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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런 감정이 정상인가?
  • 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 소제목
  • 비슷한 자료
  • 성서에 나오는 눈물을 흘린 사람들
  • 울 것인가, 말 것인가
  • 일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
  • 분노와 죄책감이 미치는 영향
  • 배우자를 잃었을 때
  •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하라”
  • “이 슬픔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깨어라!—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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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깨어라!—19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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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하는 사람이 사망했을 때
때 7-13면

이런 감정이 정상인가?

사별의 슬픔을 겪은 한 사람은 이렇게 썼습니다. “영국에서 자라던 어린 시절에, 자신의 감정을 공공연하게 드러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침받았습니다. 나에게 어떤 고통스런 일이 생겼을 때 퇴역 군인인 아버지가 근엄한 표정으로 ‘울면 안 돼!’ 하고 말하던 기억이 납니다. 우리 어머니가 자녀(전부 네 명) 중 누구에게 입을 맞추거나 껴안아 주는 것을 본 기억이 없습니다. 내가 아버지의 임종을 지켜 본 때가 56세였는데, 엄청난 상실감을 느꼈습니다. 그런데도 처음에는 울음이 나오질 않았습니다.”

일부 문화권에서는 사람들이 자기 감정을 겉으로 나타냅니다. 그들이 행복한지 아니면 슬픈지, 다른 사람이 그 감정을 알 수 있습니다. 반면에 세계의 다른 지역, 특히 북유럽과 영국에서는 사람들 특히 남자들은 자기 감정을 숨기고 억누르며, 윗입술을 꼭 다물고 자기 마음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도록 틀잡혀 왔습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슬픔을 나타내는 것이 무언가 잘못된 일입니까? 성서는 무엇이라고 말합니까?

성서에 나오는 눈물을 흘린 사람들

성서는 지중해 동부 지역의 히브리인들이 기록했는데, 그들은 감정 표현이 풍부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성서에는 슬픔을 겉으로 나타낸 사람의 예가 많이 나옵니다. 다윗 왕은 살해당한 아들 암논을 잃고서 애통해 했습니다. 사실 그는 “심히 통곡”했습니다. (사무엘 하 13:28–39) 다윗은 심지어 자신을 배신하고 왕위를 찬탈하려고 했던 아들 압살롬을 잃었을 때에도 슬퍼했습니다. 성서 기록은 이렇게 알려 줍니다. “[다윗]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루로 올라가서 우니라 저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사무엘 하 18:33) 다윗은 정상적인 여느 아버지처럼 애통해 한 것입니다. 차라리 자녀 대신 죽었기를 바라던 부모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자녀가 부모보다 먼저 죽는 것은 매우 비정상적인 일같이 보입니다.

예수께서는 친구 나사로의 죽음에 어떤 반응을 보이셨습니까? 무덤 가까이 오시면서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 11:30–38) 그 후 막달라 마리아도 예수의 무덤 가까이 오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요한 20:11–16) 사실, 성서의 부활 희망을 이해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은, 죽은 자의 상태에 대해 성서에 근거한 명확한 믿음이 없는 사람들처럼 달랠 수 없을 정도로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정상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으로서, 부활 희망을 가지고 있는 참 그리스도인일지라도 사랑하는 사람을 잃으면 슬퍼하고 애통해 합니다.—데살로니가 전 4:13, 14.

울 것인가, 말 것인가

오늘날 우리의 반응은 어떠해야 합니까? 감정을 나타내기가 어렵거나 당혹스럽습니까? 상담가들은 뭐라고 권합니까? 그들의 현대 견해는 종종 성서의 영감받은 고대 지혜를 반영할 뿐입니다. 그들은 슬픔을 억누르지 말고 표출해야 한다고 말합니다. 이 말을 들으면, 욥이나 다윗, 예레미야와 같은 고대 충실한 사람들이 생각납니다. 그들이 나타낸 슬픔이 성서에 나옵니다. 그들은 분명히 자기 감정을 속에 가두어 두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고립시키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일입니다. (잠언 18:1) 물론 애도하는 방법은 문화에 따라 다르고, 그 고장 신앙에 따라서도 다릅니다.a

울고 싶을 때 어떻게 할 것입니까? 우는 것은 인간 본성의 일부입니다. 나사로가 죽었던 때를 다시 상기해 봅시다. 그 때 예수께서는 “비통한 마음이 북받쳐 ···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요한 11:33, 35, 「공동번역」) 예수께서는 그처럼, 우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임을 보여 주신 것입니다.

