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보호 아래 담대하게 됨
1. 이 낡은 세상에 있는 동안 이 땅에서 우리의 모든 날을 여호와의 집에서 사는 것이 전부입니까? 그렇지 않다면 전망은 무엇입니까?
여호와의 숭배의 집은 보호를 받는 장소입니다. 그러므로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보호를 즐길 수 있읍니다. 이 낡은 세상이 존재하는 동안 이 땅에서 우리들의 모든 날들을 여호와의 집에서 담대하게 사는 것이 문제의 전부가 아닙니다. 영적 『산 돌들』인 그리스도인들은 죽음으로부터 부활함으로써 하늘에서 머릿돌인 기초석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여호와의 완전한 성전을 이루기 위하여 하늘로 옮기워지게 될 것입니다. 오늘날 여호와의 성전으로 들어오고 있는 수십만의 다른 헌신한 숭배자들은 지상 낙원에서 그의 깨끗한 숭배를 수행함으로써 끝이 없는 신 세계에서 그들의 생애의 모든 날을 그의 집에서 살게 될 것입니다.
2. 여호와의 증인들이 지금 무엇을 하는 것으로 장차 그들이 무엇을 원하는가를 나타내고 있읍니까?
2 그러나 우리가 장래에 무엇을 원하는가는 오늘날 우리가 무엇을 원하며 바라는가에 의하여 나타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아마겟돈」 후에 장차 여호와의 집에서 영원히 살 전망을 가지고 있다 하드라도 우리는 「아마겟돈」 전인 지금에 있어서도 거기에서 살기를 원합니다. 그리하여 이 세상에서 우리가 지금 당하고 있는 모든 환란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여호와께서는 우리가 지금 그 특권을 즐길 수 있게 하십니다. 공산주의 철의 장막 안팎을 막론하고 여호와의 증인들이 금지되었고 성경 연구를 위하여 함께 모이는 것이 금지된 나라가 여러 군데 있읍니다. 그러한 곳에서 집회를 갖고자 하는 것은 매우 위험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담대하게도 지하에서 그렇게 하는데 성공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장래에 무엇을 원하고 있는가를 나타내고 있읍니다.
3, 4 (ㄱ) 우리는 어떻게 함께 박해를 받고 있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무엇을 하여야 합니까? (ㄴ) 「다윗」은 시편 27:5-10에서 다시 여호와의 집에서 사는데 관한 그의 확신을 무엇이라고 표현하였읍니까?
3 직접적이던 간접적이던 간에 다른 사람의 동정적인 동료로서 여호와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인 우리는 함께 박해를 당하고 있읍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마치 「다윗」이 원수의 불타는 적개심 아래서도 그렇게 한 바와 같이 담대하게 함께 모이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여호와의 보호와 그의 도움과 그로 하나님의 집에서 다시 살게 되도록 구원하실 것을 의뢰하였읍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4 『여호와께서 환난 날에 나를 그 초막 속에 비밀히 지키시고 그 장막 은밀한 곳에 나를 숨기시며 바위 위에 높이 두시리로다. 이제 내 머리가 나를 두른 내 원수 위에 들리리니 내가 그 장막에서 즐거운 제사를 들이겠고 노래하여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여호와여 내가 소리로 부르짖을 때에 들으시고 또한 나를 긍휼히 여기사 응답하소서.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 하실 때에 내 마음이 주께 말하되 여호와여 내가 주의 얼글을 찾으리이다 하였나이다. 주의 얼굴을 내게서 숨기지 마시고 주의 종을 노하여 버리지 마소서. 주는 나의 도움이 되셨나이다. 나의 구원의 하나님이시여 나를 버리지 말고 떠나지 마옵소서. 내 부모는 나를 버렸으나 여호와는 나를 영접하시리이다.』—시 27:5-10.
5. 원수들은 어떻게 「다윗」을 영적으로 멸하고자 하였으며, 왜 그는 그들이 성공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확신하였읍니까?
