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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깨어라!—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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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1997
깨97 4/22 4-9면

프랑스에서 있었던 종교 전쟁들

프랑스 가톨릭교의 양대 지주인 기즈 공작과 그의 동생 샤를 즉 로렌의 추기경은 1562년 3월 1일 일요일에 무장 호위병들과 함께 말을 타고 파리 동쪽에 있는 바시 마을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바시에 있는 교회에 들러 미사에 참석하기로 하였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찬송가 소리가 들려 왔습니다. 예배를 보기 위해 헛간에 모인 수백 명의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부르는 노래였습니다. 호위병들이 완력으로 밀고 들어가자, 혼란이 뒤따랐고 그 와중에 서로 욕설을 퍼붓더니 급기야는 투석전이 벌어졌습니다. 병사들이 발포를 하는 바람에 수십 명의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죽고 수백 명이 부상을 당하였습니다.

이 학살의 발단이 된 사건들은 무엇이었습니까?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역사적 배경

16세기 상반기에 프랑스는 인구가 많고 경제적으로 번영하는 나라였습니다. 이처럼 경제적으로 호황을 누리고 인구가 증가하자, 좀더 영적이고 형제 사랑을 나타내는 형태의 가톨릭교를 실천하려는 노력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좀 덜 부유하더라도 더 거룩한 교회를 원하였습니다. 일부 교직자와 인본주의 학자들은 종교 개혁을 요구하며 고위 교직자들의 횡포와 그 밑에 있는 교직자들의 무능에 맞서 싸우려고 하였습니다. 개혁을 이루기 위해 애쓴 교직자로 가톨릭 주교인 기욤 브리소네가 있었습니다.

브리소네는 자기 교구인 모에서 모든 사람에게 성경을 읽도록 권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그리스도인 그리스어 성경을 프랑스어로 새로 번역하는 일을 재정적으로 지원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얼마 안 있어, 정통파 가톨릭교의 수호자인, 파리에 있는 소르본 신학 대학교가 브리소네에게 분노하며 그의 노력을 방해하였습니다. 그러나 이 주교는, 1515년부터 1547년까지 프랑스의 왕이었던 프랑수아 1세의 보호를 받았습니다. 그 당시 국왕 프랑수아 1세는 개혁에 대해 우호적인 입장을 취하였습니다.

하지만 프랑수아 1세는 공공 질서와 국가의 연합을 위협하지 않는 정도까지만 가톨릭 교회에 대한 비판을 관용하였습니다. 1534년에 프로테스탄트교의 과격주의자들은 가톨릭의 미사를 우상 숭배로 규탄하는 전단을 유포했으며, 심지어 왕의 침실 문에까지 전단을 붙였습니다. 그 결과, 프랑수아 1세는 태도가 돌변하여 혹독한 탄압을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잔인한 탄압

얼마 안 있어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기둥에 매달린 채 화형을 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에게 동조하는 많은 인본주의자들과, 새로 생겨난 프로테스탄트교를 신봉하는 사람들은 국외로 도피하였습니다. 당국은 서적을 검열하고 교사와 출판업자와 인쇄업자들을 단속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공식적인 반대의 화살은 전부 왈도파에게 돌아갔습니다. 왈도파는 성서 지향적인 소수 집단으로서, 프랑스 남동부 지역에 있는 여러 가난한 마을에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 중 일부는 기둥에 매달린 채 화형을 당했고, 수백 명이 학살당했으며, 그들의 마을 중 약 20군데가 약탈을 당하였습니다.—6면 네모 참조.

교회 내에서 개혁을 단행할 필요성을 깨닫자, 1545년 12월에 이탈리아의 트렌토에서는 가톨릭 주교들 간에 회의가 열렸습니다. 「케임브리지 현대사」(The Cambridge Modern History)에 의하면, 1563년에 이 회의가 끝났을 때 그 “전반적인 결과는 ·⁠·⁠· 프로테스탄트교를 뿌리뽑기로 결단을 내린 사람들의 권한이 강화된 것”뿐이었습니다.