슬퍼하는 사람들

사랑하는 사람이 죽었을 때 슬퍼하고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정상이다

이러한 사실을 뒷받침하는, 앤이라는 한 어머니의 경우가 있습니다. 그는 아기 레이철을 유아 급사증(SIDS)으로 잃었습니다. 그의 남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놀라운 일은 장례식 때 아내나 나나 울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다른 사람들은 모두 눈물을 흘렸는데요.” 그러자 이번엔 앤이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랬어요. 그렇지만 나는 우리 두 사람 몫만큼이나 많이 울었습니다. 그 비극적인 일이 지나고 몇 주일이 지나서, 마침내 집에 혼자 있게 된 어느 날, 참으로 슬픔이 엄습해 오더군요. 나는 하루 종일 울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도움이 된 것 같아요. 그 때문에 기분이 나아졌거든요. 아기를 잃고 슬퍼하지 않을 수는 없었어요. 정말이지, 우리는 슬퍼하는 사람은 눈물을 흘리도록 놓아두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삼자로서는 ‘울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 자연스런 반응이겠지만, 그건 정말로 도움이 되지 않아요.”

일부 사람들이 나타내는 반응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서 허탈해진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화니타의 예를 고려해 보겠습니다. 아기를 잃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그는 압니다. 그는 이미 다섯 번이나 유산을 했던 것입니다. 그러다 다시 임신을 하게 됐습니다. 따라서 자동차 사고로 입원하지 않을 수 없게 되자 당연히 걱정이 앞섰습니다. 2주 후에 때 이른 진통이 시작되었습니다. 얼마 안 있어—몸무게가 겨우 0.9킬로그램 남짓한—귀여운 바네사가 태어났습니다. “나는 몹시 흥분했습니다. 마침내 어머니가 되었으니까요!”라고 화니타는 회상합니다.

그러나 그의 행복은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나흘 후에 바네사가 죽은 것입니다. 화니타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참으로 허전했습니다. 어머니라는 신분을 빼앗긴거죠. 자신이 온전치 못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집에 돌아와 바네사를 위해 꾸며 놓은 방으로 가서 입히려고 사 둔 작은 옷가지들을 쳐다보기가 고통스러웠습니다. 그 후 두어 달 동안은 아기가 태어나던 날을 되새기며 지냈어요. 어느 누구도 만나고 싶지 않았습니다.”

극단적인 반응입니까? 다른 사람은 이해하기 어려울지 모르지만, 화니타와 같은 경험을 한 사람들은, 아기가 마치 얼마간 같이 살았던 사람인 양 아기 때문에 슬펐다고 토로합니다. 아기는 태어나기 오래 전부터 부모의 사랑을 받는다고 합니다. 어머니와는 특별한 유대가 형성됩니다. 그런 아기가 죽게 되면 그 어머니는 실제로 있었던 사람을 잃은 것으로 여깁니다. 다른 사람들은 이 점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분노와 죄책감이 미치는 영향

또한 어머니는 여섯 살 난 아들이 선천성 심장병으로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들었을 때의 감정을 이렇게 토로했습니다. “만감이 교차하더군요. 정신이 멍해지면서 믿어지지가 않다가 죄책감이 들더니, 아이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깨닫지 못한 남편과 의사에게 분노가 치밀어 오르더군요.”

