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벨론’은 함락되어도 그 종교는 살아남아서 모든 나라에 퍼지다
1. 강국인 「바벨론」의 함락은 어떠한 질문을 일으킵니까?
전호에서 우리는 「바벨론」이 기원전 539년에 「바사」 사람「고레스」의 손에 넘어갔다는 것을 배웠읍니다. 이때부터 「바벨론」은 더는 정치적 세계 강국이 아니었읍니다. 그러나 「바벨론」의 종교는 어떻게 되었읍니까? 「바벨론」의 정치적 세력이 없어지고 세계 지배권이 「셈」족의 손에서 「아리안」족의 손으로 넘어갔을 때 「바벨론」의 종교도 없어지고 말았읍니까? 결코 없어지지 않았읍니다. 왜 없어지지 않았읍니까?
2. (ㄱ) 열국에 퍼지게 된 「바벨론」 종교는 어떻게 그 처음 기초가 놓이게 되었읍니까? (ㄴ) 「바벨론」이 그 정치적 우월성을 상실하였을 때 그 제사장 직분에 어떠한 일이 발생하였으며 그들은 어떠한 결심을 하였읍니까? (ㄷ) 그들은 어느 방향을 보았으며 그 결과는 어떠했읍니까?
2 무엇보다도 먼저 「바벨론」 종교가 모든 민족에 퍼지게 된 기초는 「니므롯」당시 「바벨」탑을 쌓을 때 놓여졌읍니다. 그러나 충성스러운 「셈」의 후손만은 여기서 제외되었읍니다. 언어를 기적적으로 혼잡케 하여 여러 족속이 흩어졌으나 그들의 거짓 종교 사상을 그대로 가지고 갔읍니다.a 후에 이교국들은 「바벨론」을 종교의 중심지로 보았읍니다. 둘째로 기원전 539년에 「바벨론」이 함락된 후에 「바벨론」의 제사장들은 「바사」인들에 의하여 추방 되었읍니다. 그러나 그들은 「바벨론」의 종교적 전통의 권위와 우월성을 없앨 생각이 없었읍니다. 그리하여 「바벨론」이 그 정치적 우월성을 상실하였으나 「니므롯」으로 시작된 그들의 종교는 모든 나라에서 종교 세계제국으로 나타나게 되었읍니다. 다만 여기서 제외된 것은 「예루살렘」에서 여호와께 참된 숭배를 드린 자들뿐입니다. 「사단」 마귀는 교묘한 수단으로써 즉시 서쪽 지평선으로 눈을 돌려 거기다 제사장과 「벨사살」의 계승자를 위한 새로운 중심지를 세우기 시작하였읍니다. 사실상 바로 이 사상이 후에 배교적 기독교에 침투하게 되었읍니다. 그리하여 이것이 땅의 큰 부분을 차지하게 되어 그리스도교국을 형성하게 되었읍니다.
「바벨론」종교가 구라파에 퍼지다
3. (ㄱ) 「에트루리아」족은 누구며, 그들은 「로마」 역사와 어떠한 관계가 있읍니까? (ㄴ) 「에트루리아」 족의 왕들은 언제 전복되었으며 「에트루리아」족의 영향도 없어지고 말았읍니까? 설명하십시오.
