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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종교는 어떻게 돈을 조달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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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신의 종교는 어떻게 돈을 조달하는가?
  • 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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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수대—여호와의 왕국 선포 1964
파64 3/1 84-87면

당신의 종교는 어떻게 돈을 조달하는가?

집안 살림이나, 사업 혹은 정부를 운영하는데는 돈이 필요합니다. 또한 종교 조직의 운영을 유지하는데도 역시 돈이 필요합니다. 교회나 사원은 필요한 돈을 조달하는데 가지 가지 다른 방법을 사용하고 있읍니다. 당신의 종교는 무슨 방법을 사용하고 있읍니까?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서가 택하여야 할 것으로 표시하고 있는 것은 어느 방법인가 하는 점입니다.

많은 종교에 의하여 사용되고 있는 더 유행된 자금 조달 방법에는 교회 만찬, 「빵」 및 잡품 판매와 자선시와 심지어 불고기 집들을 포함합니다. 물론 이러한 활동 자체에 어떤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종교적 목적을 위한 자금 조달 방법으로 사용되었을 때, 그리스도인들은 자연히 그렇게 해도 좋다는 근거나 전례를 성경에서 찾으려는 유혹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이러한 자금 조달 방법을 시작한 사람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와 같이 찾아봐도 헛수고 입니다. 예수께서 마련하신 점심은 사실 거저 주신 것이 었읍니다.—마가 6:35-44; 8:1-9.

그 반면에 어떤 사람들은 그들의 교회를 위하여 「빙고」, 경품부 판매 및 추첨분배와 같은 운수(運數)놀이를 운영함으로써 돈을 조달합니다. 다음과 같은 신문 보도를 읽고 교회 성원 중 더러는 동요하였음에 틀림 없읍니다. 『교회 경품부 판매 축연 경찰에 의하여 폐쇄되다.』 『자선 「바퀴」 압수되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도박으로 생각하려들지 않을 것입니다. 이렇든 저렇든 종교 사업과 관련된 놀이이기 때문에, 도의에 어긋난다는 영역에서는 벗어났다고 볼지 모릅니다. 그들은 『그리고 자금이 개인을 부하게 만들기 위하여 충당되고 있지 않으므로 실제 아무런 해가 없다.』고 느낄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이 문제에 대하여 잠간 생각하여 보면 누구인가가 적어도 재정적인 면에서 피해를 받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이러한 계획은 교회의 기금 조달 목적을 위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승자가 있어야 하며 그것은 바로 교회입니다. 그리고 승자가 있어야 하므로 또한 패자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참예자들입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가정이나 타처에서 참예자로 그의 재정적 책임을 지도록 돕는 것이겠읍니까? 그가 이것만이 교회에 대하여 그의 의무를 수행하도록 하는 방법이라고 느낄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는 항상 그의 자력에 따라서 교회에 돈을 헌금할 수 있읍니다. 이것은 크게 주는데서 『쾌감』을 얻고자 하는가 혹은 성서에서 권하고 있는 주는 것으로부터 행복을 얻고자 하는가에 달려 있읍니다. (사도 20:35) 단순한 재정적 의무 이상의 것이 고려되어야 한다는 것은 물론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이 하나님께 더 가까이 나아가는 수단으로서 교회와 연합합니다. 그러나, 운수 놀이에 의한 금전 조달이 사람들을 하나님께 더 가까이 이끈다고 정직하게 말할 수 있읍니까? 하나님께서는 [운수신]에게 섞은 술을 가득히 붓는』 사람들에게 적대하여 크게 말씀하십니다.—이사야 65:11, 난외주.

많은 교회는 그 성원들이 더 많은 헌금을 하도록 강압하기 위하여 근대 판매술의 가진 기술을 이용하는 전문적 자금 조달 기술자들의 봉사를 채용합니다. 한편으로는 또한 미국 유도(誘導) 연구소와 같은 조직들에 의하여 광고된 『심리적 술책』이 있으며, 교직자들에게 값을 받고 이를 제공합니다. 그러나 교회 성원들이 일요일 마다 『기술』이나 『술책』으로 취급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할 때 그들에게 임하는 결과는 어떻겠읍니까? 그들이 내놓을지 모르지만 행복합니까?