5 박해를 당하던 「다윗」은 이러한 말로써 여호와의 성전에서 그를 숭배하는 일을 방해하는 적들에게서 마지막 승리를 걷을 것을 확신함을 표시하였읍니다. 적들은 그에 대하여 영적 재난을 기도하였읍니다. 특히 악한 박해를 합법화하므로 『율례를 빙자』하여 그렇게 함으로써 「다윗」으로 하여금 하나님께 대한 그의 믿음과 하나님께 대한 그의 숭배와 봉사로부터 떨어져 나가게 하려고 하였읍니다. (시 94:20) 그러나 그들은 여호와의 종으로서 그리고 그의 증인으로서의 「다윗」을 없애 버리는데 성공하지 못하였읍니다. 심지어 재난도 정신적으로 「다윗」에게 아무런 소용이 없었읍니다. 왜냐 하면 그는 여호와의 안전한 초막 속 즉 가까이 할 수 없는 여호와의 거룩한 장막 『은밀한 곳』에 마치 그의 모든 원수들이 올라갈 수 없는 높은 바위 위와 같이 숨겨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참다운 숭배의 원수들에게서 승리하므로 「다윗」의 머리를 높이 들게 하셨읍니다. 그는 다시 그의 숭배자들에게 충성스러우신 여호와께 제사를 드리고 감사함을 나타내고자 노래를 부르고 음률을 짓기 위하여 그의 숭배의 장막에 있는 하나님의 제단에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읍니다.
6. (ㄱ) 우리는 하나님의 어떠한 초대에 응하며, 여러 가지 장애물에도 불구하고 왜 그렇게 합니까? (ㄴ) 우리는 누구의 도움으로 그렇게 할 수 있읍니까?
6 그러므로 이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증인으로서 박해를 받고 있는 여러분은 담대하십시오. 그가 우리에 대하여 은혜를 베푸신다는 증거는 하나님을 믿지 않는 우리의 원수들이 우리에 대하여 방해하고 싸움을 일으키는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기도에 대하여 응답하신다는 것을 틀림 없이 우리에게 보여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 가운데에는 그의 백성들에 대한 여호와 자신의 초대를 간직하고 『너희는 내 얼굴을 찾으라』는 그의 초대를 우리 마음 가운데서 우리에게 일깨워 주게 할 것입니다. 우리는 그의 헌신한 백성으로서 열심히 응답하고 은혜롭고 아름다운 그의 얼굴을 찾고자 합니다. (스바냐 2:1-3) 그렇게 하는 것에 성공하기 위하여 우리는 원수들과 이 물질 주의적인 세상의 유혹에 의하여 우리 길에 놓여져 있는 많은 장애물을 극복하지 않으면 안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사랑하고 그에게 충성 함으로써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왜냐 하면 그의 은혜는 우리에게 생명을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곳으로부터의 도움이 끊어졌다 하드라도 그렇게 합니다. 모든 사람들은 우리를 버린 것같이 보일지 모르지만 여호와께서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의 도움이 되십니다. 왜냐 하면 그의 도움은 결코 충성을 잃는 일이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의 얼굴을 찾는다면 그렇게 할 수 있읍니다.
7. (ㄱ) 「다윗」은 인간이 버림을 받는 일의 가장 극단적인 예를 무엇이라고 하셨읍니까? (ㄴ) 그러나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누구를 의지할 수 있읍니까?