3 「바벨론」이 함락되기 오래 전에 「바벨론」 종교의 두목을 이태리로 옮길 토대가 마련되어 있었읍니다. 역사가 「제이 · 에이취 · 브레스티드」는 그의 저서 「고대—세계 초기 역사」에서 「에트루리아」인이라고 하는 해적 민족이 아마 소「아시아」로부터 와서 기원 전 1000년에 이태리에 정착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800년 이후로 그들이 북부 이태리를 훨씬 넘어서 거주하게 되었으며 「로마」는 「에트루리아」 왕 밑에 도시 왕국이 되었읍니다. 그리고 다른 「에트루리아」 성읍들도 「가푸아」로부터 멀리 북쪽 「제노아」 항구까지 이주하게 되었읍니다. 이 왕들은 2세기 반이나 통치하였읍니다. 그리하여 이 「로마」의 왕들은 주로 「에트루리아」 사람들로 기원전 약 750년부터 500년까지 계속되었읍니다. 「로마」의 전통적 기초가 기원 전 750년 조금 전에 놓여졌다면 이것은 「에트루리아」 족이 「로마」를 점령하여 강한 나라를 세웠음이 분명합니다. 「로마」 초기에 기록된 문서가 없어졌지만 고고학은 이 사실을 증명하여 줍니다. 이 「에트루리아」 왕들이 「로마」 발전에 공헌하였으나 그들의 잔인성과 폭정은 드디어 반역을 일으키게 하여 이 왕들 밑에 있던 「로마」는 기원전 500년 경에 종말에 이르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브레스티드」 박사는 말하기를 「에트루리아」족이 2세기 반 「로마」를 통치한 흔적이 남아 있으며, 그것들은 건축과 종교와 부족적 조직과 기타에서 볼 수 있다고 합니다.
4. 「에트루리아」족에 관하여 역사가 「브레스티드」의 기사와 일치하여 「브리타니카 백과사전」은 어떠한 사실을 알려 줍니까?
4 「브리타니카 백과사전」도 역사가 「헤로도토스」를 인용하여 이 사실을 밝혀 주며 이처럼 알려 줍니다. 즉 「헤로도토스」는 말하기를 「마네스」의 아들 「아티스」의 통치 때 온 「뤼디아」에는 18년간 계속된 큰 흉년이 있있다고 합니다. 드디어 왕의 마련으로 그의 아들 「티레누스」가 백성의 반쯤을 데리고 「서머나」로 내려가 거기서 배를 만들어 먹을 것과 나라를 찾으러 떠났읍니다. 여러 나라에 오랫동안 거류한 후에 그들은 이태리의 「옴브리지」로 와서 거기다 성읍들을 세웠읍니다.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 사람들은 자신들을 더는 「뤼디아」인이라 하지 않고 「티레니아」인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합니다. 「브리타니카」는 이어 말하기를 『그들의 초기 유물을 보면 그들의 정착이 9세기 말엽쯤 되어 보인다』고 합니다. 「티레니아」 사람들의 종교는 어떠하였읍니까? 「브리타니카」는 이렇게 진술합니다.
5. (ㄱ) 「에트루리아」의 종교는 어떠하였읍니까? (ㄴ) 얼마의 예를 들어보십시오.
5 「에트루리아」족은 그들의 초기 미술의 성격으로 보거나 혹은 그들의 종교나 숭배로 보아서 동양인이나 혹은 반 동양인이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 예술은 「메소보다미아」, 「시리아」, 또는 「구브로」의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으며 또 한편으로는 「애굽」의 것과 밀접한 관련을 가지고 있다. 「에트루리아」 족의 신들과 신화 그리고 7세기의 야금술과 보석의 모양은 동양적 신화에 나오는 신들이나 영웅들임이 분명하다. . . . 풍습과 종교의 범위에서 직접 「메소보다미아」에서 취한 것이 많으며 전체적인 감정과 분위기는 온전히 동양적이다. 가장 뚜렷하게 비슷한 것은 점치는 것이다. 양의 간이나 새가 날으는 방향을 보고 점치는 것은 순전히 「갈대아」인 식이다. (「점술」을 참조하라) 「메소보다미아」에 있는 토관에다 새긴 간의 모형은 [이태리의 「에밀리아」도에 있는] 「피아센사」에서 발견된 구리로 만든 간과 꼭 같다. 이것은 둘 다 「에트투리아」의 점치는 법이었음이 분명하다.b
6. (ㄱ) 기원전 6세기까지의 발전을 더듬어 말하십시오. (ㄴ) (각주와 함께) 「에트루리아」는 어디 있었으며, 거기서부터 오늘날 어떠한 도시명이 생겼읍니까?
