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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공정이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발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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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불공정이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발견하다
  • 깨어라!—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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깨어라!—2011
깨 11/11 21-23면

불공정이 해결되리라는 희망을 발견하다

우르줄라 메네의 체험기

나는 기억이 어렴풋한 어린 시절부터 모두가 공평하고 공정한 대우를 받는 세상이 오기를 간절히 원했습니다. 그 때문에 공산주의 치하의 동독에서 투옥을 당하기까지 했지요.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감옥에 있는 동안 불공정이 해결될 것이라는 희망을 발견했습니다. 그 이야기를 시작해 보겠습니다.

나는 1922년에 독일의 할레에서 태어났습니다. 1200여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도시인 할레는 초기 프로테스탄트의 본거지 가운데 하나로 베를린에서 남서쪽으로 약 200킬로미터 떨어져 있습니다. 1923년에는 여동생인 캐테가 태어났지요. 아버지는 군인이셨고 어머니는 극장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수이셨습니다.

내가 불공정을 바로잡고 싶은 강한 열망을 갖게 된 건 아버지의 영향이 컸습니다. 아버지는 군에서 퇴역하신 뒤 가게를 차리셨는데, 손님들 대부분이 가난했기 때문에 불쌍한 마음에 외상으로 물건을 주시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처럼 선행을 베풀다가 결국 파산하고 마셨지요. 나는 그 일을 지켜보면서도 불평등과 불공정에 맞서 싸우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지 깨닫지 못했습니다. 아직 어렸던 내 마음속에서는 공정한 사회를 이룩하고 싶은 열정이 불타고 있었습니다.

나는 어머니에게서 예술적 재능을 물려받았지요. 어머니는 나와 여동생에게 음악과 노래와 춤을 가르쳐 주셨습니다. 성격이 활달한 편이었던 나는 여동생과 행복한 나날을 보냈습니다. 하지만 1939년에 모든 것이 바뀌고 말았습니다.

악몽이 시작되다

나는 기본 교육을 마친 후에 발레 학교에 다녔습니다. 그곳에서 메리 비그만에게 아우스드룩스탄츠(표현 무용)를 배우기도 했습니다. 메리는 마음속의 감정을 춤으로 나타내는 표현 무용의 창시자 가운데 한 사람이었지요. 그에 더해 나는 그림도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새로운 것들을 배우면서 재미있고 행복한 십 대 시절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1939년에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설상가상으로 1941년에 아버지가 결핵으로 돌아가셨습니다.

전쟁은 끔찍한 악몽과도 같았습니다. 전쟁이 시작되었을 무렵 나는 열일곱 살 밖에 안 되었지만 세상이 미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요. 평범하던 사람들조차 나치가 부추긴 광적인 분위기에 휘말렸습니다. 물자가 부족했고 수많은 사람이 죽어 갔으며 건물이 파괴되었습니다. 우리 집은 폭격을 받아 심하게 파손되었고 전쟁으로 친척 몇 명이 목숨을 잃었습니다.

1945년에 전쟁이 끝났을 때 어머니와 여동생과 나는 여전히 할레에 살고 있었습니다. 당시 나는 이미 결혼해서 어린 딸을 두고 있었지만 결혼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았습니다. 결국 우리 부부는 별거했고, 나는 생활비를 벌기 위해 무용수와 화가로 일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 독일은 네 지역으로 나뉘었는데, 우리가 살고 있던 도시는 소련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이제 우리는 새로 들어선 공산 정권에 적응해야 했지요. 우리가 살던 지역은 1949년에 독일 민주 공화국 즉 동독이 되었습니다.