7 자기 부모로부터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얼마나 슬픈 일입니까? 박해를 받은 「다윗」은 그러한 경험을 하지 않았읍니다. 그의 부모는 그를 버리지 않았읍니다. 그가 박해자 「사울」왕으로부터 도망하여 「아둘람」 근처에 있는 굴에 숨어 있을 때 그의 『형제와 아비의 온 집이 듣고』 「베들레헴」을 떠나 그에게로 왔읍니다. 후에 「다윗」은 그의 부모와 함께 「요단」강 동쪽으로 가서 「모압」 땅의 왕에게 『하나님이 나를 위하며 어떻게 하실 것을 알기까지 나의 부모로 나와서 당신들과 함께 있게 하기를 청하나이다』라고 말하였읍니다. 그리하여 그의 부모는 거기에서 얼마 동안 머물었읍니다. (사무엘 상 22:1-3) 만일 「다윗」의 부모가 그를 버린 일이 있다면 그것은 다만 그가 사는 곳에 그만 남겨두고 그들이 죽은 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다윗」은 그의 시편에서 인간이 그의 부모에게 버림을 받는다는 것은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임을 단순히 말한 것입니다. 만일 부모가 그렇게 하였다면 다른 모든 사람들도 기대할 수 있는 일일 것입니다. 그러한 극단적인 경우에 있어서 「다윗」을 버리지 않으실 것을 기대할 수 있는 다만 한분이 계셨읍니다. 그는 일마나 위안이 되는 분이었읍니까! 그는 그가 항상 얼굴을 찾고 있던 여호와 하나님이시며 그는 그를 버리지 않으셨읍니다. 여호와께서는 또한 죽지도 않으시는 분이십니다.—하박국 1:12.
8, 9. (ㄱ) 예언된 바와 같이 여호와의 숭배를 선택하는 일은 어떠한 분열을 일으키게 하는 경우가 있읍니까? (ㄴ) 그러한 경우에 있어서 누가 우리를 소유하신 것을 나타내며, 그리고 어떠한 확실한 약속에 의하여 그렇게 하십니까?
8 「사단」의 세상의 『마지막 때』에 여호와를 숭배하는 일을 선택하는 것은 많은 가까운 혈연관계를 분열시켜 놓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아버지 여호와께 대한 깨끗한 숭배를 이 지상에 회복시키실 때에 그러한 일이 있으리라고 말씀하셨읍니다. 예수께서는 이 땅에 종교적 평화를 세우려고 오시지 않았읍니다.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비와, 딸이 어미와, 며느리가 시어미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애정에 대한 계속적인 시험에서 부모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하늘의 아버지께 더는 애정을 나타내는 그들 자신의 자녀들까지도 부인하고 버린다는 것입니다. (마태 10:33-37) 그와 같은 버림을 당하는 일을 당하기 위하여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신 여호와께 대한 참되고 생명을 수여하는 숭배를 드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담대함이 요구됩니다. 그러나 만일 우리의 부모가 우리가 하늘에 계신 아버지 여호와를 선택하는 것을 인증하지 않고 우리를 버린다면 어떻게 합니까? 우리의 불멸하신 하늘의 아버지께서는 우리에게 그의 조직 안에 있는 한 곳을 주시므로 우리를 소유하심과 우리를 영접하심을 보이실 것입니다. 그는 그의 조직인 「시온」에 대한 그의 깨어지지 않는 충성심에 관하여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9 『여인이 어찌 그 젖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찌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이사야 49:15, 16; 욥 39:14, 15 대조.
10. (ㄱ) 여호와께서는 근년에 와서 그의 그리스도인 증인들에게 어떻게 이 예언을 입증하셨읍니까? (ㄴ) 그는 우리를 받아 들이기 위하여 무엇을 세우셨으며, 그리고 그는 어떻게 우리의 애정의 상처를 고쳐 주십니까?
