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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평화를 구함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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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0
파60 2/1 24-31면

평화를 구함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좇으라.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그들의간구에 기울이신다. ”—베드로 전 3:11, 12, 신세.

1. 사람들은 어떠한 생활을 원하며 「솔로몬」이 기록한 잠언은 이 점을 어떻게 묘사하였읍니까?

평화가 없는 생활이란 얼마나 비참한 것입니까? 그 생명이 아무리 영원한 것이라 할지라도 누가 평화가 없는 생명을 원하겠읍니까? 보통 남자나 여자는 그러한 생명을 원치 않습니다. 고요한 분위기를 깨뜨리고 소란한 방해가 계속되는 곳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는 사람은 없읍니다. 여러번 결혼한 일이 있는 「솔로몬」 왕은 이 사실을 잠언에 잘 묘사하였읍니다. 『다투는 아내는 이어 떨어지는 물방울이니라.』 『다투는 여인과 함께 큰 집에서 사는 것보다 움막에서 혼자 사는 것이 나으니라.』 (잠언 19:13; 21:9) 아무리 크고 화려한 집에 산다 할지라도 짓궂게 불화하게 만드는 사람이 있다면 그를 피해서 그 집 한 모퉁이에 숨어있는 것이 더 나을 것입니다.

2. 생명을 원하는 사람에 관한 어떠한 질문이 생겼으며, 이 긴급한 질문에 대하여 어떻게 우리는 영감에 의한 확실한 대답을 얻게 되었읍니까?

2 그러나 오늘날 이 넓은 땅 위에는 여러가자 환난과 위험과 핵 폭탄으로 받는 재화로부터 피하여 숨을만한 도통이가 없읍니다. 이러한 공간 시대에 있어서 평화스러운 생활을 함으로 앞으로 좋은 날을 보기를 원하는 사람은 누구입니까? 이러한 질문은 오랜 옛날부터 있는 것입니다. 아마 우리 이 땅위에 환난과 불의가 생긴 때로부터 이러한 질문은 있었을 것입니다. 절망과 불가능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러한 질문을 일으킨 것이 아니라, 이와같이 긴급한 질문에 대하여 확실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그러한 질문을 일으킨 사람은 행복합니다. 그의 대답은 악기의 반주와 함께 노래를 부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대답은 영감에 의하여 읊어진 시편(詩篇)에 포함되어 있읍니다. 이 대답은 오늘날과 같은 환난과 고통과 아직도 더욱 심해져 가고 있는 공포에 눌려 있는 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의 유익을 위하여 삼천년 이상이나 보관되어 왔읍니다. 「예루살렘」의 왕이요 「솔로몬」왕의 아버지인 시편 기자 「다윗」은 마치 노련한 스승이 그의 제자들에게 훈계하는 것과 같이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3. 「다윗」은 어떻게 그가 읊은 시편에서 이 질문을 일으키고 또 그에 대하여 대답하였읍니까?

3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생명을 사모하고 장수하여 복받기를 원하는 사람이 누구뇨? 네 혀를 악에서 금하며 네 입술을 궤사한 말에서 금할지어다. 악을 버리고 선을 행하며 화평을 찾아 따를지어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시편 34:11-16.

4, 5. (ㄱ) 사도 「베드로」는 어떻게 「다윗」의 말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충고가 된다는 점을 나타냈읍니까? (ㄴ) 「베드로」는 어떠한 교훈을 지지하기 위하여 「다윗」의 말을 인용하였읍니까?

