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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69 4/1 149-152면

성서와 ‘이집트’ 역사

때때로, 성서에 나오는 역사적 사건이 다른 고대 기록들에 나오는 연대적 순서와 조화가 잘 되지 않는다는 말을 듣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면 ‘이집트’의 고대 기록과 같은 경우이다. 만일 세속 역사가 사실이고, 정확하고, 일관성있게 신뢰할 만하다면 그러한 말은 정당하다고 할 것이다. 그러면 이 점에 있어서 우리의 입장은 어떠한가? 옛날 ‘이집트’ 역사는 신뢰할 만한 표준을 제공해 주는가? 또한 관심거리는 이러한 세속 역사와 비교할 때 성서 기록은 어떠한가? 라는 질문이 있다.

성서 독자들이 잘 아는 바와 같이 ‘이집트’(애굽) 역사는 상당한 기간 동안 성서 역사와 직접적인 관계를 가지고 있다. ‘아브라함’이 처음에 ‘이집트’를 방문한 때부터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멸망된 후 ‘유대’인들이 ‘이집트’로 도망한 때까지의 오랜 기간에 걸쳐 관계를 가지고 있다. 이 기간에 ‘이집트’에 일련의 무시무시한 재앙이 닥친 것과 그 후에 ‘이스라엘’ 사람들이 강력한 ‘바로’와 그의 군대 손아귀에서 벗어나 행진해 나간 사건들이 있었다. 성서에는 명확하게 사실 그대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이집트’의 기록에는 어떠한가?

‘이집트’ 역사

현대 역사학자들이 고대 ‘이집트’의 역사에 관한 자료를 얻는 것을 주로 ‘이집트’ 열왕록(列王錄)과 같은 형태로 존재하는 문헌들에 의존하고 있다. 그러한 문헌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다. ‘이집트’ 역사의 처음 다섯 왕조라고 생각되는 왕조를 기록한 ‘팔레르모 비석’ 파편, “구 왕조” 때부터 “신 왕조” 때까지의 왕들과 그들의 통치에 대한 대단히 불완전한 기록을 보여 주고 있는 ‘투린 파피루스’ 그리고 돌에 새겨진 기타의 왕조들에 대한 기록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도 완전하게 남아 있는 것이 없다. 이러한 기록 파편들을 일치시키고 연대적인 순서를 맞추기 위하여 역사가들은 기원전 3세기의 ‘이집트’ 사제 ‘마네토’의 기록에 크게 의존하고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것은 ‘마네토’의 기록이 현존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기원 1세기의 ‘요세퍼스’, 기원 3세기의 ‘섹스터스 줄리우스 아프리카누스’, 기원 4세기의 ‘유세비어스’, 기원 8, 9세기의 ‘신셀루스’와 같은 후대의 역사가들이 참조하고 인용한 단편적인 글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문제를 더욱 복잡하게 만드는 것은 이들 역사가들이 문장을 인용할 때 정확성을 기하지 않은 예가 많다는 것이다. ‘더불류. 지. 워델’ 교수의 말을 빌리면, ‘마네토’의 글의 인용문은 “단편적이고 흔히 의곡되어 있어 어느 말이 확실한 ‘마네토’의 말이고 어느 것이 덧붙인 것이며, 조작한 것인지를 확실히 분별하기가 어렵다.”

‘마네토’의 기록이 흔히 연대 순서도 없이 역사성이 없는 전통이나 전설을 포함하고 있다는 사실을 제시하고 나서 ‘워델’ 교수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마네토’의 저술은 처음부터 착오가 대단히 많다. 그 모두가 다 복사자들이나 번역자들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다. 많은 경우에 통치 연대 길이를 발견해 내는 일은 불가능하다. 어떤 경우에는 ‘마네토’가 제시한 이름들과 왕들의 순서는 비문들로 비추어 볼 때에 인정할 수가 없다.”—Manetho (1940), vii, xvii, xx, xxi, xxv면.

