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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생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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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생활함
  • 깨어라!—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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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6
깨96 4/22 12-18면

공산주의 국가에서 하느님에 대한 믿음에 따라 생활함

온드레이 카들레츠의 체험담

때는 1966년 여름, 나는 고향인 체코슬로바키아의 프라하에서 관광 안내를 하고 있었습니다. 새로 발견한 믿음에 대해 열심이 있었던 나는, 그 관광단에게 이 도시의 인상적인 교회들과 사원들을 보여 주면서 하느님에 관해 이야기하였습니다.

“여호와의 증인이시죠?” 하고 한 미국인 경제학 교수가 물었습니다.

“아니요.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서는 들어 본 적이 없는데요. 저는 로마 가톨릭교인입니다.” 나의 대답이었습니다.

하느님을 믿는 사람이 되다

나는 교육, 정치 및 의학 분야에서 저명하였던 부모 밑에서 자랐습니다. 1944년에 내가 태어나고 그 이듬해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지 얼마 안 있어 아버지는 공산주의자가 되었습니다. 사실상 아버지는 공산주의 개혁 운동을 일으키는 데 함께 참여하였으며, 1966년에는 프라하에 있는 경제 대학교의 총장이 되었습니다. 2년 후에 아버지는 체코슬로바키아 교육부 장관에 임명되었는데, 그 당시 체코슬로바키아는 무신론을 신봉하는 공산주의 국가였습니다.

어머니는 매우 정직하고 재능이 많은 여성이었습니다. 어머니는 안과 의사였는데, 이 나라 최고의 권위자라는 평판을 얻고 있었습니다. 그렇지만 어머니는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무료로 치료해 주곤 하였습니다. 어머니는 “자기에게 주어진 재능이 무엇이든, 그 재능을 지역 사회와 국가의 이익을 위해 사용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늘 말하였습니다. 어머니는 내가 태어났을 때, 출산 휴가조차 받지 않았는데, 병원에서 계속 일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나는 학업 성적이 우수할 것으로 기대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너보다 더 잘하는 아이가 있니?” 하고 묻곤 하였습니다. 나는 경쟁을 즐기게 되었는데, 학교에서 흔히 우등상을 탔기 때문입니다. 나는 러시아어와 영어와 독일어를 배웠으며, 공산주의 국가들과 그 밖의 나라들을 널리 여행하였습니다. 종교적 개념들을 터무니없는 미신으로 논박하는 일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무신론을 온전히 받아들이기는 하였지만, 무신론이 정치적인 면으로 표출되는 것은 몹시 싫어하게 되었습니다.

겨우 스물한 살이던 해인 1965년에 영국을 여행한 것은 나에게 깊은 영향을 미쳤습니다. 나는, 확신 있게 그리고 논리적으로 최고 존재자에 대한 믿음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프라하로 돌아온 후에 나는 로마 가톨릭교인인 한 친지에게서 이러한 권고를 들었습니다. “그리스도교에 관해 읽지 말게. 성서를 읽어 보게.” 나는 그의 말대로 했습니다. 성서를 다 읽는 데는 3개월이 걸렸습니다.

나에게 감명을 준 것은, 성서 필자들이 그 소식을 제공하는 방식이었습니다. 그들은 솔직하고 자기 비판적이었습니다. 나는 그들이 말하는 웅대한 장래는 오직 인격체이신 하느님만이 구상해서 제시하실 수 있는 것임을 믿게 되었습니다.

여러 달 동안 개인적으로 성서를 읽고 묵상하고 나서, 나는 아버지와 벗들을 마주 대할 준비가 되었다고 생각하였습니다. 나는 그들이 새로 발견한 나의 믿음에 이의를 제기할 것임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 후 나는 열성적인 개종 권유자가 되었습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은 누구든—서두에서 언급한 미국인 교수와 같은 사람도—나의 개종 권유를 받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나는 심지어 침대 위쪽 벽에 십자가상을 걸어 놓아 누구든지 나의 믿음을 알아볼 수 있게 하였습니다.