공산 정권이 집권하던 시기

그 무렵 어머니가 건강이 나빠지시는 바람에 어머니를 돌봐 드리지 않으면 안 되었습니다. 나는 지역 관공서에서 사무 업무를 보는 일을 했습니다. 그러다가 공산 체제를 반대하는 학생들을 알게 되었지요. 그들은 당시 자행되던 불공정한 일을 대중에게 알리기 위해 애쓰고 있었습니다. 예를 들어, 한 젊은이는 아버지가 나치당의 당원이었다는 이유로 대학 입학을 거부당했지요. 나는 그 학생과 함께 음악을 연주하곤 했기 때문에 그를 잘 알았습니다. ‘왜 아버지가 한 일 때문에 그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 거지?’라는 의문이 들었어요. 시간이 흐르면서 반체제 활동을 하는 사람들과 접촉이 잦아졌고 공개적인 저항 운동에도 가담하기로 마음먹었습니다. 한번은 지방 법원 건물의 바깥 계단에 반정부적인 내용이 담긴 벽보를 붙이기도 했습니다.

얼마 후, 나는 지역 평화 위원회에서 비서로 일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업무상 작성해야 했던 편지들 때문에 공의를 갈망하는 마음이 더욱 강해졌습니다. 한번은 그 위원회가 정치적인 의도로 서독의 한 연로한 남자에게 공산주의 선전물을 보내 의심을 사게 만들려고 했습니다. 부당한 처사에 의분을 느낀 나는 소포를 사무실에 숨겨서 발송되지 않게 했습니다.

“가장 위험한 사람”이 희망을 주다

1951년 6월에 두 남자가 내 사무실을 찾아와 “당신을 체포하겠소” 하고 말했습니다. 나는 로터옥세라고 불리는 감옥에 수감되었고, 1년 후에 반정부 활동을 했다는 혐의로 기소되었습니다. 한 학생이 내가 벽보를 붙이며 저항 활동을 한 적이 있다고 비밀경찰인 슈타지에게 고발한 것입니다. 재판이 열렸지만 그것은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했지요. 아무도 내 변론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으며 나는 6년 형을 선고받았습니다. 수감 생활을 하던 중 나는 병에 걸렸고 병동에서 40명의 여재소자들과 있게 되었습니다. 희망이라곤 전혀 없이 삶을 체념한 듯한 사람들을 보자 미쳐 버릴 것 같았지요. 참다 못한 나는 문을 쾅쾅 두드렸습니다.

“무슨 일이야?” 하고 교도관이 물었습니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요. 독방에 넣어도 좋으니까 제발 여기서 나가게만 해 줘요!”라고 나는 소리쳤습니다. 물론 그는 내 요청을 묵살해 버렸습니다. 그런데 얼마 안 있어, 여느 사람들과 달라 보이는 한 여자가 눈에 띄었습니다. 그의 눈에서 왠지 모를 평온함이 느껴졌어요. 그래서 나는 그 여자 곁으로 가서 앉았습니다.

놀랍게도 그 여자는 “내 옆에 앉으려면 조심해야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것이었어요. 그러고는 “난 여호와의 증인인데 다른 사람들은 내가 여기서 가장 위험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거든요”라고 이야기했습니다.

당시 나는 여호와의 증인이 공산 국가의 적으로 간주된다는 걸 몰랐습니다. 하지만 어렸을 때 성경 연구생(여호와의 증인의 이전 명칭) 두 명이 정기적으로 아버지를 방문했다는 건 알고 있었지요. 나는 아버지가 “성경 연구생들의 말이 옳아!” 하고 말씀하시던 것이 기억났습니다.

나는 안도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베르타 브뤼거마이어라는 이 소중한 사람을 만나자 마음이 놓였기 때문이지요. 나는 그에게 “여호와에 대해 알려 주세요” 하고 부탁했습니다. 그때부터 우리는 함께 많은 시간을 보내면서 성서 이야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성서 토의를 하면서 참하느님 여호와께서 사랑과 공의와 평화의 하느님이라는 점이 특히 마음에 와 닿았습니다. 또한 그분이 악하고 압제적인 사람들이 초래한 온갖 해악을 모두 없애실 것이라는 점도 배웠습니다. 시편 37:10, 11은 그 점을 이렇게 약속합니다. “조금만 더 있으면 악한 자가 더는 없으리니, ··· 온유한 자들은 땅을 차지하고 풍부한 평화 가운데 참으로 더없는 기쁨을 얻으리라.”