10 1918년 제 1차 세계 대전이 끝난 이래 여호와 하나님께서는 그의 구부러지지 않는 충성의 이 예언을 입증하셨읍니다. 그는 제 1차 세계 대전 동안에 그리스도인 증인의 조직이 그들에 대한 잔인한 박해자들에 의하여 일소되는 것을 허락지 않으셨읍니다. 1919년에 그는 그들을 종교적 구속으로부터 석방하여 그들을 다시 그의 은혜 가운데로 영접하셨으며 그의 손은 그들의 황폐된 조직의 성벽을 재건하시기 시작하셨읍니다. 그는 사실상 그들을 잊으신 것이 아니었읍니다. 또한 그보다 더 심한 상태였던 제 2차 세계 대전 중에 있어서도 그들을 잊자 않으셨읍니다. 그 이래 그는 얼마나 튼튼하고 잘 보호된 조직을 그들을 위하여 재건하셨읍니까! 그들은 설립된 하나님의 나라의 기른 소식을 이들 정치 제도의 종말이 「아마겟돈」의 무서운 전쟁에서 오기 전에 모든 나라에 증거하기 위하여 이 땅에 사는 모든 사람들에게 공개적으로 그리고 호별 방문을 통하여 예언된 전파 사업을 충성스럽게 수행해 오고 있읍니다. (마태 24:14) 그러므로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 하드라도—심지어 우리의 이 세상적 부모라 하드라도—우리가 여호와를 하나님으로 찾고 있다는 이유로 우리를 버리고자 한다면 버리게 두십시요. 여호와께서는 버림을 받은 자를 기쁨으로 영접하십니다. 그의 사랑으로써 우리의 마음의 상처를 고쳐 주십니다. 그는 우리에게 그의 신 세계에서 영원한 생명을 즉 죽을 운명에 있는 우리의 부모들이 우리에게 줄 수 없는 생명을 주실 것을 보증하십니다.
11. 이제 우리는 어떠한 곳으로 영접되었으며, 우리는 결코 어떠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하며, 왜 그러한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까?
11 이제 그는 우리를 그의 신권 조직으로 영접하셨읍니다. 우리는 결코 그 조직을 떠나는 일이나 이 조직에 모이는 일을 중지 하여서는 안됩니다. 그는 결코 그의 충성스러운 조직을 잊지 않으십니다. 그러므로 그것을 떠나시거나 버리시는 일이 결코 없읍니다. 만일 여호와께서 그의 조직을 버리지 않으신다면 우리가 그 조직을 버린다는 것은 그를 버리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우리가 만일 그가 잊으실 수 없는 조직 가운데 거한다면 그는 우리를 결코 잊지 않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잊으시고 떠나신다는 것은 우리의 영원한 멸망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결코 그러한 일이 없도록 하십시요.
희망을 가지고 담대하라
12. 우리는 왜 여흐와의 증인의 역사상 가장 심한 믿음의 시험의 경험을 당하고 있읍니까?
12 이제 우리는 과거 어느 때 보다도 우리가 전 계계와 함께 지금 『하나님 곧 전능하신이의 큰 날』에 가까이 오고 있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 날은 하나님께서 『온 천하 임금』들과 그들이 동원한 모든 나라들이 「아마겟돈」에서와 같은 패배를 당하게 하는 우주의 전쟁으로써 나타나게 됩니다. 하나님 자신의 변경할 수 없는 시간표는 그러한 일이 머지 않은 장래에 일어나게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 헌신한 백성들은 여호와를 위한 처음 순교자인 「아벨」로부터 현재 『이 조직 제도의 결말』에 이르기까지 여호와의 증인들의 역사에 있어서 믿음을 시험하는 가장 심한 경험에 직면하고 있읍니다. (계시 16:14-16; 마태 24:3; 28:20) 세계 인구는 우리가 『잃어버린 양』을 발견하여 그들을 전능하신 하나님의 조직의 안전한 곳으로 인도해 들이는 수보다 훨씬 빠른 속도로 증가하고 있읍니다. 「사단」은 이 세상 모든 나라들을 하나님의 나라를 대항하도록 동맹하게 하고 있으므로 우리의 적들은 기독교국 안팎에서 끊임 없이 증가하고 있읍니다. 우리는 「사단」에 의하여 조직된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으므로 그들의 욕망은 우리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를 영적으로 파멸케 하고 그리스도의 통치 아래 있을 여호와의 신 세계에 대한 우리의 희망을 없애 버리려고 합니다.