6 그리하여 고고학은 「에트루리아」족이 소 「아시아」로부터 와서 「터스가니」 해안에 상륙하였다는 것을 지적합니다. 「로마」의 북부 「에트루리아」c에 있는 「베이이」는 그들의 주요 도시들 중의 하나가 되었읍니다. 「에트루리아」는 드디어 「로마」에 합쳐지고 말았읍니다. 6세기에 있던 12개의 도시는 연합하여 「라거스 볼시니엔시스」 (「볼세나」호)의 윗쪽에 있는 「볼투마」 신전에서 해마다 모임을 가졌읍니다. 그런데 이 모임은 주로 종교적 행사만을 위한 회합인 것같읍니다.d 이런 일은 모두 기원전 6세기에 즉 「바벨론」이 [기원전 539년에] 함락되기 전부터 함락될 때까지도 있었읍니다.
7. (ㄱ) 「로마」는 당시 여하한 다른 나라보다도 더 직접적으로 「바벨론」의 종교를 물려받았읍니까? (ㄴ) 「바벨론」의 제사직은 무엇에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이 「바벨론」에서 쫓겨난 후에 무엇을 하였읍니까? (ㄷ) 성경은 「버가모」에 관하여 무엇을 알려 줍니까?
7 그래서 「바벨론」 종교는 구라파에다 든든한 발판을 두게 되었는데 「바벨」 탑을 쌓을 때부터 먼 관계를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직접적인 상속을 받게 되었읍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주로 「바벨론」의 제사직에 관하여 흥미를 가지고 있읍니다. 마치 「사단」 마귀가 참된 숭배에 대항하게끔 「니므롯」을 통하여 「바벨론」 종교를 시작한 것처럼 「사단」의 영이 또한 「바벨론」의 제사직을 움직여 「바벨론」이 수도로서의 자리를 상실하였을 때에도 그 제사직과 종교적 계승자가 「벨사살」과 함께 없어지지 못하게 하였읍니다. 「바-커」와 「아인스워-쓰」는 그들의 저서 『「시설리」의 「라레스」와 「페니쓰」』에서 「바벨론」의 패배 후의 일을 이렇게 말하였읍니다. 『패배된 「갈대아」인들은 소 「아시아」로 도망하여 「버가모」에다 그들의 중심 단체를 세웠다.』 (8장 232면) 여기 말한 「버가모」는 계시록 2:12, 13에 나오는 「버가모」와 같은 것이며 그 후 기원 1세기에 그리스도인 회중이 세워진 곳입니다. 이 「갈대아」인의 본부 이동에 관하여 「알렉산더 히슬롭」 박사는 이렇게 말합니다.
8. 「버가모」 왕국은 무엇으로 형성되었읍니까? (각주) (ㄱ) 「버가모」 성읍은 어떠한 중요성을 지니고 있었읍니까? (ㄴ) 「버가모」의 신은 누구였읍니까?
8 「브리기아」는 . . . 「버가모」 왕국의 일부를 형성하였다. 그리고 「미시아」도 그 왕국의 일부였으며, 「파샬」 연대기에 의하면 「미시아」 사람들은 「니므롯」에서부터 내려왔다고 한다. 「미시아」인들은 「네브롯」에서 왔으며 그것은 「니므롯」에 대한 「희랍」어 방언이며 큰 사냥군 혹은 거인이란 뜻이 있다. (「파샬」 연대기 1권 50면 참조). [역사가] 「리위」와 「헤로도토스」에 의하면 [이태리]의 「에트루리아」 족이 온 「뤼디아」도 그같은 왕국의 일부를 형성하였다고 한다. 「미시아」, 「뤼디아」, 그리고 「브리기아」가 합쳐서 「버가모」 왕국을 이루었다는 것을 사실은 알려 준다. 참조 「스미쓰」 고전 사전 542면.e
「로마」는 종교적으로 영향을 받다
9. 「로마」는 종교적으로 어떻게 「에트루리아」족의 영향을 받았읍니까?