열왕록의 이러한 문제들은 까다로운 문제들이다. 그 모든 왕들을 순서대로 연결시키면 ‘이집트’ 역사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확대되어 버린다. 그러므로 「브리타니카 백과 사전」(1965년판, 5권, 722, 723편)에서는 이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 . . ‘이집트’ 역사의 연대를 추정할 때에 그러한 것들을 조심하여 사용해야 한다. 예를 들어 어떤 기간에는 ‘마네토’가 순서적으로 기술한 전체 왕조들 혹은 적대한 왕들이 모두 같은 시대에 통치하였던 왕들인 것 같이 보인다.”

‘이집트’ 역사를 추정함

그러기 때문에 ‘이집트’ 역사가들은 역사 연대를 추정하였다가 수정하기를 지난 백년 동안만도 여러 번을 거듭하였다. 일반적으로 동 시대에 산 여러 ‘이집트’ 역사 학자들이 ‘이집트’ 제1왕조의 연대를 어떻게 서로 다르게 보는가 유의하라. 그 왕조는 ‘메네스’ 왕이 ‘이집트’를 통일함으로써 시작되었다고 생각된다.

학자들의 이름 제1왕조 시작 연대

‘샹폴리온’ 기원전 5867년

‘마리테’ 기원전 5004년

‘라우트’ 기원전 4157년

‘렙시우스’ 기원전 3892년

‘브레스테드’ 기원전 3400년

‘매여’ 기원전 3180년

‘윌킨슨’ 기원전 2320년

‘팔머’ 기원전 2224년

이러한 여러 가지 연대 외에도 현재 역사가들 중에는 기원전 2900년 경이었으리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집트’인들은 어느 정도 천문학을 발전시켰다. ‘이집트’인들이 달의 운행과 낭성(狼星)의 운행에 대하여 기록한 문헌을 오늘날까지 가지고 있다. 이러한 자료들을 다른 단편적인 자료들과 연결시켜 연대표를 만들어 보면, 여러 왕조들에 대한 대략의 연대는 다음과 같이 된다.

왕조 이전의 문화 기원전 3000-2850년경

제1왕조부터 제6왕조까지 기원전 2850-2200년경

제7왕조부터 제12왕조까지 기원전 2200-1786년경

제13왕조부터 제20왕조까지 기원전 1786-1085년경

제21왕조부터 제31왕조까지 기원전 1085-332년경

천문학 자료를 사용하면 정확한 연대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낭성(狼星)이 뜨는 시각(낭성 주기를 이용한 일년을 측정하는 데 사용됨)은 일정하게 늦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루만 약간 잘못 측정하면, 120년의 차이를 내게 된다. ‘이집트’ 사람들이 육안으로 관찰하였으므로 현대의 망원경 측정만큼 정확하지는 못하였을 것이며, 하루쯤 틀린다는 것은 흔히 있었을 것이다.

‘이집트’의 역사에는 왜 ‘이스라엘’ 민족이 ‘이집트’를 떠나는 감격적인 사건과 그 이전의 재앙들이 기록되어 있지 않은가? ‘이집트’ 전문가 ‘제이. 에이. 윌슨’ 교수의 말을 들으면 그것은 놀라운 일은 아니다. “‘이집트’의 기록은 언제나 적극적이며, ‘바로’ 곧 그들의 신의 성공만을 강조하였지, 먼 과거의 것들 약간을 제외하고는 그들의 실패에 대한 것을 전연 기록하지 않았다.” 「‘유대’인의 세계사」(영문, 1964년판, 제1권, 338, 339면) ‘이집트’인들은 그 내용이 재위한 ‘바로’에게 해로운 것이라면, 과거의 기록을 파괴해 버리는 것도 사양치 않았다. 그러한 예로, ‘하트솁수트’ 여왕이 죽은 후에 ‘투트모스’ 3세는 여왕의 이름과 상징물들을 비석에서 파내 버렸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집트’를 떠나던 당시에 통치한 ‘바로’의 이름이 성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 따라서 그의 이름을 알아낸다는 것은 추측에 불과하다. 이 사실이, 현대 세속적인 학자들이 출애굽의 연대를 기원전 1441년부터 1225년까지 저마다 다르게 보는 이유를 어느 정도 설명해 준다. 학자들의 설명은 서로 200여년의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은 현재의 상태로서는 ‘이집트’ 연대에 관한 세속 학자들의 주장이 성서적인 연대 계산에 도전이 될 수 없다는 것도 명백히 해 준다.