전쟁의 전주곡

가톨릭 교회 내에서 개혁을 단행하려는 운동에 참여했던 많은 사람들은, 변화를 기다리는 데 지친 나머지 프로테스탄트교에 가담하였습니다. 1560년경에 프랑스의 많은 귀족들과 그들의 지지자들은 위그노에 가담하였는데, 당시에는 프로테스탄트교도들을 그렇게 불렀습니다. 위그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지게 되었고, 그들의 공개 모임은 때때로 분노와 적개심을 불러일으키는 원인이 되었습니다. 일례로, 1558년에는 수천 명의 사람들이 파리에 운집해 연속 나흘 동안 시편을 낭송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이 모든 일은 가톨릭 교회의 권력층 인사들과 가톨릭을 믿는 일반 사람들의 분노를 사게 되었습니다. 아버지인 프랑수아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앙리 2세는 로렌의 추기경인 샤를의 사주를 받아 1559년 6월에 에쿠앙 칙령을 내렸습니다. 이 칙령의 공식적인 목적은 “파렴치한 루터파 쓰레기”를 쓸어버리는 것이었습니다. 이 칙령을 발단으로 파리에서 위그노에 대한 일련의 탄압 조처가 취해졌습니다.

앙리 2세는 마상 무술 시합에서 입은 부상으로 몇 주 후 사망하였습니다. 그의 아들인 국왕 프랑수아 2세는 기즈 가문의 압력을 받아 프로테스탄트교를 버리지 않겠다고 고집하는 사람들을 사형에 처하게 하는 칙령을 다시 내렸습니다. 이듬해에 프랑수아 2세가 사망하자, 그의 어머니인 카트린 드 메디시스가 열살 된 그의 동생 샤를 9세를 대신하여 섭정을 하였습니다. 카트린의 유화 정책은 프로테스탄트교를 뿌리뽑기로 작정한 기즈 가문의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1561년에 카트린은 파리 근교 푸아시에서 세미나를 개최하여 가톨릭교와 프로테스탄트교 신학자들이 함께 모이게 하였습니다. 카트린은 1562년 1월에 내린 칙령에서 프로테스탄트교인들에게 도시 바깥에 모여 예배를 볼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가톨릭교인들은 분개하였습니다! 이것이 불씨가 되어 2개월 뒤,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바시 마을에 있는 헛간에서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을 학살하는 일이 있게 되었습니다.

처음 세 번의 전쟁

바시에서 일어난 살육을 계기로 첫 번째 종교 전쟁이 일어났고, 이 전쟁을 필두로 여덟 번의 종교 전쟁이 연이어 일어남으로, 프랑스는 1562년부터 1590년 중반까지 상호 살육의 공포에 빠져들었습니다. 정치적·사회적 쟁점도 관련이 있었지만, 대규모 유혈 사태는 주로 종교의 부추김으로 일어났습니다.

1562년 12월에 일어나 6000명의 사망자를 낸 드뢰 전투를 끝으로, 그 첫 번째 종교 전쟁은 막을 내렸습니다. 1563년 3월에 조인된 앙부아즈 평화 협정은 위그노에 속한 귀족들에게 제한적으로나마 특정 장소에서 예배를 볼 자유를 허락하였습니다.

“두 번째 전쟁의 도화선은 가톨릭교의 국제적 음모에 대한 위그노의 두려움이었다”고 「신 브리태니카 백과 사전」은 말합니다. 그 당시, 가톨릭교인 행정관들은 단순히 위그노라는 이유로 시민들을 교수형에 처하는 일이 비일비재하였습니다. 1567년에 위그노측에서 국왕 샤를 9세와 그의 어머니 카트린을 납치하려고 시도한 일이 도화선이 되어 두 번째 전쟁이 일어났습니다.