9 이것은 「로마」에 큰 영향을 주었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에트루리아」 성읍들이 전복되고 「로마」가 (기원전 509년에) 공화국이 된 후에 「로마」인들은 「에트루리아」족의 신들 즉 「주피터」 「쥬노」, 「미네르바」와 기타 신들을 취하여 그 신들에게 처음으로 각각 사람의 형체를 주어 신전이나 사당에 두었읍니다. 그것들은 「희랍」의 신들과도 같읍니다. 「에트루리아」의 『천부』인 「주피터」는 「희랍」의 신 「제우스-파-터를 「로마」인들이 그렇게 불렀으며, 군신인 「마르스」는 싸우는 「로마」인들에게 인기있는 신이었읍니다. 「새터날리아」는 후에 그리스도인들이 「크리스마스」로 바꾸어쳤으며 새로운 의의를 갖게 되었읍니다. 현대 역사적 저서f 하나는 「로마」인의 의식을 「갈대아」인의 것과 직접으로 연결시키고 있읍니다.
10. (ㄱ) 「바벨론」 사람들은 그들의 천문학의 지식을 어디다 잘못 사용하였읍니까? (ㄴ) 「로마」인들이 어떻게 「갈대아」인의 점성술을 따랐는가를 설명하십시오.
10 「갈대아」인들은 별로써 미래를 알고자 노력한 결과 천문학 연구에 많은 발전을 하였다. 이것이 곧 『점성술』이다. 「바벨론」 사람들은 많은 재료를 조직적으로 수집하였으며 오늘날 천문학의 기초를 가지게 되었다. 오늘날 12궁으로 알려진 별 무리의 이름들이 처음으로 지어졌다. 그리고 수성(머큐리), 금성(비너스), 화성(마르스), 목성(주피터), 그리고 토성 (새턴)과 같은 혹성들이 알려지게 되었다. 이러한 혹성들이 인간 생활에 큰 힘을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그들은 유명한 신들과 여신들의 다섯개의 이름을 따서 별들에다 붙이게 되었다. 우리는 이 혹성들을 「로마」인들이 부른 그대로 쓰고 있는데, 「로마」인들은 「바벨론」 사람들의 말을 다만 「로마」인이 쓰던 같은 말과 바꾸어 놓았을 뿐이다. 그리하여 사랑의 여신 「이쉬타르」는 「비너스」가 되었으며 「마르덕」신의 혹성은 「주피터」 (목성)로 바꾸어 놓았다.
11. 「버가모」는 어떻게 「로마」에 속하게 되었읍니까? (ㄴ) 「아달루스」왕은 어떠한 종교적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읍니까?
11 기원전 133년에 왕 「아달루스」 3세는 그의 임종 시에 「버가모」와 그 모든 영토를 「로마」에 기증하였으며, 그것은 모두 후에 「아시아」라는 이름 밑에 「로마」의 한 도 밑에 들어갔읍니다. 이 「아달루스」왕은 「갈대아」의 「마기」(승려)들에 의하여 「벨사살」 후계자로 선출되었던 것입니다. 「히슬」 박사는 이렇게 설명해 줍니다.
12. (ㄱ) 「버가모」 왕들은 어떻게 그들의 종교적 자리를 얻었읍니까? (ㄴ) 그리하여 어떠한 후계자의 연쇄가 새롭게 되었읍니까?
12 「버가모」 왕들은 「갈대아」의 「마기」(승려들)와 그들에게 동정한 일반 이교도의 소리에 의하여 「벨사살」과 그 전 왕들이 차지하였던 빈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갈대아」 「마기」는 「버가모」왕들 통치 기간에 피난처를 찾았고 그들은 옛 「바벨론」의 신의 대표자들로 찬양을 받았다. 이것은 「바우사니우스」의 성명으로도 명백하다. . . . 「아달루스」통치 기간 중 「마기」는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으며, 「아달루스」 자신은 「마기」의 우두머리인 「박카스」 그 인물로 인정받고 높임을 받았다. 그래서 「벨사살」의 빈 자리를 채웠고 「갈대아」인의 끊어진 연쇄를 새롭게 했다.—「두개의 바벨론」 240, 241면.
