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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둠
  • 깨어라!—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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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고 기쁨으로 거둠

“당신의 은퇴 생활을 햇빛 찬란한 스페인에서 즐기라!” 수백만 명의 유럽인들이 이 유혹적인 제의를 받아들여 그 곳으로 이주하였습니다. 내 나이 59세에 이르자, 나 역시 모든 것을 팔아 영국에서 스페인으로 이주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하지만 나는 햇빛과 여가보다 더 나은 것을 찾고 있었습니다.

나는 스페인에서 가장 습도가 높은 도시 중 하나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로 가기로 정하였습니다. 나의 목표는 태양 아래서 느긋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아니라 전 시간 봉사자로 일하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일찍이 22년 전, 나는 주위의 상황으로 인해 스페인에서의 복음 전파 봉사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었는데, 그 나라로 간 것은 그러한 봉사의 필요성이 더 큰 곳이 그 지역이었기 때문입니다. 그 곳으로 다시 돌아가는 것이 늘 나의 바람이었는데, 이제 드디어 그 뜻을 이루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적응하는 일은 예상했던 것만큼 쉽지는 않았습니다. 첫 달은 실로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내 생애에서 그토록 지쳤던 적은 없었다고 생각됩니다. 나는 승강기가 없는 아파트 5층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매일 되도록이면 많은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파하려고 애쓰면서, 층계들을 수없이 오르기도 하고, 산티아고의 비탈진 거리들을 힘겹게 오르내리기도 하였습니다. 그 달에 기진 맥진하게 되자, 의문들이 엄습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내가 올바른 결정을 한 것일까? 이런 유의 활동을 하기에는 너무 나이 든 것은 아닐까?

그러나 둘째 달에, 나는 힘이 되살아나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것은 마치 장거리 달리기 선수가 기력을 되찾는 것과도 같았습니다. 사실상, 내 생애의 가장 행복한 시기 중 하나로 접어든 것입니다. 여러 해 동안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린 후에, 나는 거두는 일의 기쁨을 맛보기 시작하였습니다. (시 126:5) 이제 설명해 보겠습니다.

기뻤던 때

아내 팻과 나는 1961년에 스페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그 당시에 이 곳에서는, 여호와의 증인의 봉사 활동이 공식적인 인가를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전파 활동 임지는 햇빛 찬란한 도시 세비야였으며, 그 곳에는 단지 25명 가량이 전파 활동에 참여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봉사를 하다가, 나는 집에 페인트칠을 하고 있던 한 프랑스 남자와 이야기를 하게 되었습니다. 다음날, 한 부인이 우리 부부에게 다가오더니, 그 전날에 우리가 페인트칠을 하던 어떤 남자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느냐고 물었습니다. 부인의 말은 그 사람이 자기 남편 프란시스코였다는 것입니다. 그 부인의 남편이 우리에 대하여 자세히 말해 주었기 때문에, 부인은 우리를 즉시 알아볼 수 있었습니다. “제 남편을 방문하고 싶다면, 그 양반은 지금 집에 있어요” 하고 부인은 우리에게 알려 주었습니다.

우리는 주저하지 않고 즉시 이 초대를 받아들였습니다. 오래지 않아서, 전 가족이 우리와 함께 성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얼마 후에, 프란시스코는 경제적인 이유로 프랑스로 돌아가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혹시 여호와의 증인과의 접촉이 끊기지나 않을까 걱정했습니다. 그러나 그가 떠난 뒤에 곧 우리는 그에게서 편지를 받고 안심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새로운 직장 상사가 자기에게 스페인에는 종교가 몇 개나 있느냐고 물었다고 했습니다.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두 개가 있지요” 하고 프란시스코는 조심스럽게 설명하였습니다. 우리의 활동이 아직은 합법화되지 않았기 때문에 그 이상 이야기하는 것은 지혜롭지 않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정말입니까?” 하고 상사가 물었습니다.

“실은, 세 개 있습니다. 저는 세 번째인 여호와의 증인에 속해 있습니다” 하고 프란시스코는 대답했습니다.