파리 외곽의 생드니에서 벌어진 특히 피비린내 나는 전투에 관해 언급하고 나서 역사가인 윌 듀랜트와 에이리얼 듀랜트는 이렇게 썼습니다. “프랑스인들은 또다시, 도대체 이 종교가 어떤 종교이기에 사람들이 이토록 살육을 자행하게 만드는가 하고 궁금해하게 되었다.” 얼마 안 있어 1568년 3월에 롱쥐모 평화 협정이 체결됨으로써, 위그노들은 이전에 앙부아즈 평화 협정에 따라 누리던 것과 같은 관용을 다소나마 누리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가톨릭교측은 격분하여 그 평화 협정의 조항들을 이행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1568년 9월에 세 번째 종교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그 후에 체결된 평화 협정으로 인해 위그노들은 훨씬 더 큰 양보를 얻어냈습니다. 라로셸 항구를 포함한 요새화된 여러 도시가 위그노에게 넘어오게 되었습니다. 게다가 프로테스탄트교의 주요 인물인 드 콜리니 장군이 왕의 고문으로 임명되었습니다. 또다시 가톨릭교인들은 분개하였습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약 1년 뒤인 1572년 8월 22일에 콜리니는 파리에 있는 루브르 궁전에서 자기 집으로 걸어가다가 자객의 공격을 받았지만 죽지는 않았습니다. 분개한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범인을 즉각 엄벌에 처하지 않으면 복수를 하기 위해 강경한 조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어린 왕 샤를 9세와 그의 어머니 카트린 드 메디시스 및 여러 왕족들은 비공식 회의를 열어 콜리니를 제거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그들은 또한 보복당하는 일을 피하기 위해, 프로테스탄트교인인 앙리 드 나바르와 카트린의 딸인 마르가리타 드 발루아의 결혼식에 참석하러 파리에 온 모든 프로테스탄트교인을 죽이라고 명령하였습니다.

8월 24일 밤, 루브르 궁전 맞은편에 있는 생제르맹로세루아 교회의 종소리가 대학살의 시작을 알렸습니다. 기즈 공작과 그의 부하들이 콜리니가 잠자고 있던 건물에 들이닥쳤습니다. 그 곳에서 콜리니는 죽임을 당해 창 밖으로 내던져졌고, 그의 시체는 갈기갈기 찢겨졌습니다. 가톨릭교인인 기즈 공작은 “그들을 모두 죽여라. 왕명이다”라는 말을 퍼뜨렸습니다.

8월 24일부터 29일까지, 파리의 거리 이곳저곳에서 소름끼치는 광경이 벌어졌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센 강이 살육당한 수천 명의 위그노의 피로 시뻘겋게 물들었다고 주장하였습니다. 그 밖의 여러 도시에서도 피비린내가 진동하였습니다. 추정 사망자 수는 1만 명에서 10만 명까지 다양하지만, 적어도 3만 명은 되었을 것이라는 데 대부분 의견이 일치합니다.

“학살 자체만큼이나 소름끼치는 한 가지 사실은, 그 학살에 대해 듣고 통쾌하게 여겼다는 사실”이라고 한 역사가는 썼습니다. 교황 그레고리우스 13세는 그 살육에 관해 듣고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는 의식을 거행하도록 명하였고, 카트린 드 메디시스에게 축하의 뜻을 전달하였습니다. 그는 또한 위그노 살육을 기념하기 위해 특별한 메달을 주조하도록 명하였고, “교황이 콜리니 살해를 승인하다”라는 글귀를 넣어서 그 학살을 묘사하는 그림을 그리도록 허락하였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학살이 끝난 후에 샤를 9세는 학살당한 사람들의 환상을 보고 유모에게 이렇게 외치곤 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렇게 사악한 권고를 따르다니! 오 하느님, 저를 용서해 주소서!” 샤를 9세는 1574년에 23세의 나이로 사망하였고, 그 뒤를 이어 그의 동생인 앙리 3세가 왕위에 올랐습니다.

계속된 종교 전쟁

한편, 가톨릭교의 지도자들은 가톨릭을 믿는 백성들을 선동하여 위그노들을 적대시하게 하였습니다. 툴루즈에서 가톨릭 교직자들은 추종자들에게 이렇게 권고하였습니다. “우리가 책임질 테니, 전부 죽이고 약탈하시오. 우리가 보호해 주겠소.” 왕과 의회와 통치자와 군대 지휘관들이 맹렬한 탄압으로 본을 보였으므로, 가톨릭교를 믿는 대중들도 그 본을 따랐습니다.