최고 대승정직은 어디서 왔는가?
13. 우리는 왜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최고 대승정직의 시초를 더듬어 보아야 합니까?
13 「로마 가톨릭」이 앞장을 서서 세계 평화의 소망으로서 세계 종교들이 힘쓰고 있는 이 때에 우리는 편견 없이 「로마」의 최고 대승정직의 시작을 더듬어 보아야 하겠읍니다. 「히슬」 박사의 「두개의 바벨론」 239, 240면을 인용해 봅시다.
14. 과학과 종교에 관하여 「로마」인들은 「에트투리아」족을 어떻게 보았읍니까?
14 「갈대아」인의 우상 숭배에 열심히 고착하었던 「에트루리아」족의 정착지는 [「버가모」가 있던] 소 「아시아」서 이주하여 왔다고도 하고 얼마는 「희랍」에서 와서 「로마」의 바로 이웃에 정착하였다고 한다. 그들은 드디어 「로마」 국가에 합병되었다. 그러나 이들이 정치적 합병이 있기 전에 그들은 「로마」의 종교에 큰 영항을 끼쳤다. 시초부터 그들의 점술과 술수 그리고 점쟁이와 술사들이 독점하고 있던 진짜 혹은 가짜의 모든 과학을 「로마」인들은 존경을 가지고 우러러보았다. 「로마」인들이 점치는 지식을 . . . 주로 「터스간」족 즉 「에트루리아」인들로부터 배웠다는 것을 각 방면에서 인정한다. 그리고 처음에는 그 나라의 토착민들만이 「하루스펙스」직의 일을 보도록 허락되었다. 그 직은 희생에 포함된 모든 필수적 의식을 존경하였다. . . . 「로마」의 귀족 청년들의 제일 높은 자는 거룩한 과학을 배우기 위하여 「에트루리아」로 보냈다. 거기서 그런 것이 흥왕했었다.
15. (ㄱ) 대승정 대학은 누가 처음 세웠읍니까? (ㄴ) 그 대학을 감독한 대승정은 어떠한 권력을 행사하였읍니까? 그리고 그 기원과 의식이 근본 「로마」에서 났읍니까?
15 대승정 대학g은 「누마 봄빌리우스」에 의하여 세워졌읍니다. 그는 「로마」의 전설적 2대 왕이며 「히슬롭」은 「누마」에 관하여 이렇게 말합니다. 『그 신이 「바벨론」에서는 「네보」로 그리고 「애굽」에서는 「누브」 혹은 「눔」으로 그리고 「로마」인들 중에서는 「누마」라고 불리웠다. 왜냐 하면 「로마」의 위대한 「제사장-왕」인 「누마 봄빌리우스」는 「바빌로니아」의 「네보」의 자리를 그대로 점령하고 있었다.』h 그 대학을 감독하고, 모든 중요한 문제에 관한 「로마」인들의 공적 또는 사적인 종교적 의식을 감독한 최고 대승정은 영적이나 의식에 있어서 「에트루리아」 대승정과 꼭 같이 되었읍니다. 이에 관하여 「히슬」은 이렇게 말합니다.
16. 「히슬롭」 박사는 대승정의 자리가 어디 있었다고 말합니까?
16 참으로 합법적인 「바벨론」의 대승정은 「로마」 제국의 한계를 넘어서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은 그 영토를 남부 「메소보다미아」나 「갈대아」까지 뻗지 못하였다.] 「메대-바사」 왕들에 의하여 「벨사살」이 죽고 「갈대아」의 제사직이 「바벨론」에서 박탈된 후에 그 자리는 「버가모」에 있었다. 후에 그곳에는 「아시아」의 일곱 교회의 하나가 있었다.i
17. 우리의 연구는 「로마」 법왕 직에 관하여 어떠한 결론을 내리게 합니까?