4 이 교훈은 다만 「유대」인에게 준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십시요. 「다윗」왕이 이것을 기록한지 천년 이상이 지난 후에 그리스도의 사도 한 사람은 이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아시아」 여러 지방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게 교훈하였읍니다. 그는 사도 「시몬 베드로」였읍니다. 그는 그 당시 부패한 「유대」인의 종교 「유대」교로부터 개종하여 예수 그리스도께서 지금으로부터 천 구백년전에 설립하신 순수한 그리스도교인이 된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사도 「베드로」는 영감에 의한 「다윗」의 말을 그리스도교 성경의 일부로 인정하였던 것입니다. 그는 「다윗」의 이 말이 또한 그리스도인들에게 대한 교훈이기도 하다는 것을 지적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다윗」이 기록한 시편으로부터 여러번 인용하여 그리스도교에 적용 하였읍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한 그의 첫 편지에서 그리스도인들은 마땅히 오늘날 기독교국과는 달라야 한다고 말하였읍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기독교국이 걷고 있는 길은 평화와 좋은 날이 계속되는 영원한 생명의 축복으로 인도하고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5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너희가 다 마음을 같이하며 체휼하여 형제를 사랑하며, 불쌍히 여기며 겸손하며,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도리어 복을 빌라. 이를 위하여 너희가 부르심을 입었으니 이는 복을 유업으로 받게 하려 하심이라. 그러므로(「다윗」의 말을 인용하여)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하는 자는, 혀를 금하여 악한 말을 그치며 그 입술로 궤휼을 말하지 말고 악에서 떠나 선을 행하고 화평을 구하여 이를 좇으라. 〈여호와〉a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의 귀는 저의 간구에 기울이시되 〈여호와〉b의 낯은 악행하는 자들을 향하시느니라.』—베드로 전 3:8-12.

6. 왜 오늘날에는 『생명을 사랑하느냐』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 어려운 것 같이 보입니까? 그러나 예수께서는 주후 1914년 이래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과 상태로 말미암아 어떻게 반응하라고 그리스도인들에게 말씀하셨읍니까?

6 우리는 사는 것을 즐거워합니까? 우리는 생명을 사랑합니까? 이러한 질문에 대하여 지금 대답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인 것 같습니다.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이 시대의 장래는 더욱 악화하는 환난으로 달려가는 모험을 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것은 인류가 창조된 이래 아무도 경험해 보지 못하던 큰 환난으로써 아무도 그 환난을 살아 넘어갈 희망을 갖기는 매우 힘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 날의 전쟁』인 「아마겟돈」전쟁은 급속도로 가까와 오고 있읍니다. (계시록 16:14-16) 그러나 이 우주 전쟁과 1914년 이래 일어나고 있는 모든 사건들을 예언하신 하나님의 위대하신 예언자는 그의 참다운 추종자들에게 이와같은 사건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아도 낙관적인 견해를 가지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이런 일이 되기를 시작하거든 일어나 머리를 들라. 너희 구속이 가까왔느니라. . . . 무화과 나무와 모든 나무를 보라. 싹이 나면 너희가 보고 여름이 가까운 줄을 자연히 아나니, 이와같이 너희가 이런 일이 나는 것을 보거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운 줄을 알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하노니, 이 세대가 지나가기 전에 모든 일이 다 이루리라.』—누가 21:26, 28-32.

7. 그렇다면 우리는 왜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입니까?

7 그러나 우리 앞에는 좋은 날 아니 가장 좋은 날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읍니다. 우리 앞날에는 우리가 살만한 가치가 있는 모든 일이 있읍니다. 우리에게는 사는 것을 즐거워할 만한 이유가 있읍니다. 우리에게는 생명을 사랑할만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이 없이는 결코 하나님의 설립된 왕국 밑에 있을 모든 좋은 날들을 즐길 수 없읍니다. 그러므로 우리도 시편 기자 「다윗」이 말한 바와 같이 『생명을 사랑하고 좋은 날 보기를 원』한다고 말하는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누구와 평화로울 것인가?

8. 우리는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생명을 사랑하는 것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무엇을 구하지 않으면 안되며, 누구와 그렇게 되지 않으면 안된다고 「다윗」과 「베드로」는 말하였읍니까?

8 그러나 만일 우리가 사는 것을 즐거워하고 생명을 사랑함으로 「다윗」과 사도 「베드로」가 말한 것이 성취되기를 원한다면, 우리가 먼저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발견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면 누구와 평화로와야 된다는 것인가 라는 질문이 일어나게 됩니다. 그것은 우리의 동료인 사람들과 평화로와야 된다는 것인가?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먼저 다른 어떠한 분과 평화롭지 않는다면 인간들 사이의 평화를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오늘날 기독교국은 이 절대 불가결한 분과 평화롭지 않기 때문에, 기독교국은 나라들 사이나 민족 과의 관계나 심지어는 가족끼리도 평화롭지 못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가장 중요한 분이란 누구입니까? 18세기에 있었던 영국의 유명한 정치가 「월리암 피트」 백작은 그의 조카에게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 그분이 바로 누구인가를 지적한 일이 있읍니다. 『만일 네가 하나님께 대하여 의롭지 않으면 결코 사람에게 대하여도 의로울 수 없다. 이것은 아무리 현명한 사람이나 방탕하는 사람이 인정하든 부정하든 간에 영원한 진리인 것이다.』

9. (ㄱ) 참으로 인간과 평화롭게 되기 위하여 무엇이 먼저 필요합니까? 「다윗」과 「베드로」는 이에 대하여 정치가인 「월리암 피트」가 말한 것보다 어떠한 더 중요한 것을 말하였읍니까? (ㄴ) 이 목적을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받아드려야 하며 우리는 왜 그의 얼굴이 우리를 대하시기를 원치 않습니까?