성서의 경우

성서 필자들의 기록 방법을 보면 그들이 기간 측정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음을 증거해 준다. 예를 들면, 창세기 제5장의 계보를 보라. 각 세대가 전후 세대와 얼마나 철저하게 연결되어 있는 가를! 하나도 소홀히 한 것이 없다. 기록에 나온 각 사람이 아들을 낳을 때와 죽을 때의 나이를 알 수 있다. ‘이집트’ 연대기에는 이에 비길만한 것이 전연 없다.

억지로 뜯어 맞춘 ‘이집트’ 역사 연대와는 달리 성서는 조리가 정연한 세밀한 역사를 수천년에 걸쳐서 놀랍게 알려 주고 있다. 성서는 ‘이스라엘’ 민족의 초창기부터 사실 그대로를 생생하게 묘사해 놓았다. 그 민족이 강했던 때와 약했던 때를, 성공담과 실패담을, 올바른 숭배와 이교에 빠진 심한 배도를, 그들이 받은 축복과 재앙을 솔직 담백하게 묘사해 놓았다. 정직하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연대의 정확성을 보증하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그 필자들의 성실성을 확신할만한 근거는 된다.

또한 가끔 간과하는 점은 성서 필자들이 어떤 사실들을 증거하기 위하여, 역사 문헌을 참조하였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여호와의 전쟁기”(민수 21:14, 15), “‘이스라엘’ 왕 역대지략”(열왕기 상 14:19; 열왕 하 15:31), “‘유다’ 왕 역대지략”(열왕 상 14:29; 열왕 하 24:5), “‘솔로몬’의 행장”(열왕 상 11:41) 등을 참조하였고 ‘에스라’와 ‘느헤미야’도 자기들이 참조한 역사책 혹은 공문서를 14회나 언급하였다. 그러므로 성서 필자들은 자기들의 기억이나 전설에만 의존하지 않았다. 분명히 자료를 주의깊이 조사하고 증거를 살폈다.

성서 필자들과 모든 ‘이스라엘’ 백성들로 하여금 때의 계산에 깊은 의식을 갖도록 한 여러 가지 요인이 있었다. 그것은 ‘모세’의 율법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들이 정확한 때의 계산을 요구하였다는 것이다. 속죄일, 수 많은 축제일, 안식일, 희년 등이 그것이다. 날, 달, 연, 7년, 50년 등의 기간을, 그 민족이 율법에 고착하는 한 정확히 지켰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가난해서 억지로 자기들의 토지를 포기하지 않을 수 없었던 사람들은 50년째 되는 해에는 그 토지를 다시 소유하게 되었다.—레위 25:2-5, 8-16, 25-31.

성서 필자들과 일반 사람들이 시간적 요소를 항상 생각하였던 또 하나의 강력한 이유는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예언들이 많이 있었는데, 그 중에 장래의 어느 때와 관계된 예언들이 많았다는 사실이다. 사람들은 그러한 사건들의 성취를 기다리고 살폈던 것이다. 예수께서 탄생하시던 때에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고 있었던 사람이 ‘시므온’ 한 사람만은 아니었을 것이다.—누가 2:25.