13. 우리의 원수들은 어떠한 간계로 우리를 대적하고 있으며, 이렇게 하는 마귀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13 기를 경배하게 하는 법령이라든가, 수혈에 대한 법령이라든가, 여호와의 중인들의 존재에 대한 독재적 법령 등으로써 우리의 적들은 의식적으로 혹은 무의식적으로 『율례를 빙자』하여 우리를 대적하고 있읍니다. 이렇게 하는 마귀의 목적은 그들로 하여금 우리를 법을 어긴다는 이유로 고발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 하면 그들은 우리가 하나님의 율법을 지키는 것에서 우리를 대항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할 수 있는 외에는 아무 결함도 발견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니엘」의 경우와 같이 우리가 인간의 율법과 어긋나는 일이 있다 하드라도 하나님의 율법을 깨뜨리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그들은 잘 알고 있읍니다. (시 94:20; 다니엘 6:5-9) 우리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지금 권세를 잡고 있는 우리의 적들에게 그들의 야망을 달성하도록 내어 주실 것입니까? 우리가 만일 타협하기를 거절하고 우리가 고통을 당하드라도 그의 길을 굳게 걸어 가기를 원한다면 그는 그렇게 하시지 않을 것입니다.
14. 「다윗」에 의하여 표현된 바와 같이 어떠한 것이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하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4 우리에게 절실히 필요한 것은 하나님의 의로운 길의 원칙의 끊임 없는 교훈을 받음으로써 우리의 적들이 우리가 하나님께 대한 율법을 깨뜨리도록 우리를 정당하게 고발할 수 없게 하는 길로 그의 인도를 받는 것입니다. 만일 우리의 이 땅에 있는 부모가 종교적으로 우리를 버리고 우리에게 그러한 교훈과 인도를 해주지 않는다 하드라도 하나님께서 그렇게 해주실 것입니다. 박해를 받고 미움을 받은 「다윗」의 다음과 같은 기도는 지금 우리가 하기에 가장 알맞은 기도입니다. 『여호와여 주의 길로 나를 가르치시고 내 원수를 인하여 평탄한 길로 인도하소서. 내 생명을 내 대적의 뜻에 맡기지 마소서. 위증자와 악을 토하는자가 일어나 나를 치려함이니이다.』—시 27:11, 12.
15, 16. (ㄱ) 우리를 타협하게 하기 위하여 우리의 원수들은 어느 정도까지 할 것입니까? (ㄴ) 그와 같은 환경 아래 있을 때에 「다윗」은 자신과 동료 여호와의 증인들인 우리를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15 우리에게 있어서 타협하지 않는 길이란 상징적인 「마곡」의 「곡」이 온 땅위에서 여호와의 증인들의 신 세계 사회를 마지막으로 총 공격할 때에 원수들이 일으키려는 폭력이나 우리에게 대하여 일으킬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이 낡은 세상의 보통 사람이라면 미래에 대한 모든 희망을 다 잃게 할 정도로 우리에게 참으로 심한 공격을 가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은 환란의 이 세상이 지난 후에 오게 될 미래에 대한 하나님의 선하신 약속이 마지막으로 성취되는데 대한 믿음을 꺾고자 합니다.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였던 「다윗」에 대하여 그들은 그렇게 어려운 시련을 주었던 것입니다. 그러한 환경 아래 있던 「다윗」은 우리에게 좋고 올바른 본을 세워 주었읍니까? 그는 그렇게 하였읍니다. 그는 그 자신을 위하여 그리고 동료 여호와의 증인으로서의 우리 한사람 한사람을 위하여 무엇이라고 말하였읍니까? 그는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16 『내가 산 자의 땅에 있음이여 여호와의 은혜 볼 것을 믿었도다. 너는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강하고 담대하며 여호와를 바랄찌어다.』—시 27:13, 14.
17. (ㄱ)「다윗」은 그가 사는 땅에서 어떻게 여호와의 은혜를 보았읍니까? (ㄴ) 우리에게 하라고 한 것으로 그 자신이 한 일은 무엇입니까?