“참으로 반갑습니다. 나는 당신이 속한 회중에서 종으로 일합니다!”라고 상사는 응답하였습니다. 바로 그 날 저녁, 프란시스코는 여호와의 증인의 회중 집회에 참석하였다는 것입니다.

1963년에 우리는 세비야에서 발렌시아로 옮겼으며, 그 후 얼마 안 되어 바르셀로나로 옮겼습니다. 그 곳에서 나는 여행하는 봉사자로서 섬기기 위한 훈련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나서, 다시 발렌시아로 보냄을 받아 그 지역에서 여행하는 봉사자로 섬겼습니다. 그러나 이 즐거운 활동 분야에서 2년을 보낸 후에, 아내는 균형을 유지하는 면에서 어려움을 겪기 시작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걷는 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리는’ 시기가 시작된 것입니다.—시 126:5.

눈물을 흘린 때

어쩔 수 없이, 우리는 영국에서 치료를 받기 위해 스페인을 떠났습니다. 아내가 겪는 증세의 원인은 무엇이었습니까? 사람을 점점 더 무기력하게 만드는 퇴행성 질병인 다발성 경화증이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부작용 및 관련된 문제들로 인해 결국에는 목숨을 잃게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는 생활을 조정하고 이 질병을 현실로 받아들여야 하는 극히 어려운 시기에 직면하게 된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 기간 내내 시편 필자의 다음과 같은 말씀이 진리임을 실감하였습니다. “여호와께서 쇠약한 병상에서 저[빈약한 자를 권고하는 자]를 붙드[시나이다].”—시 41:3.

거의 십 년 동안 우리는 이 집 저 집으로 옮겨 다녔습니다. 아내가 소음에 매우 예민해서, 아내가 살기에 이상적인 장소를 물색하려고 애썼던 것입니다. 그러나 결국 그것은 불가능한 일임을 깨달았습니다. 아내는 휠체어를 사용하는 데 익숙해져야만 했습니다. 아내는 요리를 하고 그 외에도 많은 일을 수행할 수 있었지만, 제대로 움직일 수가 없어서 침울해하였습니다. 아내는 자기가 워낙 활동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신체적 무능함이 감정적 스트레스의 끊임없는 요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눈물과 함께 얻게 된 힘

나는 아내가 일어나고, 앉고, 옷 입고, 목욕하고, 침대에 드나드는 일을 돕는 방법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인 집회에 정기적으로 참석하는 일은 실로 도전이었습니다. 준비하는 일에 상당한 노력이 요구되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영적으로 강함을 유지하는 유일한 길은 우리 그리스도인 형제들과 연합하는 것임을 알았습니다.

나는 11년 동안 낮에는 제도공으로 일하면서, 집에서 아내를 돌봤습니다. 결국, 아내의 건강이 악화되어 내가 베풀 수 없는 전문적인 보살핌이 아내에게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아내는 주중에는 병원에 머물고, 주말에는 집에서 내가 아내를 돌보곤 하였습니다.

일요일마다 점심을 먹은 후에, 나는 아내를 공개 집회와 「파수대」 연구에 데리고 갔는데, 그 무렵에는 아내가 그 집회에만 겨우 참석할 수 있었습니다. 집회가 끝난 후에 다시 아내를 병원으로 데려다 주곤 하였습니다. 그러한 일과는 나를 매우 지치게 만들었지만, 그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그로 인하여 아내가 영적으로 강건함을 유지하였기 때문입니다. 때로는, 내가 그런 생활을 얼마나 오래 지탱할 수 있을까 의아해한 적도 있었지만, 여호와께서는 나에게 인내할 힘을 주셨습니다. 토요일 오전마다, 나는 전파 활동을 하도록 한 집단을 인도하고 나서 아내를 병원에서 데려오곤 하였습니다. 몹시 어려운 그 기간에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일과가 내가 계속 활동하는 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한편, 아내는 좋은 소식을 전파하기 위해 자기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있었습니다. 병원에서 아내는 자기를 돌봐 주는 간호사들과 두 건의 성서 연구를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헤이절이라는 사람은 여호와께 헌신할 단계까지 발전하였습니다. 안타깝게도, 아내는 헤이절이 침례받을 때 참석할 수 없었는데, 침례받기 직전인 1987년 7월 8일에 사망하였기 때문입니다.