하지만 위그노들도 반격을 가해 왔습니다.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이 있은 지 두 달도 채 안 되어, 위그노들은 네 번째 종교 전쟁을 개시하였습니다. 이 전쟁에서는 위그노측의 수가 가톨릭측보다 많아 위그노들은 형상과 십자가상 및 가톨릭 교회 안에 있는 제단을 부수고 심지어 살육을 자행하기까지 하였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도시든 사람이든 용서해 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고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교의 지도자인 장 칼뱅은 자신이 펴낸 「참 믿음 고수 선언」(Declaration to Maintain the True Faith)이라는 소책자에서 단언하였습니다.

그 후로 네 번의 종교 전쟁이 더 있었습니다. 다섯 번째 종교 전쟁은 1576년에 국왕 앙리 3세가 위그노에게 프랑스 전국 어디에서나 예배를 볼 수 있는 전적인 자유를 허락하는 평화 협정에 조인함으로 막을 내렸습니다. 결국, 가톨릭 교세가 매우 강했던 도시인 파리에서 백성들이 들고 일어나 앙리 3세를 축출하였습니다. 앙리 3세가 위그노를 너무 부드럽게 대한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가톨릭측은 기즈의 앙리가 이끄는 반대 정부 즉 가톨릭 신성 동맹을 결성하였습니다.

급기야 여덟 번째 전쟁 즉 앙리 3세(가톨릭측)는 나중에 그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앙리 드 나바르(프로테스탄트측)와 손잡고 앙리 드 기즈(가톨릭측)에 대항하였습니다. 결국 앙리 3세는 앙리 드 기즈를 암살하는 데 성공하였지만, 1589년 8월에는 앙리 3세 자신도 도미니크회의 수사에게 암살당하였습니다. 그리하여 17년 전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을 살아 남은 앙리 드 나바르가 왕위에 올라 앙리 4세가 되었습니다.

앙리 4세는 위그노였으므로, 파리의 시민들은 그에게 복종하려고 들지 않았습니다. 가톨릭 신성 동맹은 전국에 무장 반대 세력을 조직하였습니다. 앙리 4세가 몇몇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기는 하였지만, 스페인 군대가 가톨릭측을 지원하기 위해 도착하자 앙리 4세는 결국 프로테스탄트교를 버리고 가톨릭 신앙을 받아들이기로 하였습니다. 앙리 4세는 1594년 2월 27일에 대관식을 갖고 파리로 입성하였는데, 시민들은 전쟁으로 완전히 기진맥진한 상태에서 그를 왕으로 맞이하였습니다.

그리하여 프랑스의 종교 전쟁은 가톨릭교인들과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이 30여 년 동안 주기적으로 서로 살육을 자행한 끝에 막을 내리게 되었습니다. 1598년 4월 13일에 앙리 4세는 역사적으로 유명한 낭트 칙령을 내려 프로테스탄트교인들에게 양심과 숭배의 자유를 부여하였습니다. 교황의 말에 따르면, 그 칙령은 “누구에게나 양심의 자유를 부여했기 때문에 상상할 수도 없는 최악의 사건이었으며, 세상에서 가장 끔찍한 일”이었습니다.

프랑스 전국에 있는 가톨릭교인들은 앙리 4세가 그 칙령을 내림으로 자기들의 신조를 옹호하기로 한 약속을 저버렸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가톨릭 교회는 가만히 있지 않았으며, 거의 한 세기가 지난 후에 루이 14세는 결국 낭트 칙령을 폐지하고 위그노들에게 훨씬 더 혹독한 박해를 가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전쟁의 결과

16세기 말이 되자 프랑스의 번영하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왕국의 절반이 포위 공격이나 약탈을 당하였고, 납치된 사람을 구하기 위해 몸값을 지불하는 일이 많았으며, 나라가 황폐되었습니다. 병사들은 백성들에게 지나친 요구를 하였고, 그로 인해 농민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습니다. 프로테스탄트교인들은 사형 선고, 학살, 국외 추방, 개종으로 인해 17세기에 들어설 무렵에는 그 수가 많이 줄어들어 있었습니다.