17 살아 있는 땅에서 나중에 여호와의 은혜를 봄으로 「다윗」의 믿음에 상이 주어졌읍니까? 그리하였읍니다. 여러 가지 어려운 싸움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사십년 동안이나 통치하였으며, 성전 건축에 필요한 모든 재료를 준비하였고 그의 보좌를 성전 건축자인 그의 사랑하는 아들 현명한 「솔로몬」에게 이어 주었읍니다. 그러나 그는 믿음의 시험을 당하는 한 가운데 있으면서도 우리에게 여호와를 바라라고 권고 하였읍니다. 다른 사람들에게 그렇게 하라고 권고 함으로써 그는 그 자신이 경건한 성실을 지키기 위하여 그렇게 바라는 것이 필요할 때에 그렇게 하였음을 증명해 주었읍니다. 그는 담대함을 가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18. (ㄱ)「다윗」의 「히브리」 말의 표현에 의하면 담대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입니까? (ㄴ) 담대함은 어떻게 나타날 수 있읍니까?
18 믿음과 희망은 우리로 담대하게 해줍니다. 「다윗」이 사용한 「히브리」 말에 의하면 담대하라는 것은 내적 힘을 갖는 것, 함께 꼭 뭉쳐 있는 것 같이 뭉쳐서 압력 아래에도 깨어지지 않는 것, 환란이나 적의 공격을 당하여도 조각 조각이 되어 날라가지 않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어려움과 위험의 압력 아래서도 믿음과 희망으로써 유지할 수 있읍니다. 우리는 보통 용감하다는 사람들이 자신을 긍시하는 바와 같이 자기를 나타내려고 할 필요가 없읍니다. 「아메리카 칼레지 사전」 (146면)은 『담대함이란 더 고등하고 더 고귀한 형태의 용감함을 의미한다. 특히 위험이나 난관을 두려움 없이 심지어는 열정을 가지고 직면하거나 견디는 지성이나 정신의 선천적인 성품에서 오는 결과』라고 하였읍니다. 우리가 꾸준히 하나님께 충성을 지키는 길은 그것이 조용하고 주의를 끄는 것이 아니라 할지라도 담대함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우리는 대담함을 나타냄으로써 칭찬을 받고자 하지 않습니다.
19. (ㄱ) 담대함은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할 것입니까? (ㄴ) 우리는 어떠한 희망을 결코 내버리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19 우리의 담대함은 우리의 마음을 튼튼히 갖도록 도와 줄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은 두려움으로 인하여 녹는 대신에 하나님의 사랑으르써 흔들리지 않을 것이며, 두려움과 의심을 쫓아 버릴 것입니다. (요한 1서 4:18) 그리하여 우리도 또한 우리를 시련과, 난관과, 박해와, 환란과, 위험을 통하여, 아니 「아마겟돈」의 하나님의 전쟁을 일으키게 할 「곡」의 공격을 통하여 앞으로 전진하게 하는 활동력으로서 여호와 하나님과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갖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께 충성함으로써 우리는 이전 어느 때 보다도 더 우리의 얼굴을 이 악한 모든 것을 승리한 그의 신 세계로 향하게 될 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 자신이 그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의로운 나라 아래 있을 신 세계에 대한 희망을 우리에게 주셨으므로 그 희망은 결코 던져 버릴 그러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다른 모든 희망을 던져 버리는 것은 안전하며 유익할 것입니다. 그러나 희망을 주시는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것은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여호와를 바랄찌어다』 여호와께서는 「다윗」을 실망케 하지 않으셨으며 「다윗」의 후손인 예수 그리스도도 실망케하지 않으셨읍니다. 그는 우리도 실망시키지 않으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희망과 믿음의 힘으로써 담대할 수 있으며, 여호와께서 그의 우주 주권을 입증하시기 위하여 영광스러운 승리를 거두실 세계의 「아마겟돈」을 직면해서도 담대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