아내가 사망한 때는 안위와 슬픔을 경험한 때였습니다. 아내의 고통이 끝난 것을 보게 되어 안위를 얻은 반면, 나의 반려자를 잃게 된 일로 깊은 슬픔에 잠겼습니다. 아내의 죽음은 큰 공허감을 남겼습니다.

다시 찾은 기쁨

이상하게 생각될지 모르지만, 아내와 나는 앞으로 내가 해야 할 일을 이미 결정해 놓았습니다. 아내의 생애가 그 끝에 가까워 옴을 우리 둘 다 알고 있었기에, 사별한 후에 내가 어떻게 하면 여호와를 가장 잘 섬길 수 있을지에 대하여 우리는 이야기하였습니다. 우리가 함께 내린 결정은 내가 스페인으로 돌아가서 중단할 수밖에 없었던 봉사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내가 사망한 지 삼 개월이 지난 다음, 내가 최선을 다해 봉사할 수 있는 곳을 알아보기 위해 스페인에 있는 여호와의 증인의 지부 사무실에 찾아갔습니다. 나는 특별 파이오니아 봉사자로 임명을 받았으며, 고풍스럽고 비가 많이 오는 도시인 산티아고데콤포스텔라에 임명되었습니다.

그 후 오래지 않아서, 지부 사무실로부터 막시미노라는 한 관심자의 주소가 적힌 짧은 서신을 받았습니다. 그를 집에서 만나려고 삼 주 동안 노력한 끝에 마침내 만나게 되었습니다. 한 지방 병원에서 청소부로 일하는 막시미노는 「평화로운 신세계에서의 생활」 전도지를 받았으며, 이미 「우리는 지상 낙원에서 영원히 살 수 있다」a책을 신청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방문했을 때는, 벌써 그 책을 세 번이나 읽은 뒤였습니다. 그는 자기가 성서를 그다지 많이 읽어 보지 못한 것에 대하여 사과하였는데, ‘구약’은 단지 한 번, ‘신약’은 두 번 읽었다는 것입니다. 그는 누군가가 자기를 방문해 주기를 기다리는 동안, 이 모든 일을 한 것입니다.

그는 또한 우리의 집회에 참석할 생각으로 왕국회관을 찾아간 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너무 소심해서 집회 장소에는 들어가지 않았습니다. 나는 그와 성서 연구를 시작하였으며, 그 주간에 그는 여러 집회에 참석하였습니다. 그는 진리를 열정적으로 받아들였지만, 인박인 흡연 습관과 싸워야 하는 실질적인 문제가 있었습니다. 여호와의 도움으로, 그는 마침내 흡연 습관을 버릴 수 있었으며, 지금은 침례받은 증인이 되었습니다.

많은 눈물에는 또한 기쁨이 따른다

스페인으로 돌아온 지 꼭 일 년 만에, 나는 다시 순회 감독자로 봉사하도록 초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임명을 받아들이기 전에, 나의 생활은 뜻밖의 전환점을 맞게 되었습니다. 나는 파키타라는 파이오니아를 만났는데, 그는 산티아고 부근에서 봉사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전 시간 봉사를 해 온, 홀몸이 된 여자였습니다. 우리는 곧 공통점이 많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1990년, 여행하는 봉사자로 일한 지 꼭 6개월 만에, 우리는 결혼하였습니다. 다시 기쁨이 찾아온 것입니다.