석방된 후 서독으로 가다

나는 5년 조금 넘게 수감 생활을 한 후 1956년에 자유의 몸이 되었습니다. 그 무렵 내게는 하넬로레와 자비너라는 두 딸이 있었는데, 석방된 지 5일 후에 나는 그 아이들을 데리고 서독으로 도피했습니다. 그곳에서 남편과 이혼했고 다시 증인들을 만나게 되었지요. 성서를 공부하면서 여호와의 표준에 따라 살려면 생활에서 많은 변화를 해야 한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나는 필요한 변화를 했고 1958년에 침례를 받았습니다.

후에 나는 여호와의 증인인 클라우스 메네와 재혼했습니다. 우리는 행복한 결혼 생활을 했으며 베냐민과 타비아를 낳았습니다. 약 20년 전에 클라우스가 사고로 사망했을 때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요. 나는 그때 이후로 지금까지 혼자 지내고 있습니다. 하지만 사망한 사람들이 낙원이 된 땅에서 부활될 것이라는 희망에서 큰 위로를 얻습니다. (누가 23:43; 사도 24:15) 또 자녀 네 명이 모두 여호와를 섬기고 있어서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나는 성서를 연구하면서 여호와께서만 참다운 공의를 실현하실 수 있다는 점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은 사람들은 모르는 우리 각자의 속사정과 배경을 비롯해 모든 상황을 속속들이 알고 계십니다. 이것은 인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죠. 이 귀중한 지식 덕분에 지금까지 나는 불공정한 일을 보거나 경험할 때도 마음의 평화를 누려 왔습니다. 전도서 5:8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어떤 관할 지역에서 가난한 사람이 압제를 당하거나 공의와 정의가 짓밟히는 것을 보더라도 그로 인해 놀라지 말아라. 모든 관리에게는 그보다 높은 자가 있으며 가장 높으신 분께서 그들을 모두 감찰하시기 때문이다.” (「개역 영어 성서」[The Revised English Bible]) 여기서 “가장 높으신 분”은 다름 아닌 우리의 창조주이십니다. 또한 히브리서 4:13에서는 이렇게 분명히 지적합니다. “모든 것이 그분의 눈에 벌거벗은 채 숨김없이 드러납니다. 우리는 그분에게 답변할 책임이 있습니다.”

90년에 가까운 세월을 되돌아보며

사람들은 종종 내게 나치 정권과 공산주의 치하에서 사는 것이 어땠느냐고 물어보곤 합니다. 사실, 어느 쪽에서의 생활도 쉽지는 않았습니다. 모든 형태의 인간 정부가 그러하듯, 두 정부의 통치 역시 인간에게는 스스로를 통치할 능력이 없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 주었습니다. 성서가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여 해롭게 한다’고 정확히 지적하는 바와 같습니다.—전도 8:9.

어리고 경험이 없을 때는 인간이 공의로운 사회를 이룩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나는 그처럼 허황된 꿈이 아니라 참다운 희망을 품고 있습니다. 오직 우리의 창조주께서만 진정으로 공의로운 세상을 가져오실 수 있습니다. 그분은 악한 자를 모두 제거하고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이 땅을 통치할 권리를 주심으로 그렇게 하실 것입니다. 예수는 언제나 자신보다 우리의 유익을 먼저 생각하시는 분입니다. 성서에서는 그분에 대해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은 의를 사랑하고 불법을 미워하였습니다.” (히브리 1:9) 이처럼 훌륭하고 공정한 왕의 통치를 받으며 영원히 살 희망을 갖게 해 주신 하느님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23면 삽화]

서독에 도착한 후에 두 딸 하넬로레와 자비너와 함께

[23면 삽화]

최근에 아들 베냐민과 며느리 샌드라와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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