9 하나님과 평화롭지 못한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물인 인간과도 평화로울 수 없다는 것은 똑같은 진리인 것입니다. 시편 기자 「다윗」과 사도 「베드로」와의 사이는 거의 천년 이상의 간격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둘이 다 그 점을 말하였읍니다. 사실상 그들은 「월리암 피트」의 말보다도 더 귀중한 것을 말하였읍니다. 왜냐하면 그들은 우리가 먼저 평화로와야 할 그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였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먼저 하나님과 평화롭게 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는 것을 증명하기 위하여, 그는 계속하여 다음과 같이 말함으로써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발견할 것을 충고하였읍니다. 『여호와의 눈은 의인을 향하시고 그 귀는 저희 부르짖음에 기울이시는도다. 여호와의 얼굴은 행악하는 자를 대하사 저희의 자취를 땅에서 끊으려 하시는도다.』 사도 「베드로」도 똑같은 순서로 「다윗」의 시를 인용하였읍니다. 더욱이 「다윗」은 생명을 사랑하는 자들에 대한 교훈을 하기 전에 좋은 날을 즐거워하는데 관한 충고를 하였읍니다. 『너희 소자들아, 와서 내게 들으라. 내가 여호와를 경외함을 너희에게 가르치리로다.』 만일 우리가 여호와라는 이름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을 두려워할 줄 안다면 우리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와 평화로울 것을 구하여야 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우리는 우리가 필요한 가르침을 받아드릴 것입니다. 우리는 여호와의 얼굴이 우리를 대하시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생명을 잃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바로 우리를 이 땅으로부터 끊어버리고 우리의 이름을 없애버리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0. 누가 2:14은 온 인류가 다 하나님과 평화롭고 그의 선의를 받았다는 뜻입니까? 우리는 그의 참뜻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10 도대체 우리는 왜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로울 것을 구해야 합니까? 그의 천적 아들인 예수께서 「베들레헴」에서 탄생되었을때, 일군의 천사는 지금 기독교국에서 「크리스머스」 때가 되면 노래 부르는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위에는 평화요, 사람에게는 선의로다.』라고 하지않았읍니까? 그렇습니다. 그러나 여기 천사들이 노래 부른 것은 온 인류가 다 하나님과 평화롭고 하나님의 선의를 받았다는 것이 아닙니다. (누가 2:14, 흠정역) 1881년의 「영국의 개역판」과 1901년의 「미국 표준역」은 이 천사들의 말을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위에서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사이의 평화로다.』라고 번역하였읍니다. 「미국 번역판」은 『은총받은 사람들에게는 평화』라고 번역하였읍니다. 「몬시그노르 알 · 에이 · 녹쓰」의 「로마」 「카돌릭」 번역은 『땅 위에는 하나님의 벗들인 사람들에게 평화』라고 하였읍니다. 「신세계역」 난외주는 『땅 위에는 하나님께서 인증하는 사람들 사이에 평화』라고 되어 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은총을 베푸신 자들 혹은 인증한 자들, 그러므로 그의 벗이 되는 사람들 사이에만 평화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총의 눈은 다만 그러한 사람들에게만 향하십니다. 다만 그들의 간구의 소리에만 그의 귀를 기울이십니다.

11. 최초의 인간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임에도 불구하고 왜 이와같이 되었읍니까?