17 기원전 1세기에 여섯째 세계 강국이 된 「로마」와 「버가모」 사이의 종교적 관계를 역사적으로 간단히 살펴 보는 것은 매우 흥미있는 일입니다. 특히 대승정직에 나타난 관계를 살펴 보겠읍니다. 「로마」 법왕의 대승정직의 근원은 실지 「바벨론」 종교라는 것이 입증됩니다. 「두개의 바벨론」은 우리에게 이런 기사를 제공합니다.
18. (ㄱ) 「바벨론」 대승정의 모든 권력과 기능이 언제 「로마」 통치자에게 옮기게 되었읍니까? (ㄴ) 「줄리우스 씨자」가 「바벨론」 대승정의 권력을 주장한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읍니까?
18 처음에 「로마」의 대승정은 「버가모」가 거기 있는 승려 정체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었다. 그러나 때가 흐름에 따라서 「로마」의 대승정과 「버가모」의 대승정이 동일시되게 되었다. 「버가모」 자체가 「로마」 제국의 일부가 되었다. 즉 마지막 왕인 「아달루스」 3세가 임종 때인 기원전 133년에 자기 뜻에 따라 나라 전부를 「로마」에게 넘겨주었다. . . . 먼저 최고 대승정으로 선출된 「줄리우스 씨자」는 황제로서 「로마」인의 최고 통치자가 되었는데 그는 또한 「로마」국의 원수로서 「로마」 종교의 머리가 되었다. 그리고 「바벨론」의 참된 합법적 대승정의 모든 권세와 기능을 다 그가 물려받았다. 그는 자기가 이러한 권세를 주장할 자리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 그는 「아달루스」의 신성한 권리와 그가 물려준 나라를 가질 권리를 주장하여 모든 것을 자기에게 집중시킬 것을 주장하였다. 그리고 그의 높은 대승정 직을 행사할 어떤 경우에는 「벨사살」이 행하였을 것과 같이 붉은 도포를 입고 「니므롯」의 지팡이를 집고 「다곤」[물고기 신]의 법모를 쓰고 「야누스」[얼굴 둘 가진 신]와 「사이벨」[어머니 신]의 열쇠를 가지고 「바벨론」의 옷차림으로 나타났던 것이다.
19. 최고 대승정 직을 차지할 것을 처음 거절한 「로마」 황제는 누구였읍니까?
19 [역사가] 「기본」이 알린 바와 같이 우상적인 복장을 하고 대승정의 자리에 앉는 것을 처음으로 거절한 것은 [서부 황제] 「그라티안」 통치 때 이르러 처음으로 있었다. . . .
20. 「그라티안」이 최고 대승정 직을 거절하였을 때 그 직은 없어지고 말았읍니까? 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되었읍니까?
20 . . . 대승정의 이방 칭호가 폐지된지 몇해 되지 않아서 그것이 다시 복구되었다. . . . 그리고 모든 이방의 풍습 절차와 함께 「로마」 법왕에게 주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자칭 그리스도교국의 위대한 대리자로서 군림하게 되었다. . . . 이교의 모든 다른 교회는 고대 「바벨론」에서 나왔다. . . .
21. 그 칭호를 취한 「로마」의 처음 법왕은 누구였읍니까? 「로마」는 그 당시 그리스도교의 나라였읍니까?
21 「다마서스」 법왕에게 주어진 것과 같은 칭호를 받게 된 것은 더 큰 성실과 충성을 받도록 시도한 까닭이었다. 이교가 서부 「로마」 제국에서는 법적으로 폐지되었으나 「일곱 언덕」의 성읍에는 아직 성하였으며 [나전어 「벌게이트」역을 냄] 「제로움」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으므로 그 당시 「로마」를 「모든 미신의 자수물동」이라고 불렀다. 그 결과 제국 도처에서 이교의 폐지 법령이 존경되었으나 「로마」 자체는 그러한 포고령이 한낱 사문서에 지나지 않았다. . . .