상업기업체를 운영함

또 한편으로는 돈을 조달하기 위하여 사업을 행하여 온 교회들도 있읍니다. 그러므로 1962년 2월 25일의 「위스컨신」 「밀워어키」 「저널」 지는 『교회들이 사업으로 「재물을 쌓다.」』 그리고 『많은 교파들은 주차장으로부터 양조장에 이르는 광범한 여러 가지 비종교적 기업으로 이득을 취한다.』고 보도하였읍니다. 이 표제들 아래 이 「저널」지는 계속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뉴우 저어지」의 큰 오락 공원 대문 바로 안에 검은 법의를 입은 수녀가 접는 걸상에 앉아 있다. 그녀는 무릎 위 담배 상자에 떨어뜨리는 동전을 받으면서 「그대에게 천복이 있기를!」 하고 말한다. 그녀는 구걸하는 것을 수치스럽게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그녀의 목적이 정말 돈일진데 그녀의 겸손한 방법은, 1962년 그녀가 「움-파-파」 소리를 내는 증기 「오르간」에 맞추어 귀에 거슬라는 「아베」노래를 부른것 만큼 교회 장면과 맞지 않는다. 예컨데, 그녀는 주차장이나 식당 혹은 「아파트」나 광산을 가짐으로써 오는 순 이익을 그녀의 교회에 바칠 수 있었을 것이다. . . . 혹은 더 없이 좋은 「캔디」를 만들 수 있으며 혹은 좋은 「빵」을 구을 수도 있고 혹은 새 「브랜디」를 만들 수도 있었을 것이다. . . . 이것들은 오늘날 이땅 전체에 걸쳐서 교회에 의하여 추구되고 있는 수입이 많은 작은 규모의 투기사업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이윤있는 사업이 종교적 활동을 유지하는데 필요합니까? 그리스도인들이 사업에 종사하는데는 확실히 아무런 잘못도 없읍니다. 사도 「바울」과 기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필요할 때 재정적 소득을 위하여 일하였읍니다. 그러나, 무엇 때문에 필요했읍니까? 물론 그들이 하나님의 말씀의 활동적 봉사자로서 그들 자신을 부양할 수 있도록 개인적 필수품을 위하여 필요하였읍니다. 제 일세기의 그리스도인 교회가 그 자체를 지탱하기 위하여 세속적 사업을 했다는 기록이 없읍니다. 예수께서는 그의 봉사를 수행하기 위하여 막대한 자금을 쌓아 둘 필요를 느끼지 않으셨읍니다. 어떤 한 부자 통치자가 예수께 와서 하나님의 요구조건에 관하여 문의했을 때 그는 그에게 봉사 활동에 헌금하기 위하여 그의 부를 투자하여 확장하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읍니다. 도리어 예수의 추종자로서 봉사 활동에 자신을 헌신하기 위하여 그의 물질적 환경으로부터 그가 벗어나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읍니다.—마태 6:19, 20; 19:16-25.

부탁하는가 혹은 구걸하는가

우리가 「밀워어키」 「저널」로부터 인용한 기사는 수녀가 그녀의 교회를 위하여 구걸하는 것을 말하였읍니다. 「맨치스터」 「가아디언」의 종교적 편집가 「라저 로이드」는 한 때 말하기를 그가 이십년 만에 교구 신부를 그만둘 때에 두번의 기분 좋은 일이 있었다고 하였읍니다. 이 기분 좋은 일 중의 하나는 더는 돈을 구걸할 필요가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축하하는 것이었읍니다. 의심할 여지 없이 그의 교회를 위하여 그가 돈을 구걸하는 방법 중 하나는 연보채를 돌리는 것이었읍니다. 이 흔한 습관을 보통 구걸로 생각하지 않으나 구걸과 같은 교모함을 내포하고 있읍니다.

돈을 조달하는 이런 형식이 우편에 의하여 많이 행하여집니다. 「빌리 그라함」이 그의 선전 운동에서 야기된 결손을 지불하도록 간청하는 우편엽서를 보내는 경우는 그와 같읍니다. 미국의 남부 지방에 위치한 「신부수난회」가 보낸 편지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친애하는 벗』 당신은 구걸해야 한 적이 있었읍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이 그렇게 할 필요가 없도록 하셨읍니다. 이것은 가장 불쾌한 일입니다. 흔히 거칠은 거절을 당하며 신랄하고 불친절하며 그렇지 않으면 단순히 무시당하게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구걸하여야 합니다. 수난회의 신부는 그리스도를 위하여 굳이 걸객이 되게 되어 있읍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종들이 살아 있기 위하여 하나님께서 그러한 심히 어려운 방법으로 구걸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드셨다고 상상할 수 있읍니까? 하나님을 위하여 구걸하는 것이 이치적입니까? 우주와 『천산의 생축』을 소유하고 계신분을 위하여 구걸하는 것이 목적에 맞는 일입니까? 「모세」의 율법 아래 있던 제사장들과 「레위」인들은 구걸해야 할 필요를 당하지 않았읍니다. 「느헤미야」 시대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성전 숭배를 위하여 올바로 바치지 못하였을 때 「래위」인들은 들에 나가 일하여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마련하였읍니다.—시 50:10-12; 신명 12:19; 느헤미야 13:10.