11 그러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람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완전한 「아담」은 하나님의 직접적인 창조물이었읍니다. 그러므로 누가 3:23-38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족보를 땅의 최초의 인간에게까지 따져 올라가게 되면, 『그 이상은 「아담」이요. 그 이상은 하나님이시니라.』는 말로 끝납니다. 그러나 우리는 모두 「아담」이 그의 창조주에게 죄를 범하여 인간의 완전성을 잃은 후에 탄생된 자손들입니다. 고대에 가장 지혜로왔던 왕 「솔로몬」은 『범죄치 아니하는 사람이 없아오니,』라고 말하였읍니다. (열왕기 상 8:46) 또한 「다윗」왕도 『다 치우쳤으며 함께 더러운 자가 되고 선을 행하는 자가 없으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말하였읍니다. (시편 14:3) 그로부터 천년후에 그리스도의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 . . 한 사람<「아담」>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싱에 들어오고 죄로 말미암아 사망이 왔나니, 이와같이 모든 사람이 죄를 지었으므로 사망이 모든 사람에게 이르렀느니라.』 (로마 3:22, 23; 5:12) 우리가 육체적 「유대」인이든지 아니든지 우리는 모두 죄인 「아담」으로부터 탄생된 자손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두 죄의 법 아래 있게 되었으며 우리는 모두 죄가 지불하는 보답인 죽음의 종이 되었읍니다. 『한 사람의 범죄를 인하여 사망이 그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였은즉, . . . 죄의 삯은 사망이요.』 (로마 5:17; 6:23) 모든 사람들이 다 죽어간다는 사실은 그들이 모두 사형을 선고하신 여호와 하나님에 대한 죄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12.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에 있어서 죄가 깨뜨린 것은 무엇이었으며 인류가 순종하는 것은 누구에게 순종하는 것인가를 알려주는 성구는 어느 것입니까?

12 인간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인 하나님과 인간의 평화를 깨뜨린 것은 죄였읍니다. 인류는 죄와 악한 영 악마 「사단」의 종이 되었읍니다. 그는 온 우주를 통하여 죄를 출발시킨 여호와 하나님의 원수의 괴수입니다. 아마 스스로 의롭다고 자처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죄의 창시자의 종이라는 말을 듣기 싫어할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들이 누구에게 순종하고 있는가를 보임으로써 그들이 섬기는 자가 누구인가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렇게 말하고 있읍니다.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하나님께〉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로마 6:16) 성경의 마지막에 있는 책중의 하나는 『온 세상은 악한 자 안에 처』하여 있다고 기록하였읍니다. (요한 1서 5:19) 심지어 그리스도인들에게도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너희의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그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에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사단」〉이라. 전에는 우리도 다 그 가운데서 우리 육체의 욕심을 따라 지내며,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것을 하여 다른 이들과 같이 본질상 진노의 자녀이었더니,』 (에베소 2:1-3)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 . . 화목케 하사,』—골로새 1:21, 22.

13. 모든 사람이 하나님과 그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바울」과 「디모데」가 사신으로서 간청한 바와 일치하게 무엇이 필요합니까?

13 만일 이름 뿐만의 그리스도인이 아니라 생활에 있어서도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이 그들의 마음과 행동으로 인하여 한때 하나님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었고 하나님의 원수였었다면, 참다운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은 모든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으며 그에게 원수가 된다는 것은 이상스러울 것이 아닙니다. 그들은 하나님과 화해하고 하나님의 벗이 되지 않으면 안됩니다. 만일 그들이 장차 오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의 전쟁』에서 멸망될 『진노의 자녀』가 되기를 원치 않는다면 이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입니다. 그들은 바로 사도 「바울」과 그의 선교 사업의 동료 「디모데」가 해야 한다고 간청한 것을 행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나니, 저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 . . 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 하셨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 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린도 후 5:18-20.

14. 옛날에 대사를 파견한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바울」과 「디모데」를 파견한 분이 이 조건을 초안하는 일은 왜 이상스러운 일입니까?

14 「바울」과 「디모데」가 살고 있던 시대에 사신 즉 대사를 파견하는 것은 나라나 정부 사이에 평화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고 적대시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었읍니다. 그리하여 적대시하는 나라 사이에 우호적인 관계를 수립하기 위하여 대사가 파견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 「바울」과 「디모데」의 경우에 있어서는 이 적대시하는 둘 사이의 약한 편에서 대사를 보내는 것이 아니었읍니다. 대사를 보내는 편은 전능하신 하나님 여호와이십니다. 이렇게 함으로 그는 자비를 보여 될수있는대로 많은 사람들이 그와 화목함으로 멸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하시는 것입니다. 둘 사이에서 절대적으로 강한 편인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 자신과 평화스럽게 할 수 있는 길을 예비하신 분입니다. 그는 이사야 45:7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읍니다. 『나는 평안도 짓고 환난도 창조하나니 나는 여호와라. 이 모든 일을 행하는 자니라.』 그러므로 평화를 위한 조건을 초안하는 분도 그분입니다. 평화를 위한 조건을 초안하는 것은 우리가 아닙니다. 그러나 그의 조건은 가혹한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자비로운 것이며 실제적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것을 감사함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우리에게 가장 좋은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구하는가