22. 법왕 「다마서스」 1세는 어떠한 성품의 사람이었읍니까? (각주) 「다마서스」 1세는 그의 자리를 강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세속적 지지를 받았읍니까?
22 백여명에 달하는 그의 적수를 짓밟고 도적이나 강도같이 하여 「로마」의 법왕의 자리를 차지한 사람 [법왕 「다마서스」 1세]은 그가 치루어야 할 선출에 대하여 주저할 수 없었다. 그는 이교의 칭호를 취하고 이교도의 눈에 그 칭호를 주장할 것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어떠한 진리도 희생시키는 결과에 이르렀으며, 마치 오래된 대승정의 직계를 밟아온 합법적 대표자같이 행동하였다. . . . j
23. (ㄱ) 기원 4세기까지도 이교도는 법왕을 누구로 받아들였습니까? (ㄴ) 기원 606년에 「로마」의 법왕 직에 관하여 어떠한 일이 발생되었읍니까?
23 4세기 말엽에 있었던 법왕은 지상에 남아있는 「벨사살」과 「니므롯」의 유일한 대표자였다. 왜냐 하면 이교도들이 그를 그렇게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 . . 기원 606년에 나라들이 진동하고 혼란하며 파도치는 바다같이 들뛸 때 「로마」 법왕은 세계 법왕이 되었다. 그리고 그때에 열개의 주요한 구라파 나라가 그를 지상에서 그리스도의 대리로 인정하였으며 그것이 유일한 통일의 중심이 되며 그들의 보좌의 안정의 유일한 근원으로 인정하였다.k
「바벨론」종교는 마침내 없어지게 될 것이다
24. (ㄱ) 하나님의 말씀은 큰 「바벨론」에 관하여 어떻게 말합니까? (ㄴ) 큰 「바벨론」은 그리스도교국의 종교를 포함하여 각 종교 조직을 어떻게 자기 밑에 두었읍니까? (ㄷ) 그 음녀는 나라들을 어디로 이끌었읍니까? (ㄹ) 큰 「바벨론」을 그렇게 자세히 폭로시킨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입니까? 그러므로 성실한 사람들은 무엇을 해야 합니까?
24 이러한 방법으로 「바벨론」은 서양을 정복하였읍니다. 「바벨론」의 세계 종교 제국을 하나님의 말씀은 『큰 「바벨론」이라 땅의 음녀들과 가증한 것들의 어미라 하였』읍니다. (계시 17:5) 이 종교 제국은 「버가모」와 「로마」까지도 지배하였읍니다. 그러나 이 종교 제국은 그리스도교국을 더 광범위하고 또 장구한 세월을 지배하여 왔읍니다. 그의 자녀들 즉 『딸들』인 종교 조직은 자기와 같은 음녀이며 이 세상의 정치 분자와 부정한 관계를 맺고 있읍니다. 그 음녀가 세계를 인도하는 교리와 행로는 인간들에게 해독이 되고, 고대 「바벨론」처럼 가증하고 사망으로 이끄는 것입니다. 고대 「바벨론」은 그 때부터 모든 세대에다 수치스러운 이름을 남겼읍니다. 현대 「바벨론」은 세계 평화를 위하여 인간이 만든 기구를 그의 추종자들이 따르도록 인도하였읍니다. 그리고 그의 위선과 부패로 인하여 다른 사람들로 염증나게 하였으며 세상을 이끌어 하나님의 왕국에 대항하게 만들고 있읍니다. 성경은 우리의 안전과 지각있는 행동을 위한 참된 그림을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역사적 사실은 이 그림이 참됨을 상세히 증명해 줍니다. 인간의 창조주께서 인간의 안전을 위하여 말씀하시는 것을 왜 듣지 않겠읍니까? 여호와의 자비로운 사랑으로 말미암아 「바벨론」은 우리에게 폭로되었읍니다. 그러면 현대적 큰 「바벨론」으로부터 도망하여 그 음녀가 일찍 멸망될 것을 배우고 하나님의 왕국 통치를 통하여 인간에게 임할 자유에 대한 진리를 배우십시오! (계시 18:4, 5, 20) 하나님께서 정직한 자들이 「바벨론」에서 나올 것을 돕기 위하여 어떻게 예언적 활극을 하셨는가를 다음 호에서 살펴 봅시다.