하지만 어머니는 내가 도저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반대하였는데, 내가 열성적인 공산주의자인 아버지를 무척 닮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나는 완강하게 밀고 나갔습니다. 나는 성서를 두 번, 세 번 다시 읽었습니다. 그 무렵 나는, 한층 더 진보하려면 지도를 받을 필요가 있음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의 노력이 보람을 거두다

나는 로마 가톨릭 교회와 접촉하였습니다. 젊은 사제의 주요 관심사는 나에게 교회의 교리를 가르치는 것이었고, 나는 온전히 그 교리를 받아들였습니다. 그 후, 1966년에—아버지에게는 창피스러운 일이었지만—나는 세례를 받았습니다. 사제는 나에게 물을 뿌린 후에 성서를 읽으라고 권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사제는 이렇게 덧붙였습니다. “교황께서는 이미 진화론을 수용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지 말기 바랍니다. 우리는 잡초와 밀을 구분할 것입니다.” 나는 내게 믿음을 심어 준 그 책이 의문시되어야 한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편 1966년 가을에 나는 가톨릭 집안 출신인 한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나의 믿음을 전하였습니다. 그 친구 역시 성서를 잘 알고 있었고, 나에게 아마겟돈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이었습니다. (계시 16:16) 그 친구는 자기가 여호와의 증인과 접촉하고 있다고 말하였습니다. 증인들에 대해 내가 처음으로 들었던 때는 약 2개월 전에, 서두에서 언급한 관광 안내를 하던 때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그 친구의 종파가 내가 믿는 강력하고 부유하며 신도가 많은 로마 가톨릭 교회에 비해 보잘것없다고 생각하였습니다.

토론을 거듭해 가면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주요 쟁점을 조사하였습니다. 첫째, 로마 가톨릭 교회는 1세기 그리스도교를 계승한 것인가? 둘째, 무엇을 궁극적인 권위로 간주해야 하는가? 교회인가, 아니면 성서인가? 셋째, 창조에 관한 성서 기록과 진화론 중 어느 것이 옳은가?

우리 두 사람 다 성서를 믿음의 근원으로 여겼기 때문에, 가톨릭 교회의 가르침이 초기 그리스도교의 가르침과는 매우 상이하다는 친구의 설명을 납득하는 데는 어려움이 전혀 없었습니다. 예를 들어, 나는 교회의 주요 가르침인 삼위일체가 예수 그리스도와 사도들의 가르침에 근거한 것이 아님을 가톨릭 교회의 자료들에서조차 인정한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점은 우리에게 그와 관련된 질문인, ‘무엇이 우리에게 궁극적인 권위가 되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을 제기하였습니다. 나는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 즉 “로마 로쿠타 에스트; 카우사 피니타 에스트” 다시 말해서 “로마가 말하면, 그것이 결론이다”라는 말을 인용하였습니다. 그러나 친구는 하느님의 말씀인 성서가 우리에게 최고의 권위가 되어야 한다는 견해를 피력하였습니다. 나는 사도 바울의 이러한 말에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거짓말쟁이로 밝혀질지라도, 하느님은 참되심이 밝혀지기를 바랍니다.”—로마 3:4.

마침내 친구는 나에게 「진화 대 신세계」(Evolution Versus the New World)라는 제목이 붙은 타자기로 친 낡은 사본 한 부를 주었습니다. 체코슬로바키아에서는 1940년대 후반부터 여호와의 증인이 금지되었기 때문에, 증인들은 출판물의 사본을 만들었고 그것을 누구에게 줄 것인지 신중하게 고려하였습니다. 이 소책자를 읽고 나서 나는 그 안에 진리가 들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친구는 나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습니다. 그는 한번에 성서 연구 보조서인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몇 페이지 분량을 빌려 주었고, 우리는 그것을 함께 토론하였습니다.

이러한 토론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되어, 1966년 크리스마스 철에 서독에서 친구들이 나를 보러 프라하로 왔습니다. 대화 중에 한번은, 그 친구들이 그리스도인들은 위선적인 전쟁 도발자라고 조소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NATO 회원국의 병사로서, 공산주의 바르샤바 조약국에 사는 그리스도교인이라고 공언하는 너와 싸우게 될 수도 있지” 하고 그들은 말하였습니다. 그들의 결론은 이러하였습니다. “위선적인 것보다는 냉소적인 편이 낫지.” 나는 어쩌면 그들의 말이 옳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다음 번 성서 연구 때, 친구에게 참 그리스도인은 전쟁과 그것을 위한 훈련과 관련하여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물어 보았습니다.

내가 직면한 결정들

친구의 명확한 설명에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라는 성서의 가르침과 일치하게 살려면, 나의 생활과 계획하던 직업에 극적인 변화가 있어야 하였습니다. (이사야 2:4) 다섯 달 뒤 의과 대학을 졸업할 예정이었으며, 그 후 병역 의무 기간을 보내야 하였습니다. ‘어떻게 해야 하지?’ 나는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래서 하느님께 기도하였습니다.