15, 16. (ㄱ)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될 것을 구하기 위하여 어떻게 믿음과 진실성을 보이며, 평화의 길은 누구를 통하는 것입니까? (ㄴ) 육적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올바른 입장을 어떻게 구하였으며, 그들의 죄를 위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이었읍니까?

15 그러면 그의 조건은 어떠한 것입니까? 『진노의 자녀』들인 우리는 어떻게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될 것을 구하고 그것을 발견할 수 있읍니까? 평화를 위한 그의 조건은 그의 기록된 말씀인 성서 즉 성경에 명백히 기록되어 있읍니다.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스러울 것을 구하는데 있어서 우리는 의로운 길을 좇고 성경 전체를 연구함으로 우리의 믿음과 우리의 진실성을 나타내야 합니다. 이것은 다만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지고 있었던 「히브리」어 성경 뿐만아니라 그리스도교의 「희랍」어 성경도 함께 연구하여야 함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님과 화목하여 벗이 되는 길은 다만 하나 밖에 없음을 말해 주고 있읍니다. 그 길은 곧 그의 사랑하는 천적 아들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는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이 아들을 하늘로부터 땅으로 내려 보내어 「이스라엘」나라에서 탄생되게 하셨읍니다. 그러므로 이 아들은 「유대」인의 한 처녀에게서 기적적으로 탄생되었으며 한 「유대」인 즉 「이스라엘」 사람이 되었읍니다. 그는 주후 29년부터 33년까지 3년 반 동안 다만 「이스라엘」 사람들에게만 공개적으로 또는 개인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하셨읍니다. 죄인들인 「이스라엘」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께서 다만 「유대」인들에게만 주신 율법을 지킴으로 죄의 선고로부터 벗어나려고 오랫동안 애써 왔읍니다. 그러나 그 율법은 완전한 것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그것을 지킬 수 없었읍니다.

16 하나님의 율법은 예언자 「모세」를 통하여 다만 그들의 죄를 더욱 명백하게 하기 위하여 그들에게 주어진 것입니다. 그 율법은 「유대」인들이 죄인들이라는 것을 명백히 증명하여 주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매년 상징적으로 죄를 깨끗게 하는 절차를 밟고 여호와 하나님과의 언약 관계를 계속시키기 위하여 짐승의 제사를 지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에게는 짐승의 제물보다 더 나은 제사가 필요 하였읍니다. 그들에게는 그들 자신과 온 인류를 위하여 완전한 인간의 제물이 필요하였던 것입니다.

17. 어떻게 필요한 제물이 준비되었으며 「이스라엘」백성들은 이것을 어떻게 알게 되었읍니까? 그리고 그들은 이에 대하여 어떠한 태도를 취하였읍니까?

17 그러나 「이스라엘」 나라 안에서도 자기 자신을 인간의 제물로 바칠만한 가치가 있는 완전한 몸과 마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 하나도 없었읍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는 그의 아들을 하늘에서 내려 보내시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읍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하늘에 계신 아버지로 말미암아 완전한 인간의 어린 아기로 태어나 「에덴」동산에 있던 「아담」과 같이 완전한 인간으로 성장하게 하시고 그로 하여금 자신을 완전한 인간 제물로 바치게 하셨읍니다. 온 인류의 죄를 위하여 제물로서 죽으시기 전에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도들과 70인의 다른 복음 전파자들은 「팔레스티나」에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파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사람들, 즉 「유대」인들은 하나님과의 영원한 평화를 위한 길이 그들 앞에 놓여져 있음에 대하여 무식하지 않았읍니다. 『만유의 주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화평의 복음을 전하사, 「이스라엘」자손들에게 보내신 말씀』을 그들은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10:36)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율법 아래 있는 수백만의 「유대」인들 가운데서 다만 소수의 남은 자들 만이 이 기쁜 소식을 받아들여,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되는 길을 택하였읍니다. 그 나머지 「유대」인들은 쓸데 없는 짐승의 제물로써 「모세」를 통한 하나님의 율법을 지킴으로 거만하게 그리고 실속없이 하나님 앞에서 그들 자신의 입장을 의롭게 하려고 하였읍니다.