예수의 사도들 시대에도 동일한 원칙이 적용되었읍니다. 전도하는 사도 「바울」을 동료 그리스도인들이 부양하지 못하였을 때 그는 천막 만드는 곳에서 일하였읍니다. 그는 예수께서 세워 놓으신 원칙에 의하여 행동하였읍니다.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복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본을 세웠읍니다.—사도 18:3; 20:34, 35; 고린도 전 11:1.

십일조

아마 당신의 교회가 십일조가 돈을 조달하는 수단 중의 하나일 것입니다. 제 칠일 예수 재림교와 「모르몬」교와 같은 보다 작은 몇몇 교파는 오랫동안 십일조를 실천해 왔읍니다. 그러나, 오늘날 「로마 가톨릭」과 신교 교회들도 같이 이를 사용하는 결정적 경향을 가지고 있읍니다. 이 점에 있어서 특히 열렬한 것은 미국 「로마 가톨릭」 주보 「우리 일요일 방문객」입니다. 「조세프 페이니」 『신부』는 말하였읍니다. 『소득자 각자가 그의 일의 10「퍼센트」를 바치는 것은 인간의 계획이 아니라 하나님의 것이다. . . . 우리가 십일조의 공평함을 캐묻는 것은 하나님의 지혜를 캐묻는 것이다.』 각 가족이 총 수입의 십일조를 바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가족이 얼마나 크든지 수입이 얼마나 적든지에 구애되지 않읍니다.

그러나 십일조가 『하나님의 계획』입니까? 「캐나다 터런토」 성 「미가엘」 신학교 교수인 「로마 가톨릭」 신학자 「그레고리 보엄」은 아니라고 말합니다. 그렇다고 주장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그는 말합니다. 『그것은 단지 잘못이라는 것을 선포할 뿐만 아니라 또한 역시 인간의 양심을 거짓으로 만들며 번뇌와 반항을 일으키게 하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에게 신임을 준 하나님의 가르침은 폐기되었다. . . .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 「모세」의 율법에서 자유케 되었다. 할례, 십일조 및 기타 명령들이 더는 우리를 위한 것이 아니다. 십일조가 교회의 율법인가? 대답은 퍽 쉽다. 아니다.』 하지만, 십 육세기 「가톨릭」 「트렌트」 회의는 파문의 고통으로서 십일조를 명령하기 까지에 이르렀읍니다.

「그레고리 보엄」이 십일조의 제목에 관한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에 관하여 잘못 이해하였을지 모르지만 이에 관하여 성서가 가르치는 것과는 잘못이 없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의 죽음으로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을 때 또한 십일조도 폐하셨읍니다.—에베소 2:14, 15; 로마 6:14.

만일, 십일조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인 「희랍」어 성경 가운데 그 취지에 대하여 어떤 표시가 있어야 할 것이었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표시를 보려 해도 그것은 헛수고입니다. 성서에 십일조가 약 사십회 언급되어 있지만, 소위 신약에는 단지 세번만 그것과 별개로 뚜렷이 인용되어 있읍니다.

이들 중 처음 것은 예수께서 말씀하신 것입니다. 『화 있을찐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가 . . . 십일조를 드리되 율법의 더 중한바 의와 인과 신은 버렸도다.』 다른 인용은 예수의 비유 중의 독선적 「바리새」인의 말 가운데서 발견됩니다. 『나는 이레에 두번씩 금식하고 또 소득의 십일조를 드리나이다.』 그외에 세번째 인용은 「히브리」서에서 그 제목을 토론하는데 나와 있읍니다. 거기에서는 예수의 제사장 직분의 우월성을 나타내기 위하여 언급했으나, 십일조가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것이라고 나타내지 않읍니다.—마태 23:23; 누가 11:42; 18:12; 히브리 7:4-9.