분노는 슬픔의 다른 징후일 수 있습니다. 그것은 의사나 간호사가 고인을 좀더 잘 돌봤어야 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분노일 수 있습니다. 또는 그릇된 말이나 행동을 하는 것 같은 친구나 친족에게 느껴지는 분노일 수도 있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고인이 자신의 건강을 소홀히 한 데 대해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스텔라는 이렇게 회상합니다. “결과가 달라질 수도 있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에 남편에게 화가 났던 기억이 납니다. 그이는 병이 심했는데도 의사들의 경고를 무시했거든요.” 때로는 고인의 죽음이 유족에게 남긴 짐 때문에 분노를 느끼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은 분노 때문에 죄책감을 느낍니다. 다시 말하면, 분노를 느끼는 자신을 정죄하게 될 수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을 자기 탓으로 돌립니다. “의사에게 좀더 빨리 가게만 했더라면”, “다른 의사를 찾아가게만 했더라면” 혹은 “건강을 좀더 잘 돌보게만 했더라면 죽지 않았을 텐데” 하고 자신을 다그칩니다.

어머니가 자녀를 안고 있던 자신의 모습을 회상하는 장면

자녀를 잃는 것은 깊은 상처를 남기는 끔찍한 일이다—진심에서 우러나온 동정과 감정 이입은 부모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죄책감이 그보다 더 심하게 드는데, 특히 사랑하는 사람이 갑자기 예기치 않게 죽은 경우에 그렇습니다. 그들은 고인에게 화를 냈거나 그와 언쟁을 벌인 일을 떠올리기 시작합니다. 또는 그에게 해주었어야 할 일을 제대로 해주지 못했다고 느낄 수 있습니다.

많은 어머니의 오래 지속되는 슬픔을 볼 때, 자녀를 잃은 일은 부모, 특히 어머니에게 평생을 두고 메워지지 않는 빈 구석을 남긴다는 여러 전문가의 말이 사실임을 뒷받침합니다.

배우자를 잃었을 때

결혼 배우자를 잃는 일은, 특히 두 사람이 매우 활동적인 생활을 함께 했을 경우 또 다른 종류의 충격이 됩니다. 그것은 여행이나 일, 오락, 상호 의존 등 그들이 공유하던 생활 방식 전체가 끝났음을 의미할 수 있습니다.

유니스는 남편이 심장 마비로 갑자기 사망했을 때의 일을 이렇게 토로합니다. “첫 주에는 기능이 정지된 것처럼 감정적으로 멍한 상태였습니다. 심지어 맛이나 냄새도 느끼지 못했고요. 하지만 판단 의식만큼은 초롱초롱했죠. 그들이 심폐 소생법(CPR)과 약물을 사용해서 남편을 안정시키려 하는 동안 내내 남편과 함께 있었기 때문에, 나는 사실을 부인하려 드는 흔한 증상은 겪지 않았습니다. 그렇지만 마치 낭떠러지로 굴러가는 차를 바라보면서 속수 무책인 것 같은 깊은 좌절감에 빠졌죠.”

유니스는 울었을까요? “물론 울었습니다. 특히 수백 장의 문상 카드를 받아 볼 때 그랬습니다. 한장 한장 읽을 때마다 울었답니다. 그러고 나면 그 날 하루를 견디는 데 도움이 되었죠. 그러나 기분이 어떠냐는 반복적인 질문을 받는 것은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했어요. 물어 보나마나 비참했으니까요.”

유니스가 슬픔을 견디고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 것은 무엇이었습니까?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내 인생을 지속시켜 나가야 한다는 결심을 한 것입니다”라고 유니스는 말합니다. “그러나 생명을 그렇게도 사랑하던 남편이 지금 그것을 누리지 못한다는 사실을 생각할 때면 아직도 가슴이 아픕니다.”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하라”

「하직 인사—언제 어떻게 나눌 것인가? 」(Leavetaking—When and How to Say Goodbye)의 저자들은 다음과 같이 조언합니다. “당신이 어떻게 행동하고 느껴야 하는지를 다른 사람이 왈가왈부하지 못하게 하라. 슬픔의 진행 과정은 사람마다 다르다. 당신이 지나치게 슬퍼하고 있다거나 혹은 제대로 슬퍼하지 않고 있다고 다른 사람은 생각할지—그리고 당신에게 자기 생각을 말해 올지—모른다. 그들을 용서하고 잊어버리라. 자신을 다른 사람 혹은 사회 전반이 만들어 놓은 틀에 맞추려고 하면, 그만큼 감정적 건강을 회복하는 속도가 저해받게 된다.”