18.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자신과의 평화를 위한 상태 즉 수단을 마련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으며 그러므로 그는 무엇이라고 불리우게 되셨읍니까?

18 하나님과의 평화를 위한 조건과 방법을 세우신 분은 하나님 자신이라는 사실이 하늘로부터 그의 독생자를 내려 보내어 완전한 인간의 제물이 되도록 마련하셨다는 것으로 잘 증명되고 있읍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요한 3:16) 하나님께서는 다만 그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그로 완전하고 죄없는 인간 제물로서 하나님의 원수의 손에 죽게 하신 것 뿐만아니라, 그는 또한 하나님과 평화를 원하는 인류를 위하여 그 제물의 가치를 하늘에 계신 그에게 바칠 수 있게 하셨읍니다. 하나님께서는 어떻게 이 일을 하셨읍니까? 그는 그의 전능하신 힘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죽음으로부터 다시 한번 천적 즉 영적 아들로 일으키어 그를 하늘로 돌아오게 하셨읍니다. 그리하여 예수께서 그의 제물이 된 생명의 피의 가치를 하나님에게 바침으로 평화의 새로운 언약을 맺을 수 있게 하였읍니다. 여호와께서는 인류와 더불어 평화할 수 있는 이러한 마련을 함으로써 평화의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셨읍니다. 이러한 점에서 그는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라고 불리우게 되었읍니다.—히브리 13:20.

19. 우리가 평화를 구하는데 있어서 온전한 지도로서 무엇이 필요합니까?

19 그러므로 우리는 평화를 구하고 그것을 발견하기 위하여 다만 여호와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얻을 뿐만아니라, 또한 제물이 된 그의 사랑하는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을 얻어야 될 이유를 인식할 수 있을 것입니다. 「유대」인들은 「히브리」어 성경 39권으로부터 가장 많은 지식을 얻는다고 해야 다만 일부분의 지식 밖에는 얻을 수 없읍니다. 그것으로는 불충분한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인 「유대」인들이 영감에 의하여 기록한 그리스도인의 「희랍」어 성경 27권의 부가적 지식이 우리의 지식을 완전히 하고 정확하게 하기 위하여 필요합니다. 다만 하나님에 관한 지식 뿐만아니라 또한 예수에 관한 지식도 포함되어 있는 정확한 지식을 우리가 갖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우리가 원하는 평화에 대한 보증을 받을 수 없읍니다. 이러한 이유로서 영강받은 성경 기자의 한 사람인 「베드로」는 평화를 구하는 자들을 위한 그의 기도를 그가 쓴 첫 서한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한 것입니다. 『하나님과 은혜를 앎[지식]으로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그의 신기한 능력으로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셨으니, 이는 자기의 영광과 덕으로써 우리를 부르신 자를 앎으로 말미암음이라.』—베드로 후 1:2, 3.

20. 그러므로 하나님과의 평화를 즐기기 위하여 우리는 무엇을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않으면 안됩니까?

20 우리가 아무리 하나님과의 평화를 구한다 할지라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정확한 지식과 죄를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 하신 그의 아들의 제물을 받아들이지 않는 한 그것을 발견할 수 없읍니다. 「유대」인들은 그들의 부분적인 지식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죄로부터 깨끗게 하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예수의 피의 제물을 떠나 하나님 앞에 그들 자신의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려고 노력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모세」를 통하여 「유대」인들에게 주신 율법에 의하여 의로운 행동을 나타내려고 노력하는 대신 죄를 없애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에 온전한 믿음을 갖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결코 하나님과의 어떠한 평화도 즐길 수 없읍니다.

21. (ㄱ) 그리스도인들은 의로 인정되었으므로 그들은 무엇을 즐깁니까? (ㄴ) 「이사야」는 예수의 제물의 필요성을 어떻게 예언하였으며 우리는 예수에게 우리의 소망을 둠으로써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됩니까?