이 제목에 관한 간단한 논리는 십일조를 그리스도인 활동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서 제외합니다. 그리스도인 봉사는 사랑의 일입니다. 그리고 사랑은 백분율을 근거로 하여 바쳐지지 않읍니다. 자기 아내를 진실로 사랑하는 남자는 아내의 필수품을 공급하기 위하여 그러한 법규를 필요로 하지 않읍니다. 더 필요할 때 더 줄 수 있다면, 일정한 율까지 제한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 남편을 진실로 사랑하는 여자는, 그렇게 할 수 있든 없든 남편이 자기에게 일정한 비율의 급료를 주었으면 하고 기대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가장 좋은 가정주부보다 훨씬 더 이치적이십니다.

그외에, 십일조는 언제나 완전히 공평한 마련이 아닙니다. 현재의 불균등한 경제 상태로 인하여 사람의 십일조는 적은 금액, 아주 사소한 것에 지나지 않을지 모르나 실제 그 반면에 다른 사람에게는 비틀거리게 하는 짐이 될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는 한면으로 꼭 비이기적임을 표시하는 것이 아니며 다른 면으로 굉장한 어려움, 억누르는 짐으로서 역할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일조가 초기 기독교의 가르침에 속하지 않는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그보다 일찍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요구한 것이있읍니다. 그러나, 전적으로 공정한 마련이었읍니다. 첫째로, 「이스라엘」 사람 각자는 땅의 공평한 부분을 받았읍니다. 그리고 이것을 상실하게 되면 대안식년에 회복하도록 마련되었읍니다. 그 외에 십일조는 근본적으로 기업의 땅을 받지 않은 「레위」 사람에게 주어졌읍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그리스도인 회중 가운데 유행되지 않았읍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역시 사도 시대 이후로 그리스도인 회중에서 어떠한 십일조의 마련도 찾지 못합니다. 「종교와 윤리학 백과사전」은 이렇게 말합니다. 『십일조의 제도는 수세기 동안 회복되지 않았었다. . . . 제 사세기까지는 이에 대한 말이 거의 없었다. . . . 「에피파니우스」는 십일조가 할례와 마찬가지로 더는 구속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다. (12권 348면) 하지만, 사도 「바울」이 예언한 바와 같이 참된 믿음으로부터 떨어져 나감으로써 그리스도인 교회 역시 기쁜 소식을 전파하는데 필요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하여 돈을 조달하는데 사용하는 수단도 빗나가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육세기까지는 어느 교회 회의도 십일조의 의무를 규정 하지 않았읍니다. 그리고 단지 팔세기 말엽에 「샤르레망」이 성 「로마」 제국의 율법으로 십일조를 만들었읍니다.

하지만, 옛적에도 헌금 상자나 궤를 갖는 간단한 생각은 퍽 효과적이었읍니다. 「요아스」 왕과 대 제사장 「여호야다」 시대에 그렇게 행하였읍니다. 그러한 궤는 또한 예수 시대에도 실용적이었읍니다. 비슷한 방법이 오늘날 여호와의 증인들의 왕국 회관에서 유행되고 있읍니다. 한 두개의 헌금궤가 회관 후면에 놓여져 있읍니다. 각자는 어떠한 의무나 강요의 느낌 없이 그가 원하는대로 거기 가서 헌금할 수 있읍니다.—열왕 하 12:9, 10; 누가 21:1.

참된 기독교 정신이 있는 곳에는 그 이상의 아무것도 필요하지 않읍니다. 여기에서 논의된 자금 조달 활동이 사용되지 않읍니다. 더 요구되고 있는 것은 하나님 자신의 속성인 그분의 지혜, 사랑, 공의 및 능력과 그의 이름의 입증 및 지상 낙원의 설립에 관한 그분의 목적에 관한 진리를 사람들에게 가르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아들과 불완전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사람들이 표현한 비이기적으로 주는 성서의 본들을 빠뜨려서는 안됩니다. 이 가르침은 그렇게 가르침을 받고 있는 사람들로부터 자발적인 반응을 가져 옵니다. 그럼으로써 사도 「바울」이 말한 바와 같이 될 것입니다. 『할 마음만 있으면 있는 대로 받으실 터이요 없는 것을 받지 아니하시리라.』—고린도 후 8: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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