나와 마찬가지로, 파키타도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려’ 왔었습니다. 그가 받은 특별 파이오니아로서의 첫 임무는 비극적인 일로 손상되었습니다. 그들의 새 보금자리인 오렌세로 가구를 싣고 가는 도중에, 마주 오던 트럭이 차선을 넘어오는 바람에, 남편이 자동차 사고로 목숨을 잃었습니다. 남편의 사망 소식에 접했을 때, 파키타와 그의 열 살 난 딸은 오렌세에 와 있었습니다. 혹독한 사별의 고통에도 불구하고, 파키타는 장례를 치른 지 이틀 뒤에 계획대로 자기의 임무를 수행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여러 해 동안, 파키타는 전 시간 봉사를 계속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다시 비극이 닥쳤습니다. 또 자동차 사고로 당시 23세였던 그의 딸이 목숨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 고통이란 엄청난 것이어서, 오랫동안 슬픔이 가시지 않았습니다. 이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그의 일과 그리고 동료 그리스도인들로부터 받은 지원은 그가 회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 내가 1989년에 파키타를 알게 된 것은 그의 딸이 사망한 지 만 2년 뒤였습니다.

우리는 1990년에 결혼한 이래, 스페인에서 여행하는 봉사자로 섬기고 있습니다. 최근 몇 해는 우리 생애에서 가장 만족스러운 기간 중 하나이긴 했지만, 시련을 겪으며 살아온 것이 유감스럽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그 시련들이 우리를 긍정적인 면으로 틀잡아 주었다고 확신합니다.—야고보 1:2-4.

내가 배운 교훈

나는 아무리 혹독한 시련일지라도 긍정적인 면이 있다고 믿습니다. 시련은 우리에게 교훈을 가르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시련을 통해 나는 그리스도인 감독자에게 필수적인 특성인 감정 이입의 중요성을 배웠습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에 나는 아들이 신체 장애인인 어느 그리스도인 형제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습니다. 나는 그가 아들을 모든 집회에 데려가려고 매주 바치는 엄청난 노력에 대하여 온전히 이해해 주었습니다. 대화를 마치자, 그는 나에게 감사를 표했으며, 누군가가 자기 부부가 겪고 있는 어려움을 실제로 이해해 준 것은 처음이라고 하였습니다.

내가 배운 또 다른 중요한 교훈은 여호와를 의뢰하게 된 것입니다. 우리는 모든 일이 순조로울 때에는 자신의 힘과 능력에 의지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러나 호된 시련이 여러 해 지속되고, 자신의 힘만으로 대처할 수 없게 될 때, 우리는 여호와를 의뢰하는 법을 배우게 됩니다. (시 55:22) 하느님의 돕는 손길이 나로 하여금 계속 지탱할 수 있게 해주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언제나 대처하기 수월하였다는 말은 아닙니다. 아내가 투병 생활을 할 때 처음에는 때때로 화가 나기도 하고, 특히 내가 지칠 때에는 내 처지 때문에 좌절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후에, 나는 그런 감정에 대하여 죄책감을 가졌습니다. 나는 만성 질환에 걸린 환자들을 치료하는 데 전문적인 경험이 있는 동정심 많은 장로와 내 심정에 관해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내가 내 입장에서 잘해 나가고 있으며, 불완전한 사람으로서 오랫동안 긴장감에 시달리면서 그러한 면으로 잘못을 범하는 것은 흔히 있는 일이라고 나를 안심시켜 주었습니다.

파키타와 나는 현재 전 시간 봉사를 매우 즐기고 있지만, 우리는 언제나 축복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지 않으려고 다짐합니다. 여호와께서는 여러 가지 면으로 우리에게 상주셨고, 우리가 함께 할 수 있는 일, 곧 만족을 주는 할 일을 주셨습니다. 여러 해에 걸쳐, 우리는 눈물을 흘리며 씨를 뿌렸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기뻐 외치면서 거두고 있으니, 여호와께 감사드립니다.—레이먼드 커컵의 체험담.

[각주]

a 사단법인 워치 타워 성서 책자 협회 발행.

[21면 삽화]

함께 봉사의 직무를 즐기는 파키타와 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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