21 그러므로 사도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에 대한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로 인정된 그리스도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편지하였읍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로마 5:1, 9) 우리가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되고 그의 노하심으로부터 피하기 위하여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제물이 절대 필요합니다. 오래 전에 예언자 「이사야」는 예의 제물에 관하여 예언하였읍니다.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이사야 53:5) 하나님과의 평화는 즐거움을 갖다줍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의 평화를 위하여 징계하신 아들에 대하여 믿음을 갖지 않는 한 우리는 하나님과의 그러한 평화를 누릴 수 없읍니다. 성경은 다음과 같이 말하였읍니다. 『열방이 그에게 소망을 두리라. . . .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너희 모든 사람과 함께 계실지어다.』 (로마 15:12, 13, 33) 만일 하나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면 우리는 참으로 온전한 평화를 알게 될 것입니다.

22. 육적 「유대」인이 아직까지 육체적 할례를 행하는 것이 왜 헛된 일입니까?

22 육체적 「유대」인들은 의로움을 나타내기 위하여 포피(包皮)에 할례를 행하는 것을 계속하고 있읍니다. 그렇게 하는 것으로 그들은 결코 한번 육적 「이스라엘」의 하나님이었던 여호와와 평화를 즐길 수는 없읍니다. 육체적 할례가 한번 그들의 하나님이었던 여호와께서 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요구되는 것은 새로운 그리스도인으로서 원칙 혹은 법칙대로 우리가 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가 머리가 되시는 새로운 영적 피조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적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해주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의를 위하여 할례 즉 깨끗게 되어야 합니다. 「유대」교의 개종자 「바울」은 육체적 「유대」인으로서 그가 육체적으로 할례받은 것을 자랑하는 것을 그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에게 이렇게 편지하였읍니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은 자 뿐이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갈라디아 6:15, 16; 빌립보 4:9; 갈라디아 5:25; 고린도 후 5:17.

평화를 구하는 『큰 무리』

23. 이사야 27:1-5과 일치하게 오늘날 영적 「이스라엘」 백성들은 어떻게 하나님과 평화롭게 되었으며, 특히 1935년부터 누가 그들의 뒤를 따르고 있읍니까?

23 여호와 하나님께서 상징적 「리워야단」(악마의 보이는 조직)을 죽이시고 그의 영적 포도원(땅위에 있는 그의 보이는 조직)을 계속 보호하고 계실 이때에, 보호와 보존됨을 즐기기를 원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여호와께서 친절하게 권고하시는 것은, 『나의 힘을 의지하고 나와 화친하며 나로 더불어 화친』하라는 것입니다. (이사야 27:1-5) 여호와의 영적 포도원을 구성하고 있는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인 믿는 자들은 악마의 「리워야단」 조직제도로부터 탈출함으로써 하나님과 평화롭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최근에 와서는 특히 1935년 이래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의 성원이 아닌 수십 만의 사람들이 여호와 하나님의 권고하시는 것을 듣고 행하고 있읍니다. 그들은 이 악한 「리워야단」이 관리하는 인류 사회의 바다로부터 나와 하나님의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을 따르고 있으며 하나님의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롭게 되고 있읍니다. 계시록 7:9, 10에서는 그들을 모든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나온 큰 무리로 상징하고 있으며 그들은 『구원하심이 보좌에 앉으신 우리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있도다.』라는 말로써 그들의 구원받은 상태를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게 고한다고 기록되어 있읍니다.

24. 계시록 7:14-17은 그들이 평화스러운 상태로 들어오게 한 길에 관하여 어떻게 기록하고 있읍니까?

24 아무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하나님과의 평화를 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깨끗게 하는 피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앞에 의로운 상태에 있음으로, 계시록 7:14-17은 그들이 이 평화스러운 상태에 들어 오게 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읍니다. 『어린 양의 피에 그 옷을 씻어 희게 하였느니라. 그러므로 그들이 하나님의 보좌 앞에 있고 또 그의 성전에서 밤낮 하나님을 섬기매 보좌에 앉으신 이[하나님]가 그들 위에 장막을 치시리니, 저희가 다시 주리지도 아니하며, 목 마르지도 아니하고 해나 아무 뜨거운 기운에 상하지 아니할지니,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예수 그리스도]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터라.』

25. 이 『큰 무리』 는 옛날 「여리고」성읍에 살던 누구에 의하여 전영되었으며 어떠한 면에서 그러합니까?