여러 날 심사 숙고한 후에, 참 그리스도인이 평화로운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요구 조건을 따르지 않는 일에 대해서 변명할 만한 근거를 찾을 수 없었습니다. 대학을 졸업한 후에, 나는 양심적 병역 거부자로 선고받을 때까지 어느 병원의 일자리를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 후 피를 멀리하는 것에 관해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내 직업이 수혈하는 일과 관련될 수 있음을 알게 된 나는 병원에서 일하는 것을 그만두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사도 15:19, 20, 28, 29) 이 결정 때문에, 나는 여기저기로부터 공공연히 나쁜 평판을 얻게 되었습니다.

아버지는 내가 고의로 말썽을 일으켜 아버지의 정치 경력을 망치려고 하는 것이 아님을 확인하고 나서는, 이 일에 개입하여 의무 군복무 시기를 1년간 연기시켜 주었습니다. 1967년, 그 해 여름은 나에게 특히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내가 처한 상황은 이러하였습니다. 나는 최근에 시작한 성서 연구생이었으며, 성서 연구 사회자는 내가 그 때까지 접촉한 유일한 증인이었는데, 그 해 여름 다른 곳에 가 있었습니다. 더구나 개인 연구용으로 그가 남겨 놓고 간 것은 「“하나님은 참되시다 할지어다”」 책의 몇 개 장뿐이었습니다. 이것과 성서가 나에게 영적 지침을 베풀어 주는 유일한 근원이었습니다.

그 후 나는 다른 증인들을 알게 되었으며, 1968년 3월 8일에 여호와 하느님에 대한 헌신의 상징으로 물침례를 받았습니다. 이듬해에는 영국의 옥스퍼드 대학에서 2년간의 대학원 과정을 밟으라는 제의가 들어왔습니다. 그 제의를 받아들여서 영국으로 건너가라고 권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증인이 금지되지 않은 나라에서 영적으로 진보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동시에 내가 훌륭한 전문 직업인이 될 준비를 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한 그리스도인 장로는, 나의 봉사가 영국에서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만큼 필요한 것은 아니라고 말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세속 교육을 더 받으라는 그 제안을 거절하기로 결심하였고, 우리의 지하 전파 활동을 돕기 위해 체코슬로바키아에 머물렀습니다.

1969년에 나는 천국 전도 학교 강습 과정에 참석하라는 초대를 받았는데, 이 과정의 특징은 그리스도인 감독자들에게 특별히 마련된 교훈을 베푸는 것이었습니다. 같은 해에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최우수 청년 약리학자에게 수여하는 장학금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스위스에서 열린 국제 약리학 협회의 학술 회의에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한 과학자가 견해를 바꾸다

1970년에 내가 참석한 한 강의에서는, 프란티셰크 비스코칠이라는 학자가 신경 전도라는 까다로운 주제로 설명하였습니다. 그는 한 생물체 내에서 어떤 필요가 생길 때마다 놀라운 해결책이 마련된다고 말하였습니다. “자연이라는 마법사는 이 일을 해내는 방법을 알고 있습니다”라고 그는 결론을 맺었습니다.

강의가 끝난 후 나는 그에게 접근하였습니다. “생물체 내에서 볼 수 있는 탁월한 설계에 대한 영예는 하느님께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 질문이 그를 당황하게 하였는데, 그는 무신론자였기 때문입니다. 그는 다른 각도의 질문으로 대답하였습니다. “악이 어디에서 생겼습니까?” 그리고 “그토록 많은 아이들이 고아가 된 데 대한 책임이 누구에게 있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내가 합리적이고 성서에 근거한 대답을 하자 그의 관심은 고조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서에서 구체적인 과학 지식을, 이를테면 세포의 구조에 관한 설명을 제시하여 사람들이 성서의 저자가 창조주이심을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하지 않은 이유가 무엇인지를 질문하였습니다. 나는 “어느 쪽이 더 어렵겠습니까? 설명하는 것일까요, 창조하는 것일까요?” 하고 되물었습니다. 나는 그에게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책을 빌려 주었습니다.

프란티셰크는 그 책을 대충 읽어 본 후에 내용이 빈약하고 부정확한 책이라고 단정해 버리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또한 일부다처 관습, 다윗의 간음 및 다윗이 무고한 사람을 살해한 일에 관해 성서에서 알려 주는 내용에 대해 비난하였습니다. (창세 29:23-29; 사무엘 하 11:1-25) 나는 그의 이의를 논파하면서, 성서는 하느님의 종들의 공공연한 범죄뿐만 아니라 그들의 결점까지도 솔직하게 알려 준다는 점을 지적하였습니다.