[각주]
a 더 살펴 보기 위하여 「뉴욕 · 브룩클린」에 있는 「왙취 타워 성서책자 협회」에서 발행한 「파수대」 1964년 9월 1일, 15일호와 「『큰 「바벨론」은 무너졌다!』 하나님의 왕국은 통치한다!」를 참조하라.
b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8권 1946년 판 785, 786면.
c 「희랍」어 「에트루리아」를 나전어로 「티레니아」라고 하였고 「터스가」란 말에서 오늘날 「터스가니」란 말이 나왔다.—「브리타니카 백과사전」 1959년판 8권 783면.
d 「브리타니카 백과사전」 8권 1946년 판 785, 786면.
e 고대 「버가모」는 기원전 5세기에 있어서 상당히 부유한 성읍이었다는 것은 늦어도 기원전 420년부터 돈을 주조하고 있었다는 사실로써 알 수 있다. 「크세노폰」 (기원전 430-355)이 그의 저서 「아나바시스」 7권 8장 8절에와 「헤렌니가」3권 1장 6절에 말하기 전에는 이 수도적 성읍은 잘 알려져 있지 않았고 다만 신화적 존재였다.—「브리타니카 백과사전」 1946년 판 17권 507면과 「가톨릭 백과사전」 2권 666면 1911년판.
가장 축하하고 사람들이 많이 가던 「애굴라피우스」 신전은 「버가모」에 위치하여 있었다. 「애굴라피우스」는 「버가모」신으로 불리웠으며 그의 숭배와 관련된 신화는 「바벨론」 종교와 아주 비슷하다. 그는 살아 있는 뱀의 형상으로 숭배를 받았고, 성전에서 양육하고 그것이 신성시되었다.
f 「알 · 엠 · 엥그버그」와 「에프 · 씨 · 코울」 공저 「문명의 서광과 고대 동방의 생활」 (1940년판) 230, 231면 참조.
g 여기 『대학』이라고 한 말은 교육을 위한 시설이 아니고 셋 이상의 단체이며 어떠한 목적을 수행하기 위하여 「로마」 법 밑에 법적으로 구성된 것이다. 오늘날 『사단법인』 같은 것에 해당된다.
h 「히슬롭」 저 「두개의 바벨론」 256면.
i 동권 240면.
j 「맥클린톡 및 스트롱의 백과사전」 2권 652면b 에 「법왕 「다마서스」 1세」라는 제목 밑에 이러한 기사가 있읍니다.
『법왕 「다마서스」 1세는 . . . 기원366년에 「리베리우스」를 계승하여 「로마」의 법왕이 되었다. 그는 선거를 주장한 「우르시기누스」에 의하여 반대를 받았다. 그리고 그들의 명예롭지 못한 투쟁 때문에 많은 사람이 살해되었다. . . . 「그라티안」 황제는 378년에 그 자리를 「다마시스」에게 주고 그를 반대한 교직자들에게 심판을 내리고 그들을 「로마」에서 추방하였다. 같은 해에 열린 「로마」 종교 회의의 요구에 따라 세속 권위자들에게 지시하여 그를 지지하도록 하였다. . . . 』
k 「두개의 바벨론」 241, 242, 247, 250, 253, 255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