물론, 사람마다 슬픔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릅니다. 우리는 모두에게 이 방법이 저 방법보다 반드시 더 낫다고 제안하고자 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슬픔에 잠긴 사람이 현실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침체 상태에 빠지면 위험하게 됩니다. 그러한 경우, 동정심 많은 친구의 도움이 필요할지 모릅니다. “친구는 사랑이 끊이지 아니하고 형제는 위급한 때까지 위하여 났느니라”고 성서는 말합니다. 그러므로 두려워하지 말고, 도움을 구하고 이야기하고 그리고 눈물을 흘리십시오.—잠언 17:17.

슬픔은 사별에 대한 정상적인 반응이며, 슬픔을 남에게 드러내는 것은 잘못된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다음과 같은 질문에도 대답이 필요합니다. ‘이런 슬픔을 안고 어떻게 살아갈 수 있는가? 죄책감과 분노의 감정이 솟는 것은 정상적인 일인가? 이러한 감정 반응을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사별의 슬픔을 견디는 데 무엇이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다음 부분에서는 그러한 질문과 그 밖의 질문에 대답해 줄 것입니다.

a 예를 들어, 나이지리아의 요루바족은 영혼의 환생에 대한 전통적인 신앙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어머니가 자녀를 잃게 되면, 통곡은 하지만 짧은 기간만 그렇게 한다. 요루바족의 어느 노래 후렴에 “물이 엎질러진 것일 뿐, 호리병이 깨진 건 아니라네”라는 가사가 들어 있는 바와 같다. 요루바족에 의하면, 이 말은 물을 담는 호리병처럼 어머니는 아이를 또 낳을 수 있음을—혹은 죽은 자의 환생을—뜻한다. 여호와의 증인은 성서에 근거하지 않은 불멸의 영혼이나 환생과 같은 거짓된 사상에서 나온 미신에 기초를 둔 전통을 따르지 않는다.—전도 9:5, 10; 에스겔 18:4, 20.

깊이 생각해 볼 질문들

  • 어떤 사람들은 슬퍼하는 데 있어서 어떻게 그들의 문화에 영향을 받는가?

  • 성서에는 슬픔을 겉으로 나타낸 어떤 예들이 있는가?

  •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 일부 사람들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비슷한 상황에서 당신은 어떤 반응을 보였는가?

  • 배우자를 잃는 것은 왜 종류가 다른 경험인가?

  • 슬픔은 어떤 진행 과정을 겪는가? 슬퍼하는 것은 잘못된 일인가?

  • 슬픔의 진행 과정에는 어떤 부면들이 있는가? (9면 네모 참조)

  • 유아 급사를 당한 부모는 어떤 특수 상황을 겪는가? (12면 네모 참조)

  • 많은 어머니는 유산이나 사산으로 인해 어떤 영향을 받는가? (10면 네모 참조)

슬픔의 진행 과정

“과 정”이라는 말은 슬퍼하는 데 어떤 정해진 계획표나 진행표가 있다는 의미가 아니다. 슬픔의 반응은 개인에 따라 각 단계가 중첩되거나 그 기간이 달라질 수 있다. 아래 목록은 온전한 것은 아니다. 다른 반응이 나타날 수도 있다. 다음의 것들은 슬퍼하는 사람이 겪을 수 있는 슬픔의 증상의 일부이다.