결국, 한번은 대화 중에 프란티셰크에게, 선한 동기가 없는 사람이라면, 진리에 대한 사랑이 없는 사람이라면 그런 사람에게는 어떤 논증이나 이유도 하느님의 존재를 확신시키지 못할 것이라고 말해 주었습니다. 내가 막 떠나려고 하던 참인데, 프란티셰크가 나를 멈춰 세우더니 성서 연구를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사람은 진화되었는가 혹은 창조되었는가?」 책을 다시 읽겠다고, 이번에는 마음을 열고 읽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후 그의 태도는 완전히 바뀌었는데, 그 증거로 그의 한 편지 가운데는 이러한 인용문이 들어 있었습니다. “그 날에 자고한 자는 굴복되며 교만한 자는 낮아지고 여호와께서 홀로 높임을 받으실 것이[라].”—이사야 2:17.

1973년 여름에 프란티셰크와 그의 아내는 여호와의 증인으로 침례를 받았습니다. 현재 그는 프라하에 있는 한 회중의 장로로 봉사하고 있습니다.

금지령 아래서 전파하다

금지령 아래서 우리는 매우 신중하게 야외 봉사를 수행하라는 지시를 받았습니다. 한번은 나보다 연소한 증인이 나와 함께 전파 활동을 하고 싶다고 거듭 요청하였습니다. 그는 여호와의 증인의 조직에서 인도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직접 봉사하러 가는지 궁금해하였습니다. 우리는 비공식 봉사를 하면서 여러 가지 유익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하지만 나중에는 어떤 남자를 만나게 되었는데, 내가 그 당시에는 눈치 채지 못하였지만 그 남자는 국가 비밀 경찰의 사진첩에 나오는 사진을 통해서 내 얼굴을 알아보았던 것입니다. 나는 구속되진 않았지만, 그 이후로 당국의 엄밀한 감시를 받아야 하였고, 그것은 내가 지하 전파 활동을 효율적으로 수행하는 데 방해가 되었습니다.

1983년 여름에 나는 그 이전에 여러 해 동안 해 오던 대로, 이 나라의 외딴 지역에서 며칠간 보내면서 비공식 증거를 수행하려고 일단의 젊은 증인들을 조직하였습니다. 나는 현명한 충고를 듣지 않고 더 편리하다는 점 때문에 대중 교통을 이용하는 대신 내 차를 몰았습니다. 우리는 잠시 멈추어서 몇 가지 물건을 사려고 백화점 앞에 차를 세웠습니다. 물건 값을 치르면서 나는, 젊은 점원을 가리키며 나이 든 종업원에게 “앞으로는 우리 모두가 젊어질 수 있을 겁니다” 하고 말하였습니다. 그 여자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나는 계속해서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장래는 인간의 노력으로 이룰 수 없는 일이지요. 위로부터 오는 도움이 필요하겠지요.”

더 이상 반응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백화점에서 나왔습니다. 내가 모르게, 그 종업원은 내가 종교적인 견해를 권장하고 있다고 의심하면서 내가 물건 꾸러미를 차에 싣는 것을 창문 너머로 지켜 보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그 여자는 경찰에 신고하였습니다. 여러 시간 후에, 그 마을의 다른 지역에서 비공식 증거를 하고 나서 짝과 함께 주차해 둔 곳으로 돌아왔습니다. 갑자기 경찰관 두 명이 나타나더니 우리를 감금하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경찰서에서 여러 시간 심문을 받고 나서야 가도 된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가장 먼저 떠오른 생각은, 그 날 받은 관심자들의 주소를 처분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주소 쪽지들을 변기에 버리려고 화장실에 갔습니다. 그러나 변기에 물을 내리기도 전에 한 경찰관의 억센 손이 나를 가로막았습니다. 그는 변기에서 쪽지들을 꺼내어 물기를 털어냈습니다. 이 때문에 나는 중압감을 받았는데, 나에게 주소를 알려 준 사람들이 이제 위험에 처하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 후 우리 모두는 우리가 묵던 호텔로 끌려왔는데, 경찰이 이미 방을 수색한 뒤였습니다. 그러나 경찰은, 우리가 관심자들의 주소 쪽지를 신중하게 숨겨 둔 것도 아닌데도 더 이상 주소를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나중에 내가 신경 약리학자로서 일하던 직장에서 나는 불법 활동에 연루되었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질책당하였습니다. 또한 체코슬로바키아의 전파 활동을 돌보던 감독자에게 책망을 받았는데, 그는 그 일이 있기 전에 나에게 봉사하러 갈 경우 내 차를 사용하지 말라고 주의를 준 적이 있었습니다.