어느 모로 보나 프랑스의 종교 전쟁에서는 가톨릭이 승리를 거둔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승리를 축복하셨습니까? 분명히 그렇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을 빙자해 자행된 이 모든 살육에 신물이 난 나머지, 많은 프랑스인들은 종교에 대해 반감을 품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18세기에 나타난 소위 반(反)그리스도교 사조의 선구자들이 되었습니다.

[9면 삽입]

“하느님께서는 도시든 사람이든 용서해 주기를 원하지 않으신다.” 프랑스 프로테스탄트교 지도자는 그렇게 단언하였다

[6면 네모와 삽화]

왈도파는 확고한 태도를 유지하였다—그 결과는?

피에르 발데스 즉 피터 왈도는 12세기에 프랑스에 살았던 부유한 상인이다. 그 당시 로마 가톨릭 교회가 의도적으로 사람들을 성서에 대해 무지한 상태에 있게 하자, 왈도는 복음서와 그 밖의 성서책을 프랑스 남동부에 사는 사람들이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언어로 번역하는 일을 재정적으로 지원하였다. 그 후 왈도는 자신의 사업을 정리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일에 투신하였다. 얼마 안 있어 많은 사람들이 그에게 가담하자, 1184년에 그와 그의 동료들은 교황 루키우스 3세에 의해 파문당했다.

결국, 성서 지향적인 전파자들로 이루어진 이러한 집단들은 왈도파로 알려지게 되었다. 그들은 초기 그리스도교의 신앙과 관습으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였다. 그들은 면죄부, 죽은 자들을 위한 기도, 연옥, 마리아 숭배, “성인들”에게 하는 기도, 유아 세례, 십자가상 숭배, 성변화(聖變化) 등 가톨릭의 전통적인 관습과 신앙을 배척하였다. 그 결과, 왈도파는 종종 가톨릭 교회의 손에 끔찍한 고통을 당하였다. 역사가인 윌 듀랜트는 국왕 프랑수아 1세가 비가톨릭교인들에 대한 탄압 조처를 취했을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드 투르논 추기경은 왈도파가 정부에 대해 모반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며 병약하고 우유부단한 왕을 설득하여, 이단죄가 성립되는 모든 왈도파 신자를 사형에 처하는 법령(1545년 1월 1일자)에 조인하도록 하였다. ·⁠·⁠· 일 주일(4월 12-18일) 내에 몇 군데 마을이 완전히 불에 탔는데, 그 중 한 마을에서는 80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학살당하였다. 두 달 동안 3000명이 죽임을 당하였고, 22군데 마을이 쑥대밭이 되었으며, 700명의 남자들은 갤리선(船)의 노를 젓는 형벌에 처해졌다. 공포에 질린 스물다섯 명의 여자는 동굴로 피신했다가 입구에 지른 불로 인해 질식사하였다.”

그와 같은 역사적인 사건들에 관해, 듀랜트는 이렇게 평하였다. “이러한 박해는 프랑수아가 통치 중에 저지른 최대의 실수였다.” 그러나 왕이 인가한 박해 기간에 왈도파 신자들의 확고함을 관찰한 사람들은 어떠한 영향을 받았는가? 듀랜트는 이렇게 썼다. “순교자들이 보여 준 용기는 그들의 대의에 위엄과 영광을 더해 주었다. 지켜 보고 있던 수많은 사람들이 감명을 받고 당혹해하였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대대적인 처형이 없었더라면 그들은 결코 조상 대대로 물려받은 신앙을 굳이 바꾸려 들지 않았을 것이다.”

[5면 삽화]

바시에서 일어난 학살, 종교 전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자료 제공]

Bibliothèque Nationale, Paris

[7면 삽화]

“성” 바돌로매 축일의 학살, 수만 명의 프로테스탄트교인이 가톨릭교인에게 살육당하였다

[자료 제공]

Photo Musée cantonal des Beaux-Arts, Lausanne

[8면 삽화]

프로테스탄트교인들도 가톨릭교인들을 살육하고 교회 건물을 파괴하였다(위와 아래)

[자료 제공]

Bibliothèque Nationale, Paris

Bibliothèque Nationale, Par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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