초기 반응: 처음의 충격; 믿지 않으려는 태도, 사실 부인; 감정적으로 멍한 상태; 죄책감; 분노.

격한 슬픔에 젖어 있을 때 나타날 수 있는 증상: 기억 상실과 불면증; 극도의 피로감; 갑작스러운 기분의 변화; 판단력과 사고의 결함; 발작적인 통곡; 식욕 변화와 그에 따른 체중의 감소 또는 증가; 여러 가지 건강 이상 증상; 무기력; 작업 능력 감퇴; 환각—고인에 대한 촉감, 말이 들림, 눈에 보임; 자녀를 잃은 경우, 배우자에 대한 불합리한 원망.

평정기: 그리움 섞인 슬픔; 고인에 대한 보다 즐거운 추억—유머가 곁들여지기도 함.

유산과 사산—어머니들의 슬픔

여러 자녀를 두고 있지만, 모나는 머지않아 태어날 아기를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다. 출산하기도 전에 벌써, 아기와 “놀고 이야기하고 또 꿈에서도 만났”다.

어머니와 태어나지 않은 아기 사이에 친숙해 가는 과정은 대단하였다. 모나는 계속 이렇게 말한다. “우리 아기 레이철 앤은 뱃속에서 발길질을 하여 내가 배 위에 올려 놓고 읽던 책을 떨어뜨리고, 밤에는 잠을 못 자게 했답니다. 아직도 그 애가 처음으로 발길질하여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날 쿡 찌르던 때가 기억납니다. 아기가 움찍거릴 때마다 그러한 사랑으로 벅찼지요. 나는 아기가 언제 고통을 느끼고 언제 병이 나는지를 알 정도로 아기를 잘 알았습니다.”

모나의 계속되는 이야기는 이러하다. “의사는 내 말을 믿으려 하지 않더니, 결국 시기를 놓치고 말았어요. 나보고 걱정하지 말라고 했죠. 나는 아기가 죽은 것을 직감했습니다. 별안간 아주 심하게 요동을 쳤는데, 다음날 죽었습니다.”

모나의 경험은 특이한 사례가 아니다. 저술가 프리드먼과 그래드슈타인의 공저 「유산의 슬픔을 이겨 냄」(Surviving Pregnancy Loss)이라는 책에 따르면, 미국에서만도 해마다 약 100만 명의 여자가 임신 후 실패를 겪는다. 물론 전세계 수치는 훨씬 더 크다.

종종 사람들은, 유산이나 사산이 여자에게는 비극이며—어쩌면 평생—잊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한다. 예로서, 베로니카는 현재 지긋한 나이인데도 유산된 아기들을 기억하는데, 특히 몸무게가 6킬로그램 나간 9개월짜리 사산아를 잊지 못해 한다. 그는 이미 죽은 아기를 2주 동안이나 몸 안에 가지고 있었다. “죽은 아기를 낳는다는 건 산모에게 참혹한 일”이라고 그는 말했다.

이처럼 낙망하는 어머니의 반응을 사람들이 항상 이해하는 것은 아니며, 심지어 같은 여자들까지도 마찬가지이다. 유산으로 아기를 잃은 한 어머니는 이렇게 썼다. “내가 아주 고통스럽게 깨달은 사실은, 나에게 이러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는 실제로 친구들이 어떠한 일을 견뎌야 했는지 내가 전혀 몰랐다는 점입니다. 사람들이 지금 내게 하는 것처럼, 나도 당사자에 대해 무관심하고 무지했지요.”

한 부부가 부둥켜안고 슬퍼하는 모습

슬픔에 잠긴 어머니에게 있을 수 있는 또 다른 문제는, 남편이 자기처럼 자녀를 잃은 슬픔을 느끼지 않는다는 인상을 받는 일이다. 한 아내는 그 점을 이렇게 말했다. “그 때 나는 남편에게 너무 실망했어요. 그이에게는, 임신은 실제로는 없었던 일이나 마찬가지였어요. 그이는 내가 겪는 슬픔을 느끼지 못했어요. 내가 느끼는 두려움에 대해서는 매우 동정심을 나타냈지만, 내가 느끼는 슬픔에 대해서는 그렇지 못했죠.”