25 이 『큰 무리』는 옛날 「모세」의 후계자 「여호수아」시대에 있던 「라합」이라는 「가나안」 여인에 의하여 전영되었읍니다. 「가나안」에 있는 「라합」이 살고 있는 도시는 「여리고」라는 성읍이었읍니다. 이 성읍은 그의 시민과 함께 멸망될 운명에 놓여져 있었읍니다. 여호와 하나님께서 「여리고」의 성벽을 무너뜨리고 이레동안이나 「여리고」 성의 주위를 행진하고 있던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 성의 악한 시민들을 죽일 때에 「라합」과 그의 가족은 그 멸망을 피할 수 있었읍니다. 그들은 어떻게 그러한 안전한 피난을 할 수 있었읍니까? 왜냐하면 「라합」은 「이스라엘」의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라합」은 「여호수아」가 그 도시에 보낸 두 정탐군을 밀고하지 않고 그의 집에 숨겨 주었읍니다. (여호수아 2:1-21; 6:1-25) 그리스도의 「희랍」어 성경은 이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읍니다. 『믿음으로 칠일 동안 「여리고」를 두루 다니매 성이 무너졌으며, 믿음으로 기생 「라합」은 정탐군을 평안히 영접하였음으로 순종하지 아니한 자와 함께 멸망하지 아니하였도다.』—히브리 11:30, 31.

26. 「가나안」에 있는 어떠한 도시 사람들에 의하여 살아 넘어갈 『큰무리』가 예표되었으며 그들은 어떠한 절차를 밟아 그렇게 되었읍니까?

26 임박해 오고 있는 『하나님 곧 전능하신 이의 큰날의 전쟁』에서 살아남을 이 같은 『큰 무리』는 또한 「기브온」성읍 사람들에 의하여 전영되었읍니다. 「가나안」에 있는 이 도시도 「여호수아」의 지휘 아래 있는 여호와의 「이스라엘」군대에 의하여 멸망될 운명에 있었읍니다. 「여호수아」라는 이름을 「희랍」 사람들은 예수라고 불렀읍니다. 사실상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심판에서 그의 집행관이 되실 예수 그리스도를 예언적으로 전영하였읍니다. (사도 7:45; 히브리 4:8) 이상스럽게도 「기브온」성읍과 그 이웃에 있는 세 성읍은 「여호수아」가 「가나안」에 있는 다른 도시들을 멸망시키는 집행에서 벗어났읍니다. 이렇게 된 이유도 또한 그들이 집행자가 오기 전에 여호와 하나님과 평화스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여호수아」와 그의 군대가 그 성읍으로 가까히 오기 여러 날 전에 「기브온」사람들은 변장을 한 그들의 대사를 「여호수아」의 진으로 보내어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백성들과의 평화를 요청하였읍니다. 그들은「여호수아」를 통하여 여호와께 완전히 항복하였던 것입니다.

27. 이러한 옛날 사람들이 받은 결과와 같이 평화를 구하는 이 『큰 무리』는 어떠한 결과를 얻게 됩니까?

27 그 결과는 어떠하였읍니까? 그에 대한 대답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수아」가 곧 그들과 화친하여 그들을 살리리라는 언약을 맺고 회중 족장들이 그들에게 맹세하였더라.』 (여호수아 9:15) 오늘날 평화를 구하는 『큰 무리』는 옛날 「이스라엘」 백성이 아닌 「기브온」사람들과 같이 「아마겟돈」이 폭발되기 직전인 오늘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여호와 하나님께 자신들을 완전히 헌신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더 크신 「여호수아」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주 전쟁의 멸망으로부터 그들을 구원하실 것입니다. 영적 「이스라엘」의 남은 자들과 같이 『큰 무리』도 생명을 사랑합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아래 영원한 좋은 날을 보기를 소원하고 있읍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오늘날 평화에 관한 「다윗」과 「베드로」의 충고를 따르고 있읍니다.

[각주]

a 그리스도인의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 베드로 전 3:8-12의 난외주에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희랍」어 성경의 아홉 가지 「히브리」어 번역에는 이 곳에 「여호와」 혹은 「야웨」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도「베드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있는 「히브리」어의 「다윗」의 말로부터 이것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b 그리스도인의 「희랍」어 성경 신세계역 베드로 전 3:8-12의 난외주에 설명되어 있는 바와 같이, 그리스도인의 「희랍」어 성경의 아홉 가지 「히브리」어 번역에는 이 곳에 「여호와」 혹은 「야웨」라는 말이 있다. 이것은 사도「베드로」가 전능하신 하나님의 이름이 나타나 있는 「히브리」어의 「다윗」의 말로부터 이것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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