그러나 어떤 사람은 성서의 원본은 현존하지 않으며, 세월이 흘러 복사하고 번역하는 동안에 기록의 정확성에 심한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하여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그러나 이 점에 있어서 우리는 성서 사본을 많이 만들었던 복사자들이 얼마나 철저하고 세심히 복사하였는가를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들에게 있어서 복사에 정확을 기하는 것은 하나님의 은총과 미움 혹은 생명과 사망의 문제였다. 그들은 검토하고 재검토하고, 심지어 행과 단어들과 글자의 수까지 세어보았다.

성서 사본들이 현 20세기까지 보존되어 오면서 정확하게 기록되어 왔는가를 생생하게 설명한 예로 최근에 사해 근처 ‘쿠므란’ 동굴에서 발견된 두루마리들을 살필 수 있다. 거기에 잘 보존된 「이사야서」 전체가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것은 17장의 양피지에 기록된 것이었다. 그것이 발견되기 전에는 가장 오래된 「이사야 사본」이 기원 10세기 것이었다. 그런데 기원 제1세기 경의 두루마리가 발견된 것이다. 놀라운 사실은 현대의 「이사야서」 본문과 대조해 보았을 때에 그 차이가 무시해도 좋을만한 대단히 근소한 것 뿐이었다는 것이다.

비할만한 것이 없다

현재까지 내려온 그러한 형태로서는 ‘이집트’ 역사 문헌들이, 성서 연대의 정확성 여부를 측정하는 표준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이집트’ 필자들의 진실성, 및 충실성은 아무리 보아도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는 할 수 없다. ‘제이. 에이. 윌슨’ 교수는 「‘유대’인의 세계사」 1964년판, 1권, 280, 281면에서 이렇게 말하였다. “‘이집트’ 비문들의 정확한 역사성에 대하여는 경고를 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나라는 신비와 기적의 나라였다.” 그는 필자들이 그 당시 세력을 잡고 있는 왕조를 찬양하기 위하여 연대를 의곡하였다는 사실을 지적한 다음에 이렇게 말하였다. “역사가들은 그것이 의곡된 것이라는 명백한 증거가 없다면 그 내용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것이나,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서 과거의 해석에 새로운 빛을 던져 준다면, 자기의 설명을 즉시 수정하지 않으면 안된다.”

현대 학자들이 ‘이집트’에서 나온 자료에 근거해서 추정한 연대들은 아직도 대단히 빈약하다. ‘이집트’ 역사학자 ‘이. 에이. 월리스 버즈’는 이렇게 논평하였다. “현재로서는, 연대에 관하여 ‘이집트’ 본토에서 얻은 자료들은, 복사자들의 부주의와 무지로 말미암아 생긴 ‘마네토’ 연대표의 착오를 시정할 만큼 충분치 못하다. 비록 많은 학자들은 연대 수치를 수정하고 고치기를 좋아하지만 이 일을 할만한 어떤 다른 방법이 발견되기 전에는 그러한 일이 도로에 불과하다.” (「‘이집트’사」(영문), 1902년판, 1권, 서문 16면) 반 세기 후에도 역사가들은 “‘이집트’ 연대가 아직도 유동(流動)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푸리차드’저 「고대 근동사」(영문), 1955년판, 서문 17면) ‘제이. 에이. 윌슨’ 교수는 ‘이집트’ 역사 연대가 “꽤 정확”한 것은 기원전 663년 이후에 와서이며, “그 이전으로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학자들 간에) 의견의 불일치가 더욱 심하여 진다”고 말하였다.—「‘유대’인의 세계사」(영문), 1964년판 1권, 268면, 「해석자의 성서 사전」(영문) 1962년판, 2권 43면.

그러므로 단순히 어떤 세속 역사 기록이 성서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여 성서 연대의 정확성에 의심을 가질 이유는 없다. 그와 반대로 세속 역사 연대가 성서 기록과 일치할 때에 우리는 그 고대 기록의 정확성을 어느 정도 확신할 수 있게 된다. 특히 고대 ‘이집트’ 기록에 있어서는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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