이러한 반응은 남편의 경우에는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남편은 임신한 아내처럼 태아와 신체적, 감정적 유대가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렇긴 해도 남편 역시 자녀를 잃은 고통을 겪는다. 그러므로 남편과 아내는, 서로 방식은 다를지라도 함께 고통을 겪는다는 사실을 반드시 깨달을 필요가 있다. 그들은 슬픔을 함께 나누어야 한다. 남편이 슬픔을 감추면, 아내는 남편이 무관심하다고 생각할지 모른다. 그러므로 함께 눈물을 흘리고 생각을 나누며 포옹해 줄 필요가 있다. 이전 어느 때보다 더 서로를 필요로 한다는 점을 나타내라. 그렇다. 남편들이여, 감정 이입을 나타내라.

유아 급사증—그 슬픔을 이겨 냄

유 아 급사는 가슴 아픈 비극이다. 보기에 멀쩡하던 아기가 어느 날 깨어나지 않고 마는 것이다. 이런 일은 전혀 예기치 않은 일이다. 유아나 아이가 부모보다 먼저 사망하리라고 누가 상상이나 하겠는가? 어머니의 끝없는 사랑이 집중되는 대상이던 아기가 갑자기 어머니의 끝없는 슬픔의 원인이 된 것이다.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한다. 부모는 아기의 죽음이 마치 자기가 어떤 일을 소홀히 한 탓이기라도 한 것처럼 책임을 느낄 수 있다. 부모는 이렇게 자문한다. ‘어떻게 했더라면 이번 일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까?’b 어떤 경우 남편은 근거도 없이 심지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아내를 탓하고 있을지 모른다. 자기가 출근할 때, 아기는 살아 있었고 건강했었다. 집에 돌아와 보니, 아기가 침대에서 죽었다는 것이 아닌가! 아내는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때 어디에 있었단 말인가? 결혼 생활에 긴장을 일으키지 않기 위해서는, 이와 같이 괴롭히는 의심을 지워 버리지 않으면 안 된다.

비극의 원인은 예상치 않았고 예상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성서는 이렇게 말한다. “내가 돌이켜 해 아래서 보니 빠른 경주자라고 선착하는 것이 아니며 유력자라고 전쟁에 승리하는 것이 아니며 지혜자라고 식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명철자라고 재물을 얻는 것이 아니며 기능자라고 은총을 입는 것이 아니니 이는 시기와 우연이 이 모든 자에게 임함이라.”—전도 9:11; 사체로는 본 책자에서.

아기를 잃은 가족을 다른 사람이 어떻게 도와 줄 수 있는가? 아기를 잃은 한 어머니는 이렇게 대답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는데 한 친구는 우리 집에 와서 청소를 해주었습니다. 다른 사람들은 우리에게 식사를 준비해 주었고요. 누군가는—아무런 말 없이—포옹해 주기만 했는데도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 일에 대해서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았거든요. 어떻게 해서 그런 일이 생겼는지 이야기하고 또 이야기해야 하는 일이 싫었습니다. 마치 내가 무엇인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캐묻는 질문을 받고 싶지 않았어요. 어머니는 바로 나였습니다. 우리 아기를 살리기 위해서라면 무슨 일이라도 했을 겁니다.”

b 유아 급사증(SIDS)은 보통 1개월에서 6개월 된 아기들에게 발생하는데, 건강한 아기가 뚜렷한 이유 없이 갑자기 죽었을 때 사용하는 용어이다. 어떤 경우에는, 아기를 똑바로 누이거나 얼굴을 파묻지 말고 모로 누여 재우면, 그러한 일이 일어날 가능성을 피할 수 있다고 믿어진다. 그러나 어떻게 재우든지 간에 유아 급사가 발생하는 모든 경우를 미리 막지는 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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