 편지를 한 통 받았다. 그러다가 아주 오래간만에 날아온 편지 한 통이 우리에게 충격을 주었다. 그 편지에는 후회스럽고 슬프고 두렵다고 쓰여 있었는데, 마치 야라가 신경 쇠약에 걸려 있는 것 같았다. 야라의 어머니는 “이건 다른 사람이 쓴 게 분명”하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필체였다!

야라의 어머니와 나는 각기 그에게 편지를 써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신뢰심을 분명히 밝힘으로 그를 격려하였다. 몇 주 뒤에 다른 편지가 날아왔는데, 더욱 당혹하게 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내 아들이 이런 편지를 쓸 리가 만무”하다고 야라의 어머니는 다시 한 번 말하였다. 하지만 그의 필체가 분명하였으며 야라만의 독특한 표현들도 들어 있었다. 더는 편지도 받지 못하였고, 면회도 허락되지 않았다.

그와 비슷하게 야라도 우리에게서 왔다는 당혹스러운 편지를 받았다. 어머니의 편지에는 늙은 어미만 홀로 남겨 놓고 떠나 버렸다고 꾸짖는 내용이 들어 있고, 내 편지에는 그토록 오랫동안 그를 기다려야 하는 것에 이제는 진력이 났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 편지들 또한 우리의 필체와 표현 방식을 완전히 모조한 것이었다. 야라 역시 처음에는 당혹해하였지만, 우리가 그런 편지를 쓸 리가 없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하루는 누군가 문간에 나타나서 작은 꾸러미를 하나 건네 주고는 황급히 사라졌다. 그 안에는 담배를 말았던 종이가 수십 장 들어 있었는데, 거기에는 글씨가 깨알같이 적혀 있었다. 야라는 우리가 보낸 것으로 생각되는 편지들과 검열을 통과하지 못한 자기의 편지 여러 통을 베껴 보냈다. 증인이 아닌 재소자가 출감하면서 몰래 가지고 나온 이 편지를 받아 보고 나서, 우리는 참으로 안심이 되어 여호와께 얼마나 깊이 감사를 드렸는지 모른다! 지금까지도 우리는 우리의 충절을 깨뜨리려는 이런 마귀적인 시도가 어떻게, 누구에 의해 배후 조종되었는지 알지 못한다.

얼마 뒤에 야라의 어머니는 아들을 면회해도 좋다는 허락을 받았다. 그 때마다, 나는 야라의 어머니를 따라 교도소 입구까지 갔으며 이 자그맣고 연약한 여인이 대담하게 행동하는 것을 지켜 보았다. 야라의 어머니는 교도관이 감시하는 가운데, 아들의 손을 잡으면서 가능한 한 가장 작게 사진 촬영한 서적을 건네 주곤 하였다. 발견되는 날에는 특히 아들이 가혹한 처벌을 받게 될 것이었지만, 야라의 어머니는 여호와께 의지하였다. 영적인 건강을 유지하는 것이 언제나 가장 중요한 일임을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 뒤, 1960년에 일반 사면이 선포되면서 증인들이 대부분 석방되었다. 야라도 집으로 돌아왔으며, 우리는 몇 주 뒤에 행복한 신혼 부부가 되었다.

내 생활 방식의 변화

남편 야라는 여행하는 봉사에 임명되어 전국을 두루 다니며 형제들의 유익을 위해 섬겼다. 1961년에 남편은 이 나라에 있는 체코어를 사용하는 지역에서 제1기 천국 전도 강습을 조직하도록 임명받았고, 그 이후로도 그 강습의 여러 학급을 감독하였다.

1968년에는 체코슬로바키아에 정치적인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이 곳의 증인 상당수가 이듬해에 독일 뉘른베르크에서 개최된 여호와의 증인의 “지상의 평화” 국제 대회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당국은 나의 남편에게는 출국을 허락하지 않았다. 일부 형제는 그 훌륭한 대회를 슬라이드 사진에 담았으며, 남편은 전국을 두루 다니면서 이 사진들을 중심으로 한, 믿음을 강화시켜 주는 프로그램을 제공하는 일에 참여하는 특권을 누렸다. 많은 사람은 이 프로그램을 거듭거듭 시청하고자 하였다.

우리는 이것이 남편이 형제들을 방문하는 마지막 기회가 될 줄은 전혀 몰랐다. 1970년 초에 남편의 건강은 급속도로 악화되었다. 남편은 평생 만성 늑막염을 앓으면서 견뎌 왔었는데, 늑막염의 영향으로 신장까지 나빠졌고, 치명적인 신부전이란 진단이 나왔다. 남편은 마흔여덟 살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견딤

나는 그토록 깊이 사랑하던 사람과 사별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하느님의 조직 내에서 즉각적인 도움이 베풀어졌다. 내가 성서 서적을 번역하는 일에 참여하도록 허락된 것이다. 마치 이어달리기에서처럼, 남편이 나에게 배턴을 넘겨 주어 내가 남편이 지금까지 해 온 일의 일부를 계속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유럽의 많은 우리 형제들은 공산당의 금지령하에서 40여 년 동안 여호와를 섬겨 왔다. 그러던 중, 1989년에 철의 장막이 제거되면서 이 곳 사람들의 생활이 극적으로 변하기 시작하였다.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프라하의 거대한 스트라호프 스타디움에서 대회를 개최하게 될 날을 꿈꾸어 왔지만, 이 꿈이 실현되리라고는 결코 생각지 못하였다. 그런데 1991년 8월에 7만 4000명 이상이 그 스타디움에 함께 모여 기쁨에 넘친 숭배를 드릴 때 그 일이 놀랍게 실현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는 이제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1993년 1월에 그 나라가 두 나라—체코 공화국과 슬로바키아—로 나누어졌기 때문이다. 1993년 9월 1일, 체코 공화국이 여호와의 증인을 공식 인가해 주었을 때, 우리는 얼마나 기뻐하였는지 모른다!

나는 지금까지의 인생 경험을 통하여, 여호와께서는 언제든지 우리를 위해 축복을 준비해 놓으신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단지 우리의 날을 계수하는 방법을 여호와께 가르침받기만 하면 된다. (시 90:12) 나는 이 사물의 제도에서 내 인생의 남은 날을 계수하는 방법을 가르쳐 달라고 하느님께 한결같이 기도하고 있다. 하느님의 신세계에서 앞에 놓인 셀 수 없는 날 동안 그분의 행복한 종들 가운데 포함될 수 있도록 말이다.

[19면 삽화]

나의 어머니와 아버지

[21면 삽화]

금지령하에 있던 중인 1949년에 숲 속에서 가졌던 모임. 1. 남동생 파벨, 2. 어머니, 3. 아버지, 4. 나, 5. 할라 형제

[22면 삽화]

남편 야라와 함께

[23면 삽화]

시어머니 그리고 시어머니가 몰래 아들에게 건네 준, 사진 촬영한 서적

[24면 삽화]

현재 프라하 지부에서 일하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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