징계에 순응하다

1976년에 나는 체코슬로바키아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전파 활동을 감독하는 위원회에서 봉사하도록 임명을 받았었습니다. 그러나 앞서 언급한 그러한 일들에서 어설프게 판단력을 사용한 탓으로 내 생활이 비밀 경찰의 엄밀한 감시를 받게 되었기 때문에 나는 전국 위원회에서 봉사하는 일에서 그리고 여러 가지 다른 특권에서 해임되었습니다. 그러한 특권들 가운데 내가 특히 소중하게 여긴 것은 여행하는 감독자와 파이오니아들을 위한 강습에서 가르치는 특권이었는데, 파이오니아란 전 시간 봉사자를 말합니다.

나는 주어진 징계를 받아들였지만, 1980년대 중반에서 후반에 이르는 이 기간은 나에게 있어서 자기 검토를 하는 힘든 기간이었습니다. ‘내가 좀더 분별력 있게 일하고 더는 경솔하지 않게 행동하는 법을 배울 수 있을 것인가?’ 시편 30편 5절은 이렇게 말합니다. “저녁에는 울음이 기숙할찌라도 아침에는 기쁨이 오리로다.” 그 아침이, 1989년 11월에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된 일과 더불어 나에게 도래하였습니다.

놀라운 축복

우리의 봉사의 직무에 자유롭게 참여하고 뉴욕 브루클린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본부와 공개적으로 연락을 취하게 된 것은 참으로 큰 변화였습니다! 얼마 후에 나는 여행하는 감독자로 임명되었으며, 1990년 1월에 이 활동을 시작하였습니다.

그 후 1991년에 나는 영국 맨체스터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는 특권을 받았습니다. 두 달을 보내면서 장성된 그리스도인 남자들과 교제를 즐기고 그들에게서 교훈을 받는 것은 참으로 큰 축복이었습니다! 매일 일정 시간 우리 학생들은 작업하도록 임명을 받았는데, 이 임명은 강도 높은 학구적인 교육에서 받는 긴장감을 덜어 주었습니다. 나는 유리창을 닦는 일에 임명되었습니다.

영국에서 돌아온 후 즉시 나는, 8월 9일에서 11일 사이에 프라하의 거대한 스트라호프 스타디움에서 개최될 여호와의 증인의 중요한 모임을 준비하는 일을 돕기 시작하였습니다. 이 행사에는 여러 나라에서 온 7만 4587명이 자유롭게 모여서 우리 하느님 여호와를 숭배하였습니다!

이듬해에 나는 신경 약리학자로서의 세속 일을 그만두었습니다. 나는 거의 사 년 동안 프라하에 있는 지부 사무실에서 일해 왔으며, 체코 공화국에서의 여호와의 증인의 활동을 감독하는 위원회에서 다시 봉사하고 있습니다. 최근에는 여호와의 증인에게 기증된 새로운 10층 건물이 개축되었고 지부 사무실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1994년 5월 28일, 이 훌륭한 시설이 여호와의 봉사를 위해 봉헌되었습니다.

내가 누려 온 가장 큰 축복들 가운데는 친척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성서 진리를 전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아직 증인이 되지는 않았지만 지금은 내가 하는 활동에 대해 호의적입니다. 지난 몇 년 동안 아버지와 어머니는 우리의 일부 모임에도 참석하였습니다. 나의 간절한 희망은 아버지와 어머니가 다른 수백만 명의 마음이 정직한 사람들과 함께 겸손하게 하느님의 왕국 통치에 순응하여, 하느님께서 자기를 섬기기로 결심한 사람들 앞에 예비해 두신 영원한 축복을 누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기사에 언급된 출판물들은 뉴욕 법인 워치타워 성서 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것임.)

[12면 삽화]

대학생 때의 모습

[13면 삽화]

체코슬로바키아의 교육부 장관이 된 아버지와 저명한 안과 의사였던 어머니

[15면 삽화]

과학자이자 무신론자였는데 증인이 된 프란티셰크 비스코칠

[16, 17면 삽화]

공산주의가 붕괴된 이후로 여호와의 증인은 동유럽에서 큰 대회를 여러 번 개최하였다. 7만 4000명이 넘는 사람이 1991년에 프라하에서 열린 이 대회에 참석하였다

[18면 삽화]

영국에서 열린 봉사 훈련 학교에 참석하였을 때 내가 임명받은 일

[18면 삽화]

1994년 5월 28일에 봉헌된 프라하에 있는 지부 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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